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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능을 찾는 슬기 (막 0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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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해 보면 가끔 다리에 무슨 표시판이 붙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언젠가 시골길을 가면서 교량 옆에 세워진 표시판을 보니깐 2t이란 글자 위에 검고 굵은 빗금이 처져있습니다. 이게 뭘까 하고 보았더니 '이 다리의 중량은 2t 밖에 감당할 수 없으니 2t 이상 적재한 차량은 이 다리 아닌 다른 다리를 이용해 달라'는 안내판이었습니다. 운전자들에겐 매우 중요한 정보입니다. 만약 그런 정보를 주지 않는다면 초과중량으로 인해서 큰 사고를 자초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누구에게나 다 이 규칙이 적용되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누구나 다 이 규정을 준수해야 합니다. 아니면 다리가 무너져 내려서 다리만이 아니라 그 차에 탄 사람과 화물도 다 버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단 하나의 예외가 있을 수 있습니다. 사실 이 안내판은 이 다리를 모르는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이 다리를 직접 설계하고 만든 사람에게는 이 표시판이 별 의미가 없는 겁니다. 실지로 이 다리가 감당할 수 있는 무게가 4t인데 이 다리의 오랜 보존을 위해서 2t으로 정해 놓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에 긴급한 일이 생겼다고 하십시다. 그럴 때 이 다리의 설계시공자는 3t 정도 나가는 물건을 실은 차량으로 이 다리를 통과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 다리를 만든 자는 그 다리의 능력을 넘어설 수는 없지만 규정은 넘어설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면 이런 자기 표식을 나름대로 만든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창조주되시는 하나님께 이 표식을 변명적으로 들이미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들어쓰시려는데 자꾸 '하나님, 전 이만큼 밖에 지탱 못해요. 그러니 저 말고 다른 사람을 찾아보세요.'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예의나 겸손이 아니라 불신이고 무례입니다. 누구보다도 나를 잘 아는 분은 바로 나를 만든 하나님 그분이십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을 향해서 '내가 2t 밖에 감당하질 못하니 우회해서 돌아가십시오' 한다면 그런 불손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자신들에게는 의외로 그런 모습이 많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련히 다 알아서 지시하시는데 자기 나름의 잣대로 되니 안되니, 하니 못하니 하는 철없는 모습들이 많은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을 [가능을 찾는 슬기]라고 붙여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생들에게 주신 가능성을 십분 찾아내어 100% 활용하며 살아가는 인생의 모델을 우리는 이 본문 속에서 발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의 내용은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없는 우리들이 너무도 잘 아는 것입니다. 가버나움이라는 마을에 살던 한 중풍병자와 네 사람이 주님 앞에 나아가 병고침을 받고 더하여 죄사함까지 받는다는 그런 내용의 치유기적입니다.
인간이 사고하는 방식을 크게 두 종류로 나눕니다. 하나를 [적극적 사고방식]이라고 부르고 또 하나를 [소극적 사고방식]이라고 부릅니다. 적극적 사고란 무슨 일이나 가능하다고 낙관적, 희망적,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성이고, 소극적 사고란 무슨 일에서나 안된다고 비관적, 절망적,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성입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은 사고하는 대로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생각하는대로 움직이는게 인간입니다. 인간의 모든 것은 생각의 산물입니다. '생각은 행동을 바꾸고, 행동은 습관을 바꾸고, 습관은 성격을 바꾸고, 성격은 운명을 바꾼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적극적 사고는 행복과 성취와 가능의 길을 열어주고, 소극적 사고는 불행과 불가능의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믿음이 좋다는 신앙의 사람들 중에도 소극적 사고 속에 매어사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인간의 제한성을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라는 주장이 성경에 분명히 있습니다. 이 제한성이 인간으로 하여금 소극적이 되게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반쪽 진리입니다. 또 한편으론 성경은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여기까지가 합쳐져야 온전한 진리입니다. 그럼 무슨 말이 됩니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이것이 기독교의 진정한 메시지입니다. 여기서 신앙인은 무한한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잠언 16장 1절에 보면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은 모든 수고는 사람이 하여도 그 수고의 열매는 하나님께 있다는 말씀입니다. 즉 불가능한 인간 속에 하나님의 능력과 가능성이 활동할 때 우리는 가능의 슬기를 얻을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에게 믿음이 있다면 이 산을 옮길 수도 있다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3절에 '한 중풍병자'로 소개되는 이 사람을 유심히 살펴보면 그 어느 곳에서도 낙심되는 분위기가 없습니다. 저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저는 도리어 치유의 가능성을 발견합니다. 예수께로 가면 고침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저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 것입니까
저가 '주님께 어떻게 가느냐' 하는 문제에 봉착했을 때 도리어 그 난관 속에서 저는 하나의 슬기를 터득합니다. 그것은 '걸을 수 있는 사람들의 도움을 얻자'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가지고 예수께로 왔다... 네 사람이 중풍환자의 침상을 메고 주님께로 나갔습니다. 혼자서는 불가능합니다. 둘이도 불가능합니다. 셋도 어렵습니다. 그래서 네 명이 협력했습니다. 합심과 협력, 여기에 또한 가능의 슬기를 얻는 비결이 있는 것입니다.
한 나라가 흥할 때는 반드시 흥하는 요인이 있고, 한 나라가 망할 때 역시 망하는 요인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개인의 경우도 그렇고, 교회의 경우도 그렇고, 사회 단체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역사의 연구라는 저서로 유명한 영국의 석학 아놀드 토인비는 '흥하는 민족에게는 반드시 세 가지 요인이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왕성한 활동력이요, 둘째는 단결력이요, 세째는 신실한 국민성이라고 했습니다. 이 세 가지는 마찬가지로 교회 부흥에도 해당되는 요소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왕성한 활동력은 교회 부흥의 절대요인입니다. 기독교는 정지표시가 아니라 길을 가리키는 표지입니다. 정지표지의 목적은 진보를 희생하여 안전을 보장하자는 사인이지만 도표는 바른 방향으로 더 나아가도록 지시하는 표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서는 그리스도인을 가리켜 '길을 가는 도상의 나그네'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끊임 없는 전진과 활동만이 있을 뿐입니다. 요한복음 16장 13절에 보면 진리의 성령이 너희에게 이르면 그가 모든 진리 가운데로 너희를 인도하시리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교회 앞에는 가야할 영원한 전망이 열려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끊임없이 그 전망을 바라보며 끊임없이 움직여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전망을 잃은 채 안일무사에 빠져든다면 그것은 교회의 위기상황임을 우리는 감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토인비가 말한 세가지 요소 중에서 본문과 결부하여 생각할 교훈은 '협력'이라는 것입니다. 인생에도 항상 세 가지의 조력, 곧 돕는 힘이 있습니다. '자조'와 '호조'와 '천조'가 그것입니다. 자조는 스스로 돕는 것이고, 호조는 상호 간에 서로 돕는 것이고, 천조는 천우신조, 곧 하늘이 돕는 것입니다. 성도는 믿음 위에서 자조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자기를 사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욕심많은 사람이 되라는게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자신의 더없이 소중히 여기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공동 목표인 선교의 문제를 실현시키기 위해서 상호 조력이 필요합니다. 서로 남의 짐을 져주고 도와주는 삶입니다. 그러면 그 가운데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온전히 선을 이루어가시며 복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미국의 신학자 라인홀드 니이버는 목사를 교향 악단의 지휘자에 비유하고 교인들을 교향악단의 단원, 즉 연주자로 비유했습니다. 그의 이러한 비유는 어떤 계급적인 것을 말하려는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교회의 기능적 성찰을 하다보면 그렇게 비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케스트라의 주인이 누구입니까 지휘자입니까 아닙니다. 교향악단의 주인이 따로 있습니다. 지휘자는 지휘라는 영역에서만 자기 고유의 권한을 갖는 자입니다.
얼마 전에 까다롭기로 소문난 프랑스 바스티유 교향악단에 한국인 음악가 정명훈씨가 지휘자로 내정되어 세계적인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프랑스라는 나라는 콧대높기로 이름난 나라입니다. 자기나라 국민들에게 영어를 쓰면 벌금 물리는 나라는 그 나라 밖에 없습니다. 문화적 프라이드가 대단합니다. 바스티유 교향악단의 전임 지휘자는 유명한 다니엘 바렌보임이라는 프랑스인 지휘자였습니다. 그런 나라의 국립 교향악단 지휘자를 황인종에서 골랐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얘기가 뭡니까 그만 두라는 겁니다. 기한도 다 안찼는데 중간에 갑자기 년봉을 형편없이 깍아내리고서는 계속 하려면 이런 대우 받고 하고, 아니면 그만 두라는 겁니다. 앞으로 이일이 어떻게 전개될지 음악계의 촛점이 되고 있습니다만은 전망은 그리 밝은 것 같지가 않습니다. 악단주가 요구하면 어차피 나올 수 밖에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악단주가 있고 지휘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단원들이 있습니다. 단원들은 지휘자의 요구에 잘 따라야 합니다. 그럼 어떤 경우에도 지휘자의 지시를 따라야 하느냐 그렇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면 지휘자가 베토벤의 작품6번, [운명]을 연주하는데 편곡이 아닌 자기 마음대로 악보를 전혀 다르게 뜯어 고쳐서 연주를 요구해 왔다면 그 연주를 단원들은 따르지 않아도 되는 겁니다. 아무리 지휘자지만 악보까지는 못바꾸는 겁니다. 악보를 틀리게 연주하라는 연주자의 연주를 어찌 따를 수가 있습니까 그건 음악에 대한 모독입니다. 베토벤은 베토벤입니다. 그렇게 마음대로 뜯어고치면 베토벤은 베토벤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요구를 목사가 해 온다면 그건 따르지 않아도 됩니다. 목사 아니라 교황이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면죄부가 이미 죽은 자들로 하여금 연옥에서 천국으로 옮겨준다는 중세 카톨릭 교리에 반기를 들었던 것이 루터이고 그 루터로 인하여 프로테스탄트/개신교가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지 않는 한 단원은 지휘자의 사인을 따라야 합니다. 강하게 찔러오면 강하게, 여리게 그려오면 여리게 활을 그어야 합니다. 그럴 때 아름다운 음악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언제나 서로가 협력함으로써 큰 성과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언제나 베드로와 요한, 바울과 디모데, 바울과 바나바, 바울과 실라 등 짝을 지어 같이 다니며 화음과 조화를 이루어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도 교역자와 평신도가 같이 사역하는 공동교회가 되어가야 합니다. 잘 되어도 잘못 되어도 함께 책임지고 영광과 수치도 함께 받는 협력의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교회에서 자기 절대화는 금물입니다. 내 의견만 옳다든가 내 생각대로 해야한다든가 하는 식의 사고방식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또 무관심도 금물입니다. 나는 간섭을 안할테니 네 멋대로 해보라는 식의 자세도 아름다운 모습은 아닙니다. 에베소서 4장 16절의 말씀처럼 '모두가 사랑 안에서 스스로를 세워갈 때' 교회는 부흥되는 것입니다. 협력, 가능을 찾는 슬기의 비결이 여기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한 개인이 힘이 없어 스스로 서지 못할 때 우리는 넷이서 침상을 들어야 합니다. 타이밍도 중요합니다. 모두가 같이 동시에 들어야 합니다. 교역자들만 들어서도 안되고, 항존직들만 들어서도 안되고, 제직들만 들어서도 안됩니다. 온 교우들이 함께 참여해서 더불어 들어야 합니다. 이렇게 침상을 같이 들기 위해서 조직을 하고 기관을 세우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오늘날과 같이 다원화되고 전문화된 사회에서는 혼자서 다 잘할 수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앞으로는 교회 안에서의 평신도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제 점점 평신도가 교역자 사역의 많은 부분을 감당해야 할 그런 시대가 도래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가지고 예수께로 왔다... 가버나움의 사람들, 대단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많은 마을사람들이 예수께 가면 병을 고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그 중풍병자를 침상에 태워 네 사람으로 하여금 그 침상을 들고 예수께로 나가는 것입니다. 자포자기 하지 아니하고, 절망하지 아니하고, 저의 병을 고쳐주려는 갖은 노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오늘날까지 이것저것 다 해 보았습니다. 그럴 때 마다 백약이 무효였지만 '우리에게 절망은 없다'는 자세로 주님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가능성의 길을 모색했을 때 길이 열렸고 그럼으로 저들은 예수께로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저들은 나아가던 길을 멈추어야 했습니다. 길이 있어 여기까지 오긴 왔는데 이번엔 들어갈 문이 없었습니다.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이 이미 문앞에 운집해 있었기 때문에 집안으로 들어갈려도 들어갈 틈이 없었습니다. 여기서 저들은 또 한번의 가능을 찾는 슬기를 얻습니다.
'정신일도 하사불성'이란 말처럼 정신을 한 목표에 집중하면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 없는 것입니다. 성취에는 끈기가 필요하며 승리에는 인내가 요구되는 법입니다. 불굴의 투지가 없이는 결코 성공할 수가 없고, 칠전팔기의 피눈물 나는 노력 없이는 영광스런 월계관을 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께 가기만 하면 살 길이 있다는 가능성 위에 섰던 이들은 이제 두번째 가능성 위에 섭니다. 문제는 '어떻게 예수께로 나아가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가능성을 타진할 자리에 선 것입니다. 문이 있어야 하는데 문이 없는 현실, 있긴 있었으나 그건 저들이 사용할 수 있는 문이 아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이미 닫혀져 버린 벽과 다른 없는 문만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럴 때 저들은 문이 없다고 주저앉지 않고 저들 스스로가 문을 만들어 나아가기 시작합니다. 4절 말씀 보니깐 무리를 인하여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내렸다고 했습니다. 지붕을 뚫고 내려갔습니다. 여기서 유념해야 할 것은 갈릴리 지방의 집구조가 우리와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갈릴리는 지리적으로 푹 꺼진 분화구입니다. 이 말은 갈릴리가 화산지대로 화산의 영향으로 형성된 분지였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토질과 돌들이 독특했습니다. 왜 제주도 가보시면 돌들이 다르지 않습니까 구멍이 뽕뽕 뚫린게 작지 않습니까 이 갈릴리 지방의 돌들도 화산돌로서 1m 80cm 이상된 돌이 없다고 합니다. 때문에 갈릴리 지방의 가옥구조는 유다나 사마리아 지방과는 같지 않은 독특한 것이었습니다. 중앙에 돌기둥을 세워놓고 지붕은 5-6m 정도 되는 큰 종려나무가지를 올리고 그 위를 진흙으로 덮어 말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것을 저들은 '우리나라에서 초가지붕 갈 듯' 2년마다 한번씩 갈았다는 것입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지붕을 뜯고 내려가는 얘기는 가버나움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야, 그 사람들은 지붕을 뚫고 중풍병자를 내렸대잖아 우리도 그렇게 하자. 그게 믿음좋은거래. 우리도 그렇게 해서 우리의 믿음을 좀 과시하지..' 이래선 안됩니다. 그러면 다 경찰서 붙들려 갑니다. 가버나움에서 지붕을 뜯는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보니깐 이제 곧 지붕을 갈 정도로 낡아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고 새것이라 해도 2년 후엔 또 갈아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는데도 그렇게 많은 돈이 필요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랬기에 시도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발한 착상인 것 만은 분명했습니다. 지붕을 뚫고 들어가는 슬기, 그 슬기가 놀라왔습니다. 그것은 [믿음의 행위]였습니다. 그래서 5절에 뭐라 그랬습니까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주목할 것은 이 중풍병자의 기적사건에 보면 중풍병자나, 마을사람들이나, 침상을 나르는 네 사람들이나 저들 중 그 누구도 주님을 향해 고쳐달라고 간청하는 장면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가는 이 장면에서 주님은 저들의 믿음을 보고 계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지금 저들의 행위 속에서 믿음을 보고 있는 겁니다. 저들의 믿음은 '행동하는 믿음'이었습니다. 비록 '주님, 저를 고쳐주십시오. 제가 믿나이다...' 이런 고백은 없었지만 당신이 계신 집의 지붕을 뚫고 환자를 옮기는 기발한 그 슬기로운 행위가 그것을 대신하고도 남는다는 인정인 것입니다. 이 슬기가 불가능을 가능으로 전환케 했던 것입니다.

거기서 저들은 엄청난 말을 듣게 됩니다.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 말은 저들이 지금 하나님을 만나고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죄란 하나님만이 사하실 수 있는 권한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들은 그곳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인간에게 있어 가장 절실한 그 말씀을 들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이 계신 자리에서 우리는 인생에 있어 가장 절실한 말씀을 듣게 됩니다. 오늘의 주님이 계신 자리는 어디입니까 바로 교회입니다. 온갖 장애와 난관을 뚫고 교회에 나올 때 우리는 거기서 사죄의 선언도 듣고, 치유의 은총도 경험하고, 갱생의 축복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가능을 찾는 슬기, 어려움에 처한 한 중풍병자를 돕는 친구들 속에서 우리는 '교회를 염려하는 마음'을 헤아려 볼 수 있습니다. 교회란 교인 한 사람입니다. 작은 교회입니다. 그러니깐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이란 다름아닌 '교우들을 구체적으로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전 요즘 참 기분이 좋습니다. 정필순 집사님이 디스크 수술을 하고 요양 중인데 정집사님이 속한 1구역 식구들과 이웃의 삶의 모양이 너무도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구역식구가 수술에 들어간다니깐 몇일 전부터 구역에선 저를 위한 철야기도에 들어갔습니다. 우리 교회 본당이 좀 무덥습니까 그러나 그 더위도 아랑곳 하지 않고 밤을 새워 기도하는 구역식구들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새벽기도 마치고 집에 가서 집안 살림하고 또 가게 나가서 밤까지 가게를 보고 그리고 또 밤에 교회 나와서 기도의 제단을 쌓습니다. 금요일, 토요일이면 그분들이 또 정집사님 감당하던 교회청소를 대신 다 감당합니다.
'그래, 이게 정말 교회의 모습이지...'싶습니다. 제가 은혜 받습니다. '어떻게 하면 어려움 중에 있는 저 믿음의 식구를 도울까...' 얼마나 귀한 마음입니까 돈으로 도우라는 말 아닙니다. 제게는 우리 교우들 중에 몇분이 편지를 보내옵니다. 다 소중한 나눔들입니다. 그런데 그중의 한분의 글 속에는 믿음이 쑤욱쑤욱 자라가는 모습이 눈에 선히 빨려들어옵니다. 어쩌면 그렇게 아름답게 자라가는지. 직장에서의 자기 하루 생활에 있었던 일들을 주신 말씀과 연결해서 진솔하게 적으면서 그런 일상 속에서 경험했던 하나님의 역사를 잔잔히 전해오는데 참 제가 기쁘고 신나게 읽습니다. 편지 한 장, 얼마나 귀한 섬김인지 모릅니다. 다정한 말 한마디, 상냥한 미소, 그게 다 소중한 나눔인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공동체를 더욱 더 잘 섬기기 위한 가능성을 찾는 슬기가 있어야 합니다. 어떻하면 피로 사신 이 귀한 제단을 잘 섬길까 이게 우리의 관심사가 되어야 합니다. 제가 참 감사한 것은 제게 어떤 목회의 아이디어를 말씀해 주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참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들어보면 괜찮은 것도 있지만 신통치 않은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이 얼마나 귀합니까 어떻하면 교회를 더욱 아름다운 교회로 가꿔갈 수 있을까, 그걸 생각하는 그 마음이 아름다운 마음인 것입니다.

가능을 찾는 슬기, 오늘 우리에게도 필요한 지혜입니다. 환경에 절망하지 말고, 처지에 낙심하지 말고, 가능을 찾는 슬기를 주 안에서 가져 보십시다. 지혜는 절망의 자리인듯 싶은 곳에서 피어나는 한 송이 꽃과 같은 것이고, 슬기는 어두운 방 한가운데 문틈 사이로 스며드는 햇빛같은 것입니다. 그런 하늘의 지혜와 슬기로 미래의 전망을 열어가는 우리 모두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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