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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리석은 산헤드린 (막 11:27-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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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1:27-12:44에는 유대교의 영행력있는 종교 지도자들과 예수 사이에 벌어진 다섯가지 논쟁을 기록하고 있다.
오늘은 바로 첫 번째 논쟁으로 “권위”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본문을 중심으로 산헤드린의 어리석음에 대하여 생각하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1. 예수의 권세에 대한 질문(27-28)
예루살렘에 들어간 예수와 일행은 산헤드린의 대표자들을 만나게 되었다.
산헤드린 공회원들은 율법의 공식적 수호자로서, 하나님에 의하여 보냄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모두 조사할 권리와 책임이 있다. 따라서 그 대상에 예수님도 포함되는 것은 당연하다.
신18:15-22에 보면 “하나님의 이름으로 빙자히 말하는 자들은 죽임을 당하리라”고 거짓 선지자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이것은 거짓선지자가 존재하며 그들을 가려낼 필요에 대하여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 일을 하는 곳이 산헤드린의 일 중에 하나였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향하여 두가지를 물었다.
① 너의 권세의 성격이 무엇이냐 너의 신분이 무엇이냐
② 너의 권세의 근원이 누구이냐 누가 너에게 이런 일을 할 권세를 주었느냐
이것은 전날에 있었던 성전청결의 일에 대하여 묻는 말이고, 사람들이 호산나 호산나하며 환호를 하고 난리를 치는데 그 일에 대하여 어떻게 된것이냐고 묻는 말이다. 또 예수의 가르침과 교훈이 어디에서 온 것인가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이미 산헤드린은 예수의 모든 것에 대하여 알고 구약의 메시야에 대하여 알고 있었기 때문에 주님이 메시야일 수 있다는 생각을 충분히 할 수 있는 인물들이다.
그러에도 불구하고 오늘 그들의 질문은 예수의 메시야 됨을 묻는 질문이 아니라
예수를 곤경에 빠트려서 넘어뜨리고자 질문하는 것이다.
그들의 마음 가운데는 진리를 향한 열심도, 사모하는 마음도 찾아볼 수 없다.
오직 예수를 무너뜨리기 위한 증거를 찾는데 혈안이 되 있을 뿐이다.
유대인의 지도자들 가운데 진리를 향한 진지한 자세나, 메시야에 대한 간절한 소망이 결여되어 있었기에 이런 어리석은 일을 행하고 있는 것이다.

2. 예수님의 답변(29-33)
예수님이 그 질문에 대한 분명한 대답(나는 그리스도, 메시야,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자)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질문에 역질문을 하셨다.
이것은 랍비들의 논쟁기술로 산헤드린은 자기들의 질문에 대하여 스스로 답을 해야만 했다.
예수님은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고 질문을 하셨다.
만일 그들이 하늘로서라고 한다면 어찌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것이요,
사람에게로서라하면 모든 사람들이 참 선지자로 여기므로 백성을 두려워하여 대답지 못하였다. 이것은 예수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습니다. 즉 산헤드린은 예수에 대하여 어더한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지도 못하고, 그를 거직 선지자라고 하지도 못하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예수는 그럼으로 산헤드린의 질문에 대답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혜로 이 위기를 넘기시고 예수님은 자신도 세례요한처럼 하늘에서 오셨음을 암시하시고 계신다.

3. 포도원의 비유(12:1-12)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을 두르고, 포도주를 자서 모으기 위해 구유자리를 파고, 보호와 저장과 안전을 위해 망대를 세웠다. 이것은 포도원 주인이 좋은 포도와 포도주를 얻고자 하는 욕망이 있었음을 말한다. 그리고 그는 소작농에게 포도밭을 맡기고 타국으로 떠났다. 주인은 추수때가 되어 소작료를 받기 위하여 종들을 보냈는데 첫째는 떼려서 빈손으로 내어쫓고, 두 번째는 심히 때리고 능욕하고 세 번째는 죽여 버렸다. 이제 많은 종을 보내다 안된 주인은 최후로 자기의 아들을 포도원에 보냈다. 그러자 그들은 상속자를 죽여 그 땅을 차지하려는 욕심을 냈다. 그러자 주인이 농부들을 진멸하고 다른 사람에게 준다는 내용의 말슴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거부하고 메시야를 죽이는 이스라엘을 향한 말씀이다.
특별히 이스라엘의 산헤드린 지도자들을 향한 말씀이다.
그들은 이미 그 말씀의 의미를 알고 있었고 체포하고자 했지만 무리가 두려워 하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다.
말슴을 깨달았지만 그 말씀에 대한 회개나 눈물이 없이 오직 자기들의 권위와 위치만을 내세우고 고집하는 산헤드린을 볼 수 있다.
예) 설교를 듣고 따지고 대들고 회피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말슴이 우리의 심령을 찌르는 말슴이면 아멘으로 받고 돌이키는 모습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것을 본다. 마치 산헤드린의 모습과 같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산헤드린의 어리석은 모습을 통하여 나를 돌아보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① 진리에 대한 진지한 자세를 갖지 않은 산헤드린.
② 분명한 자세를 갖지 않는 산혜드린.
③ 말슴을 깨닫고 회개하지 않는 산헤드린.
④ 사람을 두려워 하는 산헤드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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