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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의 행복(VII) (마 05:1-9, 골 03: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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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일곱번째 행복이 무엇일까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저희가 하느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진다. 싸움 잘하는 사람이 대장이 된다. 골목대장, 깡패들의 왕초, 마피아 세계의 대부(Godfather), 군사혁명 가에 이르기까지 싸움 잘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한 시대, 한 고을의 우 두머리가 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하느님의 아들이 된다고 말씀하셨다. 싸움을 말리며, 못하도록 중재역할을 하는 사 람이 만왕의 왕의 아들이 된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제자단을 조직하셨다. 그리고 그들을 여러 곳으로 파견하셨 다.(마태 10:3-) 다음 두가지 사실을 전해 주라고 당부하셨다. 하느님 나라가 가까왔다고 선포하라. 어느 집으로 찾아가든지 평화를 빕니다라 고 인사하기를 잊지 말라는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 나라와 평화를 동일시하셨다. 사람으로 사람되게 하는데 있어 하느님 나라와 평화를 절대 불가결의 요소로 이해하셨다. 그래서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1)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란 분쟁을 일삼지 않는 사람이다.(내촌감 삼) 한국은 20세기에서만도 여러 차례의 전쟁의 화를 입었다. 청일전쟁은 일본과 청나라가 우리 땅을 먹기 위해 벌인 전쟁이었다. 그 싸움의 장은 평안도 일대였다. 노일전쟁은 일본과 러시아가 우리 땅과 만주를 차지하기 위해 일으킨 전쟁이었다. 이 전쟁들은 강대국들의 식민주의정책으로 말미 암아 빚어진 참극이었다. 제 2차세계대전으로 우리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 다. 최근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는 일본제국주의의 강제징용과 징병, 정신 대등으로 수많은 젊은 남녀들이 희생되었다. 제 2차세계대전의 주범은 독 일의 나치스와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이었다. 한국동란은 국제공산주의자들 의 팽창정책으로 비롯된 야만행위였다.

 전쟁이란 파괴와 살생만 남기는 것이 아니다. 전쟁준비를 위해 자원을 소모하게 되고, 생활환경까지 오염시킨다. 그래서 전쟁은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20세기의 사람들은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가장 믿 을 만하고 존경받을 사람이라는 사실을 터득했다. 예언자들은 이미 2천 6 백년전에 평화야말로 가장 바람직한 이상사회의 기본임을 선포했다.

 야훼의 말씀은 예루살렘에서 들려온다.

하느님께서 민족 사이의 분쟁을 판가름해 주시고,강대국 사이의 시비 를 가려 주시리라.

그리 되면 나라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나라와 나라 사이에 칼을 빼어 드는 일이 없어 다시는 군사를 훈련하지 아니하리라.

사람마다 제가 가꾼 포도나무 그늘, 무화과나무 아래 편히 앉아 쉬리라.(미가 4:3-4)예수께서는 자신의 죽음을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한데 모으시기 위함(요한 11:52) 이라고 믿고 있었다. 분쟁이 아니라 하나 되게 하기 위한 죽음이라는 뜻이 다. 그래서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하느님의 아들이 된다고 말씀하셨 다. 십자가가 있는 그때 그 자리에는 분열이 아니라 일치만이 있을 뿐이다.

그 자리가 인간의 마음이든지, 교회이든지, 낮이든지, 밤이든지, 그때 그곳 은 흩어진 하느님의 자녀들이 한데 모이는 때요, 자리가 되어야 한다.

 (2)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란 성령을 좇아 사는 사람이다. 성령을 좇 아 사는 사람은 육신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영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이 다.(로마 8:6-) 육신은 갈라져도 쓸데가 있지만 영은 갈라지면 죽음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육신의 질병은 고칠 수 있지만 영의 질병은 사람의 손으로는 고치지 못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육신의 일에만 열중한다. 괴로운 일이다.

 최효섭 목사의 책에 있는 이야기이다. 19세기 말엽 미국에는 제임스라 는 성을 가진 두 가문의 형제들이 있었다. 이들은 전혀 다른 가문의 출신들 이었으나 19세기의 미국사회에 유명했었다는 점에서 비슷했다. 한 가문의 제임스 형제들의 이름은 제시(Jesse)와 프랜크(Frank)였다. 우리도 종종 그 들을 소재로 한 영화를 관람해 왔다. 금고털이, 열차털이 강도로 유명한 총 잡이였다.

 이들 형제는 처음부터 사회의 반항아들이었던 것은 아니다. 미국의 남 북전쟁에 대한 환멸과 남군의 패배로 말미암아 태어난 사회의 패륜아였 다. 정치적 좌절은 사람으로 하여금 시대의 낙오자가 되게 하든지, 아니면 반항자가 되게 한다. 우리 사회에서도 얼마나 많은 수재들과 정의의 사람 들이 정치적 좌절에 빠져 버림받거나 한에 맺힌 반항아로 전락되고 있는 가

또 다른 제임스 형제들의 이름은 윌리암(William)과 헨리(Henry)이다.

하바드대학의 철학교수로, 소설가로 미국인의 가슴 속에 지금도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 지성인들이다. 그들은 어릴 때 아버지를 잃었으나 아버지의 유 훈은 잊지 않고 자랐다. 아버지가 죽더라도 내가 못다한 일을 위해 하느님 께서 너희를 보내셨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라. 그들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 의 유훈대로 배우며 성장했다. 무슨 일이든지 하느님의 일처럼 여기며 임 했다. 자신들의 존재이유를 하느님의 선교에서 찾으며 성장한 것이다. 스 웨덴버그연구가였던 아버지에게서 받은 교육은 무슨 일이든지 하느님께서 주시는 일이라는 사명감으로 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느님께서 주신 일 이라는 사명감으로 사는 사람은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된다는 신앙으로 살게 된다.(로마 8:28) 그런 사람들은 어떤 실패와 좌절 속에서 도 절망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의 희망은 하느님 안에만 있기 때문이다.

희망을 주시는 하느님께서 믿음에서 오는 온갖 기쁨과 평화를 여러분에게 가득히 안겨 주시고 성령의 힘으로 희망이 여러분에게 넘쳐 흐르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로마 15:13)

(3)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란 나누어 주는 사람이다. 원수가 주리거 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로마 12:20) 원수관계를 청산하고 평화관 계로 변케하는 길은 주는 일에 힘쓰는데 있다. 남북의 평화통일을 원한다면 주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웃는 얼굴에 침을 뱉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상 식이다. 그와 같이 주는 사람의 뺨을 치지 못하는게 인간의 도리이다. 오 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하느님께서 기뻐하신다. 사람도 그 런 사람을 믿고 따른다.

 예언자 이사야는 예수의 죽음에 대한 예언에서 그 의미를 제시하였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 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 리가 고침을 받았도다(이사야 53:5) 예수는 우리로 하여금 평화를 누리게 하기 위해 죽으셨다. 십자가가 있는 그때, 그 자리엔 평화가 있다. 그러므 로 평화를 위해 일한다는 것은 자기를 주는 일이요 희생하는 일이다. 역사 에 이름을 남기기 위한 일이 아니다. 백인과 흑인의 아들 딸들이 같은 동산 에서 뛰놀 수 있게 하기 위해 아브라함 링컨대통령은 죽었다. 그리고 마 틴 루터 킹 목사도 죽었다.

 한때 우리네 서민들의 안방을 흥분시켰던 TV 드라마가 있었다. 김성 종씨의 작품을 영상화한 여명의 눈동자이다. 주인공인 두 청년들은 열렬 한 애국청년들이요 학병출신의 엘리트였다. 그러나 복수에 복수를 거듭하던 최대치는 죽음으로 삶을 마쳤다. 그가 그릇된 줄 알면서도 따르던 여인도 죽음으로 끝났다. 그러나 그들을 위해 온갖 오해와 박해를 받으면서도 그들 을 돌보아 주던 장하림은 살아남았다. 장하림을 잡으려고 혈안이 되었던 친일파 악질 형사는 후일 장하림을 향해 한국은 당신 같은 일꾼을 필요로 한다고 고백하는 것으로 끝나는 드라마였다. 주고 또 주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가 참된 평화의 사도가 되고 하느님의 아들이 된다.

 사랑의 대결(D.오거스버그)은 세 유형의 부부싸움에 대한 심층분석 을 한 책이다. 나는 이기고 너는 졌다는 부부싸움이 있다. 네가 이기고 나는 졌다는 부부싸움이 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은 마침내 비극으로 끝나고 만다. 오직 나는 먼지털개(Doormat)이니 나를 밟고 먼지를 털고 집으로 들 어가라고 할 때 이상적인 부부생활이 유지된다는 것이다. 이런 싸움은 비온 뒤 땅이 굳어지는 것처럼 단단한 반석 위에 가정을 세우게 되는 것이다.

 가정의 평화를 이룩하기 위해 지혜로운 남편과 아내는 말다툼하다가도 서로가 내가 먼지털개라는 심경에 이르러야 한다. 남북의 평화와 통일에 도 우리편이 먼지털개가 되지 아니하면 이룩할 수 없게 된다. 말은 흡 수통일하지 않겠다면서도 군사력으로, 경제력으로 서로를 삼키려 한다면 이 강토는 언젠가 다시 전쟁을 일삼게 될 것이다. 양극대립으로 국력이 소 모되어 허약해진 틈을 강대국들은 비집고 들어 올 것이다. 지난 날의 전쟁 과 미움, 불신과 대립의 먼지를 털어주는 먼지털개 되는 운동이 벌어져야 하느님이 아버지 되는 나라, 가정이 될 수 있다.-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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