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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시대를 밝힌 각성 운동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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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숫군이여 밤이 어떻게 되었느뇨?”(사21:11). 이것은 밤과 같이 어두운 시대를 살아가는 인생들이 아침이 오기를 기다리는 애타는 부르짖음이다. 이 부르짖음에 대해 선지자 이사야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침이 오나니” (사21:12). 그렇다. 세상에는 어두움의 시대가 계속되지만 아침도 온다는 것이다. 선지자 에스겔은 어두운 시대를 마른 뼈가 가득한 죽음의 골짜기로 묘사했다. 그러나 에스겔도 아침이 올 것을 내다 보았다. 그 아침은 마른 뼈들이 살아서 일어나는 영적 각성과 교회 탄생의 아침이었다.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겔37:10). 다윗도 밤과 같이 어두운 골짜기를 지나가면서 아침이 올 것을 내다보곤 했다. 그 아침은 구원의 아침이요 기쁨의 아침이었다.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시30:5). 그리고 아침을 깨우겠다고 고백했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시57:8).

시대가 어두워질 때마다 시대를 깨우고 밝히는 각성 운동들이 일어났다. 지금 우리는 하나의 어두운 시대를 지나가고 있다. 정치, 경제적 어두움 뿐 아니라 윤리적 및 영적 어두움이 이 시대를 캄캄하게 만들고 있다. 부정 부패와 부실 공사로 다리와 백화점이 무너져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극단적인 이기주의와 배금주의로 부모와 자식과 남편과 아내가 살해되는 끔찍한 사건들이 발생하기도 했다. 급기야 국가 부도적 경제 위기도 맞았고 지금은 극단적인 동서 남북의 이데올로기적 대결로 온 나라가 분노와 분쟁과 분열에 휩싸여 있다.
우리는 지금 또 하나의 각성을 기다리고 있다. 정치 및 경제 구조의 개혁과 아울러 의식의 변화와 영적 및 윤리적 각성이 일어나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영적 각성은 진정한 회개 운동으로부터 시작되어 삶의 개혁으로 이어지곤 했다. 진정한 각성 운동은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하나님의 사람과 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일어나서 밤과 같이 어두운 시대를 밝히곤 했다.

1. 독일의 밤을 밝힌 각성 운동자 슈페너
종교개혁 운동이 일어난 지 150여년이 지난 독일은 영적 및 사회적으로 캄캄한 밤과 같은 시대를 지나고 있었다. 성직자들은 사변적 교리 논쟁에 기우러 졌고 예배는 형식에 그쳤으며 교인들은 설교 시에 잠자는 것이 예사로운 일이 되었다. 1648년에 그친 “30년 전쟁”은 독일을 극도로 황폐하게 만들었다. 도시와 마을들은 폐허가 되었고 인구는 3분의 1로 줄어들었으며 굶어서 죽은 시체들이 곳곳에 널려 있었다. 마르틴 루터가 개혁의 봉화를 든 지 158년이 되던 1675년 독일에는 어두움을 밝히는 하나의 각성 운동이 일어났다. 즉 독일 경건주의 운동의 창시자 야콥 슈페너가 독일 경건주의 운동의 헌장이라고 할 수 있는「경건한 소원」이란 글을 발표하므로 하나의 각성 운동을 일으킨 것이었다.

슈페너는 교회와 사회의 타락상을 다음과 같이 탄식하며 묘사했다.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몸이 지금 고통과 질병으로 괴로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질병이 무엇인지를 알아내야 할 것입니다. 성령의 조명을 위한 뜨거운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면서 치료의 방법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교회의 영적 비참상이 너무나도 심각하고 위태로운 형편입니다. 대부분의 정치가들은 죄와 방탕 가운데서 살고 있고 통치자들은 자신들의 유익만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성직자들의 생활은 세속적 풍습에 빠져있고 육체적 쾌락과 안목의 정욕을 추구하며 교만한 태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좋은 자리만을 찾아 이 교회에서 저 교회로 옮기고 음모만을 꾸미고 있지 않습니까? 설교자들은 성령의 사역에 의지하지 않고 그들 자신의 인간적 노력에 의해서 성경의 문자만을 조금 배웠고 옳은 교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였으며 그리고 설교하는 것까지도 배워서 알지만 그러나 참된 하늘의 빛과 신앙의 생활이 무엇인지를 도무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야콥 슈페너 한 사람의 각성의 탄식과 회개의 기도와 개혁의 제안은 독일 교회 안에 즉각적이고도 열광적인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슈페너는 300통 이상의 편지를 받았는데 대부분이 그의 각성 운동을 지지하는 편지들이었다. 튜빙겐 대학의 신학교 교수들은 슈페너가 제안한 개혁 방안을 공적으로 찬양하며 지지하기까지 했다. 독일 안에 영적 각성 운동이 일어난 것이었다. 회개 운동과 성경공부 운동이 일어났다. 그것은 또한 윤리적 각성으로 이어졌다. 고아와 과부들을 돌보는 일과 병자들을 돌보는 사랑 실천 운동이 일어났다. 영적 각성 운동은 선교 운동으로까지 이어졌다. 독일 경건주의의 모라비안 선교 운동은 현대 선교 운동의 시발점이 되기도 했다.

2. 영국의 밤을 밝힌 각성 운동자 웨슬레
종교개혁 운동이 일어난 지 200여년이 지난 18세기 초엽 영국은 영적 및 사회적으로 캄캄한 밤과 같은 시대를 지나고 있었다. 18세기는 이성의 세기로 18세기 초 영국의 기독교는 자연신교의 영향을 받아 하나의 이성적 연구의 대상이나 결코 “신비롭지 않은” 하나의 “자연법칙”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사회는 부도덕과 무질서와 가난으로 어두워져 있었다. 루터가 개혁의 봉화를 든 지 210년이 되던 1729년 영국에는 어두움을 밝히는 또 하나의 각성 운동이 조용히 일어나고 있었다. 즉 영국 복음주의 각성 운동의 주역이 된 죤 웨슬레가 1729년 “거룩한 모임”(Holy Club) 이란 모임을 만들어 촬스 웨슬레를 비롯한 몇몇 동지들이 주일 저녁마다 (나중에는 매일 저녁 마다) 함께 모여 성경 공부와 기도에 열중하며 “초대 교회로 돌아가자”는 각성 운동을 일으킨 것이었다. 저들은 규칙적으로 희랍어 성경을 연구했고 수요일과 금요일마다 금식했으며 병든 자와 감옥에 갇힌 자들을 방문했다.

죤 웨슬레는 1735년 복음전파 선교회의 파송을 받아 미국 죠지아 주로 선교하러 가던 선상에서 모라비안 교도들을 만나게 되었는데, 폭풍과 파선의 위험 중에서 나타내 보인 그들의 신앙적 확신에 깊은 충격과 감동을 받았다. 죤 웨슬레는 1738년 영국으로 돌아왔는데 그 해 5월 24일 저녁 런던 알더스게이트에서 모인 한 집회에 참석하였다가 루터의 글이 읽혀질 때 가슴이 “이상하게 뜨거워지는” 영적 각성을 체험했다. 그 후 웨슬레는 진젠돌프를 비롯한 모라비안 교도들과의 계속적인 협력관계를 유지하면서 복음 전도자로 나서서 옥외 천막집회를 인도하며 영국 곳곳에 복음적 각성 운동을 펴 나아갔다. 수많은 사람들이 죄의 형벌을 두려워하며 회개했고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와 사죄와 구원의 은총을 체험하며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했다. 웨슬레는 중생의 정서적 체험, 성령의 내적 증거, 의지의 성결성, 하나님과의 동행, 성화의 완전성 등을 강조하며 영국교회 안에 각성 및 부흥 운동을 일으켰는데 그 결과 메도디스트 교파가 생겨났다.

3. 미국의 밤을 밝힌 각성 운동자 에드워즈
종교개혁 운동이 일어난 지 200여년이 지난 18세기 초엽 미국도 영적 및 사회적으로 캄캄한 밤과 같은 시대를 지나고 있었다. 미국 대 각성 운동의 주역이 된 요나단 에드워즈가 미국 마사츄셋트 주 노드햄턴에서 목회 활동을 시작하던 1729년 당시는 100여년 전에 불붙던 청교도적 신앙 운동이 극도로 침체된 때였다. 에드워즈는 마을 청년들 가운데 널리 유행하던 방종함을 목격하고 마음에 큰 고민을 느꼈다. 그는 당시 마을의 형편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외조부의 사망 후 경건은 극도로 침체했다. 마을의 젊은이들 가운데 수년간 방탕이 크게 유행했다. 많은 젊은이들이 밤 거리를 헤매며 걸어 다녔고 술집을 드나들며 음탕한 행위를 자행했다. 어떤 사람은 음탕한 행위를 나타내 보이므로 다른 사람들을 타락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자주 남녀들이 함께 모여 주연과 환락에 빠지곤 했다. 그들은 그 곳에서 밤을 새우고 지냈으며 가정의 질서를 생각지도 않았다.”

17세 때 이미 하나님을 만나는 영적 각성을 체험한 요나단 에드워즈는 노드햄턴의 가정마다 젊은이들을 찾아 다니며 회개와 각성을 독려했다. 1733년부터 젊은이들 가운데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1734년 에드워즈가 “이신 득의”란 주제로 다섯번 설교했을 때 놀라운 각성 운동이 일어났는데, 그 설교는 “때에 맞게 선포된 설교가 되었고 마을 사람들의 영혼 위에 하늘의 축복이 놀랍게 쏟아지게 한 설교였다.” 마을에서 이름난 젊은 여자가 가슴이 깨어져 변화되는 일이 일어났다. 이와 같은 각성이 1735년 여름까지 계속되었다. 에드워즈는 이렇게 기록했다. “마을이 하나님의 임재로 충만한 것 같이 보였다. 전에 볼 수 없던 사랑으로 충만했고 기쁨으로 충만했으며 동시에 통회로 충만했다. 가정마다 그들 위에 임한 구원으로 기쁨을 누렸다. 하나님의 행차가 그의 성소에도 나타났으니 하나님의 날은 기쁨의 날이 되었고 그의 성소는 사랑의 처소가 되었다.”

요나단 에드워즈는 1740-41년에 또 하나의 놀라운 각성 운동을 주도하며 체험했는데, 이 각성 운동을 가리켜 “대각성 운동”이라고 부른다. 에드워즈가 마사츄세트 주의 엔필드에서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죄인들” 이란 제목의 설교를 했는데 그 설교는 엔필드 마을의 형식적인 신자들의 가슴에 폭탄이 터지는 듯한 커다란 충격을 가져 다 주었다. 청중들은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 선고에 무서워 떨면서 탄식했으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에드워즈의 영적 각성 운동은 사회 개혁으로 이어졌다. 에드워즈는 인디언들에 대한 백인들의 착취를 공박하는 글과 불의한 사업과 부도덕과 부정직을 공박하는 글을 쓰며 사회 개혁을 시도했다. 에드워즈는 하나님 의식에 사로잡힌 설교자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높인 칼빈주의 신학자로 미국의 교회와 역사와 삶의 방향을 바꾸어 놓은 놀라운 각성 운동을 일으킨 것이었다.

4. 조선의 밤을 밝힌 각성 운동자 길선주 목사
20세기 초엽 조선은 캄캄한 밤과 같은 시대를 지나고 있었다. 나라는 1905년 을사보호조약으로 일본에 의해 점령을 당하기 시작했고 사회와 경제 상태는 무질서하고 어두웠다. 윌리암 블래어 선교사는 1910년에 저술한 「한국의 오순절」이란 저서에서 19세기 초엽 조선의 어두운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건장한 남자들이 망국을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볼 때 참으로 동정을 금할 수 없었다. 그들은 내게 와서 이렇게 물었다. ‘우리 같이 가난하고 비참한 민족이 또 있습니까?’ 그러나 이 말은 그들의 눈이 열려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들의 심령은 갈기갈기 찢어졌다. 수년 동안 그들은 재 가운데 앉아 그들이 당하는 불행과 지난날의 죄악을 슬퍼하고 있었다. 그토록 처참한 민족 위에 하나님은 때때로 축복의 손을 펴신다.” 20세기 초엽 조선은 영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처참한 상태에 있었다.

조선의 처참한 어두움을 밝히는 영적 각성 운동이 1903년경부터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하다가 1907년에 평양에서 본격적으로 일어났다. 각성 운동의 주역은 평양 장대현 교회의 길선주 장로였다. 온 나라가 민족적 비통에 사무쳐 있던 1905년, 영국의 웨일즈 지방에서 성령의 불길이 일어나서 서방 교회를 부흥시켰다는 소식은 길선주 장로의 가슴을 두드렸다. 길선주 장로는 신학교 시절부터 기도와 금식에 전념하고 있었는데 1906년부터 평안도 곳곳에 부흥 운동을 일으키는 주역이 되었다.

1907년 1월 첫 주 평양 장대현 교회 사경회에서 길선주 장로가 설교하는 기간 중에 놀라운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는데 2,200여명의 결신자가 생겼다. 수요일 저녁 집회 때의 일이었다. 예배당은 만원을 이루었고 장내의 분위기는 곧 무엇이 터질 것 같았다. 바로 그때 길선주 장로는 “마음의 문을 열고 성신을 받으라”는 설교를 시작했다. 성령으로 충만한 길선주 장로의 설교는 흐르는 시내 같았고 회중은 감격에 사로잡혔다. 다음 날 저녁 길선주 장로는 “이상한 귀빈과 괴이한 주인”이란 제목으로 설교했는데 설교 도중에 여기 저기서 통회의 외침과 눈물이 바다를 이루었다. 블래어 선교사는 그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한쪽 구석에서 어떤 사람이 울기 시작했고 이어서 모든 사람이 울기 시작했다. 한 사람 한 사람 일어나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는 털썩 주저 앉아 흐느껴 울다가 마루 위에 뒹굴면서 고뇌에 찬 모습으로 두 주먹으로 마루 바닥을 두들겼다. 모든 청중들이 한 목소리로 통성기도를 했는데 통성기도의 감화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많은 물이 쏟아져 내리는 것 같았고 기도의 바다가 하나님의 보좌를 때리는 것 같았다.”

1907년에 일어난 영적 각성 운동은 교회를 살리고 민족을 살리는 생명의 불길이 되었고 윤리적 삶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온 사회 개혁 운동으로 이어졌다. 블래어 선교사는 각성 운동이 가져온 생활의 변화를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시내 각 곳에서 사람들은 이 집 저 집 다니며 전에 피해를 주었던 사람들을 찾아가 잘못을 빌었으며 기독교인들에게 뿐 아니라 이교도들 에게도 훔친 물건과 돈을 돌려 주느라 시내는 온통 술렁거렸다. 한 중국 상인은 어떤 기독교인이 들어와 수년 전 자기에게서 부당 이익을 취하여 모은 것이라며 거금을 주는 것을 받고 깜짝 놀랐다.”

길선주 장로는 1907년 평양 신학교를 졸업하여 한국 최초 일곱 분 목사들 중의 한 분으로 안수를 받았고 그 후 목회와 전도에 헌신하며 한국교회의 부흥운동에 종사하다가 1935년 11월 26일 평남 강서군 고창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고 마지막 폐회 축도를 마치고 쓸어져 하나님의 품으로 옮겨졌다.

5. 4.19의 밤을 밝힌 각성 운동자 서울대 문리대 학생들
1960년 4.19가 일어나던 때 한국의 사회는 무질서와 혼란에 쌓여 있었다. 학생들이 흘린 피값으로 장면 정권이 들어섰지만 정치는 물론 사회와 윤리는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바로 그때 즉 1960년 초 여름 서울 대학교 문리대 캠퍼스 안에서는 혼란한 정치와 사회를 바로 잡자는 하나의 정신적이고 윤리적인 각성 운동이 조용히 일어나고 있었다. 4.19 직후 서울 문리대 교정 안에는 한편에서는 정치에 관심이 있는 학생들을 중심으로 “국민 계몽운동 발대”가 진행되고 있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5, 6명의 기독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하는 소위 “새 생활 운동”의 내용과 방향이 설정되고 있었다. “이래 가지고는 안되겠다. 정치, 사회적으로 혼란한 이 시대에 우리 4학년 신앙의 친구들은 과연 무엇을 하여야 할 것인가?” 이것이 우리 몇몇 친구들이 캠퍼스 잔디 밭에 앉아서 진지하게 논의한 것이었다. 거기에는 김상복, 손봉호, 이형기, 이명섭, 김명혁 등이 있었다. 우리가 합의한 결론은 “새 생활 운동”을 일으키자는 것이었다.

우리는 며칠 동안 사회의 부조리한 실태를 조사한 뒤 어느날 문리대 소 강당에서 그것을 발표한다고 공고했다. 소 강당을 가득 메운 학생들에게 밀수로 수입되는 커피와 양담배의 일년분 밀수 액이 대전시 인구가 1년 동안 먹을 수 있는 식량 값과 같다는 등의 조사 내용을 손봉호 학생이 발표하자 학생들은 흥분하기 시작했다. 국민계몽 운동 쪽으로 갔던 학생들이 새 생활 운동 쪽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서울 문리대 학생 수백 명이 방학이 시작되던 6월부터 거의 한달 동안 매일 새벽부터 함께 모여 밤 늦게까지 다방과 공원과 시장과 극장과 댄스 홀과 요정과 국회 등을 찾아 다니며 “새 생활 운동”을 펴 나아갔다.

밀수품 양담배와 커피를 사용하지 말자고 호소했다. 산더미 같이 수거된 양담배를 광화문 네거리에 쌓아놓고 애국가를 부르며 불태우기도 했다. 밤마다 댄스 홀을 찾아가 그 곳에서 춤추는 고관들과 유부녀들을 향해 춤추기를 자제할 것을 호소하면서 춤추는 모습을 찍은 사진을 시청 앞에 전시했는데 치안 국장의 사진이 전시된 일도 있었다. 4.19 이후 국회 의원들이 군용 짚차를 빼내어 불법으로 “가” 넘버를 달고 다니던 차량 수십 여대를 국회 의사당 앞에서 탈취하여 시청 앞 광장에 집결시키고 불법을 중단할 것을 촉구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모두 불태우겠다고 위협하기도 했다. 휘발유가 나지 않는 나라에서 자전거 타기 운동을 벌이자고도 호소했다. 요정을 찾아가서 마시며 즐기는 정치가들을 질책하기도 했다.

우리의 운동이 다소 과격한 양상을 띄기도 했지만, 사회악과 부패를 제거하고 사고와 생활을 바꾸자는 우리들의 동기가 매우 순수했고 비정치적이었기 때문에 그 당시 수많은 시민들의 호응을 얻었고 심지어는 이 호 내무장관을 비롯한 고위 관리들까지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새 생활 운동은 사회 변혁을 내 세웠지만 근본적으로는 윤리 운동이요 신앙 운동이었다. 새 생활 운동이 전국의 대학으로 확산되었고 나중에는 장 면 정부의 신 생활 운동, 박정희 정부의 국민 재건 및 새 마을 운동으로까지 이어졌다고 하겠다.

6. 오늘의 시대의 밤을 밝히는 각성 운동
이 시대를 밝히는 각성 운동은 무엇보다 “회개 운동”으로 나타나야 할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악을 통회하는 영적인 회개와 이웃 앞에서 자신의 탐욕을 제거하는 윤리적인 회개로 나타나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회개는 남을 향해 큰 소리로 외치는 설교나 구호로 나타나기 전에 나 자신의 생각과 삶을 먼저 미워하고 슬퍼하는 통회 자복으로 나타나야 할 것이다. “나는 아간과 같은 죄인이올시다”(길선주 목사) “내가 바로 신사 참배한 죄인입니다”(한경직 목사) “나는 83년 묵은 죄인입니다”(박윤선 목사) 라는 고백들이 한국 교회 지도자들의 입에서부터 터져 나올 수 있기를 바란다.

이 시대를 밝히는 각성 운동은 또한 “화해 운동”으로 나타나야 할 것이다. 각성 또는 부흥운동의 본질은 죽은 자들이 살아나서 하나님을 만나고 사람들을 만나는 생명의 운동이고 화해의 운동이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에 나타난 생명과 화해의 운동이다. 지금 우리 사회와 교회는 모두 자기의 주장 또는 이데올로기만 내 세우고 상대방을 공박하는 ‘분노’와 ‘분쟁’과 ‘분열’에 휩싸여있다. 각성운동은 예루살렘에 머무는 운동도 아니고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하는 운동도 아니다. 사마리아와 가이사랴와 소 아시아와 마게도냐와 로마 등 이방을 품는 화해의 운동이다.

이 시대를 밝히는 각성 운동은 또한 “절제 운동”으로 나타나야 할 것이며 사회 변혁 운동으로 나타나야 할 것이다. 장기려 장로 한경직 목사 김용기 장로 등이 나타내 보인 절제와 검소와 봉사의 삶이 곳곳에 나타나 보이기를 바란다. 1960년대에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새 생활 운동”과 같은 윤리 및 사회 변혁 운동이 다시 한번 새로운 형태로 일어나기를 바란다. 지금도 우리의 가정과 사회를 파괴하는 유해 업소와 행위들이 우리 사회 곳곳에 만연되고 있다. 좀 과격한 형태의 정화 운동이 일어나는 것도 바람직하다. 사회와 나라를 살리자는 운동이 학생들 가운데서 순수하고 뜨겁게 일어나기를 바란다. 우리의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 만은 아니다. 우리 사회를 건강하게 만들고 우리의 환경을 깨끗하게 만들며 그리고 지구의 고난 당하는 우리의 가난한 이웃들과 연대하여 함께 살기 위해서 이다.

이 시대를 밝히는 각성 운동은 무엇보다 “성령 운동”으로 나타나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고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도모하는 “그리스도 중심적” “하나님 중심적” 운동으로 나타나야 할 것이다. 진정한 각성과 부흥은 인위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복음운동과 부흥운동이 혹시 잘못된 운동으로 나타날까 봐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 헬라의 지식으로 복음을 포장하지도 않고 로마의 웅변술로 각색하지도 않고 오히려 자기의 약함을 들어내고 다만 성령을 의지하며 십자가만을 전하겠다고 선언했다. 성령운동은 기도와 성령과 약함에 사로잡힌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서 그리고 무엇보다 성령님 자신으로 말미암아 주어진다. “하나님이시여, 우리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살려 주시옵소서. 우리들에게 생기를 부어주시옵소서. 우리들을 하나님의 군대로 일어나게 해 주시옵소서.”/김명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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