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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마 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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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 복의 서론에서 저는 [[예수 따라 산으로 가자]] 라는 제목을 붙였습니 다. 흔히들 우리는 예수 믿고 구원받은 것으로 땡! 이라고 생각들을 하지만 사실은 그게 아닙니다. 그때부터 시작인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왜 이런 결과가 초래하였느냐 하면 구원이라는 것을 창조 자 편에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인 내 편에서 생각하다 보니 인본주의 적 발상이 싹 트고 그래서 내 편할 대로 예수를 보고 ......

구원의 성장은 없이 단순히 예수 천당(기본구원)으로 단정 지어 버렸습니 다. 자신을 깨어 온전히 바치고자 한 마리아를 질타하고 나무라는 가롯유 다를 보면서도 내 안에 내 성분적 사상과 추구가 가룟 유다와 같은 것이 들 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고자 많은 사람들이 몰려 왔습니다.

그러나 정작 하늘의 복을 듣고 보고 가질 수 있었던 사람은 몇 되지를 않 습니다.

산 밑에 있는 사람과 예수 따라 산에 따라 올라간 사람이 비교되고 예수 따라 산에 올라갔지만 예수 앞에 나간 사람과 멀찌감치 있는 사람이 비교 되어 나옵니다.

다같이 제자 되어 말씀을 듣지만 깨달아 알아서 질문을 하는 사람이 있는 가 하면 이 무슨 말인고 하는 사람이 비교되어 나옵니다.

 이 광경을 하나님이 나에게 보여 주셨는데 보여주신 까닭이 뭐냐 하면 산 밑에 있는 사람이 되지 말고 멀찌감치 예수 바라보는 사람되지 말고 예수 앞에 나왔으나 알아듣지 못한 사람되지 말고 천국의 복을 받는 사람, 다시 말하면 팔 복의 사람이 되라는 뜻입니다.

 이제 팔 복을 강론함에 있어 누누이 강조함은 내가 팔 복의 사람이 되자는 데 초점을 맞추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팔 복이다 가 아니라, 이것이 팔 복 이니 이렇게 살아라 가 아니라 [[내가 이렇게 살자]]는 생각으로 팔 복을 보자는 것입니다.

 1 . 복이 뭐냐

팔 복이라 함은 하나님이 성도에게 주시는 복입니다.

성경의 주변 정황으로 볼 때 이 설교는 반복된 듯이 보이지만 각자 성경이 주고자 하는 계시 성이 다르기 때문에 여기서는 다루지 않겠습니다.

 본문에서 특이한 점은 복의 강조점 입니다.

복이 뭐냐 하는 것입니다. 기복 주의에서 말하는 목이냐 샤머니즘적 개 념의 복이냐 구국 주의적 복이냐 율법 주의적 복이냐 그 모두는 아닙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공생애 첫 부분에서 수없이 강조하는 이 복이 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세계는 신령한 세계입니다.

인간의 머리통으로 그것을 이해할래야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차원 높은 경지의 세계입니다. 그곳은 영원한 세계입니다. 처음과 끝이 없다 로 표현 되고는 하는 이 세계는 영원한 세계입니다. 성도는 영원한 존재이니 영원 한 것을 소유하는 것이 복입니다.

 한 예를 들자면 A.라는 부모와 B.라는 부모가 있다고 가정을 합시다.

A. 라는 부모 자식의 장래를 생각해서 인격적인 면 교양적인 면 지식적인 면 모든 면에 서 교육과 성장에 신경을 씁니다.

B. 라는 부모 자식이 하고 싶다는 대로 다 하게 하고 달라는 대로 다해 주면서 밭에 나 가 밭갈이도 시키고 심부름도 시키고 꼬박 꼬박 노동의 대가를 현금으로 줍 니다.

 이제 객관적으로 우리가 볼 때 아이에게 어느 것이 참 복입니까 어느 부 모를 소망하며 어느 부모를 원하고 바라겠습니까 아이의 입장에서는 B.라 는 부모를 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가 원하는 것을 다 주는 것이 아 이에게 선이 아니라는 것을 여러분은 수긍하실 것입니다. 아이를 위하는 부모는 A. 라는 부모입니다. A.라는 부모가 주고자 하는 것이 선이기 때문 에 그렇습니다. 질적으로 우수하고 시간적으로 오래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 렇습니다.

 좀더 구체적인 예를 듭시다.

생면부지 고아이던 아이가 어느 날 갑자기 친 아버지가 나타나서 너는 내 딸이다. 라고 지목을 하고는 강남의 어느 으리으리한 저택으로 끌고 가서 는 이 집은 네 집이니 네 마음대로 살아라 했다고 합시다.

이 아이가 그 크고 좋은 집이 좋겠습니까 좋지요. 무지하게 좋을 것입 니다. 그러나 고아처럼 교육도 받지 못하고 천박하게 자라기만 한 이 여자 아이가 40인치 텔레비전을 켤 줄 알겠습니까, 냉장고에서 고기를 꺼내 요 리해 먹을 줄을 알겠습니까, 텔레비전만 키면 홍콩의 위성 방송에서 유덕화가 나오고 일본의 음악 방송 에서는 시커먼 놈 허연 놈이 나오고 한국의 케이블 TV 에서는 채널이 수십 개 넘는데 그것을 마음대로 키고 듣고 즐길 수 있느냐 말입니다. 40인치 대 형 화면이 무슨 소용이냔 말입니다.

 문화의 수준이 다릅니다.

지리산 산골 마을에서는 푸짐하고 넉넉한 여자가 복스럽고 예쁜 여자이지 만 버스타고 30분만 가면 미니스커트에 롱 부츠를 신고 긴 생머리를 하고 가느다란 허리를 흔드는 여자가 예쁜 여자입니다. 하지만 기차타고 택시 타고 서울의 상류 사회로 가면 그 미니스커트 롱 부츠의 패션은 천박한 패 션이 됩니다. 그곳에서는 교양과 우아함과 섹시함이 잘 조화된 여성만이 아름다운 여성으로 봅니다.

 하류층 사람으로 크던 사람이 상류층 딸이 되기 위해서는 상류 사회를 알 아야 하고 배워서 자기 자신이 상류 사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사회의 일원이 되고 그 사회를 누리고 즐길 수 가 있는 것이지 껍데기만 알고 겉치레만 하면 그 사회에서 조롱을 받고 부끄러운 존재가 됩니다. 이 딸의 입장에서 참된 복은 무엇입니까 상류 사회의 사람이 되는 것이 참된 복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 가지입니다.

산 밑에서는 병 고치겠다고 날 리를 떨고 있지만 예수 따라 산으로 올라간 사람들은 복을 받습니다. 천국의 복을 받는데 천국의 사람이 되는 복을 받 습니다. 이 보다 더 큰 복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는 하류층 사고 방식을 버려야 합니다. 땅에서 누리고 즐기던 생각과 사고로 천국을 보고 누리고 다스리려 하지 맙시다. 그러면 부끄러운 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복이 뭐냐 하는 개념이 어느 정도 정리되셨을 줄 믿습니다.

그러면 심령으로 들어가겠습니다.

 2 . 심령(心靈)이뭐냐

이론적으로 중생댄 영이 가난하여 질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장성한 사람이 다시 어린아이가 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 니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말하는 심령이란 중생댄 영이 아닙니다. 현재적 으로 인간 개인을 움직이는 자아의 심리 상태를 이르는 말인데 국어사전에 서는 심령(心靈)을 [[마음 혹은 정신 작용을 일으킨다고 여겨지 는 근원적 존재]] 라고 정의합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이 심령을 [[마음을 움직이고 작용시키는 존재]]라고 부르 겠습니다.

 마음을 움직이고 작용시키는 것이 가난해야 천국을 갖을수 있다고 예수님 은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가난해야 한다고 하니 지금 마음을 움직이는 것, 조종하는 것이 무엇엔가 대단히 부유함을 누리고 있나 봅니다.

자! 그러면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 , 조종하는 것이 무엇에 부유한가를 체 크해 볼 필요가 생겼습니다. 오늘 아침 텔레비전에서 비만 환자를 치료하 기 위해서는 비만의 원인을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심령이 가난 해 지기 위해서는 부유하게 된 원인을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떤 이는 지식으로 부자일 수가 있고 어떤 이는 교만으로 부자일 수가 있고 어떤 이는 종교열심으로 부자일 수가 있고 어떤 이는 세상일에 부자일 수가 있습니다.

 우리들도 경험하는 일이지만 사람은 음식을 골고루 먹어야 건강합니다. 그 런데 비만하거나 유달리 야위어서 병치레를 자주 하는 아이를 보면 대개가 공통적으로 군것질을 많이 합니다. 밥먹기 전에 과자 사탕 쵸콜렛 등등을 먹습니다. 그리고 끼니때가 되면 밥 먹기를 싫어합니다.

 인간이 본래 밥을 먹어야 하는 이유는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영양 분을 섭취하는 수단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른 대안 예를 들면 알약 하 나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아직까지 그런 약이 없으므로 우리는 밥을 먹어야 합니다.

그런데 밥 대신 다른 것으로 위를 채우면 입맛이 없고 밥을 먹지 못합니 다. 그러면 아이는 몸이 약해져서 병에 걸립니다.

 우리의 영도 마찬 가지입니다.

영은 진리(하나님이 주신 구원 도리)를 먹어야 건강하게 성장하는데 믿음 으로 자라는데 진리가 아닌 다른 것을 먹이고 있다면 그 영은 분명 중병에 걸려 있을 것입니다.(이것은 표현상 그렇고 실제적으로는 영이 성장하지 못 하도록 영양분을 공급하여 주지 않는다는 것이 좀더 정확할 것입니다.)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 더라 눅 2:40]]예수님이 육신이 자라고 강하여 지며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 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부모가 마 음을 움직이는 정신작용에게 우상의 것, 세상의 것, 더러운 귀신 들린 것, 그런 것들을 막 퍼다 가 먹였습니까 아니죠 .

지혜를 먹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먹였습니다. 그러니까 진리이신 예 수님이 자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많고 많은 부모 중에 왜 하필이면 요셉과 마리아를 지목하시고 그들에게 어린 예수를 맡겼겠습니까 이 부분에 대해 생각해 보신 적 있으십니까 인간이기에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때로는 예수를 잃어버리기도 했지만 그래 도 예수님을 하나님에 것이 아닌 세상 것으로 배불리며 키우지는 않았단 말 입니다.

지금 나는 예수를 믿고 진리로 성장한다고 하면서 지금 내가 배불리며 지 금 내가 즐기는 것이 무엇입니까 영원한 것으로 배불리며 영원한 것으로 위안을 받으며 영원한 것으로 즐거워하고 있느냐 말입니다.

 3. 복이있나니천국이저희것임이요.

 그러면 심령이 가난하여 지면 잘먹고 잘 살고 무병장수하며 명예와 부를 얻을 수 있고 만 유의 능력으로 귀신을 내어쫓을 수 있느냐 하면 그렇지 않 다는 것을 여러분은 장황한 설명을 통해 인식하셨습니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여기서 말하는 복은 천국을 소유하는 복이지 들어가 는 떡반죽 나가는 떡반죽 꽉! 꽉! 채워 주시는 임시적 세상적 복이 아닙니 다.

복이 임시적 세상적 것이다 라고 은근슬쩍 말하는 사람은 천국 복을 받지 못하게 가로막는 사람이고 은근슬쩍 그 설교가 보기 좋고 듣기 좋은 사람은 천국 복 받기를 거부하는 사람입니다. 황금 대신 개똥 줏으러 다니는 사람이란 말입니다. 무슨 말인 지 알아 들으시겠습니까

병중에 살기가 너무 힘이 들어 죽기를 갈망하는 형제가 있었습니다.

그 형제가 하는 말 예수 믿으면 천지가 개벽을 해도 천국을 가는데 뭐하 려 굳이 심령이 가난하여지기까지 살아야 하느냐 라고 했습니다. 단순히 천국만 바라보면 그렇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나에게 천국을 주시데 끝 까지 주시고자 하는 것을 알게되면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이라는 것 을 깨닫게 됩니다.

앞에서 잠깐 얘기했지만 하류층 천민의 생활을 하던 나를 상류층의 사람을 만들어서 그 생활을 누리고 향유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본래 목적입니다. 단순히 상류 사회의 일원으로서가 아니라 그 세계의 최 고자로 만들고자 하는것이 하나님 사랑의 목적입니다 .

그런데 상류층의 세계를 알지도 못하고 느끼지도 못하고 그 사람되기를 포 기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내 입장에서야 상류 사회의 즐거움을 모르니 안타까울 리도 없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그게 아닙니 다.

 단순히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인 내가, 내 입장을 개입 시킬수는 없는 일 입니다. 항상 절대적 기준인 하나님의 입장에서만이 생각되고 판단되어 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늘의 세계를 완전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 에 그렇습니다.

길거리 부랑아에 불과한 신분으로 귀족 사회를 알기나 하겠느냐 말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비참하고 고통스럽고 , 화려하고 영광스러운 현실 삶을 살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내 마음을 채우고 정신 작용을 채워서 현실 붙들고 싸우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주어진 그 현실을 극복하고 정복해서(안개가 걷히고 나면 밝은 태 양을 보듯) 천국의 사람이 되라는 하나님의 깊은 뜻이 숨겨져 있습니다.

 4 . 결 론 심령이 가난하여 진다는 것은 천국의 사람이 되기 위한 시작입니다. 산밑 에서 미적거리지 않고 예수 따라 산으로 올라가고 제자가 되어 예수님의 말 씀을 들었습니다. 심령이 가난하여 지면 천국을 갖을수 있다고 하는 예수님 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제 심령이 가난하여 지면 되는 것입니다. 임시적 이고 세상적이고 변질된 것으로 즐기고 누리고 활용하는 나의 마음과 정신 작용을 비우고 영원한 것, 천국 적인 것 참된 것으로 채우면 그것을 중생된 영이 먹으면 나의 신앙 인격이 성장합니다. 그것이 성화의 길이고 이룰 구 원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입니다.

이것을 잡지 못하면 이것을 보지 못하면 껍데기 신앙 헛된 신앙을 하게 됩 니다.

산 아래에서 귀신 붙들고 씨름하는 사람이나 별반 다를 것이 없는 신앙 수 준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 따라 산에 올라간 보람이 없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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