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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긍휼이 여기는 자는 (마 05:7)

첨부 1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의를 얻고 의에 주리고 목말라하는 사람의 실제 삶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긍휼히 여기는 삶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것은 이웃과의 관계 속에 이루어지는 실천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팔복은 새로운 대목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복은 주로 내면의 문제, 하나님 앞에서 존재의 문제를 말씀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가 되느냐 어떤 사람이냐는 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의 복의 내용은 하나님 앞에 어떤 존재로 서느냐
하나님과 어떤 관계 속에 있느냐가 그 초점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 가난함과 죄됨 그리고 의없음을 인식하며 애통하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품성의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순복하며 그 분의 뜻이라면 목숨을 버리는 충성스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모하고 그 분과의 전적인 올바른 관계, 의로운 관계를 사모하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이제 이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의를 얻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를 얻은 것입니다.
흠없고 점없는 완전하고 깨끗한 의를 얻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의로운 자란 칭호를 얻은 것입니다.

이제 의를 얻어 그리스도 안에서 배부른 자의 삶은 어떠한가라는 문제에 대한 답이 긍휼입니다.
예수 그리소 안에서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은 사람은 긍휼이 여기는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함을 얻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속에 있는 사람은 긍휼이 여기는 사람입니다.

그럼 오늘 긍휼이 여기는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첫째로 긍휼히 여기는 자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이웃을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긍휼이 여기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헤를 체험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전적으로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의 긍휼의 은혜 속에서 이웃을 만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긍휼이 여기는 사람은 저절로 생겨진 사람이 아닙니다.
긍휼의 사람은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져 가는 사람입니다.

긍휼이 여기는 사람은 먼저 자신의 영적 가난과 죄를 아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자기 죄와 의없음을 애통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하며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사모하며 그분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 살기를 원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를 얻은 사람입니다.
긍휼이 여기는 사람이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의를 얻고 하나님께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입니다.
긍휼은 이런 과정 속에서 얻게 되는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긍휼이 여기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죄 뿐이며 하나님의 형벌의 대상이었던 그가 이젠 하나님께 의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그는 긍휼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긍휼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천성이 아닙니다.
사람들 중에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도 천성적으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천성이 고와서 불쌍한 사람을 보면 마음이 아프고 도와주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상엔 이런 사람들이 있으므로 세상의 악함과 각박함 속에서도 따뜻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연말이 되면 불쌍한 이웃을 생각하는 마음들이 있습니다.
TV에서도 불우 이웃을 돕자고 특집방송도 하고 성금을 모금합니다.
이런 모금에 선 뜻 많은 돈을 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요 측은지심(惻隱之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 마음 한 구석에 이런 측은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선남비에 돈을 넣고 이웃 돕기에 성금을 냅니다.
물론 이런 일들은 좋은 일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이 오늘 성경이 말씀하는 긍휼이 여기는 사람은 아닙니다.
긍휼은 우리의 천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서 흘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오늘 성경에서 말씀하는 “긍휼이 여기는 사람”은 하나님의 긍휼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 아래 살아갑니다.

이런 사람은 먼저 자신에 대해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을 받아 마땅한 죄인이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 자요 하나님을 미워하던 자였다.
그런데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의 자비를 받은 몸이 되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해 내 죄에 대한 용서를 받았고 믿음으로 의를 얻게 되었다.
이젠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로 새사람이 되었다.
내가 이렇게 큰 은혜를 받았는데 무엇으로 보답할까”
그래서 그는 긍휼의 사람이 됩니다.

이제 그는 사람들을 은혜 안에서 보게 됩니다.
자기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저런 죄인으로 살았을 것이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나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저렇게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을 불쌍히 여깁니다.
죄 중에 빠진 자들을 불쌍히 여깁니다.
그래서 기도합니다.
저 사람에게도 하나님의 은혜를 주시라고 기도합니다.
긍휼을 베풀어 주시라고 간구합니다.
이런 사람이 긍휼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긍훌을 받고 체험한 결과 그는 긍휼을 베푸는 사람이 됩니다.
이런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고 오늘 주님이 말씀하는 긍휼이 여기는 자입니다.

예수님은 어떠셨습니까
예수님도 십자가를 지심으로 자신의 긍휼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기를 죽이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눅23:34)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우리는 이런 주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순교자 스데반은 주님을 닮은 긍휼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이 던진 돌을 맞았습니다.
그는 큰 고통 속에 피흘리며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유대인을 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저주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행7:59)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행7: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이것이 긍휼입니다. 이런 사람이 긍휼이 여기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긍휼은 우리의 본성과는 다른 품성입니다.
하늘로부터 주님으로부터 오는 품성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영엔 긍휼의 영이 있습니까 긍훌이 여기고 불상히 여기는 마음이 있습니까
자기를 적대하며 미워하는 자에게도 이런 긍휼이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의 영엔 긍휼이 필연적으로 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크신 긍휼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긍휼은 이런 하나님의 긍휼을 받은 사람들의 품성이기 때문입니다. 긍휼은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새로운 성품이기 때문입니다.

두번째로 긍휼히 여기는 자는 행동으로 불쌍히 여기는 사람입니다.

긍휼은 단지 불쌍히 여기는 마음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긍휼은 행동하는 측은지심입니다. 실천하는 자비입니다.
긍휼은 죄에 빠진 자에 대한 구제의 행동입니다.
긍휼은 불쌍한 사람에 대해 행동으로 돕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부터 이 긍휼을 가르쳐 오셨습니다.
(레19:9)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너는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너의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레19:10) 너의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너의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타국인을 위하여 버려 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이스라엘의 추수때 밭의 일부를 남겨 좋을 것
-추수때 떨어진 낱알을 줍지 말 것
-가난한 자들과 나그네들이 이것을 구해 먹을 수 있도록할 것.

긍휼은 이와같이 자기의 권리를 다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권리가 있음에도 아껴두고 그 권리가 없는 것같이 행하는 것입니다.
긍휼은 “잘 걸렸다 법대로 하자”는 마음이 아닙니다.
긍휼은 자신의 권리마저도 남을 돕는데 사용하는 마음입니다.

미국에 있는 뉴욕시의 역대 시장 중 가장 명시장으로 알려진 사람은 라과디아(Laguardia)였다고 합니다.
그가 뉴욕시의 즉결재판부 판사로 있을 때의 일입니다.
하루는 가게에서 빵을 도둑질하다가 붙잡혀온 노인이 기소되었습니다.
노인은 배가 고파 빵에 손을 댔다고 자백했습니다.

그러자 라과디아 판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행위는 10불의 벌금형에 해당됩니다.”

그리고나서 그는 자기 지갑에서 10불을 꺼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10불은 내가 내겠습니다. 이토록 배고픈 사람이 뉴욕을 헤매고 있었는데 내가 그동안 너무 좋은 음식을 배불리 먹은 벌금으로 내는 것입니다.

라과디아 판사는 자신의 넓은 중절모자를 재판부 서기에게 내주며 말했습니다.
이 재판정에 계신 분들도 나처럼 너무 잘 먹은 데 대한벌금을 내시고 싶으면 이 모자에 넣기를 바랍니다
이렇게해서 가난한 노인은 오히려 47불을 손에 넣고 눈물을 흘리며 재판정을 나갔다고합니다.
이것이 긍휼입니다.
긍휼은 불쌍히 여길뿐아니라 돕는 행동까지 포함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긍휼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의 성육신입니다.
긍휼은 눈에 보이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긍휼은 행동화된 불쌍한 마음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진정한 긍휼은 우리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활동을 통해 긍휼의 참 모습을 알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인들을 불쌍히 보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저 하늘에서 불쌍히 여기고 계시지만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불쌍한 죄인들을 위해 자기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런 하나님의 긍휼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엡2: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엡2: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엡2:4)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엡2: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에게 죄인들의 죄를 친히 짊어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그저 불쌍한 눈으로 바라보고 계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행동하셨습니다.
긍휼이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자기 아들을 동정녀의 몸에 잉태케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모양으로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그 분의 크신 은혜가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은 그래서 긍휼이 여기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긍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큰 은헤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받은 사람에겐 긍휼이 담겨있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품성이 있습니다.
만일 긍휼이 없다면 그리스도인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받은 일이 없는 사람입니다.
긍휼은 하나님의 긍휼을 받은 모든 사람들의 품성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여러분 모두가 긍휼의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긍휼을 더욱 많이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축 도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주시기를 원하노라(민6:24-26).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한량없는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크고 영원하신 사랑과 성령의 교통 위로 충만케 하시는 역사가, 하나님의 크신 긍휼로 말미암아 모든 죄를 사함받고 새로운 품성을 얻어 긍휼의 사람이 되어 이웃에게 긍휼을 베풀며 살기를 다짐하는, 모든 교회와 사랑하는 모든 성도들의 심령들 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을지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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