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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비난을 중지하고 은혜의 관성으로 살아가라 (롬 07: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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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로마서 12번째 강해시간입니다. 제목은 비난을 중지하고 은혜의 관성으로 살아가라! 무지하게 길죠. 비난을 중지하고 은혜의 관성으로 살아가라! 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7장 1절부터 12절말씀까지는 쉬운 말씀은 아닙니다. 사실 굉장히 어려운 말씀인데 쉽게 생각하면서 풀면 또 굉장히 쉽게 풀릴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로마서 7장 1절부터 12절까지의 말씀은 로마서 6장 14절에 말씀에 대한 주석이다 라고 말해도 됩니다. 6장 14절의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너희가 이제는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아래 있음이니라!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고 우리의 신분이 어떻게 변하느냐 법아래 있다. 이제 율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아래 살아가는 존재다. 이것을 설명하면 됩니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사도바울도 고심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어떻게 설명했느냐 결혼관계로 이 진리를 설명했습니다. 결혼관계. 법아래 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율법아래 있다는 얘긴데, 우리는 과거에 법아래 있었다. 율법아래 있었다. 이 선언입니다. 우리가 율법아래 있었다는 또다른 말로 뭡니까 범죄했다와 동의어라고 생각합니다. 왜 그러냐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보십시요. 법을 제일 잘 아는 사람이 누굽니까 판사나, 검사나, 변호사. 그렇죠 이런 사람이 법을 제일 잘 압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 잘 아는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오히려 이런 사람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누구겠어요 죄인들입니다. 죄수들. 그죠 반쯤 변호사 되어 있습니다. 제가 아는 분 한번 교통사고 때문에 재판 오랫동안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쨌든 교통법 특례에 관한 것은 줄줄줄 외웁니다. 훤하게 외어요. 그렇죠 그 문제에 직면에 있는 사람이 전문가가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떤 간이 안좋은 분이 있습니다. 간이 부었는지, 간이 안좋은지, 하여튼 간 전문가 되어 있습니다. 집에 성경책보다 간에 대한 책이 더 많이 있습니다. 한 스무권 정도 독파하고 나니까 왠만한 의사 가르쳐도 될 정도로 모든 부분을 다 알고 있습니다. 저는 그때 깨달았습니다. 문제가 전문가를 만든다. 우리가 법아래 있다는 것은 뭡니까 법. 법이 필요한 이유가 죄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율법0에 눌리는 그런 인생을 산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율법에 대해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 이유가 뭐냐 범죄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율법의 조항가운데 우리가 자유로운 것이 있습니까 나 외에는 다른 신을 두지 말라. 우리 우상숭배를 하잖아요. 돈이 우상이 될 때도 있고, 이성이 우상이 될 때도 있고, 우상숭배 하잖아요. 살인하지 말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허구헌날 살인하잖아요. 밤낮 밉고, 더구나 내게 잘못한 것도 없는데 재수없게 생겼다 그러면서 미워하잖아요. 그리고 할말 없잖아요. 간음하지 말라.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을때 마다 간음했다고 하는데, 음욕 안품은 사람있습니까 지나가다가. 또 이상한 눈으로 날 쳐다 보지 마십시요. 음욕을 품을 수 있습니다. 뭐 자기는 안 그런가 지나가다가. 영화 이상한 간판을 보고도. 이것에 안걸릴 사람이 어디 있어요. 도적질 하지 말라. 날마다 탐욕으로 탈취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 아닙니까 어떤 면에서 세상에서 걸리지 않는 도둑질 많이 하잖아요. 내 이웃에 대해서 거짓 증거하지 말라. 맨날 헛소리하면서 범죄하고. 입술에 죄악이 끊이지 않는다. 그래서 율법의 모든 얘기를 들어보면 모두 다 내 얘기 같다. 그렇습니다. 율법의 모든 주문이 화살이라고 그러면 날 향해서 날라옵니다. 이제 고습도치 같은 모습이 된다는 것에요. 나의 모습입니다. 나의 모습. 우리는 범죄 했기 때문에 법을 잘 알뿐만 아니라 법이 우리를 얽어매고 있습니다. 법의 조항이 우리를 붙들어 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절감하는 것은 내가 죄인이구나!라는 것을 깨닫고 절감한다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절감한다는 것입니다. 이 죄가 한가지 죄를 은폐하고 감추려고 하면 또다른 죄를 짓게 하고요. 죄는 절대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죄는 새끼를 칩니다. 죄는 반드시 새끼를 쳐요. 우리 뭐 카드빚을 약 100만원 졌다고 해요. 그러면 다른 카드에서 돌려 막고, 막고, 막고, 이렇게 돌려 막다보면 실제 빚은 100만원 밖에 안되는데 천만원 이상까지 되는 사람을 봤습니다. 그것은 당연하죠 이렇게 복리로 늘어나면 이것은 당연한 것 아닙니까 눈덩이 불듯이. 죄가 그렇습니다. 하나를 막고 그것을 처리하지 않고, 자꾸만 돌릴라고 그러면 눈덩이처럼 된다는 것이예요. 죄가 죄를 낳습니다. 예를 한번 들어볼까요 가인을 보십시요. 하나님 앞에 예배 드리는 것 실패했죠 가인의 예물과 제사를 받지 아니하시더라. 예배의 실패가 예배에 그치던가요 아비를 죽이는 것으로 발전하잖아요. 그저 예배의 문제에 문제를 철저하게 해결하지 않으면 다른 것으로 돋이게 되어 있습니다. 다윗도 보세요. 간음했잖아요. 간음에 그치던가요 충신 우리아를 죽이는 살인으로 연결됩니다. 죄는 점점 더 깊은 곳으로 나아가게 하는 속성이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범죄하면 죄가 우리를 얽어 맵니다. 거짓말, 음행, 악의, 불순종, 탐욕, 이런 것이 계속 우리를 얽어매서 우리로 하여금 계속 수렁에 빠진것처럼 만들더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7장에서 이것을 악한 남편과 아내의 모습으로 나타냅니다. 어느 집안에 지긋지긋한 폭력 남편이 있습니다. 여러분! 가정에도 이런 사람이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뭐 멀리 있는 얘기가 아닙니다. 상담을 하다 보면은 참 좋은 남자가 부족하구나! 그러한 생각을 많이 갖습니다. 맨날 여자를 때리는 사람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뭐 남는게 힘이다 해서 먹으면 패고, 예를 들어 그런 남편이 있다고 합시다. 가정에 대한 헌법을 하나 만들어 놓고 이 법에서 조금만 어긋나면 징계가 임한다. 그런 남편이 있다고 합시다. 게다가 도전을 못할 만큼 힘이 장사입니다. 그죠 또 거기다 머리도 잘 돕니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만들어 놓은 남편이 있다고 합시다. 근데 독한 남편입니다. 늦잠 5분만 자면 얻어 터집니다. 몽둥이 날라옵니다. 밥을 태우면요. 그것은 몽둥이 세례입니다. 그죠 자기는 일주일 굶기고. 법이라는 몽둥이를 계속 이렇게 하는 남편밑에 있다고 하면, 무섭지 않겠습니까 실지로 우리가 구약속에 살아갔던 사람들은 이런 잔혹한 법에서 살아가는 남편의 모습과 똑같이 살아가고 있더라는 거예요. 그게 우리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선교단체 중에 그런 선교단체가 있던 것 같아요. 이런 율법적인 선교단체에 가면요. 뭐 멀쩡한 젊은이들이 부들부들 떨어요. 일 하면서 부들부들 떨고. 얼굴에 기쁨이 하나도 없고. 밤낮 묻는게 이거예요. 이게 죄예요 아니예요 하나님의 심판이 있어요 없어요 다 사고 방식이 그것입니다. 그저 자신은 자신이 정상이 아닌 줄도 몰라요. 우리 믿음 안에서 참된 은혜안에서 자유를 전혀 알지 못하는, 완전히 폭군밑에 있는 아내같은 그런 모습으로 눌려 있는 것을 봅니다 이거 벗어나는 방법 뭡니까 죽음입니다. 1절부터 3절까지 보십시요.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아뢰리니 너희는 사람이 살동안만 그를 주관하는줄 알지 못하느냐 그러니까 법하는 사람에게 법으로 얘기해 볼께!-그러는 거죠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벗어났느니라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겡게 가면 음부라 이르되 남편이 죽으면 다른 남자에게 갈찌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므로 율법으로부터 우리가 자유로와 지는 방법은 뭡니까 죽음입니다. 죽음. 둘중에 하나가 죽어야 하잖아요. 남편이 죽거나 아내가 죽거나. 그런데 잘 보십시요. 율법이 죽을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율법이 내가 올때까지 일점 일획이라도 전혀 변함이 없다. 율법은 죽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법칙. 법이기 때문에. 그러면 누가 죽으면 되지요 내가 죽으면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의 원리입니다. 내가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면 된다는 것. 그래서 꼭 보면은 안 될려는 사람은 꼭 하나님의 말씀을 죽일려고 합니다. 우리 가운데 자유주의 신학을 한다는 애들이 그런 애들이예요. 율법주의라고 해서 불편함을 느끼는 것은 우리나 같은 불편함을 느낍니다. 그럴때 우리는 내가 죽는 방법을 선택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사는 일. 내안에 사는 이 그리스도니. 자유주의는 다른거 아니예요. 죽긴 죽이는데 누가 죽느냐 말씀을 죽이는 거예요. 말씀은 그뜻에 한계가 있다고 그러고 이것은 실화가 아니라 신화라고 그러고, 하나님 말씀은 조합이 된거라고 그러고. 그리고 짜집기 한거라고 그러고. 그러니까 말씀을 난도질해서 말씀을 죽이려고 합니다. 말씀이 죽나요 나중에 지가 죽지..그것도 스스로 죽는게 아니라 영원한 죽음. 지옥의 형벌로 가는 거죠. 그러니까 물어볼 것도 없습니다. 남편과 헤어지는 방법. 내가 죽으면 된다는 거예요. 죽으면 됩니다. 그 죽으면 된다는 말이 어디에 나오죠 6장 4절을 보십시요.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으니 누구와 함께요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6장 8절을 보면 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그와 함께 살줄을 믿노니. 잘 아는 말씀. 갈라디아서 2장 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죽으면 자유로울 수 있다라는 거예요. 죽음의 원칙으로서 율법으로부터 나오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함께 죽으라는 거예요. 실제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죽음의 능력을 주십니다. 옛날에 궁중에 내시들이 있었습니다. 내시들 앞에는 아무리 멋진 여자들이 앞에 왔다 갔다 해도 유혹이 되지 않습니다. 왜 왜그러죠 다 알죠. 남자로서의 죽음이기 때문에. 그죠 남자들이 죽으면은 그거 경험 안해 봐서 잘 모릅니까 상상은 할수 있잖아요. 그러면은 유혹이 유혹될 수 없어요. 어떤 사람이 돈을 가지고 자꾸 유혹합니다. 내가 돈으로부터 죽으면요 유혹 안됩니다. 돈으로부터 죽는 방법이 뭔줄 아세요 어! 웬만큼 죽는 방법은 십일조입니다. 십일조 생활 철저히 하면 돈이 잘 유혹이 안되요. 십일조라는 것은 십분의 일만 드리는게 아니라 심정적으로 반쯤 드리는 거거든요. 진짜 그렇습니다. 십일조 드릴 때 반쯤 나가는 것 같죠 반쯤 나가는 것 같은 사람은 믿음이 좋은거고, 믿음이 별로 없는 사람은 다 나가는 것 같아요. 느낌이 그래요. 절대 십분의 일이 아니예요. 심정적으로는 목사인 나도 한 30프로 정도 되는 것 같으니까 여러분이야 말할 것도 없죠. 죽음이예요. 죽음. 물질에 대해서는 이것 내거 아니고 하나님것입니다. 하면서 죽음을 선언하는 거예요. 죽음. 거기다 좀더 하나님께 헌신한 삶을 살면 나에게 돈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돈 때문에 움직이고 그러지 않아요. 이게 진짜 자유로운 방법이라니까요. 돈으로부터의 죽음. 그것은 유혹이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보기에 저사람은 돈 주면 넘어갈 사람이야. 안 죽었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니까 유혹이 살아있지요. 어떤 사람은 돈으로 못움직일 것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행태를 보면은 돈으로부터 죽은 사람이거든요. 절대로 그것 갖고 유혹하지 않습니다. 유혹이라는게 뭐죠 내가 살아있는 것 가지고 유혹합니다. 그건 마귀도 알지만 주변사람들도 잘 알아요. 명예가 살아있는 사람은요 명예갖고 유혹합니다. 미끼라는게 그런거잖아요. 미끼라는게. 그런데 우리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으면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니까요.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겁니다. 다 죽는거예요. 그래서 법 아래 사는거에서 살아나는 길은 그리스도 안에서 죽는 거예요. 자기 인생 부인하는것. 이게 유혹에서 이기는 길입니다. 그리고 율법에서 이기는 길이고 자유로운 길이라는 거예요. 법아래 있다고 하는데 법이 하는일이 뭐예요. 정죄 아닙니까 정죄. 저는 지금부터 이런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뭐냐하면 이 성경에 나오는 용어들이 당시에 잘 알던 용어들이었거든요. 법이라는 개념. 노예제도. 로마의 법. 이런 것이 있었기 때문에 쉽게쉽게 이해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사람들은 계약의식도 없고 별로 법의식도 없습니다. 그것 아십니까 법 없이 살사람. 이게 좋은 사람이라는 뜻이예요. 우리는 그런 민족이거든요. 대충하는 민족입니다. 그저 인간적인 감정에 의해서 대충 법에 호소하지 않고 잘 하는 것을 우리는 인간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예요. 미국에 한번 가보십시요. 그애들은 모든 것을 법조문에 맞춰서 하는 것을 인간적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족속이 다릅니다 족속이. 그러니까 우리 족속에 맞는 설명을 해줄 수 있어야지요. 제가 볼때 그런 설명의 고민을 많이 하는데. 법 아래 있다. 이 정죄라는 말은 우리 식으로 말한다면, 21세기의 알기 쉽게 표현한다면 비난하는 게임을 중지하는 것입니다. 법으로부터 자유로운 방법이 뭔줄 아세요 비난 하는 게임을 중지하는 거예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서로 비난하면서 발전한다고 생각하는데 여러분 잊지 마십시요. 비난은 상처만 만듭니다. 가정에서도 그렇고, 교회에서도 그렇고, 직장에서도 그렇고. 여러분 경험이 얘기 하잖아요. 비난은 상처만 만듭니다. 비난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뭐냐 한 5가지 이야기만 할께요.

첫째 비난은 결코 치유되지 않습니다. 비난한다고 치료되는게 아니예요. 또 비난한다고 절대 치유되는게 아닙니다. 오히려 상처를 더 심하게 만듭니다. 또 어떤 아기들을 교육시킬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들이 잘 몰라요. 비난을 한다고. 애들을. 비난한다고 애들이 치유가 되느냐.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상처만 더 깊어져요. 나중에 가출하죠 비난이 해결한다고 생각하니까 그것은 틀린거죠. 그런데 묘한게 뭐냐면 자기 어렸을 때는 아는데 자기 어른되었을때에는 모르는 것 같애요. 어른되면 싹 잊어버려요. 싹 잊어버려. 그리고 또 하나 논지가 있죠. 난 이렇게 못했지만. 하면서 아! 사람 속을 뒤집어 놓는거죠 여기 젊은이도 그것 듣기 싫다고 나온 사람이죠? 여러분도 그렇게 됩니다. 전 여러번 봤습니다. 그렇게 비난받는 것 싫어하던 사람이 애 낳고 난 다음에 애 3살인데 공부 안한다고 욕하고. 아이구! 내가 그 아줌마 데려다가 너 어렸을때 어땠는줄 아냐 사람이 그래요. 사람이. 이게 묘한 율법주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비난이 사람을 고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둘째로 비난은 사람을 완전하게 하지 않습니다. 비난이 완전하게 만든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비난은 파괴할 뿐입니다. 비난은 완전하지 않아요. 관계만 파괴해요. 저는 얘기를 하죠. 어떤 것들은 치유도 중요하지만 관계가 더욱 중요하다고. 올바른것도 중요하지만 어른한테 무례하게 해 보십시요. 말은 옳아요. 변화가 될 것 같애요 변화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 중에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아야 합니다. 관계가 깨지는 것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무조건 관계만 붙들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관계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가치가 있는건지. 성경에서는 오히려 정의를 세우는 것하고. 실적할만큼의 가치가 있습니다. 그래서 관계가 다 깨지는 사람. 좋은 사람 아닙니다.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도 의를 들고 나가는게 아니라 관계를 가지고 나아가는 겁니다. 관계. 관계라는게 그렇게 중요하다는 거예요. 비난은 관계 파괴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비난은 결속시키지 않습니다. 하나되게 하는 힘이 굉장히 중요한데 비난을 하면 결속이 되는게 아니라 잘 보십시요. 분리시켜요. 사람들을. 분리시킨다고. 이 사회도 자꾸만 비난해 보십시요. 비난을 하면 그것에 지지하는 사람도 있고, 반대하는 사람도 있을 것 아니예요. 당연한 얘기 아닙니까 그 당연한 얘기를 자꾸 벌이는 사람은 뭐예요. 분열주의자예요. 분열주의자. 결속시키지 못합니다. 절대 리더가 될 수가 없습니다. 그사람은.

네 번째. 비난은 세우지 못합니다. 세우는데 아무힘도 없어요. 그런데 무너 뜨리는데 기가 막히게 힘이 있습니다. 허무는데는 힘이 있죠. 파괴하는데는 비난하는 사람들은 쉬워요. 불지르고 도끼 하나만 주면 뭐 힘듭니까 그러나 세우는 것은 아무나 못한다는거예요. 세우는 사람 되어야 할 것 아니예요 무너뜨리는 사람이 아니라. 무너뜨리는 것은 시원은 하지만 다시 세울려고 하면은 수십년이 걸릴수 있습니다. 그렇죠 무너뜨리는 것은 쉽죠 캄보디아 같은데에서도 한번 공산혁명을 한후에 그 인구 3분의 1인가를 죽였잖아요 안경낀 사람들은 인텔리라고 해서 다 죽였잖아요 제가 보니까 인물이 없어요. 인물이. 인물을 죽이는 것은 순식간이지만 인재를 다 죽여놓으니까 완전히 뭐 원시국가처럼 되어버렸다고요. 공부한 사람을 만들려면..사람이 뭐 하루 아침에 큽니까 인재를 키우는데도 30년, 40년 걸리는 거죠. 뭐 어려워 지는거죠. 이게 참 어려워지는 거라는 겁니다.

다섯 번째. 비난은 결국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더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어요. 그러므로 악한 마귀가 역사 할 때는 항상 역사하는게 뭐냐하면 비난을 통해가지고 상처를 더욱 깊게. 관계를 파괴하고 분리하고 무너뜨리고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고. 여러분! 경험상 다 맞지요 그렇지 않아요 비난 했더니 다 이런일이 벌어지지 않아요 반면에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나아가면 사람이 치유가 됩니다. 묘해요. 치유가 된다니까요. 상처가 아물어요. 그리고 사람의 관계가 회복이 되요. 화해의 역사가 벌어지고, 그리고 결속시키는 일들이 벌어지고요. 세우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문제를 복잡하게 하는게 아니라 문제가 해결 되죠. 주님이 이런한 법 아래에 있는 비난 게임에서 정죄하는 모임에서 뛰쳐 나와 죽음을 통해 뛰쳐 나와 은혜의 새 남편과 결혼하라는 거예요. 4절을 보십시요.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의 죽임을 당했으니 이제 다른이. 다른이가 누구죠 예수그리스도죠. 그 죽음자 가운데서 살아난 이에게 가서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똑같은 얘기죠. 예수님께 가면 열매를 맺게 된다는 거예요. 열매. 이제 율법이 우리를 지배하는 게 아니라 은혜가 우리를 지배한다. 새 남편은 은혜를 주는 남편이고 용서하는 남편이고 사랑하는 남편이다. 우리 삶 가운데 우리가 어떻게 살아 갈 것인가! 법이 지배하는 인생이 아니라 은혜가 지배하는 인생을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역사하고 성령이 역사하는 곳에는 은혜가 넘쳐야 합니다. 은혜가 넘친다는 것은 뭐예요. 서로 사랑으로 덮어주는 거예요. 법조문이 지배하는 곳이 아니라 사랑이 지배하는 곳이어야 한다는 거예요.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법이 지배하면 끝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이것을 은혜로 사용하는 방법이 있고, 법으로 사용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부부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특별 새벽기도회에 나와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어떤 가정은 보면요 말씀가지고 싸우죠 그리고 이메일 날라오죠. 아! 이럴수가 있냐고. 내가 오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아내에게 적용 했더니 아내가 펄펄 뛰더라는 거예요. 아내한테 순종 하라고 했더니 왜 순종 안하냐고 그러고. 아내는 또 내가 그 하나님의 말씀을 남편에게 적용했더니 남편하고 같이 못살겠다는 거예요. 이게 아주 마귀 새끼라는 거예요. 마귀새끼. 말씀을 법으로 사용하는 겁니다. 말씀을 들어가지고 상대를 공격 하잖아요. 말씀의 검을 가지고 상대를 찌르는게 되잖아요. 이 문제가 있지 않아요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은혜로 생각하는 방법이 뭐죠 말씀을 듣고 나서 내가 문제 투성이 폭력 남편이었군요. 내가 사랑하지 못한 것. 내가 하나님께 회개합니다. 말씀을 은혜로 사용한거죠. 그 다음에 아내도 마찬가지죠. 아! 내가 여태까지 게으른 여자였습니다. 문제있는 여자였습니다. 내가 품어주지 못하는 여자였습니다. 가정의 불화의 원인이 나에게 있군요. 은혜로 사용하는 거래요. 은혜로. 그렇게 똑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은혜로 사용할수도 있고 법으로 사용할수도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은혜. 은혜 하니까 우리 젊은이들이 이해를 잘 못하는 것 같애요. 그래서 고심을 했습니다. 도대체 은혜아래 산다는 것이 현대용어로 뭘까 아까 법으로 산다는 것은 비난게임을 중지하는 것이다. 그게 가장 유사한 것 같아요. 그럼 은혜아래 산다는 것은 현대적인 용어로 뭘까 그래서 붙든게 모멤톤이라는 것입니다. 관성. 은헤의 관성으로 살라. 전 이게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그 다음에는 95퍼센트는 생각할수 있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은혜의 관성. 은혜의 관성이 뭔지 알죠 어떤 달리는 기관차가 있습니다. 어떤 달리는 기관차가 막 달려요. 최고의 속도로. 요즘 고속철도 같은게 나오는데 최고속도 200킬로미터 이상으로 달리는데 그런게 있다고 합시다. 보통 150 킬로로 달리는 기관차가 있다고 합시다. 막 달리면요 그 기관차는 1미터 50 센티미터 정도 되는 콘크리트 벽을 뚫어버린다고 합니다. 이해가 되시죠 기관차 다 철로 만든거 아닙니까 철마 아니예요 철마. 쇳덩어리 아니예요 쇳덩어리가 150 킬로미터로 막 달리면은 1미터 50 센치 얼마나 크겠어요 그러니까 좀 키 작은 사람 누워있는 두께. 그러면 이해가 되시지요 그 정도의 두께의 콘크리트 벽을 뚫어 버린대요. 왜그래요 관성 때문에 그래요. 관성. 그런데 그런 기차를 전시할 때 그러니까 은퇴한 철마들 전시해 놓은 곳에 가 보면은 한 2센치정도 되는 베니아 합판으로 막아놨어요. 그래도 충분히 보호가 되지요. 왜요 관성이 없으니까. 움직이지 않는 기관차야 뭐 2센치면 어때요 종이로 포장을 해 둬도 상관이 없어요. 천막으로 해 놓아도 비만 안 새면 되요. 그렇죠 관성이라는게 이렇게 중요하다는 거예요. 어떤 사물이든지 운동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율법으로 사는거와 은혜로 사는것의 차이가 뭐냐 율법으로 사는것은요 관성이 없는거예요. 그냥. 고정된것. 가만히 있으면서 잘하니 못하니 뭐니뭐니 하면서 밤낮 때리고 찌르고 죽이고 하는 것이고. 은혜는 뭔지 알아요 운동력이 있습니다. 운동력. 그 안에 추진력이 있어요. 그래서 은혜로 산 사람이 뭐예요 이것을 또 다른 말로 하면 제가 자발성 한적 있죠 어떤 사람에게 자발성이 생겨요. 불이 나지요 어떤 사람이 운동력이 있으면 하나님께 기도를 하면 은혜가운데 충만하게 운동을 한다고 그러죠 충만하게 움직인다고 우리는 그런식으로 표현하지요 그게 우리 심령에 관성이 붙는 거라고요. 관성이. 한번 관성이 붙으면 감당 못할 정도로 많은 일을 하죠. 동기부여만 되십시요. 폭발력이 일어납니다. 폭발력. 그게 은혜라니까요. 은혜. 은혜 받아야 동기부여가 되요. 은혜 받아야 관성이 생긴다니까요. 우리 넓이뛰기 하는 사람 보십시요. 도움닫기라고 하죠 맨 뒤에서. 뭐 제자리에서 뛰는 사람 봤어요 제가 뭐 힘차게 뛰는거 봤어요 뭐 내가 볼때 많이 뛰어야 2미터도 못뛸걸요 그런데 옛날에 내가 좋아하는 칼루이스같은 사람. 그래서 멀리뛰기는 백미터 잘 뛰는 사람이 잘 뛰죠 대게 100미터 나오는 사람이 넓이 뛰기도 같이 나와요. 이유가 뭐냐 뒤에서 탄력. 관성의 법칙을 이용해서 탄력을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멀리 날라가는 거죠 상식이잖아요. 그러니까 100미터 빨리 뛰는 사람이 멀리 날라간다고요. 우리가 넓이 뛰기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죠 다리를 찢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달리기 실력을 늘리면 멀리 날라가요. 정말 그렇다니까요. 달리기 실력을 늘리면. 짧은 20미터 30미터 속도가 빠른 사람이 멀리 날라가요. 물론 몸무게도 조금 줄여야 겠지만. 그럼 멀리날라간다고요 왜요 관성의 법칙이예요. 우리가 그런 관성을 배워야 한다고요. 관성. 여러분 테니스나 탁구 칠 때 자세가 중요하다고 그러죠.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이렇게 몸을 움츠리고 있죠 서브 받을 때. 몸 뻣뻣하게 세우고 있는 애들은 일단 못하는 애들이예요. 왜그러죠 뻣뻣하게 서 있으면 공이 내려올 때 내려갔다 올라오는 운동량 속에 벌써 끝나 버리죠. 넘어가버리고. 무슨 말이예요 움츠리고 있다는 것은 무슨말이예요 움크리고 있을때 튀어 오르는 관성을 이용해서 받는 것 아닙니까 제가 예전에 깡패 영화 많이 봤는데요. 깡패중에도 주먹을 잘 쓰는 사람은 어떤 줄 알아요 서가지고 주먹을 때리는 사람. 이것은 맞아도 아프지도 않습니다. 정말로 무서운 사람은 회전력을 이용하는 사람입니다. 허리를 이용해 가지고 이렇게 날라가야지 사람이 날라가는 거라고요. 이것은 제가 과거에 경험이 있기 때문에 압니다. 그것은 묻지 마십시요. 회전력이예요. 회전력. 그거 잊지 마십시요. 그래서 사람들이 돌려차기 이런게 왜 무서우냐면 회전력 때문에 그래요. 관성의 법칙. 탄력이 붙으니까. 무서운 힘이 되는거죠. 그들은 폭력세계에서 은혜가 뭔지 아는 사람이예요. 그렇죠 관성을 붙여서 일을 하는것. 제가 이정도 설명하면 아시겠죠 그래서 믿음이라는 것도 관성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을 보면은 믿음의 관성을 설명하고 있는데 1장 1절. 뭐 다른 것은 못외어도 1장 1절은 외우잖아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니. 현재 내가 현위치에 있습니다. 믿음이 뭐라고요 바라는 것이 있어요. 믿음이 뭐라고요 보지 못하는 건데 내가 보여요/. 보지 못하는거 나는 보인다고. 그러니까 바라는 것도 보지 못하고 멀리 있는 건데 우리는 보지 못하는 것을 보잖아요. 그것을 바라보면서 기도하면서 순종하면서 달려가요. 그러니까 믿음있는 사람은 또 다른 말로 하면 뭐예요. 100 퍼센트 관성이 있는 사람이예요. 아시겠습니까 비전이 왜 중요한지 알아요 젊은이 가운데 비전이 있는 사람은요 그들의 비전의 관성이 그들의 삶을 움직여요. 목표를 향해서 뛰니까. 그런데 대개 얼굴이 죽은 애들을 보면 관성이 전혀 없어요. 뭘 해야 할지도 몰라요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몰라요. 멍하니 방안에만 쳐박혀 있어가지고, 뱃살만 나오고 다리만 약해지고 뭐 병이죠. 관성이 다 죽었으니까. 이게 율법적인 삶이예요. 이해가 되십니까 무슨 소리인지 은혜 아래 산다는 것은 관성으로 다 설명할수 있습니다. 그래서 현재의 시점에서 무엇을 바라보면서 뛰는 것. 그러면 쉽게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쇠도 달구어졌을때 내리쳐야 한다고 그러죠. 관성으로 일하는 사람 있습니다. 어떤 사람 기도의 관성을 할때 기도 쉽게 하는 사람있습니다. 왜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뜨거운 마음을 주셨을 때 기도하는 마음을 주셨을 때 즉각 기도해요. 그때 쉽죠 네 쉬워요. 관성이 있으니까. 뭐 특별 새벽기도회 갔을때 많은 사람들이 몰려올 그때가 쉬워요. 왜요 왜 전체적으로 기도하는 관성을 세울때 그때 아니예요 그때 슬쩍 편승만 해도 되요. 슬쩍 편승만 해도 기도의 사람이 된다고요. 기도자가 해야 할 일이 뭔지 아십니까 전성도에게 계속 광고와 기도와 자극을 통해서 운동량을 만들잖아요. 관성을 만들잖아요. 그러니까 전성도가 기도하는 곳에 집중하게 하지 않습니까 이게 은혜예요. 은혜. 여러분! 은혜 아래 산다는 것은 뭐냐 자꾸만 우리의 삶 가운데 관성의 법으로 일을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거예요. 이것은 파도를 타야 한다. 이것과 거의 같은 얘기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새벽기도회 시간에는 관성을 법칙을 가지고 여러분의 삶을 변화시키는 힘입니다. 존 맥스웰은 이런 말을 했어요. 관성은 모든 변화에서 최고의 수단이다. 이번에 말고 다음 대통령. 다음 대통령에서 우리 교회에서 나올지 모르겠는데 대통령이 되실만하신분들. 잘 들으십시요. 어떤 전환을 일으키려고 할때 지도자가 반드시 염두해 두어야 할 것은 그 이전부터 계속 관성을 길러가야 되요. 무슨 얘기인지 알겠습니까 그래서 자기가 운동량을 비축해 가지고 관성의 힘을 쌓아놓고 난 다음에 관성의 힘으로 변화를 추구하고 나면 쉽게 변화가 됩니다. 쉽게. 정말이예요. 쉽게 변화가 되버리고 말아요. 어떤 물에 의해서 밀려오면 수압에 의해서 청소가 쉽게 되듯이. 관성의 힘을 가지고 일을 하는 사람이 리더입니다. 그런데 리더쉽이 없다고 하는 사람의 특징이 뭔지 아십니까 관성이 뭔지 몰라요. 그저 가만히 있다가 책 읽고 난 다음에 옳은 일 하면은 툭툭 나서서 이게 옳아! 사람들 그럴때는 냉랭해 지는거죠. 운동량이 없는거죠. 운동량이. 관성율이라는 것을 배울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마지막으로 한번 더 해보겠습니다. 큰 교회도 있고. 작은 교회도 있는데 저도 뭐 작은 교회 경험도 해 보았습니다. 저는 한번 이런 고민을 해 봤어요. 왜 작은 교회는 관성을 받기가 힘든가! 우리 교회 같은 교회는 새벽기도회 한다고 하면 와! 하고 몰려 들잖아요. 제주도 선교 간다고 하면 힘있게 결집이 되잖아요. 그런데 왜 작은 교회는 그런게 잘 안되나 저도 대학부때 조금만 교회를 맡았더니 그게 대게 힘들어요. 힘든 이유중에 하나가 뭐냐 매우 작은 문제가 사람들의 초점을 흩을수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작다라는게 뭐예요 작으면요 예를 들어 교회 규모가 한 100 명정도 된다고 합시다. 우리 모임단체가 한 100명정도가 된다고 합시다. 그러면 거기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두사람만 싸워도 일이 안되요. 일이. 그죠 초점이 흩어져 버려요. 그리고 100명 전체에 영향있는 사람이 영향을 주기 때문에 그래요. 뭐 가지말자. 하면은 한 20명정도 빠져버리고. 그리고 눈에 띄죠. 힘을 발휘할수 있는 힘이 너무 작은 부분에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규모가 커져 보십시요. 커지면은 두 놈쯤 싸워봐야 눈에 띄지도 않아요. 이런 것은 . 똥개는 짖어도 경부선은 간다고 된다고요. 큰 흐름속에 간다고요. 그러면 우리가 여기서 지혜를 얻어야지요. 지혜를 . 답이 나옵니다. 왜 진이나 팀에서 일을 하다보면은 거기서 작은 것에 영향을 안받을 태도와 구조를 갖추면 되지요. 그러면 승리할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비판을 합니다 .뭐. 이게 뭐야뭐야 하면서 비판을 해요. 탄력을 받을때 그런 비판은 그냥 내버려 둬도 되요. 탄력이 없을때 이 탄력을 죽일정도의 비판이 된다고 하면 그거 막아야 합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죠 예를 들어서 기도하는 분위기가 막 되는데 균형을 잡고자 딴소리 하는거 괜찮아요. 그거 받아줄수 있죠. 옳은 소리이니까. 그런데 기도의 탄력을 막을정도로 가로 막고 있는 것은 막아야 되요. 그게 지도력입니다. 지도력. 여러분! 무슨일을 하든지 탄력을 잃어가면서 일을 하지 않는 사람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지헤로운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관성을 깨지 않으면서 조언할수 있는 방법을 배워야 해요. 아시겠습니까 그게 진짜 친구입니다. 어떤 사람이 관성을 죽이면서 하는 것은 비판자이지. 절대 좋은자가 될 수가 없다는 거예요. 여러분! 이해를 위해서 관성이라는 말로 은혜를 설명했습니다. 잘 이해가 되십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은혜가운데 살아간다는 것은 이런것이예요. 그죠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과 지혜와 권능을 가지고 더 큰 일할수 있는 곳으로 나아가는 하나님 백성이 되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장 쉽게 적용할수 있는 것은 뭡니까 내일도 새벽기도회죠. 나오십시요. 이때 안나오는 사람은 뭐죠 이건 원수죠. 원수. 우리의 관성에 방해가 될려고 하는 사람이죠. 그렇잖아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관성에 더욱 힘을 돋우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죠 한번도 안나오던 사람이 나 어저께 설교듣고 나왔어 그러면 이 사람은 관성에 힘을 주는 사람이예요. 거기에 힘을 얻고 나도 사실은 오늘 끝내려고 했는데 너 때문에 또 나온다 또 나온다. 이유가 되죠 그게 은혜의 확산. 지금 표현에 의하면 관성의 확산이라고 할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이 뭡니까 성령안에 살아가는 사람은 은혜 안에 살아가는 사람이다. 이런 성령이 주시는 관성의 법칙에 의해서 일들을 어렵게 하는 종들이 아니라 쉽게 일을 하는 것이다. 서로 격려하고 세워주고 좋은 것으로 나아 갈수 있도록 복돋는 힘을 주는 존재다. 그게 은혜 아래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법아래가 아니라 은혜 아래 살아가는 우리 믿음의 종들 되기를 바랍니다.

다같이 하나님 앞에 간구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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