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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07 06:43

산상수훈강해1 (마 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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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rj hvmata) 영이요(pneu'ma ejstin) 생명이다(zwhv ejstin). (요 6:63) 라고 선 언하고 있다.

영이요 생명인 말씀은 언어라는 매개체를 통하여 우리들 각자에게 전달된다-그것이 문자 언어이든 음성 언어이든 혹은 이미지() 언어이든 또는 표현되어 나타난 언어이든 아니면 생각속에서 번개처럼 주어진 어떤 것이라 할지라도-. 어떤 철인이 언어는 존재의 집 이라고 말한 것처럼 모든 언어는 양식, 즉 살게 하는 요소를 담고 있는 집이라고 보아도 무리가 아니다.

문제는 그것이 생명으로 살게 하느냐 혹은 멸망으로 살게() 하느냐 하는 차 이점 뿐이지 모든 언어가 각기 어떤 요소를 그 속에 담고서 양식으로서의 역 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직시해야 한다. 실제로 우리 인간이 떡만으 로 살 수 없다는 사실은 성경의 증언이 아니라 하더라도 자명한 것이다. 우리 일상 삶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언어생활의 비중은 절대적이다. 언어는 우리를 살게 하기도 하고 죽게 하기도 하는 중요한 구성 요소이다.

여기서 우리는 떡에 대한 일반적인 구분(육체의 양식과 영혼의 양식이라는 등 식)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소위 영의 양식이라는 것에 있어서도 크게 둘로 나누어진다는 사실이다. 즉 어떤이는 그리스도께서 하신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ta; rJhvmata), 곧 영과 생명인 말씀으로 양식을 삼 고 있는 반면에, 어떤 이들은 멸망케 하는(ajpollumevnhn 요6:27) 것으로 양 식을 삼고 살기 까닭이다. 다시 말하면 멸망의 양식 으로 인가. 아니면 생명의 양식 으로 인가이다. 요한복음 6장 27절에 나오는 멸망의 양식 을 육신의 떡으로 이해하는 잘못된 풍토속에서 빚어지는 신앙의 양태는 지적 되어야 할 부분이기도 하다. 즉,여기서 말하는 멸망의 양식은 육신(body)의 양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육신의 양식은 육신을 살리게 하는 양식일 뿐이 지 멸망케 하는 양식이 결코 아니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육신의 양식이 아니라 참으로 멸망케 하는 양식이다. 무엇이 우리를 멸망케 하는가. 이 글 이 진행되면서 그러한 것들은 드러날 것이다.

어떻든, 이 양식은 언어라는 매개체 속에 담겨져 있다. 성경 언어가 중요하다 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점 때문인데, 이 생명과 영인 말씀을 어렵도다 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곁을 떠났을 때 너희도 가려느냐 하시 는 주님의 말씀에 대한 베드로의 고백은 유명하다. 주여 우리가 누구를 향 하여 가겠습니까. 당신은 영생의 말씀을 갖고 계십니다(kuvrie,pro; tivna a jpeleluso-vmeqa rJhvmata zwh' aijwnivou e[cei). 라고 하고 있다. 그분 은 말씀을 갖고 계시며 결국 말씀이시라는 고백과 다름없다.

 그런데 문제는 도대체 어떻게 우리에게 그러한 영생의 말씀이 실제화 될 수 있고 우리의 삶에서 용해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주어진 언약의 말씀들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언약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그 언약에 대해 소망을 갖 고 언약의 땅으로 인도를 받으며 동시에 성취의 사실들을 끊임없이 확인하면 서 신앙생활을 한다.

그러나 이 기록된 언약의 말씀인 성경이 우리에게 가리워져 있어서 쑥물(멸망 의 양식)과 같음에도 사실 쑥물을 단물로 알고 도취해 있는 것이 우리 시대의 불행이다.

이 말씀들이 어떻게 우리에게 영생의 말씀이 될 수 있는가. 우리의 식견과 지 혜의 출중함으로 단순히 기록된 말씀이 영생의 양식이 될 수는 결코 없다. 기 록된 성경 말씀이 단순한 도서로서가 아니라 영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려면 말 씀하신 분의 비추어 주심이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가 생명과 진리를 볼 수 있 는 유일한 길은 생명 자신이, 진리 자신이 우리들에게 빛을 비추어 주심 가운 데 비로소 볼 수 있다. 그래서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두움이 아닌가 보라(마 6:23)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태양을 보는 것이 우리 자신의 시력이 좋아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태양 자신의 빛에 의해서 비로소 태양 뿐만 아니라 만물을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때문에 소경이 소경을 인도 할 때 빚어지는 참 극은 이러한 빛의 드러내 주심이 없이 딘순히 전해들었거나 배운것(지식)을 가지고 비추임 받은 것인양 전할 때 일어나는 현상이기도 하다.

눈은 몸의 등불이요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나 눈이 나쁘면 라 는 말씀은 네 눈이 빛이신 그리스도냐 아니면 여전히 법아래서 허우적대는 어 두움이냐를 생각 하라는 말씀과 다름없다. 그러므로 진리는 빛의 비추임 가운 데서 자신을 명시(明示) 하고 있고 가리워져 있지 않음(ajlhvqeia)속에서 드 러나는 것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진리가 자신을 밝혀 주는 곳에서만 우리는 진리를 알 수 있 고 그러한 속에서만 또한 진리는 자신을 드러낸다는 말이다.

이것은 찾고 구하고 두드리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의 지혜 가운데 서 그 자신을 나타낸다.

찾고 구하고 두드리는 구체적인 삶이 무엇이겠는가 그렇다. 로마서 8장에서 말하고 있는대로 육신을 쫓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쫓는자는 영의 일을 생 각(fronou'sin) 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frovnhma)은 생명 (zwh)과 평안(eijrhvnh) 이다(롬8:6).

이것이 소위 기도라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기도도 두 종류로 대별할 수 있 다. 육신을 쫓는 곧 사망을 결과하는 기도가 있고 또한 영생과 평안을 가져다 주는 기도가 있다. 그래서 죄악을 품고 하는(시 66:18) 기도는 기도가 곧 죄 요 욕심을 따라 정욕으로 잘못 쓰려고 구하기 때문에(약 4:3) 하나님은 듣지 않으실 뿐 아니라 들으실 수(능력)가 없는 것이며, 때문에 로마서는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라고 못박고 있다. 그것이 죄의 삯이요, 사망(롬 6:23)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볼 수 있듯 기록된 말씀은 진리 자신이 자신을 비추어 주심 가운데 영의 생각이라는 통로를 통하여 현재의 우리들에게 말씀하심으로 나타나셔서 (ajlhvqeia) 우리에게 생명과 평안으로, 곧 영생의 말씀인 참된 양식(ajlhvq hejstin brw'si)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즉 그 말씀하신(기록된) 말씀이 말씀 하심으로 우리에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해아래 새 것이 달리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었던 존재적 진리가 나에게 진리로 나타 날 뿐이다. 그래서 내 살을 먹고 내피를 마시는 자는 내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요 6:56) 라는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이며 결국 중요한 것 은 그러한 말씀의 성취가 개개인의 삶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에 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기록된 말씀에 있다. 기록되어 있는 말씀이 말씀하심으 로 나타날 수 있기 위한 중요 요소로서 빛의 비추어 주심과 영의 생각이라는 통로임을 살펴보았는데 여기에서 우리가 중시해야 할 것은 일차적으로 기록 된 성경에 대한 접근을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 현재의 나에게 어떻게[의미 있음], 즉 양식으로 주어지느냐의 문제인데, 우 선해야 할 일은 텍스트(Text)에 의 접근이다.

우리가 오늘날 주로 대하고 있는 성경은 번역된 성경으로서, 원어성경의 보편 화는 아예 꿈조차 꿀 엄두를 내지 못하는 형편이다. 대부분 상아탑에서 소수 무리들의 전유물로 원어성경이 취급되고 있는 현실이며 또한 그들의 견해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우리의 주된 관심사를 이제는 원어성경의 보편화 운동에 눈돌림으로 누구나 원어성경을 쉽게 볼 수 있고 접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 장벽이 아무 리 험난하고 높다할지라도 말이다. 성경의 원전에 대한 막연한 필요성은 그것 의 접근에 가장 큰 장애요인이다. 그렇다고 해서 절대 필요성을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결코 아니며 다만 찾고 구하고 두드리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말씀들 을 진리의 기준자(ruler)인 성경의 빛에 비추어 보지 않고서는 끊임없이 자기 주장만 난무할 우려가 있고 또한 번역성경의 오류에서 빚어지는 혼돈만 있을 뿐이라는 생각에서이다. 기록당시 기록자들의 언어 매개체를 통하여 유기적 으로 기록된 원전의 가치를 강조한다는 것은 오히려 그 가치가 강조함 때문에 떨어질 우려가 있다.

우리가 말하는 이의 본래 의도를 올바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화자(話者)의 열 어보여 주심은 물론이려니와 그가 말하고 있는 상황과 맥락 그리고 말을 듣고 있는 대상이 누구인가를 지나치고서는 기록된 말씀의 참된 의미를 상실하기 쉽다. 또한 말하고 있는 이의 말을 끝까지 들어보고 자세히 검토해 보기도 전에 무슨 의미일 것이다라고 앞질러 단정 짓는 일만큼 큰 적도 없을 것이다 . 그러한 것 때문에 말하는 분과 듣는 이는 항상 동문서답을 하게 되고 그러 한 불행을 우리는 성경에 등장하는 대화들 가운데서도 자주 발견하게 되며 오 늘날 신앙인들에게서도 여전히 되풀이되고 있다.

이러한 요소가 실제로 성경을 보거나 번역함에 있어서 매우 크게 작용하고 있 으며 번역성경 오류의 주범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번역성경의 문제점은 지리적 시대적 문화차이에서 오는 개념의 혼동과 번역자의 선입관 의 작용이다. 이러한 것들을 극복하는 최고의 지름 길은 원어성경을 직접 대 하는 것이다. 그것은 구도자에게 있어서 어쩌면 기본이기도 하다.

그러한 생각의 틀속에서 우리앞에 놓여있는 산상수훈의 말씀을 진리를 구하고 찾는 마음으로 그 원문적 의미를 짚어보며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또한 그 러한 과정에서 야기될 수 있는 모든 토론의 여지들은 펼쳐놓고자 한다. 즉 한 본문을 보면서 드러내 주심을 관찰하고 표현하는데는 다양한 이해를 가질 수 있음을(그렇다고 해서 본문이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거나 또는 존재적 진리가 다양하다는 이야기는 결코아님) 인정하면서 누구도 본문에 대한 확정 된 결론을 내려놓는 것이란 쉬운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뿐만아니라 텍스트는 그 자체의 독립성을 가지고 오늘 우리 각자에게 발언하고 동시에 우리는 텍 스트와 마주하게 된다. 새로운 이해와 열림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므로 이 글 은 한 개인의 신앙적 씨름과 텍스와의 만남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이해의 일부 로 보면 된다.

다만 본문을 살펴보면서 있을 수 있는 완곡한 표현들은 단지 내게 주어진 상 황에서 그렇게 보여진다는 잠정적인 결론일 뿐이라는 것에 대해 미리 양해를 구하고자 한다. 이는 동시에 필자의 텍스트와의 대화요 당시의 상태이며 상 황일 뿐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차피 求道의 道上에서 眞理를 만나고 혹은 살필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救援을(빌2:12) 이루어가는 巡禮者의 旅 程에 모두가 서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한에서 이 글을 활자화하는 변이 있다면 함께 순례자의 길을 걷고 있 는 모든 이들에게 그저 또 다른 하나의 순례객으로서 한마디 덧붙혀 보므로 우리의 주변과 안을 들여다 보고 생각해보고자 함에서이다. 글이 진행되는 도 중 원문에 대한 설명이 자주 나오므로 어떤 이들에게는 다소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겠고 표현의 미숙함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이 필요한 이들 에게 조금의 위로라도 될 수 있고 나눔이 될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 우리의 손에 성경이 들려져 있다는 것에 다시한번 감사하고 싶은 마음이다 .

 산상수훈2 1

무리를 보시고 태복음 5:1절과 2절은 산상수훈이 시작되는 분위기가 어떠한지를 잘 보여 주 고 있다.

우리는 마태복음 5장의 분위기를 이해 하려면 4장의 분위기를 바로 보아야 한 다. 4장은 잘 아는 대로 예수께서 성령에 이끌리어 40일 금식하신 후 마귀의 시험이 끝나고 나서 그의 사역이 시작되고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그 중 12절 부터 살펴 보면 예수께서 요한의 잡힘을 들으시고 갈리리로 물러 가셨다가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 야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스블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하였느니라. 라는 말씀은 빛 으로 오신 예수를 잘 증거해 준다.

여기서 여기서 우리는 대체로 성경에서 말하는 빛과 흑암이 무엇인지가 분명 함을 알 수 있다. 예수는 이 때부터 비로소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고 제자들을 택하신다.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색병과 고통에 걸 린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저희를 고치시더 라.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강 건너편에서 허다한 무리 가 좇으니라 로 4장이 매듭지어 지고 있다. 그야말로 수다한 무리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서 좇는 모습이다.

그들이 예수를 좇는 이유가 분명하게 나타나있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신유와 이적에 대한 소문을 듣고서이며 그것과 또한 여타의 것들을 목적으로 하고 이다.

 그런데 마태복음 5장은 [그러나 (de, but)]라고 하는 접속사로 시작하면서 5 , 6, 7장의 전혀 다른 분위기를 예고 해주고 있다. 즉 4장 사역의 성격과 5, 6, 7장 사역의 성격 구분이 de (데);라고 하는 접속사 하나가 명확히 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말 번역 성경에서는 별것 아닌 것 같은 이 접속사 하나 를 소홀히 취급하므로 번역을 하지 않고 있는 까닭에 원문의 분위기가 상당히 약화되어 있고 실제로 오늘날 기독교 사역의 상당 부분은 4장의 무리들 사역 에 치중하고 있거나 혹은 머무르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때문에 5, 6, 7장은 설교자들이 간헐적으로 취급하기도 하지만 그 감추어진 비밀들은 몇겹 으로 덮혀 있어서 좀처럼 열려지지 않을 뿐더러 이같은 현상은 대부분의 주석 서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위의 본문을 직역해서 해석을 해본다면 다음과 같다.

그러나 예수께서 무리들을 보시고 산으로 올라가셨다. 그리고 그가 앉으시 니 그의 제자들이 그에게 나아왔다. 그리고 그의 입을 열고 그들을 말씀하심 으로 가르치신다(동사, 직설법, 미완료).

 왜 무리(o[clou,오크루스)를 버려둔 채 제자들과만 말씀하시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산상수훈이 끝나고 나서 마 8:1에 보면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 오 시니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 라는 것을 보면 5, 6, 7장은 매우 구분된 부분 임에 틀림 없다. 즉 예수께서 제자들과 무리들을 차별하시는 것이 아니라 무 리들의 관심과 그들의 상태에서는 능히 감당할 수 없는 부분이며 그것은 곧 아마도 예수의 견딜 수 없는 아픔이기도 한 것이다.

실제로 성경 여러곳을 살펴보면 무리의 특성이 잘 나타나 있다. 마가복음 2장 4절을 보면 무리를 인하여 정작 예수의 필요를 절실히 느끼는 한 중풍병자가 큰 방해와 불편을 느끼기도 한다. 마치 여론에 편승하여(밀려) 진리에 이르 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을 생각케 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이부분을 그렇게 해 석해야 된다는 것은 아님) 성경에 대한 이해도 모든 기독교인들이 보편적으로 인정하는 해석에 안주해야 편리하고 위험부담을 줄일 수 있을 것이라는, 그 래서 일보도 앞으로 내딛지 못하고 마침내 진리의 지식에 이르지 못하는 보편 성과 교리에 민감한 많은 이들 처럼 말이다.

막 4:1절에 보면 무리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는 비유로 가르치실 수 밖에 없는 그분의 아픈 심정이(12절) 잘 나와 있다. 요 6장에서 표현 된대로 그들은 표 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즉 표적을 보고 그 표적이 의미하는 바 바로 그것 때 문에가 아니라,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에 그를 따르고 좇는다는 것이다(요 6:26). 실제로 표적이 의미하는 바 바로 그것(요 6:27-59)에 대한 말씀을 듣고 난 후 제자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6:60) 하고 수근 거리고 있으며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라고 하고 있으니, 하물며 무리들이야 더 말해서 무엇 하겠는가 문제는 이러한 현상이 오늘날 기독교에도 여일하며 기껏 선교 단체등에서 제 자 훈련을 한다고 하나 내용은 마찬가지라고 하는 것이다. 어떤 유명 단체에 서는 제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훈련으로 만들어진다 는 그야말로 몰라 도 무엇을 한참 모르는 소리를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말하고 있는 함 정에 크게 빠져 있기도 한 현실이다.

 원문 성경은 이렇게 접속사 하나라도 그냥 간과할 수 없도록 우리들을 붙잡고 서 많은 의미를 던져주고 있다.

헬라어에는 문장과 문장을 연결해주는 접속사로서 세 종류가 있다. 즉 본문에 서처럼(de 데)와 같은 경우를 우위접속사(conjuction Super-ordinating)라고 하는데 (de가 반드시 우위접속사로 쓰이는 것은 아님) 그 문장이 앞의 문장 보다 우위에 있다고 보면 된다. 반면에 종속 접속사(Conjunction Subordinat ing)가 있는데 마 5:3에 나오는 (o]ti,왜냐하면) 와 같은 경우로써 종속 접속 사 이하에 나오는 문장이 앞의 주절을 설명해 주고 있는 경우이며, 두 문장에 서로가 어떤 영향을 미치지 않으면서 대등하게 연결해 주는 접속사가 등위접 속사(Conjunction Coordinating)이다. 예컨데 (kai;,그리고) 와 같은 것이다 .

오늘 본문 맨 처음에 나오는 Ijdw;n(이돈)이라고 하는 동사는 ei[dw (에이도 )가 원형이고 Ijdw;n(이돈)은 ei[dw(에이도) 동사의 분사형태로서 과거 능동 태 남성 단수이다. 여기서 남성 단수라고 하는 것은 그 동사의 동작을 하는 동작의 주인공이다. 헬라어는 동사에 주어의 성. 수. 격이 표현되어 있어서 인칭 대명사가 주어일 경우는 주어가 생략되는 것이 일반적이며(인칭대명사 주격이 있는 경우는 그것을 특별히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동사만 보 고서도 주어를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Ijdw;n(이돈)을 그가 보시고 ('보다'의 분사형)로 해석하 면 된다. 그리고 ei[dw(에이도) 의 단어는 '알다, 깨닫다, 보다, 지식을 갖 다, 확신하다, 이해하다, 알고 있다,'라는 사전적 의미를 갖고 있는 것으로서 , 그러고 보면 단순히 무리들을 바라보고 산으로 올라 가신 것이 아니라 무리 들의 어떠함을 예수께서는 아시고 산으로 올라 가셨다는 의미를 품고 있는 단 어 이다.

tou; o[clou에서 tou;는 관사, 목적격, 남성, 복수인데 관사는 명사앞에서 그 단어를 특정한 것으로 한정하는 역할을 한다. 즉 무리들(o[clou)인데 어 떤 무리인가하면 4장에서 예수를 좇던 그 무리들이기 때문에 관사가 붙어 있 는 것으로 보면 되고 이 때 관사의 변화는 그것이 형용하는 명사와 변화가 일 치 한다. 관사가 목적격, 남성, 복수인 것은 o[clou(오크루스, 무리)가 목적 격, 남성, 복수이기 때문이다. o[clou(오크루스, 무리)는 명사, 목적격, 남 성, 복수이다.

ajne;bh(아네베)는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3인칭 단수 이다. 그러므로 그 가 올라 가셨다 라고 보면 된다(산으로).

여기까지만 해석해보면 그러나 그가(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아시고) 산으 로 올라 가셨다. 라고 하면 된다. 이하와 2절은 독자 여러분들께서 연습해 보시고 다음은 5:3절부터 살펴 보자. 특히 2절에서 우리말 성경은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로 번역되어 있지만 원문성경에는 가라사대(levgwn,레곤)가 분사이면서 주격으로 되어 있음을 유의해서 묵상해 보시기 바란다.

오히려 가라사대 보다는 그가 그의 입을열어 말씀하심으로 그들을 가르치시더 라가 더 정당한 해석이다. 그것의 차이와 의미하는 바는 더 설명하지 않아도 능히 짐작되리라.

 산상수훈 3(심령이 가난한 자) 마 5:3절 심령이() 가난한 자

산상수훈, 그 중에서도 8복의 제 1 聲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 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이다.

너무나 유명한 말씀 이면서도 너무나 우리에게 애매하게 알려져 있는 구절이 다. 어쩌면 마태복음 5, 6, 7장을 모두 해결해 줄 수 있는 구절이기도 한 오 늘 본문이다.

우선 본문의 문장부터 살펴보고 그 의미를 탐구해 보도록 하자. makavrioi(마 카리오이)의 문법적으로 즉 형용사 주격 남성 복수 이다. 앞서 잠간 언급했 듯이 형용사는 그것의 꾸밈을 받는 명사와 성, 수, 격이 일치한다. 그러므로 형용사가 NMP(주격 남성 복수)인 것은 그것과 관계하는 (oiv ptwcoiv,호이프 토코이)가 주격, 남성, 복수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잠깐 형용사의 두가지 용법에 대해서 살펴 보자. makavrioi o iv ptwcoiv(마카리오이 호이 프토코이)의 문장을 볼 때 우리는 makavrioi(마 카리오이)가 형용사라면 두가지의 형태로 해석을 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복 있는 가난한 자들 또는 가난한 자들은 복이 있다 이다. 전자의 경우를 한정적용법 혹은 제한적 용법이라 하고 후자를 서술적인 용법이라고 한다.

어순에 관계없이 한정적인 용법은 형용사에 관사가 함께하고 서술적 용법에는 관사를 동반하지 않는다.

예컨데 makavrioi oiv ptwcoiv (마카리오이 호이 프토코이) oiv ptwcoiv makarivoi(호이 프토코이 마카리오이) 가난한 자들은 복이 있다

oiv makavrioi ptwcoiv (호이 마카리오이 프토코이) oiv ptwcoiv oiv makavrioi(호이 프토코이 마카리오이) oiv makavrioi oiv ptwcoiv(호이 마카리오이 호이 프토코이) 복이 있는 가난한 자들

그 밖에도 명사적인 용법과 부사적인 용법이 있지만, 우선 앞의 두가지의 경 우를 익히도록 하자.

그러고 보면 오늘 본문의 makavrioi oiv ptwcoiv(마카리오이 호이 프토코이) 는 서술적으로 해석하면 된다. 즉 가난한 자들은 복이 있다.

그런데 헬라어의 어순은 주로 영어의 어순과 유사하지만 강조하고자 하는 것 을 문장의 처음자리에 위치 시킨다. 오늘 본문에서는 makavrioi(마카리오이) 가 문장 맨 앞에 나와 있어서 강조를 하여 해석해 본다면 가난한 자들은 복이 있도다 로 해 볼 수 있겠다.

문제는 (tw/' pneuvmati, 토 프뉴마티)이다. 우리말 번역성경은 심령이 라 고 번역을 하고 있다. 물론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자칫 독자들이 느끼는 감은 '심령' 할 때 웬지 '마음'이라는 강한 뉘앙스를 갖게 한다. 그 래서 마음이 가난한 자들()이 복이 있다 라는 조금은 막연하고 추상적인 느 낌을 갖게 한다. 마음이 가난한 상태가 어떨 것이라는 어떤 느낌은 있을지 모 르지만 그 의미가 석연하게 전달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더욱이 헬라어에는 마음(kardiva/ 카르디아) 이라는 단어가 따로 있고, 또한 중요한 것은 오늘 본문의 tw/' pneuvmati(토 프뉴마티)는 격이 여격으로 되 어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을 '심령이' 라는 주격으로 개역 성경은 번역을 하고 있지만 여격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유의 하지 않으면 안된다 .

헬라어 격에는주격(Nominative, 은, 는, 이, 가) 소유격(genitive,의) 여격( Dative,에게), 목적격(Accusative, 을, 를), 호격(Vocative)이 있다. 물론 t w/' pneuvmati (토 프뉴마티)를 의역해서 심령이 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그 것은 어디까지나 원문의 의미가 손상되지 않는 범위에서 의역을 해야 한다.

차라리 우리말 번역에 있어서는 매끄럽지 못하더라도 때로는 문장이 어색한 직역이 더 효과적일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원문의 의미를 다치지 않고 가 능한한 그대로 보존할 수 있기 위한 최소한의 방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선 tw/' pneuvmati(토 프뉴마티)를 이해하기 위해서 / pneuvma(프뉴마)라는 단어가 성경에서는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를 먼저 살펴 보도록 하자.

일반적으로 (pneuvma 프뉴마)에는 크게 두 종류의 형용사가 형용을 해 주면서 쓰여지고 있는 것을 많은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우리말 번역 성경에 성령 으로 번역된 부분들은 pneuvma( 프뉴마)라는 단어에 aJgi;o(하기오스, 거룩 한)란 한정어가 있어서 거룩한 영으로 원문에 표기되어 있는 것을 성령'으 로 번역한 것이다. 반면에 똑같은 pneuvma에 ajkavqarto(아카다르토스, 더러 운)라는 형용어가 수식해서 더러운 영 혹은 귀신 이라고 많은 곳에 번 역을 하고 있다(마10:1, 12:43,45, 막 1:23, 26, 27, 3:11, 29, 30, 5:2, 8, 13, 눅 4:33, 36,등등). 물론 귀신이라는 헬라어의 단어에는 daimovnion (다 이모니온, 귀신)이라는 명사가 있다. 이 daimovnion(다이모니온)이 들린 영을 (tw/' ajkavqarto pneuvma 토 아카다르토스 프뉴마)해서 더러운 영 혹 은 더러운 귀신 으로 번역한 곳도 여러 곳에 나타난다. 어떻든 영에는 크 게 두 종류의 영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거룩한 영 과 더러운 영 이 다.

그런데, 원문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런 형용사가 없이 단독으로 쓰인 곳 이 빈번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런 경우에는 물론 문맥을 통해서 pneuvma((프 뉴마가)가 거룩한 영을 말하는지 혹은 더러운 영을 말하고 있는 지를 어느정 도 알 수 있다. 그래서 번역성경은 pneuvma(프뉴마가)가 단독으로 쓰이더라도 어떤 곳에서는 성령으로(마 4:1, 12:18, 막 1:10, 12, 요 1:32, 33, 3:5, 6 , 8:34, 7:39, 15:26, 16:13, 롬 8:16, 23, 고후 1:22, 갈 3:2, 3, 14, 4:29 ) 번역을 해주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문맥에 따라 pneuvma 가 약속 의 영(엡 1:13) 곧 아버지의 영(마 10:20), 진리의 영(요 15:26, 16:13) 등일 경우 '거룩한' 이라는 형용사가 없어도 성령 으로 번역을 해 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꾸며 주는 형용사가 없는 경우, 그냥 영 으로 번역되고 있는 부분도 허다하다. 롬 7:6,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 롬 8:1,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등. 결국 이러한 경우도 문맥을 자세히 검토해 보 면 어떤 영인지 알 수 있다.

문제는 오늘 본문에 쓰이고 있는 tw/' pneuvmati(토 프뉴마티)를 어떻게 볼 것이냐 이다.

우리가 어떤 성경의 개념에 대한 본래적인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 기본적으 로 살펴보아야 할 것은 성경 전체적인 맥락을 통하여 그 시대 성경 저자들이 어떤 의미로 개념을 채택해서 사용하고 있는지를 살펴 봄과 동시에 그 단어 가 사용되고 있는 그 문맥의 흐름을 결코 간과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것 이 동시에 균형적으로 병행되지 않으면 단순한 단어의 개념집착으로 오해를 낳는 수가 허다하다는 점을 철두철미 경계해야 한다.

어쨋든 오늘 본문의 tw/' pneuvmati(토 프뉴마티)를 이해함에 있어 본문의 흐 름의 분위기가 특별한 힌트를 우리들에게 제공해 주는 것을 발견하기는 그렇 게 쉬운일이 아니다. 앞서 살펴 보았듯이 성경 전체적인 흐름에서 볼 때 마음 의 뉘앙스를 품고 있는 '심령'으로 번역하기 보다는 그냥 영 이라고 보는 것이 합당 하다. 그렇다고 '성령'으로 보는 것도 팔복의 맥락과 관련해 보면 무리가 따르는 해석 이다.

분명한 것은 tw/' pneuvmati가 여격으로 쓰이고 있다는 점이며, 이것은 을 이해함에 있어서 매우 주의 깊게 살펴 보아야 할 부분이다. 여격을 국어 대사전은 정의 하기를 체언으로 하여금 무엇을 받는 자리에 서게 하는 구실 을 하는 외에 동작의 상태를 나타낸다 라고 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여 격으로 쓰이고 있는 영 은 행위의 주체가 결코 될 수 없을 뿐더러 오히려 어떤 행위나 동작의 결과 혹은 상태가 영에 미쳐 있는 것으로 보아야 타당하 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tw/' pneuvmati를 의역해 본다면 영의 상태가(in spirit) 가난한 자들은 이라고 해 볼 수 있겠다.

그러면 도대체 가난한 자들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많은 사 람들이 애써서 본문을 이해하려고 하는 일반적인 표현이 우리가 아무것도 소유하고 있지 않으며, 철저히 복종한 상태로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와 그의 은혜와 자비를 철저하게 의뢰하는 것 (로이드존스, 산상설교집. 문창수역.6 4-65쪽) 이라고 하는 정도이다. 그러나 이것이 본문의 적절한 이해에 충분히 이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좀더 살펴보면 금방 드러날 것이다.

 가난하다 라는 의미의 이해를 위해서 부요하다 라는 성경적 개념을 먼저 살펴 보도록 하자.

계 3:17절을 보면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이르는 편지의 책망 내용 중에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라오디게아 교회가 갖고 있는 자부심이다. 그러나 그것에 대한 책망을 보면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 벗 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복이 있는 가난과 복이 없는 가난이 무엇인지를 비교해서 생각 해 볼 수 있다. 자신은 부요한 줄 알았는데 실상은 그것이 아무것도 갖고 있 지 못한 비참한 가난이었다는 지적이다. 그렇다면 그 반대의 경우인 복이 있 는 가난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는가 바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 게 하고 이다. 이 부요의 상태는 곧 라오디게아 교회의 자부심이던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라고 하는 것과 같은 고백은 전무(全無 )한 상태 이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는가. 그것은 곧 불로 연단한 금으로 ()이다.

약 2:5를 보면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 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오늘 본문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와 비교해 볼 것)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바로 본문의 가난에 대한 의미를 분명하게 설명해 주고 있는 부분이다. 가 난 이라함은 세상에 대하여 가난함이고 반면에 믿음에는 부요한, 천국이 저 희 것인 현재의 상태이다. 그래서 마태복음 5:3은 영에 가난한 자들은 복이 있도다. 왜냐하면(for) 천국이 저희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더우기 천국은 현재 시제의 상태로(동사 직설법 현재) 저희들의 것이라는 말 씀이다.

우리는 여기서 한번 더 물음을 던져 볼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세상에 대하여 가난하다는 것은 무엇이며 또한 라오디게아 교회의 자부심인 나는 부 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는 말은 무엇인가 그리고 도대체 tw/' pneuvmati에 가난한 자들은 복이 있도다. 왜냐하면 천국이 현재시제를 사용하여 저희들의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하는 말은 무슨 말인가 하는 것이다. 더욱이 5:4절부터 9절까지는 oti이하의 동사가 모두 미래시제를 쓰고 있고 5장 10절은 다시 천국이 저희 것이기 때문이다 라고 할 때는 현재시제를 쓰고 있다. 이러한 시 제의 차이가 가져다 주는 의미는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는가 4-10절까지의 해석의 열쇠는 오늘 본문 3절에 달려 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가난이 무엇이며 부요가 무엇인지를 고찰해 보면, 한마 디로 산상수훈의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와 그의 義냐 아니면 율법 적 신앙에 의한 자기 義냐 하는 문제이다. 누가 부요하다고 하는 자이겠는가 결국, 나는 하나님 말씀대로 이만큼 열심히 그리고 최선을 다해서 신앙 생 활을 하고 있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도록 온 정성을 다 하고 있다고 하는 자들의 자부심이다. 그래서 이들은 주일성수, 십일조, 기도 , 구제, 금식, 전도, 봉사, 선교, 심방 등에 가장 모범적이기에 칭찬을 아무 리해도 부족하지 않은 자들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들의 그러한 신앙 생 활 근거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그렇다. 모두가 성경말씀에 근거하여 그렇 게 하고 있고 말씀에 그렇게 하라고 했으니까 한 것 뿐이요 하지 말라고 했으 니까 하지 않은 것 뿐이다. 그러므로 조금도 부끄러울 것도 부족한 것도 없는 지극히 하나님 앞에서 당당한 것 아니겠는가 혹 육신이 약해서 부족된 것 은 회개하였고 뿐만 아니라 내사정을 잘 아시는 그분께서 오죽 잘 이해를 해 주시겠는가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축복도 받았고 말씀대로 살았으 니 부요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는 것이 바로 라오디게아 교회의 使者의 태 도이다. 이들을 가리켜 세상에 대하여 부요한 자들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즉 신앙생활이 처음부터 끝까지 세상식 이라는 것이다. (성경도 역시 세상식으 로 보기 때문에 그럴 수 밖에 없다.) 이렇게 아름다운 자기 義의 옷으로 치장 한 사람들은 그렇게 자기들이 생각하는 식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자(않는 가난한 자들)들을 향하여 그들식의 말씀을 갖고 권고 하며 율법으로 책망하는 자들에 대하여 야고보고가 그의 형제들에게 경계하는 내용이 야고보서 2장의 내용이다. 약 2:6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멸시하였도다 부자는 너희를 압제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라는 것이다. 그들은 항상 자기 들의 율법적 기준으로 심판, 판단하며 그러므로 법정의 재판관에게로 끌고 가 는 자들이라는 말씀이다.

앞서 인용한 바 있는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우리가 아무것도 소유하고 있 지 않으며, 철저히 복종한 상태로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와 그의 은혜와 자비 를 철저하게 의뢰하는 것 이라고 하는 설명은 그것이 가난한 상태에서 그러 한 양태의 삶이 결과적으로 나타날 수는 있겠으나(사실은 그런것도 아니지만 ), 이것이 적절한 이해가 되지 못하다는 것은, 바로 아무것도 소유하고 있지 않으며, 철저히 복종한 상태로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와 그의 은혜와 자비를 철저하게 의뢰하는 그 행위의 주체는 여전히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죽어야할 자기 라고 하는 사실이다. 바로 여기에 교묘한 술책이 숨어 있다는 것이 다. 아무리 그럴듯한 설명이나 그것은 결국 한걸음 더 심화된 율법에 불과하 다는 것이다.

隔痼 속아서도 안되고 속일 수도 없는 것이다.

tw/' pneuvmati에 가난한 자들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철두철미하게 하나님 을 바라보고 의뢰하는 것 자체까지 완전히 없어진, 자기적 요소라고는 전혀 없는 상태로서 그야말로 인간으로는 전혀 불가능한 상태이다. 이 상태야말로 천국이 현재적으로 저희 것인 복있는 상태요 또한 율법으로부터 완전히 해방 된 상태이다. 그것은 자기 의지적인 노력에 의해서 주어질 수 있는 상태가 아 니다.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 의 현재성이 성취되고 있는 실제 적 사실을 오늘 본문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먼 미래에 도래할 나라가 아닌 현재 사실적으로, 바로 가난한 자들에게 임하여 실현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실재성이 어떠한지를 그리고 참된 구원의 모습 이 무엇인지를 생생하게 알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가난이 없는 무엇인가 자기 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는 자들에게는 도무지 언어로 전달할 수 없는 신기루와 같은 생생함이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는 불가능한 일이요 그러므로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 는 유일한 길 외에는 가난의 상태에 이를 수가 없다. 즉 가난이라고 하는 것 은 어떤이들의 말처럼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구하는 상태도 아니요, 바로 그 러한 자기까지 완전히 없는, 소유한 것이라고는 전혀없는 진정한 무소유의 가난 일진대 어떻게 그것이 사람으로서 가능할 수 있겠는가 바로 그 상태 는 천국이요, 욕심도 주장도 어떻게 해보겠다는 자기 의욕도 아무것도 없는 상태요, 다만 있다면 하나님의 주권(Lordship)이 100%로 행사되는 오직 하나 님 나라의 영토요 소유된 백성일 따름이다. 어떤 일에 대한 불같은 의욕이 있 다면 그것은 자기 의욕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에 의한, 바울이 말한 대로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내노니 와 같은 의욕일 뿐이요(이것이 분명하게 나누어지지 않으면 혼돈 상태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일에 대한 결과에 대해 자랑할 것도 그것에 만족해 하며 안주할 것도 없는 다만 있다면 고요와 평강 그리고 기쁨과 즐거움 즉 의와 평강과 희락 밖에 는 있을 것이 없는 나라이다. 그러기에 가난이 무엇인지 모르는 자들에게 있 어서 하나님 나라는 영원히 미래일 수 밖에 없고 내세에 귀착될 수 밖에 없다 . 혹 신학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성경적 증거에 의해 논리적으로 강 하게 주장한다 할지라도 결국 그것은 지식에 불과한 허상일 수 밖에 없는 것 이다(그것은 실제적 삶이기 때문에).

천국이 현재적으로 임해 있는, 곧 온전한 구원이 실현된 tw/' pneuvmati에 가 난한 상태, 하나님 밖에 하실 수 없는 그러한 상태에 어떻게 이를 수 있겠는 가 하나님은 어떻게 그 일을 이루어 나가고 계시느냐 하는 것이다. 그것은 어떻게 구원 역사를 이루어 가시느냐 하는 물음과 같다. 그래서 tw/' pn euvmati에 가난한 자들은 복이 있도다. 왜냐하면 천국이 저희들의 것이기 때 문이다 로 시작된 산상수훈은 계속해서 애통하는 자의 복이 나오고 있고, 온 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 케 하는 자의 복이 나올 수 밖에 없으며(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이기 때문에) 이들 복에 대한 결론으로 10절에서 핍박을 받은자(완료)는 복이 있 나니 천국이 역시 현재시제로 저희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라고 하고 있다. .그 러기에 계시록에서는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이다.

팔복 각각의 경우에 대해 차례로 살펴보게 될 것이지만 애통하는 자에서부터 화평케하는 자의 복은 5장 3절의 가난에 이르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사역이시 라는 것만 우선 말씀 드리고자 한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인 5장 3절은 어쩌면 성경의 결론이라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며 (현재적 하나님 나라의 성취이기 때문에) 이어서 나오는 복들은 5장 3절에 대한 주석이요. 3절의 복을 누리는 자들에게는 반드시 성취되어야(거쳐야 할) 할 말씀들이다. 즉 애통하는 자의 복이 임하지 않고는, 애통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 지지 않고는 하나님 나라도 , 그리고 실제적 구원 사건도 사실은 그림의 떡이요,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이 다.

실제로 5장 3절의 이해됨이 없이는 산상수훈을 부분적으로는 알 수 있을지 몰 라도 전체적인 이해에 바르게 도달할 수 없을 만큼 본문은 축복의 말씀이며 동시에 심판의 말씀이다. 오늘 본문에 대한 설명이 미비하다 할지라도 계속해 서 산상수훈을 연구하며 살펴 보노라면 부연 설명이 충분히 되어지리라고 생 각되며 이후에 나오는 말씀들이 가난의 비밀과 그 의미에 대해 충분히 뒷받침 해 줄 것이며, 드러내 줄 것이다.

 산상수훈4(애통하는 자)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팔복이라고 일컫는 소위 마 5:3-11절까지 거의 모든 구절이 마찬가지이지만 이제 우리가 살펴 보고자 하는 본문도 예외없이 그럴듯하게 왜곡()되어 이해 되고 있다.

대부분 5:3절의 심령이 가난한 것은 팔복에 있어서 하나의 시작이라고 전제해 놓고 그 밖에 이어서 나오는 복은 기타 점진적으로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서 이루어지는 현상으로 보려하는 것이 일반적 경향이다. 사실상 순서로는 처음 에 나와 있고 그러기에 오히려 그것이 더 타당해 보일 수 있으며 그런 유혹에 넘어가기가 매우 쉽다고도 볼 수 있다.

예컨데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자신의 무능과 무가치함을, 그리고 아무것도 소유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철저히 복종한 상태로 하나님만을 바 라보고 그 은혜를 의뢰하는 태도나 상태라고 보고 이러한 사람은 자기 죄와 자기의 실패에 대해 애통해 한다는 것이다. 즉 죄에 대한 참된 참회로서 그에 대한 슬픔의 상태가 애통하는 자의 모습 그것이라는 것이다. 곧 무자비한 죄 의 세력에 대한 인식과 이 세력을 막거나 피할 수 없는 우리의 무능의 인식에 서 하나님께 끊임없이 부르짓는 울부짖음으로 이해하려는 것이다.

일면 바로 보고자하는 부분도 없지 않겠으나 문제는 그것이 문제의 핵심에서 벗어나서 이해되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그럴듯해도 오히려 본질을 왜곡하거 나 호도할 우려가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들의 애통하는 자의 복인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에 대해서, 대부분이 뉘우치며 애 통하는 모든 죄인들에게 선언된 사죄야 말로 위로라는 쪽으로 당연히 결론 지 을 수밖에는 없을 것이다. 애곡이 하나님께 올라갈 적마다 위로는 한결같이 우리에게 내려오는, 그래서 복이 있는 자라는 식의 결론이다.

이러한 결론이 가져다 주는 신앙에의 부정적 악영향은 언제까지나 되풀이 되 는 많은 악순환을 가져다주고 있다는데서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할 것이다.

어떠한 악영향 인가 베드로 사도가 표현한대로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 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 도다 라는 말씀이 그대로 성취되어 반복하게 하는 신앙생활을 부추기는 결론 밖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무서운 사실이다.

혹자는 말할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참된 죄의 뉘우침이나 애통이 아니었기 때문이지 참으로 죄에 대하여 애통했다면 그리고 그 결과로 위로를 받은 자라면 그럴 수 있겠느냐, 그것은 오히려 당신이 지나치게 단순화 시켜 서 그야말로 당신이 본질을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라고 항변하실 분이 있으리 라는 것도 능히 짐작이 가고 남는다. 그렇다면 그렇게 항변하고 계신 당신에 게 있어서는 어떠한가 과연 당신은 참된 애통을 하였기에 바로 애통한 죄에 대해서는 다시는 애통할 필요가 없는 당신이 되었느냐 하는 것이다. 그렇다 면 전혀 더 이상의 논쟁은 필요치 않다.

만일 그렇다면 그런 것이요 그렇지 못하다면 그렇지 못하다는 당연한 귀결이 나올테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반응을 보이시는 분도 계실 것 이다. 어떤 죄의 부분에 대해서는 애통이 있은 후 완전히 돌아서서 해방 되었 지만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은 이라는 아주 애매하게 조목에 매여 끝 없는 궤변을 늘어 놓으시면서 그것이 인간 실존이 아니겠느냐 라고 말씀하실 분도 없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 였던 것에 라는 말을 할 수 밖에 없으며 나야 아직 온전한 신앙생활을 하지 못해서 그렇지만 어떻게 그렇게 한마디로 잘라 말할 수 있느냐 그들의 주석적 이해가 논리적으로는 맞는 것이다 라는 말씀들도 결국 개()의 그러 한 습성에서 비롯되는 반복된 논쟁일 뿐이다. 사실은 그러한 인간의 해결할 수 없는 논쟁의 되풀이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이기에 애통의 과정이 필요하 다는 사실은 결코 기이한 일이 아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자. 여기서 우선 oiJ penqou'nte(애통하는 자)를 살펴보기 전에, 앞서 언급한 tw'/ pneuvmati에 가난한 자를 잠시 상기 해 볼 필요가 있다. 바로 심령이 가난한 자들(편의상 심령이라고 하겠음)은 가난이 어떤 하나님께만 의존하고 구하는 간절한 상태나 태도가 아니라 그야 말로 자기적 요소 즉 자기 의적 요소가 전무한 상태로서 가난이 현실인 자들 은 천국도 미래가 아니라 그들의 현실임을 살펴 보았었다. 그러므로 그것은 과정이라든지 태도가 아니라 천국이 현재인 상태로 사실은 성경의 결론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의 임하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 로 팔복 중 5장 3절은 팔복의 시작이 아니라 결론이며, 사실은 팔복은 복이 여덟가지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복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곧 천 국이 저희 것이라는 복이다. 그래서 팔복은 시종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말씀 하고 계신다.

 어떻게 우리가 가난해 질 수 있는가 다시 말하면 하나님 나라의 임하심이 어떻게 가능한가 라는 물음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가 현재 시제로 임하지 않은 이전의 우리 모습은 어떠한가를 살펴 볼 수 있어야 한다. 즉 심 령이 가난하지 않고 부유한 상태의 모습을 생각해 보시면 될 것이다.

이러한 부유는 철저하게 율법 주의자들에게서 자기 의로 가득찬 모습으로 나 타나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나는 말씀대로, 하나님 뜻대로 이만큼 하였습니 다 라는 것은 바로 말씀이 그에게 법으로 적용되어서 나타났기 때문이며 그래 서 그 흑암으로 부터 해방되려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통로가 있는데 그것은 애통의 과정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애통하려 하고 울부짖으려고 한다. 이게 종교인의 함 정이다. 바로 그와같은 데에 문제가 있다. 그렇게 의지적인 노력으로 해서 되 는 애통이요, 부르짓음이라면 그것은 한가지 더 자기 의만 보태는 결과이지 그것이 애통이 될 수 있는 것이겠는가. 그렇다면 아마도 마음만 먹으면 누구 나 할 수 있는 것일 것이다.

그러기에 이것은 사람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오직 하나님 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다. 우선 성경에서 언제 어떠할 때 애통하게 되는 지를 살펴 보도 록 하자.

 바로 오늘 본문에서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주님께서 마태복음 9장 15절에 말씀하시기를 혼인집 손님(아들들)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 안에 슬퍼(penqei'n)할 수 있느뇨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 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헤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 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 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 되느니라 라고 말씀 하시므로 애통하는(penqevw) 것이 언제 발생하는 지를 잘 말해 주고 있다.

신랑을 빼앗길 때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현상임을 저희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에게 금식과 관련하여 설명하고 계신 것이다.

실제로 신랑을 빼앗기고 난 후 그와 함께하던 자들의 애통해 하고 있는 모습 이 막 16장 10절에 나타나고 있다.

마리아가 가서 예수와 함께하던 사람들의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이 일을 고하매 (막 16:10) 여기서 슬퍼하며(penqevw) 울고 있는 모습은 그들이 따르던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고난 후 애통하며 울고 있는 모습이다.

야고보서 4:8-9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하라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 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높이시리라 라고.

무엇이 저희 즐거움이며 무엇이 그들의 웃음이겠는가. 바로 그 웃음의 요소 즐거움의 요소가 하나님 나라의 임하심을 방해하고 있는 마귀 그 놈이요 그 실체가 그들이 철두철미 믿고 따르고 있는 하나님이며 그들을 주관하며 다스 리고 있는 남편이며, 그들은 그 남편의 다스림을 옳게 받을 적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만면에 웃음을 머금으면서 세상 평안을 만끽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신랑이며 남편이다. 그 놈을 저 흉악한 마귀 곧 인신매매단의 배후 조 종 인물로 생각하는 한 그의 정체는 결코 저희들 앞에 드러나지 않을 것이며 유유자적하게 그들과 한몸을 이룬 사랑스런 남편으로 그들을 언제까지나 주 장할 것이다.

충격적인 한가지 사실 중에 오늘날 추앙을 받고 있는 기독교의 순교자들 중에 서도 사실은 그 남편 그 신랑에게 순교하고서 높임을 받고 있는이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당신은 감지할 수 있겠는가.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를 터인데 그 날에는 슬퍼하며 금식할 것이라던 주님께 서는 그 날이 가까이 다가오자 요한복음 16장 20절에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 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라고 말씀해 주고 계시다. 오늘 본문에 대한 주석이 다 나와 있는 말씀이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왜냐하면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은 요 16:16절의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라는 말씀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 21절에서는 그 신랑을 빼앗기게 되는 애통을 여자의 해산 때의 근심으로 말씀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러기 때문에 애통이 복이 있는 것이지 그렇지 않다면 애통이 무슨 복이 될 수 있겠는가. 바로 새 생명의 출산을 앞둔 예비적인 과정이기 때문에 복이 있는 자요. 그 시기는 아직 출산한 상태가 아니라 바로 그 상태가 지나고 나 서 새 생명이 탄생할 것이기 때문에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는 미래시제를 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 미래의 복이 현실로 이제 미래가 아니라 현재가 된 상태는 바로 5장 3절의 천국이 저희 것인 심령이 가난한 상태의 실현이다.

그렇다면 좀더 구체적으로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른다는 말과 도대체 그러한 때 왜 애통하게 되는가 하는 문제를 살펴 보도록 하자.

신랑을 빼앗긴다는 말은 남편이 죽는다는 말이요 아내는 남편 생전에 남편의 법에 매여서 그의 주관과 지배를 받는 것이 당연할 뿐더러 사실은 죽기 살기 로 그를 순종하고 따를 뿐만 아니라 한 몸이었다(그 남편과 한몸이라는 사실 이 이론적으로가 아니라 생생하게 실감하실 수 있겠는가). 일평생을 의지하고 사랑하며 살던 남편이 어느날 갑자기 죽었다고 가정해 보라.

오늘날은 아내가 죽으면 화장실에 가서 웃는다는 우스겟 말도 있지만, 그같은 어설푼 부부관계가 아니라 참으로 자기와 한 몸인 남편이 죽었다면 그에게 위로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사실 아무리 친근한 사람의 위로의 말도 오히려 그에게 위로가 되기는 커녕 번뇌와 슬픔만을 더 가중시킬 뿐이 다. 무엇이 그에게 위로가 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성경은 그 죽음으로 즉,애통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죽었던 남편 이 죽었다가 새로운 그리스도 남편, 즉 온전한 율법(새 생명)으로 살아 돌아 온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남편 잃은 여인에게 유일한 한가지 위로가 될 수 있 는 죽었던 남편이 살아 돌아오는, 그것도 새 사람이 되어서 다시 품에 안기게 될 것이기에 (복이 있는 것이요,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인 것이다.

이것은 이론도 아니고 어떤 종교적 주장도 아니며 지식은 더더욱 아닌 실제적 십자가 사건이요 천국이 저희 것이기 위한 실제적 개개인에게 일어나야 할 애통의 사건이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 2:19) 돌 하 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마 24:2)

유대교 신앙의 최고 가치 질서인 성전이 헐린다고 생각해 보라.

무슨 살 맛이 나겠는가 아니 순교를 각오하고 사명 의식에 불타서 물, 불 가리지 않고 충성 봉사 하는 그 육체적 신앙, 소위 은혜로 포장된 철두철미한 율법적 보수신앙의 가치체계가 무너진다고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오직 주님 만 위해서 그것이 유일한 소망이었고 그것이 낙이었으며 살만한 이유였는데 그것 때문에 산 그것이 무너진다고 생각하면 무슨 의미로 살 수 있겠는가 말 이다. 그것은 곧 바로 나 자신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죽음은 그렇게 쉽게 말해질 수 있는 간단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 바로 그렇 기 때문에 애통은 인위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역사하심이며 그래 서 맏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맛보셨으며 누구든지 그와 연 합하여 죽는 자는 인 것이다. 이때 비로소 자신이 죽을 수 있는 것이며 여기 서 마 5장 3절의 가난에 이르는 길이 열려 있고 천국이 저희 것으로 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좁고 협착한 그러나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며 , 이 애통의 과정이 로마서 7장까지라면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는 로 마서 8장 이후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의 para klhqhvsontai(파라 클레데손타이)의 명 사형인 paravklhto(파라클레토스)는 우리의 위로자가 되시는 다른 보혜사(요 14:16) 곧 조금 있으면 다시 보게되는 진리의 영이신 새로운 남편 그리스도가 아니시겠는가 아니 그리스도 외에 당신에게 위로가 될만한 그 무엇이 있다 는 말인가 그렇다면 그것은 당신에게 있어서 제거되지 않으면 안 될 그 무엇이다. 왜냐 하면 안타깝게도 그것은 그리스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욥의 고난과 애통 중에는 친구들의 위로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번 뇌만을 가중시킬 뿐이 아니었던가. 다만 번뇌케하는 위로일 따름이다.

오늘 살펴본 애통은 동전의 한면만을 말했을 뿐이다. 나머지는 새로운 차원에 서 한번더 언급해야하지만, 그것은 차후로 미루고자 한다.

김창호 씀 , 여러분의 평안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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