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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산상수훈 강해 3 (마 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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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일반적으로 산상수훈 처음 5:3-12의 내용을 팔복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렇게 일컫게 된 연유야 어떻든 사실 엄격히 따지고 보면 福의 종류는 여 러개일 수 없다. 다만 복에 대한 전달의 방법으로 팔복 또는 구복이라는 여 러 형태의 표현 수단이 동원될 수 밖에 없는 표현상의 다양성은 어쩔 수 없지 만 성경 전체에 도도히 흐르고 있는 복의 내용이 다수일 수는 결코 없다는 말 이다.

죄인인 인간이 어떤 특수한 상황에서가 아닌 본질적인 위로를 받는다는 것이 나 우리의 영원한 처소가 될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거나 긍휼히 여김을 받는다 는 사실, 그리고 희미하게만 여겨지던 하나님을 얼굴과 얼굴을(face to face ) 대하여 보고 온전히 그분을 안다는(ejpigi-nwvskw) 사실은 하나님의 아들이 라 일컫음 받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하나의(동일한) 복이며 천국이 저 희 것인 유일무이(唯一無二)의 복인 것이다.

다만 성경이 그러한 하나님 나라에 이르는 복의 한가지 통로를 이렇게 다양하 게 표현할 수 밖에 없는 것은 다양한 인간을 향하신 여러측면에서의 배려임과 동시에 인간의 언어로는 그것이 둥글다 해야 할지 네모라 해야 할지 하는 표현의 한계 때문일런지도 모른다. 때문에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도 그속에 담겨져 있는 반짝 반짝 빛나는 보석을 다만 이 시대에 내가 살고 있는 부분 적일 수 밖에 없는 편협한 개인의 언어로 이것이 바로 그것이다 라고 밖에 는 다른 방법이 없다. 구도자는 다만 그렇게 저렇게 살아가는 뿐이라는 것이 다. 그것이 얼마큼 순도를 갖느냐에 따라서 제한적인 언어임에도 불구하고 다수가 보편적 개념으로 공유하고 함께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마 5:9에서 중요한 단어는 oiJ eijrhnopoioiv(화평케 하는 자)이다. 대부분 번역성경들이 이 단어를 화평케 하는 자들 Peacemakers 로 번역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간과해서 안 될 것이 oti 이하의 문장이다. oti aujtoi; uiJoi; qeou' klhqhvsontai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여기서 우리는 생각해 볼 일이 하나 있다. 도대체 누가 화평케 하는 자들 (Peacemakers)이 될 수 있는가 그것은 자명하다. 화평한 자만이 화평케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자기 코가 석자나 빠진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 을 돌본다고 나설 수 있는가 자신의 가정이 화평치 못하면서 다른 사람의 가정에 화평을 말할 수는 없다. 전쟁광이 평화의 중재자가 된다는 것은 제스 처로는 가능할지 모르나 도무지 불가능하다. 백합꽃이 백합향기를 발하는 법 이요, 가시나무가 포도열매를 맺을 수는 없다. 오늘날은 가시나무가 가시나무 더러 포도열매를 맺으라고(알고보면 그 열매도 가시나무 열매이지만) 열변을 토하고 있으니 그 상황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자, 그렇다면 누가 과연 화평케 할 수 있는 Peacemakers 가 될 수 있는가

그는 우리의 화평(eijrhvnh)이신지라 (엡 2:14) 그는 평강의 왕 (사 9:6)이시며 우리의 화평 이시다. 그러므로 평강 의 왕 이신 그리스도만이 Peacemaker 가 본질적으로 가능하다. 동시에 단수 Peacemaker 와 하나가 된 자들, 곧 그와 연합하여 화평을 이룬 자들 만이 화평케 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게 된다는 것이다. 가시나무에게 포도열 매를 맺으라고 아무리 강조해도 그리고 맺고싶어도 그것은 본질적으로 불가능 한 것처럼 화평케하는 것이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 이미 자신이 화평을 이룬 자가 아니고서는 도무지 그림의 떡이다.

그러므로 Peacemakers 는 누구만이 가능한가 하면 이미 화평을 이룬 자, 즉 하나님의 아들 이라고 일컬음을 받고 있는 자만이 비로소 가능하다.

 그렇다면 다시한번 생각해 보자.

oiJ eijrhnopoioiv 가 어떤 자들을 말하는 것이겠는가 여기서 하나님 의 아들이라고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klhqhvsontai 동사 직설법 미래 수동 태) 는 현재 이루어진 상황이 아니라 이제 oiJ eijrhnopoioiv에게 주어질 앞 으로의 상황이다. 그러므로 oiJ eijrhnopoioiv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 을 받기 이전의 어떤 상황에 있는 자들임이 분명하다. 이것은 결코 억지 논 리일 수가 없다. 오히려 화평케 하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라고 하는 번역이야말로 성경의 큰 흐름 과 줄거리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번역이다. 번역자들이 결코 그러한 의도로 번역한 것은 아닐 터이지만 본문에의 원문에 대한 정확한 의미가 도무지 가리 워져 있기 때문에 그렇게 밖에는 번역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번 따 져보자. 의도야 어떻든 번역문장을 그대로 놓고 헤아려 보자는 이야기다.

oiJ eijrhnopoioiv를 Peace-makers 로 이해를 해야 한다면 어떤 중대한 모 순에 직면하게 되느냐 하면 Peacemakers 들의 행위의 결과가 하나님의 아들 이라고 일컬음 받을 수 있는 원인적 행동이 된다고 하는 논리에 빠지게 된다. 그것은 곧 Peacemakers 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조건이 되는 것 이다. 이러한 엄청난 모순이 숨겨져 있는데도 어물쩍 넘어갈 수 있겠는가

이러한 성경구절을 대충 은혜스럽게() 넘어가서는 안된다. 조금이라도 어색 한 앙금이 있으면 짚어보고 물어보며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eijrhnopoioiv를 Peacemakers 로 번역하는 것에 이의를 두 고 싶다.

오히려 eijrhnopoioiv는 Peace-makers 가 될 수 있는 선행적인 준비자들을 나타내주는 개념이다. Peacemakers 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일컬음을 받 은 연후에 당연하고도 자연스럽게 맺혀질 열매이다. 참감람나무에 接붙임을 받았으면 돌감람 열매를 맺고자 몸부림을 쳐도 이제는 그것이 오히려 불가능 한 것과 같다. 참감람 나무가 되었으면 태풍과 병충해의 피해로 인해 주렁 주렁 맺히지 못하고 겨우 하나의 열매만 맺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수많은 열매를 맺고 있는 돌감람 열매와 비교될 수 없는 참감람 열매인 것이다. 그 렇듯이 Peacemakers 의 삶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 받은 연후의 삶인 동시에 그들의 신분이다.

그러면 이제 eijrhnopoioiv를 어떻게 새겨야 할 것인가 나는 우선 우리말 번역에서는 화평케 하는 자들 보다도 화평을 이루는 자가 더 적절하다 고 본다. 물론 그 의미는 개개인의 내적인, 안에서 이루질 개념으로 이다.

어떻게 화평을 이룰 수 있으며 화평케 될 수 있는 복있는 자인가 그리고 화평은 무엇으로부터 누구와의 화평인가 또한 화평의 참된 의미는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eijrhvnh의 헬라적 개념은 여러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의미하기 보다는 끝없 는 전쟁의 와중에서의 막간(interlude)으로 순수하게 되어지는 평화의 상태 (state of peace) 라 한다.

전쟁은 기본적으로 두 존재의 의견 불일치에서 시작된다. 서로의 이해가 다 를 때, 그리고 그 의견이 팽팽히 대립될 때 발생한다. 그러나 그 이해가 일 치될 때 전쟁원인은 소멸하게 되므로 평화가 이루어진다. 물론 그것은 일시 적인 평화요 언제든지 두 존재의 의견이 대립되면 다시 발발할 가능성은 계속 해서 상존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화평은 서로 팽팽히 대립하고 있는 두 김씨의 타협으로 인한 일시적 위기극복이 아니다. 상호적절한 정도에서의 양보도 방법이 아니다.

이 모든 것은 세상에서 사람들 사이에 일어나는 임시방편의 응급조치들일런 지는 몰라도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 (엡 2:15)은 그러한 방법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우리의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안에 있는 원수를 제거해야 한다 . 우리 속에 거하는 죄는 곧 나 자신 이라는 사실이다. 마귀는 다른게 마귀가 아니다. 마귀와 하나인 내속에 거하는 그 나가 원수요 그 나 가 아무리 원수야 물러가라 소리쳐도 그 원수는 더 강하게 살아날 뿐이다.

성경적 화평의 방법은 타협에 의한 일치(reconcilication)가 아니라 다음과 같은 방법이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 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 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 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엡 2:14-18) eijrhnhpoiov는 바로 위와 같은 말씀에 잘 나타나 있다. eijrhvnh가 하나가 되는 것이라면 그것을 위한 poivew는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는데 있다 . 거기서 진리와 하나됨, 곧 하나님과 화목이 이루어질 뿐더러 화평이 가능 해지는 것이다. 이때야 비로소 초막도 상관이 없고 궁궐도 상관이 없는 존재 가 될 터이니 그 안에서 다투고 있던 전쟁이 사라지고 비로소 하나님의 아 들(uiJoi; qeou') 이라 일컬음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eijrhvnh+poivew의 합성어인 eijrhnopoiov의 poivew는 여기에서는 적어도 다른 이들을 화평케 하는 그것에 촛점을 맞출 수 없다는 것이다.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는 것이 화평을 위한 poivew이니 원수된 것이 사 라져 버리고 나면 자연히 육신의 생각과 더불어 사망이 사망해 버리고 영의 생각이 지배할 터이니 생명과 평안이 자리잡게 되는 것이다.

eijrhnopoiov가 유일하게 성경에서는 마 5:9에 한번 쓰이고 있기 때문에 그 개념에 대한 이해가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이 단어에서 파생한 동사가 eijrhnopoievw로서 골로새서 1:20에서 사용되고 있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eijrhnopoihvsa dia; tou' aimato tou' staurou' aujtou')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골 1:20)

여기서도 화평의 방법은 그의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아 인 것이 잘 나타나 있다. 악한 행실 속에 있는 마음에 원수를 그의 죽음으로 화목케(ajpokata llavssw) 하심인 것이다. 그러므로 eijrhnopoivew는 ajpokatallavssw와도 밀 접한 관련이 있는 개념이다.

여기서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이러한 화목을 이룬 사람의 당연히 나타나고 이룩될 삶의 외적모습을 잘 말해주고 있는 야고보서의 어휘선택과 표현방법 이다.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karpo; de; th' dikaos uvnh ejn eijrhvnh/ speivretai toi' poiou'sin eijrhvnhn) 원문을 직역해 본다면 화평안에 있는 의의 열매가 화평을 행하는 자들에 의해 심기워진다 라고 할 수 있다.

마 5:9와 골 1:20은 eijrhvnh와 poivew를 합성하여 쓰고 있는 반면 야고보서 는 곧바로 poivew를 eijrhvnh를 목적격으로 취하는 타동사로 쓰고 있다. 단 순히 야고보의 필체 또는 표현어법의 독특성 때문이라고 해야 할까. 물론 표 현이야 하나의 의미를 한 단어로도 할 수 있고 구(句)로도 할 수 있고 절(節 )로도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번 쓰이지 않는 개념이 합성어로 표현된 곳과 문장의 형태로 기술된 것은 자못 흥미롭다.

이것은 이렇게도 생각이 가능하다. 우리말에서도 돌과 다리가 합하여 돌다 리 라는 두개념의 의미를 담고서 복합어의 독특한 한 개념을 지닌다. 그와 같이 toi' poiou'sin eijrhvnhn과 이 두 단어의 합성어인 eijrhnopoiov와 eijrhno-poievw의 의미는 명백히 뉘앙스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고 본다면 아 전인수가 될 것인가 그 뉘앙스의 차이를 필자는 앞에서 언급한 oiJ eijrhnopoiov는 바로 toi' poiou'sin eijrhvnhn이 될 수 있기 위한 앞선 과정이요 후자에 대한 영역이 for those that make peace 라고 되겠지만 이것을 한 단어로 표현해 볼 수 있는 단어가 오히려 화평케 하는 자들 인 Peacemakers 할 수 있다고 보고 싶은 것이다. 물론 이것은 사적인 견해요 추론이다.

또한 oiJ eijrhnopoiov 에 대한 영역에 있어서 적절한 어휘를 선택하기란 쉽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Peacemakers 라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 나 어휘선택의 제한 때문이라면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우리 번역성경이 말하 고 있는 화평케 하는 자들 의 의미로 새겨진다면 그것에는 반대하고 싶은 것이다.

 화평을 이루는 자들(oiJ eijrhno-poioiv)은 복이 있다. 그러나 그 화평을 이 루기 위해서는 한몸되어 애지중지 지내던 원수를,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로 진멸해야 한다. 남편이 죽어야 새로운 남편에게 시집간다. 태어날 때부터 아담안에서 남편이던 세상체제가 무너지지 않으면, 그것도 돌 위에 돌 하나라 도 남기지 않은채 파괴되지 않으면 진리와 한몸을 이룰 수가 없다.

그러나 oiJ eijrhnopoioiv는 복이 있나니 그 화평을 이루는 과정에서는 고아 와 같이 버림받은 것같기도 할 터이요. 그동안 쌓았던 자기 성의 무너져 내 림이 고통스러울 것이지만 그것은 잠시 잠깐이면 된다. 그것이 성경의 약속 이요, 제자들을 앞에 두고 직접하신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요 14:18)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 워하지도 말라 (요 14:27)

이러한 말씀들과 마 5:9은 조금도 다를 바가 없는 말씀이다. 비록 화평을 이 루는 과정은 십자가의 고통이 있을지라도 근심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은 조금 있으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조금 있으면 그분의 평안이 주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는 더이상 고아로 버려져 있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니(klhqhvsontai) 참으로 복있는 자들임이여! 김창호씀 추신:이 글을 썼을 때와 지금 올릴 때의 생각이 조금 달라진 부분이 있습니 다만, 수정을 하고 올리는 것보다는 그래도 이 글을 썼을 때의 분위기를 유지 하는 것도 듯해서 그냥 올립니다. 화평을 누리시며, 화평케하는 이들 이 모두 되기를 기원합니다.

 산상수훈10(핍박에 관하여)

핍박을 받은 자와 받는 자 마 5:10-12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 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 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 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5:10의 핍박을 받은 자는 두말할 나위없이 지금까지 살펴온 바대로 5:4-9까지를 다시 요약해 주는 말씀에 다름 아니다. 우리는 마 5:3의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라는 현재 시제로 이루어짐이 모든 인간의 참된 복임과 그것 은 심령이 가난한 자들의 것임을 살폈다. 또한 심령이 가난케 되는 길이 도 대체 어떻게 가능한지, 즉 그것은 사람의 원함이나 의지를 가지고 이루어 지 는 것이 아님을 팔복의 각각의 경우를 묵상해 보면서 여기까지 왔다. 인간의 원함이나 노력에 의해서 하나님 나라가 임할 수 없다는 것은 일반 신학이나 교회에서는 너무나 익히 말해지고 있는 부분들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모든 기독교인들, 아니 종교인들은 그것은 하나의 교리적 개념으로만 갖 고 있을 뿐 실제의 모습은 정반대이다. 거기에 비극과 함정이 있는 것이다.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 교리가 꽉 박혀 있기 때문에 현재 자신의 신앙생활 이 믿음의 행위인줄 알고 있는데에 문제가 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의 열심과 열정으로 하나님 나라를 끌어 내리 려고 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열심히 믿는다 는 말은 믿지 못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믿음에는 열심 이라는 수식어가 필요가 없다.

믿음이면 믿음이고 아니면 아닌 것이지 열심히 믿는다 는 말은 또 무엇 인가 그것은 믿음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열심이라도 내어보 면 믿는 제스추어라도 될까 싶어 그러고 있을 뿐이다.

하나님 나라의 임하심은 그러한 인간의 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기에 애 통이 필요한 것이고 온유와 그리고 목마름과 긍휼함과 마음의 청결, 그리고 화평에 이르므로가 필요한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은 자신이 일구어 놓은 그 모든 열심과 스스로의 의로움으로부터 벗어남이요 비로소 가난함 이요, 천 국이 저희 것이기 위한 과정일 따름이다. 그러한 과정, 그러한 용광로를 통 하지 아니하고서는 결코 자기 義라는 도성으로부터 헤어나올 수가 없다. 인 간은 義가 없이는 결코 살 수 없는 존재자로 피조되었다. 아무리 보잘것이 없는 인간이라고 자신을 생각하는 사람도 그 보잘것 없다고 하는 義 가 있 기 때문에 현재 살 수 있는 힘이 있는 것이요, 존재의 의미를, 살만한 이유를 갖는 것이다.

그러한 인간이 종교성이 발현되고 종교와 만나고 나면 자신의 義가 더욱 견고 하게 놓아져 간다. 더우기 믿음 을 강조하고 인간의 의가 아닌 신의 의 로 살아야 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기독교일찐대 믿음 이라는 개념속에 자기의 의를 살짝 숨겨놓고 열심히 자기 의를, 자기 행위를 기세 당당하게 쌓아가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실상이다. 행위로 구원 받을 수 없다 는 바 울의 고발에 대한 지식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이제는 행위로 구원받을 수 없다 는 그러한 지식마저도 자신의 한 행위의 일부로 작용하고 있다.

교리나 지식의 맹점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교리나 지식이 잘못됐다거 나 틀린 것이 아니라 그러한 지식과 교리가 자신을 속게하는 요소로 작용할 뿐더러 한걸음 더 나아가 자신의 크나큰 義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열 심히 행위하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라. 그들은 행위로 구원 받을 수 없다는 사 실에 대해서는 더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자기 義에 獵.

누구나 구원받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길이 좁고도 협착한 것은 바로 이러한 까닭이다. 자기 義를 가지지 아니하고는 한시라도 살 수 없는 인간 이 그러한 자신의 義를 포기하는 데에는 자신의 노력과 의지를 가지고는 불가 능하다는 것이다. 자기 의지와 노력으로 가능하다면 그것은 더 큰 자기의 의 일 뿐이다. 그래서 이러한 철옹성으로부터 탈출구가 마련되어 있으니 그것이 곧 복된 소식이요,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요,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복 중의 복이요, 하나님 나라의 임하심의 비밀이 담겨져 있는 팔복인 것이다.

그래서 결국 의를 인해서 , 혹은 의 때문에(eneken dikaio-suvnh) 핍 박을 받은 자는(oiJ dediwgmevnoi) 인 것이다.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더우 기 그 원문을 살펴 보면서 그 문장의 구성이나 시제 등이 얼마큼 사려깊고 세 심하게 되어 있는지는 볼수록 새로우며 감탄할 수 밖에 없다.

5:3의 종속절(oti 이하)의 시제는 현재 시제요, 능동태로 되어있고 4절부터 9절까지의 종속절은 미래시제요, 10절은 또다시 현재시제를 쓰고 있다. 또 한 10절의 oiJ dediwgmevnoi는 그 시제가 완료분사이다. 핍박을 받은 자 는 인 것이다. 그러한 자들은 현재 시제로 천국이 저희 것이라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지금까지 4-9절을 다시 한번 정리해서 함축한 표현이 의를 인 해서 핍박을 받은 자들(oiJ dediwgmevnoi eneken dikaio-suvnh)은 인 것이 다. 즉 4-9절이 완료된 자들은 비로소 하나님 나라가 미래시제가 아닌 현재 시제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eneken(헤네켄)을-위하여 라고 번역한 것 은 오역중에 오역이다. 이쯤되면 아마도 독자들께서는 왜 오역이 될 수 밖에 없고 또 번역자들이 그렇게 번역할 수 밖에 없었는지 짐작이 되실 것이다.

아직도 자신이 무엇인가 의를 위해서 참으로 의롭게 핍박을 받을 수 있고 그 러할 수 있는 존재라는 사고가 그렇게 번역하도록 작용했을 것이다.-위하 여 가 되기 위해서는 uJpevr(휴페르)라는 전치사가 쓰였어야 하지만 여기서 는 엄연히 eneken을 쓰고 있다.

어떻든 10절에서 왜 핍박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다고 하시는지는 더이상 설명이 필요없을 것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핍박이다. 다른 표현을 해본다 면 자기 義 라는 이제까지 안주하고 머무르고 있던 그 집과 농사짓던 전토 가 그리고 그 세상의 지배원리이며 하나요 한몸이던 남편이 무너지고 떠나가 면서 발악하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세상의 가치체계가 박살나면서 겪 는 혼돈과 무질서 그리고 고통들이 4-9절까지요, 그것이 완료된 상태가 바로 5:10이니 죄와 사망의 법이 무너지고 생명의 성령의 법이 지배하는 새 예루 살렘의 재개발이 이루어지는 장면이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 의 실체가 바로 이것이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 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 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인하여) 제목숨을 잃으면 찾으리 라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제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 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 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대로 갚으리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중에 죽기전에 인자가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 느니라 (마 16:24-28)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는 것이 바로 열심으로 나타나는 자기 의요, 그것이 믿 음인 줄 알면 곤란하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신앙생활이 내목숨을 구원코자 함이 아닌지 살펴볼 일이다. 자식 잘되고 사업 잘되기를 위해서 기도하는 행위들은 물론이려니와(사실 그러한 것은 논할 가치도 없지만 오늘날은 지나 치게 그러한 것이 팽배해 있고 널려져 있으니 ) 종교적 규례나 금욕의 생활 들이 모두 자기 목숨을 구원코자 하는 행위들인 것을 속히 깨닫고 알아야 할 일이다. 그러한 것이 하나님 나라를 대적하고 거부하는 행위로 작용한다는 사실 등은 왜 알지 못하는지 안타까울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해악을 보면서 지적하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들의 직무유기 아닌가).

이 모든 것들은 결국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함이다. 잘먹고 잘 살려는 것만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함이 아니요, 신앙생활 잘해보려고 열심 충성, 봉사하는 것 도 제 목숨 구원하려는 것이니 성경은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아 보자는 것에 대해서 질타할 뿐만 아니라, 목숨 내걸고() 제 목숨 살려보겠다고 열심내는 그 열심신앙을 질타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 때문에(eneken)가 아니요 자기의 의를 위하여(uJpevr) 하는 신앙생활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기를 부인(否認)하고 와는 상관이 없는 행위이다. 사실 팔복의 복음은 자기 십 자가를 지고 주를 좇음이 무엇인지와 그 성취과정을 상세히 말하고 있다. 이 것이 아들의 믿음이다. 그래서 핍박을 받은 자 는인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이 부인(否認)되는 과정이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좇는 일이기 때문 이다.

 의를 인하여 핍박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5:11-12의 말씀을 살펴보자.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 을 할 때에는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 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어떤이들은 10절과 11절을 하나의 복으로 보고 전체를 팔복이라 하기도 하고 11절을 10절과 구분하여 구복으로 보려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구분 들과는 상관없이 5:3-10까지가 內的 形象의 하나님의 자녀를 빚어가는 과정이 라면 이제 5:11에서 16절까지는 그러한 천국이 저희 것인 사람들의 당연히 나 타나고 이룩될 삶의 외적 모습을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외적 현상들은 팔복 의 내용들을 역동적으로 강화시켜 주고 확인시켜 준다. 팔복의 내용이 로마 서의 내용이라면 5:11-16까지는 야고보서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손바닥과 손 등의 관계와 같아서 별개가 아닌 하나이다.

생각해 보시라. 투우사의 격전장과 같은 현실에서 도 를 말하는 것은 적 어도 세상의 사고에 젖어 있는 이들의 눈에는 미친놈 으로 보임이 당연하 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도 적절치 못한 것은 단순히 미친놈 정도로 치부되고 말 정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십자가의 도는 적어도 팔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 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이 던(빌 3:5-) 사울에게 있어서는 참을 수 없는 이단 사설이요 그냥 놓아두었다 가는 열심이 식어버린 믿음없는 자가 되고 말아버릴 터이니 예수의 도를 전하 는 스테반을 돌로 치는데에도 앞장설 뿐더러 그의 죽임당함을 마땅히 여기는 것처럼 그러한 이들에 의해서 욕과 핍박과 악한 말을 듣는 것은 당연하다.

자기에게 유익한 것을 위하여는 무엇이든지 물불 가리지 않고 하는 자들을 향하여 십자가의 도를 전하고도 욕을 안듣고 돌을 안맞으면 잘못 전했든지 대 상이 잘못되었을 것이다. 자기에게 유익한 것이라고만 하면 집팔아서 헌금하 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요, 새벽기도 금식기도는 물론이요, 목숨도 자기의 유 익을 위해서는 기꺼이 바칠 수 있는 순교자를 자처하는 이들에게 그 모든 것 들은 당신을 망하게 하는 것들이니 그런 것들로부터 속히 돌아서시오. 그것 은 당신의 의일 뿐 하나님의 의가 아니라고 말하면 그들에게서 날아올 것은 돌밖에 없다. 어떤 돌인가 예루살렘 성전을 쌓고 있는 돌, 율법에 흠이 없 이 순종하려고 하는 그 법, 이제까지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자기식 말씀의 자기성 (城) 건축자재인 그 돌들이 날아들지 않는다면 되레 이상한 일이다.

그것은 예전의 내 모습이요, 바울이전의 사울 모습이며 그 싸움은 내 안에 서도 얼마나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되었었던가. 차라리 외적 환경의 압박은 아무것도 아니지 않던가 그 전쟁이 평정되던 날 그리고 자신의 버둥대던 그 것이 사라지고 주의 영토요 소유된 백성이요 그의 주권이 지배하던 날, 더 이 상 꿈틀거리던 녀석이 죽어버린 날은 어눌한 말 몇마디로 표현이 불가능하리 라. 그러기에 능히 돌을 던지는 이들이 무엇을 가지고 돌을 던지는지는 충분 히 알고도 남는다. 그것은 이전의 바로 나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그러한 일들이 있거든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인 것이다. 왜 하늘에서 너 희의 상(misqo;)이 크기(polu;)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전에 있던 선지자 들도 그렇게 핍박하였다는 것이다.

여기 상급(misqo;)에 대해서도 이를 말이 참으로 많지만 지면 관계상 간단히 한다.

상급에 대한 잘못된 교리가 가져다 주는 폐해와 그러한 오늘날의 기독교에 대 해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당신에게는 무엇이 상급으로 주어졌으면 좋겠는가

나를 인하여(eneken ejmou')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 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왜 복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 그것은 5:3-10까지의 복이 임한 자에 게만 비로소 가능한 외적현상이다. 그것은 억지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말 몇마디 실수해서 얻어먹는 욕이 아니라는 말이다. 자기 행위의 실수로 받 는 비난은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가치체계의 극한적 대립상황에서 생기는 그들의 저항이요 반발이며 자신의 체제 유지를 위한 몸부림에서 생기는 핍박 이다. 이 말은 달리 말하면 자신이 그 세상체제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말해줌 과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임함의 외적 표징이기도 하기 때문에 기뻐하고 즐거 워할 일이며 그것이 곧 상급인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자신을 계시하시기를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창 15:1)

우리의 상급은 결코 하나님 자신 외에 다른 것이 되어서도 안되고 될 수 없다 . 그것이 새언약의 성취요 한몸의 원리이다.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계 21:7)

우리의 진정한 면류관은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 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계 3:12)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로 지어져서 그의 소유된 백성과 땅이 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가장 큰 상급이다. 신부가 신랑외에 다른 것을 바라는 것은 창기적 속성을 그대로 나타내는 것이다. 창기는 남자외에 금품을 바라는 것이 상례 이지만 오늘날은 세상의 결혼 풍속도나 교회안에서의 결혼풍속도가 신랑이나 신부 자신보다도 열쇠고리에 더 관심이 있으니 어찌되려는지 . 그래서 하 나님은 오늘도 정결한 처녀를 찾아 예루살렘 거리를 방황()하고 계신다.

 산상수훈11(소금과 소금언약) 소금과 소금언약 마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복은 하나님의 의로 덧입혀지는 과정이요, 그와 동시에 인간의 하나님을 향하 여 높아져 있는 모든 대적의 요소들이 허물어지는 과정이었다. 그것은 하나 님을 충성스럽게 섬기고자 하는 신앙의 열심까지도 포함해서 도대체 인간의 의로는 어쩌지 못한다는 절대적 절망의 벽에 부딪힌 연후 자신이 포기되어지 고 하나님의 의로 의롭게 되는 모습이다.

이제는 모든 선진들이 그러했듯이 그 의를 인하여 살며 그 의를 인하여 그와 대립적인 위치에 있는 자들에게 욕과 핍박과 모든 악한 말을 듣게 되는 것은 생리적으로 당연한 福人들의 삶인 것이다. 그것은 빛에 대한 어두움의 항거 요, 그리스도에 대한 벨리알의 대적인 까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이 福人들의 신분에 대해서 그 어떠함을 확실하게 기술해 주고 있다.

 Umei' ejste to; ala th' gh':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Umei' ejste to; fw' tou' kovsmou.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여기 기술된 표현을 보면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같고 빛과 같다 는 식의 직유법이 아니다. 너희는 소금이요, 빛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소금과 같은 존재요, 빛과 같은 존재라는 표현이 아니라, 소금이요 빛이라는 것이다 .

여기서의 너희 는 팔복의 성취자임은 물론이요 의를 인하여 살고 있는 나 를(ejmou') 인하여 사는 자들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겠다. 그래서인지 여기서 Umei'(너희는)는 흔치 않게 대문자로 시작되고 있다. 바로 그러한 대상 향하여 소금이요 빛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주석가들과 설교가들이 위의 말씀을 예수께서 그리스도인의 특성을 소금으로 비유하셨다고 한다. 그러기에 소금이 맛을 내며 또한 방부제로 쓰 이듯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서 이 세상을 윤택하게 하고 부패하 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들 한다. 그러나 그러한 설명은 아주 그럴듯한 것은 사실이나 그러한 식의 성경해석 방법은 매우 조심해야 한다. 결국 그러한 해 석의 결론은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소금의 역할을 충실히 해야한다는 쪽으로 내려진다. 설교가나 주석가 자신도 질 수 없는 무거운 짐을 대상들에게 잔 뜩 지워주는 것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너희는 소금과 같은 존재이니 소금의 역할을 하라고 성경은 말한적이 없다. 다만 성경은 너희가 소금이다 라 고 말씀하고 있을 뿐이다. 소금은 당연히 소금 역할을 하게 되어 있고 할 수 밖에 없다. 존재가 소금이지 역할을 소금처럼 하라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이 다.

그런데 문제는 이 소금이(to; ala) 맛을 잃게 되는(mwranqh'/) 경우가 있 으니 그것이 경계해야될 부분이요, 그러하면 무엇으로 짜게 할 수 있겠느냐고 하는 반문이다. 맛 잃은 소금은 무가치할 뿐만 아니라 밖에 버리워 사람들 에 의해 밟힐 뿐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소금이 맛을 잃는다는 것은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는다.

소금이 맛을 잃다니 맛을 잃은 소금이 있을 수 있는가 어떻게 보면 그것은 도무지 불가능한 것같다. 그러나 유대의 소금은 석염(石鹽) 곧 돌소금을 사 용하기 때문에 수리아나 팔레스틴 지역에서는 맛을 잃은 소금이 땅바닥에 버 려져 이곳 저곳에 쌓여 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고 한다. 더구나 성경의 소금인 너희 는 얼마든지 맛을 잃어버릴 수 있기에 오늘 본문과 같은 표현 이 가능한 것이다. 물질적 소금이 성경의 소금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런지 는 모르지만 성경의 소금은 성경의 소금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마찬가지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고 할 때도 동일하다. 성경에서 말하는 빛은 성경 의 빛이요, 물질적인 빛의 그것과는 다른 것이 분명하다. 물론 성경의 빛에 대한 그림자적 성격으로서 또는 자연계시의 성격으로서 물질적인 빛은 진리 의 보충적 계시 성격을 띄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림자와 실체는 엄연히 다르다 . 그러므로 물질로서의 소금은 다분히 보충적 진술의 성격은 지닐 수 있어도 비유로서 등장되는 것과는 그 의미가 다르다는 것이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 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 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여기서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라고 할 때 빛 을 비유라고 말할 수 는 결코 없다. 그것은 해와 달과 별과 같은 물질적 빛의 개념으로 보충적 설 명을 한다 해도 오히려 성경에서 말하는 빛의 진정성을 왜곡할 뿐더러 그 본 질을 훼손할 우려가 매우 크다 할 것이다. 비유는 비유로서의 본래적인 의미 전달의 가치가 있지만 존재의 직설적 진술을 비유로 이해할 때, 오히려 그 진 술의 참의미를 상실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실피고 있는 본문의 경우가 그렇게 취급되기 쉽다. 앞서 말한 것처럼 실제로 그러한 일이 많은 이들에 의해서 쉽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우리가 살펴야 할 일은 소금의 화학적 성격과 그것의 역할 을 방부제 의 성격이 어떻고 하는 식으로 접근하기 보다는그것은 성경으로 부터 말씀을 듣고자 하기 보다는 그 본문에 자기의 의미를 주입해서 설명하고 적용하려는 자기식 성경이 되어버리고 만다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그것에 귀 를 기울여 보아야 할 것이다.

 ala(할라스)를 쓰고 있는 성경 본문은 그렇게 많지 않다. 우선 신약성경에 나타나고 있는 경우를 보도록 하자.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서 소 금 치듯함을 받으리라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 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막 9:48-50)

여기서 소금은 심판적 상황의 묘사와 동시에 화목의 요소로서 사용되고 있다 . 소금의 맛은 짜게 하는 것이요, 그 짜게하는 맛은 화목과 관련지어서 쓰여 지고 있는 것이다. 이 말씀은 어떻게 보면 무서우리 만큼 전율을 느끼게 하 는 말씀에 이어서 나오는 말씀이다.

 네 손이 너를 범죄(실족)케 하거든 찍어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실족케)하거든 빼어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거기는 구더 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마 9:43-48)

이 말씀을 다시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 바로 앞에는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바다 에 던지움이 나으리라 라는 말씀도 있다. 이 소자중 하나 가 어느 사이 네 손이 너를 로 바뀌면서 말씀이 전개되고 있다.

너의 그 손이(hJ ceivr sou) 너를 실족케(skandalivzh/ se)하거든 그것을 찍어버리라 두손을(duvo cei'ra) 가지고 지옥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네가 불 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나으니라(kalovn) 문제는 항상 두손(duvo cei'ra), 두발(duvo povda), 두눈(duvo ojfqalmouv )에 있다. 항상 두손, 두발, 두눈이 싸우고 끊임없이 괴롭힘을 더하게 하여 실족하게 하는 것이다(skandalivzw). 그러므로 해결책은 그 손(hJ ceivr)을 찍어버려야 하며 그 발(oJ pouv)을 찍어버려야 하고 그 눈을(oJ ojfqalmov ) 빼어버려야(e[kballw) 한다. 왜냐하면 한손(불구자), 한발(절뚝발이), 한 눈(monovfqalmon)이면 전쟁이 필요없을 뿐더러 실족할 일이 없을 터이니 말이 다.

너희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두손 두발 두눈이 화목하는 길은 미봉책으로는 되지 않는다. 이들이 화목하 는 길은 적당한 방법이 도무지 없다. 단지 유일한 하나의 길은 불구자가 되 는 길이요 절뚝발이가 되는 길이며 외눈박이가 되는 길 밖에는 도리가 없다.

임시 미봉책은 언제나 그러하듯 다시 터지게 되어 있고 그것은 불로서 소금 치듯함을 받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전쟁의 와중에서 불구자가 되지 못하고 절뚝발이와 외눈박이가 되지 못하고 잘라져 나가던 손과 발, 눈을 붙잡으려던 한 많은 여인이 롯의 처 요 그것 을 못내 아쉬워하며 끊어버리지 못해 영원한 소금기둥으로 심판의 대명사로 오늘도 남아있는 여인이 바로 롯의 아내 인 것이다. 소금으로 맛을 낼 일 이지 소금기둥이 될 일이 아니다.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유사한 말씀이 누가복음 14장에도 나오고 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 하리라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었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 리요 땅에도 거름에도 쓸데없어 내어버리느니라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 다 하시니라 (눅 14:26-25)

무엇이 소금 기둥인가 맛잃은 소금이 어디에 버려질 것인가 그것은 롯의 처로부터 시작된 역사가 계속하여 반복되고 있으니 맛을 내지 못하는 소금이 소금 돌 무더기 위에 버리워지면 기둥 밖에 더 되는가 오늘날 팔레스틴 지 역에도 이렇게 버리워진 돌무더기 소금기둥은 흔하게 볼 수 있단다. 그 기둥 의 시초는 롯의 처로부터 시작된 것이지만 . 때로는 길거리에 내버려져 사 람들에게 밟히기나 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들을 귀가 있는 자만이 들을 수 있는 말씀이다.

소금의 맛, 화목케 되는 길은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버리라는 그것에 있다.

그렇지 아니하면 능히 그의 제자가 될 수 없으니 이것은 구약에 나타나는 소 금 언약에서 확실하게 증거된다.

 구약에서 사용 사례를 살펴보자.

히브리어로 소금은 hl'm,(멜라흐)이다. 명사형으로는 27회 정도 쓰이고 있고 동사로(hl'm;, 말라흐) 4회, hl'm](믈라흐) 형태로 3회 쓰인다.

주로 심판과 관련해서 롯의 처의 경우(창 19:26)가 그렇고 언약과 관련된 제 물에서 쓰이는 경우가 자주 나온다(레 2:13, 민18:19, 대하13:5, 겔43:24).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 (레 2:13, 겔 43:24 참조)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모든 성물은 내가 영영한 음식으 로 너와 네 자손에게 주노니 이는 여호와 앞에 너와 네 자손에게 변하지 않는 소금 언약이니라 (민 18:19)

이렇듯 소금(hl'm,, ala)은 구약에서 언약에 대한 결정적 표현으로 등장되 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하나님의 언약은 제한된 시대에 특정인에 한정하여 세워진 것만은 아니다.

모압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세우신 언약의 말씀에서 언약의 분명한 목적과 적용대상을 알 수 있다.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대로 오늘날 너를 세워 자기 백성을 삼으시고 자기는 친히 네 하나님이 되시려 함이니라 내가 이 언약과 맹세를 너희에게만 세우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우리와 함께 여기 선 자와 오늘날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한 자에게 까지 니 (신 29:13-15)

이 언약의 성취는 분명하게 축복과 저주가 동시에 이루어진다. 언약의 말씀 을 따라 행한 자는 그의 백성이 되며 또한 하나님이 그의 하나님이 되시지만 그와 반대편에 있는 자는 율법책에 기록된 언약의 모든 저주(詛呪)대로 그에 게 화가 미치게 되어 있다. 이때 저주의 내용 중에는 그의 땅이 소금 땅이 되며 불에 타서 심지도 못하며 결실함도 없으며 거기 아무 풀도 나지 아니하 는 저주도 들어있다.

도대체 소금 언약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는가 더구나 이미 팔복의 성취 자인들인 너희는 세상의(th' gh') 소금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무엇을 이름 하겠는가 사사기 9 45절을 살펴보자.

사사들 중에서도 유명했던 기드온이 많은 아내를 거느리고 그중에서 세겜에 있는 첩을 통하여 낳은 자가 아비멜렉이라는 자였다. 그는 스스로 지배자가 되려하여 이복형제중 요담외에 70인을 한반석위에서 죽이는 희대의 끔찍한 살인극을 벌인다. 또한 그를 반대하는 무리들에 대한 살육을 서슴치 않는 장 면이 사사기 9장에 보도되고 있다. 그중 45절을 보면 아비멜렉이 그날 종일토록 그 성을 쳐서 필경은 취하고 거기 있는 백성을 죽이며 그 성을 헐고 소금을 뿌리니라 라고 하는 기사를 볼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엿볼 수 있는 것은 성경에서 나타나고 있는 소금의 역할, 이스 라엘의 풍속에 스며있는 소금의 어떠함을 들여다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성경 이 말하는 소금의 의미는 단순히 음식의 조미료적 역할, 그래서 부패를 방지 하고 도덕회복 운동의 모범적 역할 정도를 말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소금은 성결케 함이요, 나누는 역사요, 언약에 참여하는 자들의 분명한 예식 이다(출 30:35).

소금은 산자를 살게하고 죽은 자를 죽게한다. 그것이 성경적 소금의 역할이 요, 의미이다. 소금은 죽어야 할 요소를 철저히 죽게하고 동시에 살아야 할 것은 생동력 있게 살게한다. 소금은 심판과 부활을 이루게 한다.

예루살렘의 가증한 일에 대하여 에스겔을 통해 예언하는 말씀 중, 예루살렘의 처음 상태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네 근본과 난 땅은 가나안이요, 네 아비는 아모리 사람이요 네 어미는 헷 사람이라 너의 난 것을 말하건데 네가 날 때에 네 배꼽줄을 자르지 아니하였 고 너를 물로 씻어 성결케 하지 아니하였고 네게 소금을 뿌리지 아니하였고 너를 강보로 싸지도 아니하였나니 (겔 16:3-4)

마치 오늘날 기독교인들에 대해서 그대로 말해주고 있는 듯하다. 태어날 때 의 배꼽줄을 자르지 못하고 있다. 언제까지나 배꼽줄만 생명줄인 줄로 여기 고 놓지 못하고 있으나, 한때는 그것이 절대적인 생명줄이었지만 그것을 끊어 버리고 단절시키지 않으면 저주의 줄이 되어버린다는 사실은 왜 알지 못하고 여기가 좋사오니 란 말인가 성경은 누구나 쉽게 마음만 먹으면 버릴 수도 있고 취할 수도 있는 그러한 것 을 버리라고 하지 않는다. 적어도 버릴 수 없는 생명선을 버리라고 하는 것 이 성경이다. 그것이 소금 언약이요, 사는 길이다. 소돔과 고모라성을 누구 나 쉽게 버릴 수 있는 것이었더면 한 여인의 소금 기둥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 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나 소금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너희( JUmei') 가 소금이다 .

바로 8복의 내용대로 버릴 것이 버려지고 그리스도로 다시 산 자 너희 인 것이다.

버려야할 것을 도리어 취하는 것이 福이나 되는 것인양 성경 몇 구절 암송하 면서 예수 믿고 복받으라고 악다구니하는 것이 소금의 역할인줄 알면 큰 오산 이다.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은 그러한 것을 말함이 아니다.

곧 소금인 너희가 소금의 맛을 내는 것이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다. 그리스 도가 전파되는 곳에는 어미로부터의 배꼽줄이 잘려져 나가는 사건이 일어나고 죽어야 하고 버려져야 할 것이 분명히 구분되어 성결케 되는 일이 일어나며 , 그래서 땅이(th' gh') 저주를 면케되어 풀잎이 돋아나며 많은 열매가 맺 히게 하는 일들이 발생하게 된다. 때문에 to ala th' gh'인 것이다. 이 것이 소금의 소금 역할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간략하게 살펴본대로 신약과 구약의 소금 의미의 일치성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언약의 성취에서 치루어야 하는 필연의 과정이다. 거기 에는 적당히 어물쩍 넘어갈 수 없는, 그래서 능히 내 제자가 되느냐 아니면 땅에도 거름에도 쓸데없어 밖에 버리워 사람들에게 밟히는 신세가 되느냐이다 . 소금언약이 성취된 그의 신분은 너희는 소금이니 할 때의 소금이 된다 . 때문에 소금이 되고 이제 소금이 되게 하는데 그 맛을 내는 의미가 있다.

그것이 제자가 되고 제자가 되게 하는 하나님의 역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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