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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반 시(半 時) 어간의 감사 (계 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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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요한계시록 1장에서 계시자의 출현을 보았습니다. 그 분은 부활하신 영광의 왕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는 2장과 3장에서 세상 끝날에 세상에 자리잡은 교회들의 진상을 보았습니다. 그는 4장에서 계시록의 출처인 하늘의 보좌를 보았습니다. 그는 5장에서 계시 사건의 집행자이신 승리의 주 예수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6장에서 핍박의 상징인 여섯 가지 인재앙을 보았습니다. 7장에서는 구원받기로 작정된 14만 4천의 인맞은 자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8-9장에서 일곱째 인의 개봉과 함께 경고의 상징인 나팔재앙을 보게 됩니다. 그 나팔재앙의 개봉 직전에 서론적인 묵시가 나타나는데, 하늘이 반 시 동안 고요한 가운데 금향로에 담기어 보좌 앞으로 올라가는 성도들의 기도를 보게 되었습니다.
일곱째 인을 떼실 때 하늘이 반 시간 동안 고요해졌다고 하였습니다. 그때 일곱 천사가 일곱 나팔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그 순간 또 다른 천사가 나타나서 제단 곁에 서서 금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이 향을 가리켜 성도들의 기도라고 하였습니다. 그 천사는 그 시간에 그 향로에 성도들의 많은 기도들을 담아 하나님 보좌 앞으로 올리고 있었음을 보았습니다.
그러더니 그 천사는 그 성도들의 기도를 담아 하나님 보좌 앞으로 운반하는데 사용된 금향로에다가, 보좌 위의 불을 담아다가 땅에 쏟으매 뇌성과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나더라고 하였습니다(계 8:1-5).

그렇다면 하늘이 반 시 동안 고요한 이 어간은 ① 지극히 짧은 시간이고 ② 고요한 잠정적 평화가 계속되는 어간이고 ③ 더욱이 세상에서 올리는 성도들의 기도가 제물이 되어 하나님 앞에서 상달되는 시간임을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하늘이 반 시 동안 고요한 시간은 하나님의 구속사 경륜의 진행 가운데, 하나님 자신께서만 주장하시는 은닉된 ‘때’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우리로서는 전혀 알 길이 없는 하나님 자신의 주권적 시간 사용의 섭리인데, 이천 년 기독교 역사 중에 이따금 이러한 어간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바로 지금 우리는 하늘이 반 시 동안 고요한 이 어간을 살고 있지 않는가 생각됩니다. 저는 언제나 저 개인이 받은 이 어간 속의 삶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어간에 천사는 금향로 가운데 성도들이 올리는 여러 가지 감사 기도의 향연을 하나님의 보좌 앞에 운반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하늘이 반 시 동안의 고요한 이 어간이야말로 감사의 향로를 드리는 축복의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이 드릴 반 시 어간의 감사 내용들이 무엇일까

Ⅰ. 잠정적인 평화의 때에 예수 믿게 된 감사입니다.

이천 년 기독교 역사는 환난의 역사였습니다. 십자가 고난의 역사였습니다.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예루살렘 영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신 주님 이후로 그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따르던 그의 사도들이 예외없이 핍박을 받아 순교하였습니다.
초기 예루살렘 교회가 박해를 받는 중에 예수를 믿었습니다. 초기 이방 교회들은 로마제국의 박해 삼백 년이라고 하는 긴 고난의 터널을 지났습니다. 저들은 단순히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이유 때문에 죽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벧전 4:16). 그 후에 얼마간의 고요한 반 시 어간이 있었습니다. 이 때 기독교 문화가 꽃을 피운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중세기의 기나긴 암흑기 속에서 수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고난의 가시밭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마침 종교개혁 운동으로 말미암아 세계는 복음 운동으로 진동하고, 그 복음의 힘이 역사를 새롭게 창조해내고야 마는 기독교 문명의 시대를 꽃피우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근세사의 물줄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다시 세계는 냉전 시대를 맞아 1차, 2차 대전을 치르면서 교회는 환난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민주우방국가들의 백성들은 신앙의 자유를 누리는 반 시 동안 고요한 평화의 어간을 누리고 있습니다.
불행스럽게도 이들 대부분의 나라의 교회들은 오히려 산업 사회 시대를 맞으면서, 고도의 물질문명의 혜택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세속에 붕괴해 버리는 불행의 위기를 자초하고 말았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의 경우를 보십시오. 개신교는 100년의 역사적 기록을 남겼습니다. 그 중에 초기에 예수 믿은 신자들은(1885-1910년) 그 대부분이 불교와 유교와 조상 전래의 무당교의 박해를 받으면서 예수를 믿었습니다.
제2기라 할 수 있는 시기는(1910-1945년) 이 나라가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 버린 때였습니다. 망국의 한을 품고 살던 때였습니다. 이때에 기독교 신자들은 잃어버린 나라를 찾아야 된다고 하는 우국지심의 민족적 수난과 함께, 예수를 믿어야만 된다고 하는 기독교적 수난을 겸하면서 일제와 항거했습니다. 더욱이 일본 신도주의(神道主義)의 박해로 교회는 폐문이 되고, 신앙 파수자들은 순교의 피를 흘리고 말았던 시대였습니다. 이런 때에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인간적으로 자기의 불행을 자초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제3기라 할 수 있는 해방 이후의 시대(1945-현재)입니다. 이 어간에 38선과 함께 남북이 양단되는 비극이 있었습니다. 6.25동란(1950년)의 동족상잔의 비극이 있었습니다. 수백만이 되는 월남 피난민과 함께 전 남한이 전란을 같이 겪었습니다.
그러한 와중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통치하는 자유당 정치, 윤보선 대통령과 장면 총리가 통치하는 민주당 내각 정부, 그 정권의 부패와 함께 박정희 씨의 군사 쿠데타와 그로부터 수십 년간 계속된 군부 공포정치를 겪었습니다.
그리고 해방 후 52년 역사 속에 숨쉬면서 군사적으로 북한의 남침 도발의 위협을 지금까지 받고 있는 중입니다. 그리고 수많은 데모의 폭풍을 겪었고, 경제적 혼란, 사회적 불안 요소들이 그야말로 태산 준령을 이루었습니다.
그래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 중에 한국이 받은 놀라운 기적은 바로 세계 선교 역사상에 그 유례를 보기 힘든 복음 운동의 맹성이었습니다. 이 땅에 사는 수많은 백성들이 바로 이 어간에 예수를 믿고 구원받게 되는 하나님의 구속사적 섭리가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그 중에도 바로 이 어간에 예수 믿는 우리들은 초기에 예수 믿었던 우리의 선배들보다, 일제 식민 하에서 예수 믿었던 우리 선배들보다, 해방 직후 6.25동란과 경제적 궁핍 속에서 예수 믿었던 우리 선배들보다 비교할 수 없는 좋은 생존의 환경에서 예수를 믿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반도강산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이래로 제일 좋은 집과 옷과 음식을 즐기고, 교육과 문화의 혜택을 받고 사는 자들입니다.
보라! 지금이야말로 은혜받을 만한 때요 구원의 날입니다(고후 6:2). 신앙의 자유, 예배의 자유, 기도의 자유, 전도와 선교의 자유, 봉사의 자유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정말 많은 감사의 향을 금향로에 담아 하나님께 올려 드릴 때입니다. 말하자면 하늘이 반 시 동안 고요한 이 평화의 어간에 예수 믿고 살게 된 은혜를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Ⅱ. 잠정적인 평화의 때에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게 된 감사입니다.

하늘이 반 시 동안 고요해졌다는 말은 잠정적인 어간을 암시하고 있음이 확실합니다. 그 후에는 ‘뇌성’과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나는 때가 있습니다(계 8:5). 말하자면 또 다시 세계가 혼란에 빠지는 환난의 때가 온다는 말입니다. 그때는 하나님의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정말 좋은 어간에 부름 받은 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 속의 교회를 하나님의 큰 포도원에 비유하였습니다. 그 포도원에는 이른 아침 시간 그리고 제3시(오전 9시), 제6시(정오 12시), 제9시(오후 3시), 제11시(오후 5시)까지 온종일 일꾼을 청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주인은 장터에서 놀고 있던 사람들에게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하라고 하였습니다(마 20:1-16).
이러한 예수님의 비유는, 하나님께서는 역사가 시작되는 이른 아침부터 역사의 끝날까지 이 세상 중에 사는 사람들 가운데 구원받기로 작정된 하나님의 자녀들을 당신의 포도원(교회)으로 초청한다는 말입니다. 구원에로의 초청을 말합니다. 포도원에 들어와 일하라 함은 곧 교회를 통하여 예수를 믿으라는 말입니다. 예수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요 6:29).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그 때부터 자기의 존재 의미와 목적이 무엇인가를 바로 깨닫게 됩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디도서 2장 14절에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선한 일이 무엇인가 바로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는 복음 전파의 일입니다. 우리 모두가 받은 여러 류의 재능(달란트)들은 바로 하나님의 선한 일을 하기 위한 수단들이요, 도구들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주를 위하여 하라고 한 것입니다(롬 14:6-8).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렇게 주의 일(선한 일구령 운동)을 할 수 없는 때가 있고 주의 일은 할 수 있는 때가 있습니다. 바로 반 시 동안 이 잠정적 시기야말로 주의 일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절호의 시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에게 “평화 시대를 사는 값을 하라.”는 말을 잊지 않고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코 이러한 좋은 시기를 주객으로 더불어 먹고 마시면서 허랑방탕하게 지내서는 안된다고 하였습니다(눅 12:45). 받은 달란트를 땅에 파묻어 두어서도 안된다(마 25:25)고 하였습니다. 저들은 악하고 게으른 종이 되고 무익한 종이 되어, 결박을 당하여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겨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고 말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마 25:30).

그러나 고맙게도 우리 경향인은 이 축복을 받아 누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가 설립될 때부터 지금까지 ① 개척 교회 운동과 ② 신학교 운동과 ③ 세계 선교 운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여러 떼를 이루고 오대양 육대주에 80여명이나 되는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 선교사와 총회 선교사를 합치면 백명이 훨씬 넘는 선교사들이 큰 농원의 추수기에 전세계에서 뛰고 있습니다.

뿐 아닙니다. 우리 교회가 신림동에 10층(지하 3층, 지상 7층) 빌딩을 건축하여 불우 이웃을 돌아보는 사회사업의 일환으로 사단법인 한국성민회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 위에 하나님은 우리 생애 중 최고의 축복을 허락하셨습니다. 학교법인 경향학원을 허락하사 경복여자고등학교와 경복여자정보산업고등학교를 경영하게 하고, 우리 경향인의 숙원인 새 성전 건축을 시작하여 완공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주차 공간과 함께 10,000평이나 넘는 세계적 예배 공간과 교육 공간을 주께로부터 받게 되었습니다. 일할 수 있는 자에게 허락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늘이 반 시 동안 고요한 어간에 우리 경향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이 때를 위하여 저와 여러분을 세상에 보냈습니다. 평화 시대를 사는 자는 평화의 사역을 해야 된다는 하나님의 요구입니다. 그래서 금향로에 이 감사의 향연을 담아 주께 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환난날에는 순교자를 내는 시대이지만, 평화로운 시대는 복음전파의 나팔수들인 선교사를 내는 시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 유명한 철학자 플라톤은 자기가 만난 임종 앞에서 이렇게 감사했다고 합니다. 첫째 감사는 자신이 남자로 태어난 것, 다음으로 야만인이나 짐승이 아닌 그리스인으로 태어난 것, 셋째로 소크라테스와 같은 시대에 태어난 것을 감사 조건으로 열거하였다고 합니다. 타투수스와 안티파테르는 임종을 앞두고 저들의 일생 중에 로마에서 그리스까지 그 무서운 바닷길을 무사히 가게 된 것을 감사로 남겼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복스럽고 좋은 것들을 가장 귀한 보물 창고와 같은 기억 속에 종신토록 간직하고, 또 그것 때문에 감사를 합니다. 그러나 기억 속에 남겨 놓을 만한 복스럽고 좋은 일이나 업적들이 없는 자들에게는 행복에 겨운 감사의 고백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받은 감사의 내용은 하늘이 반 시 동안 고요한 어간에 숨쉬고 살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평화로운 어간에 자유롭게 예수 믿게 된 은혜를 감사하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평화 시대를 사는 자들에게 주어진 주의 선한 일을 하게 하신 은혜를 감사하자는 것입니다.

지금 이 어간을 통과하는 우리 모든 경향인들은 평생에 우리의 가슴 속에 감사의 향연이 가득 담겨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 이 시간 금향로에 담아 올립시다. 주여 감사합니다! 이러한 감사의 고백은 우리 한평생을 지배하는 위대한 행복의 원천이 아닌가! 우리 생의 최고를 주게 드릴 수 있는 이 감사의 고백은 바로 우리가 받은 축복의 산정(山頂)이 아닌가! 아니 하늘이 반 시 동안 고요한 이 어간에 하나님의 금향로에 담을 값진 제물이 아닌가!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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