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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역사를 바꾸는 기도 (느 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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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을 경한 윈스턴 처칠경이 쓴 전쟁 회고록이 있는데 워 메모리스라는 이 책가운데 그는 1940년 9월 15일을 가리켜서 자기조국인 영국이 당시 나치독일과의 전쟁 가운데 특별히 공중전에서 특별한 승리를 거둔 절정의 날이었다고 그는 증언한 바가 있습니다. 당시 독일 공군기와 폭격기들이 영국을 무차별 공격하는 가운데서, 영국으로서는 아무 방어수단을 갖고 있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독일군이 결정적 승리를 목전에 둔 시점에서 전혀 이유 없이, 아무런 이유 없이 한 10분간에 걸쳐서 대대적인 후퇴를 하는 이상인일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영국의 공군 전투부대 사령관이었던 당시 공군대장 다우딩경은 전쟁이 끝나자 이날을 회고하면서 달리 설명의 방법이 없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개입으로 의당 진행 되어야 할 사건을 바꾸어 놓은 엄청나고도 이상한 사건이었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노먼 그럽이라는 사람이 쓴 책 가운데 탁월한 중보기도의 사람 리스 하월즈라는 그런 책을 보면 사람의 책을 보면 당시 웨일대학의 학장이었던 리스 하월즈의 영향으로 처칠수상은 당시에 두 차례에 걸쳐서 전국적으로 기도의 날을 선포하여 온 국민들이, 그리고 온 교회가 함께 기도해 줄 것을 호소했습니다. 이 제한을 한 바 있었던 자신 리스 하월즈는 독일의 공습이 시작되자마자 자기가 가르치고 있는 학교 강단에서 교직원전체와 학생들을 모아놓고 매일아침 1시간, 그리고 점심시간 직후에 1시간, 그리고 저녁 7시부터 자정까지 한 네사간에 걸쳐서, 한 네 다섯시간에 걸쳐서 기도에 힘썼고, 공습이 절정에 다를때마다 금식을 했다고 그 책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는 독일군이 이유없이 후퇴하는 독일 군인의

9.15 때 기도회를 하면서 리스 하웰즈는 이런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잦은 공습으로 마음이 흔들리는 분이 계십니까 여러분 자신이 지옥에서 구원 받은 것을 분명히 기억하십니까 그렇다면 이 공습에서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왜 믿지 못하십니까 그러나 우리가 만일 이 때에 믿음으로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갈수만 있다면 나치들 속에 역사하는 마귀들의 체제는 이제 곧 종말을 고할 것이고 그 외 심령들을 보호하시기 위해 전쟁의 흐름을 바꾸시는 일을 하나님은 반드시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마치 예언처럼 기도해서 전파한 그의 메시지는 그대로 응답되었습니다. 이때 리스 하웰즈와 영국 그리스도인들의 기도를 가리켜서 그들은 훗날 역사를 바꾼 기도라는 의미심장한 그런 말을 남겼습니다. 오늘 역사를 바꾼 기도, 오늘 우리가 함께 읽었던 본문의 역사를 바꾸었던 또 하나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때는 B.C 446년, 혹은 445년에 일어났던 일입니다. 당시에 신흥제국이었던 페르시아정부에서 유대인 출신으로서 아닥사스왕 1세의 비서실장을 지내고 있었던, 일종의 비서실장입니다. 성경에서는 그를 술장관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술장관이라는 말이 고대 독제자들은 죽는 것이 제일 두려우니까 신으로 하여금 자기에게 들어오는 음식들을 모두 검사하게 만들었고 그는 음식을 진상한 다음에 왕과 더불어 앉아서 후사를 의논하는 자리에 있었기때문에 우리가 그를 비서실장이라고 말해도 그것은 조금도 지나친 표현이 아닙니다. 당시의 그의 조국인 그 이스라엘 백성들은 소위 페르시아 ‘고레스’라는 왕이 일어남으로서 바벨론 포로의 자리에서 해방되었습니다. 해방되어서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향인 이스라엘로,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성전을 재건했습니다. 성전은 다시 재건되었지만 한날 다시 폭동들이 일어남으로서, 소위 성벽이 파괴되어, 예루살렘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은 깊은 절망과 그리고 미래를 전혀 보장받을 수 없는 그런 안타까운 삶의 처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약탈과 무질서가 횡행했고, 사람들은 내일에 대한 아무런 삶의 희망을 약속받지 못하고 있다는 이런 소식이 멀리 페르시아에서 장관을 하고 있던 느헤미야 귓전에까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마침내 자기의 사랑하는 조국에 돌아가 조국을 위해서, 특별히 예루살렘을 위해서 성벽을 쌓아주는 그런 일을 하기로 결단을 합니다. 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 성벽이라는 것은 삶의 울타리 역할을 했고, 또 그것이 있음으로 인해서 그들의 삶이 안정되게 삶을 보장하고 미래를 꿈꿀수 있는 가장 삶의 중요한 요소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벽이 쌓아지는 역사적인 사건이 이 느헤미야를 통해서 성취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분명 역사를 바꾸는 하나의 사건이었습니다. 이 역사를 바꾸는 위대한 사건은 어느날 느헤미야가 자기 조국을 위해서 기도하던 그 기도에서부터 이 위대한 일은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역사를 바꾸는 것은 역시 기도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이라는 이 시간을 살아가는 여러분과 저에게 있어서도 우리네 고단한 삶의 장에서 역사를 바꾸어야 할 그런 삶의 필요성이 없겠습니까 만약 우리를 둘러 싸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속에서 이대로 살 수는 없다. 우리의 환경이, 또 우리의 현실이 바뀌어야 한다는 어떠한 절실한 마음의 어떠한 갈망이 있다면 오늘 우리는 본문의 역사를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역사를 바꾸는 그런 기도를 시작 할 수 있을까요 역사를 바꾸는 기도를 어떻게 시작할 수 있을까요
첫째로, 우리는 역사에 대한 열린 의식이 필요 합니다.
우리는 역사에 대한 열린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역사에 대한 열린 의식이란 무엇을 뜻하는 것이겠습니까 이것은 우리를 둘러싸 있는 역사적 사실에서 우리의 눈이 열리고 그 다음에 우리의 귀가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열려 있어야 한다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어야 진정한 의미에서야 진정한 기도를 역사를 바꾸는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기도많이 하는 분!하면 어떤 분의 떠오르십니까 기도를 많이 하시는 분. 그러면 아마 이세상을 등지고 깊은 산속에 들어가서 혹은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눈을 막고 귀를 막고 혹은 세상을 향해서 마음을 차단하고 그리고 거룩한 손을 들고 주여! 삼창을 하는 사람을 아마 여러분은 마음속에서 그 이미지를 떠올리지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역사의식이 닫혀 있는 사람은 결코 역사를 바꾸는 기도를 할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은 비록 기도를 한다고 할지라도 그의 기도는 자기를 위한 자기를 위한 연장선에서 가정을 위한 기복적인 기도에서 벗어나기란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내가 아닌, 스스로를 위한 것이 아닌, 그리고 민족을 위해서 기도를 하는 것. 이런 기도를 하는 사람을 기대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역사를 향한 창이 닫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역사를 향해서 눈이 열린 사람. 그리고 귀가 열린 사람, 그리고 마음이 열린 사람이어야 그 역사에 지워진 짐을 내게 주어진 기도의 짐으로 알고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느헤미야의 기도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자! 본문 2절을 보시면 자기 고국을 떠나서 장관을 하고 있던 이 사람이 어느날 고국을 방문하고 돌아온 사람에게 그를 붙들고 고국의 형편을 묻게 되었습니다. 자! 본문 2절을 다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나의 한 형제 중 하나니가 두어 사람과 함께 유다에서 이르렀기로 내가 그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유다 사람과 예루살렘 형편을 물은즉. 내가 유다 사람들과 또 예루살렘 사람 형편을 어떻게 했다고 그랬어요 물어보았다고 그랬습니다. 물어보았다. 이 질문은 고국에 대해서 그의 마음속에서 꺼질줄 몰랐던 관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는 외국땅에 와서 출세하고 살고 있지만 여전히 고국에 대한 관심을 접을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로부터 들려오는 고국의 소식에 귀를 기울여 그는 경청하기 시작했습니다. 자 그 내용이 3절이지요. 우리는 3절을 소리내어 읽어보겠습니다. 본문의 3절입니다. 시작!-저희가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은 자가 그 도에서 큰 환난을 만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성은 훼파되고 성문들은 소화되었다 하는지라. 이런 안타까운 소식을 듣게 됩니다. 조국의 역사의 장에서 들려오는 소식을 그는 들었습니다. 자! 4절은 이 소식을 들은 느헤미야의 반응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 4절 다같이 읽지요. 계속 해서 읽습니다. 시작!-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우선 이 소식을 듣고 앉아서 무엇을 했습니까 울었습니다. 그리고 수일동안 슬퍼했다고 했습니다. 하루동안이 아니라 그는 수일동안 슬퍼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슬퍼만 하지 않았습니다. 하늘의 하나님 앞에 드디어 금식하면서 무엇하기로 작정했습니까 기도하기로 작정하고 있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소위 역사를 바꾸는 느헤미야의 기도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기도를 시작하게 되었던 동기는 바로 그를 붙들고 있었던 역사의식입니다. 사람들이 왜 기도를 못할까요 왜 기도하지 않고 있을까요 그것은 그들이 마땅히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들어야 할 것을 듣지 못하고, 느껴야 할 것을 느끼지 못하고 있기 때문 까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네 삶의 장 주변을 천천히 주의 깊에 돌아보십시오. 우선 여러분의 가정을 보십시오. 여러분의 자녀들은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부모님은요. 여러분의 배우자의 처지는 어떻습니까 혹은 여러분의 주변의 사랑하는 이웃들의 사람들을 바라 보십시오. 내가 기도해 주어야 할 어떤 도덕적인 영적인 의무를 느끼는 바라보십시오. 우리의 목장 식구들을 바라보십시오. 찢긴 가슴으로 아파하는 사람들의 현장을 보십시오. 아니 우리사회와 민족의 창을 돌이켜 보십시오. 한나라의 지도자가 대통령 못해 먹겠다라고 말 할 정도로. 우리 사회와 우리 민족의 답답한 현실을 한번 천천히 돌이켜 보십시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역사의 창에서 들려오는 그 소식을 참으로 듣고 있다면. 그리고 보고 있다면, 그 정직한 현실을 우리의 눈으로 보고 있다면 그리고 그 아픔을 동일하게 우리의 가슴으로 느끼고 있다면 어떻게 기도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주께서 오늘 여러분과 저를 먼저 눈을 열고 귀를 열고 마음을 여는, 이것이 바로 역사의식인데, 그런 은혜를 주시기를 기도하십시다. 진정한 기도는 눈을 감고 하는 기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기도는 눈을 떠야만이 할 수가 있어요. 그것은 실제로 기도할 때 눈을 뜨느냐 마느냐라는 포즈의 문제를 제가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의식. 눈이 열려 있어 볼 때 우리는 마음에 부담을 느끼게 되잖아요. 귀가 열려 들려오는 소식을 들을 때 어떻게 기도하지 않을수가 있어요. 그것이 역사의식입니다. 그렇습니다. 역사의식에 대해 열린 사람이어야 역사의식에 대한 책임의식을 느끼고 역사를 바꾸는 기도를 시작 할수 있습니다. 저는 저와 여러분이 정말 이런 역사앞에서 오늘 우리 민족을 위해, 이웃들을 위해, 그리고 자신의 가정과 미래를 위해서 엎드려 참으로 기도하는 기도의 사람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참으로 기도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먼저 주님이 우리의 눈을 여시고 귀를 여시고 우리의 마음의 문을 열어주시기를 기도하십시다. 역사를 바꾸는 기도. 그것은 역사에 대해서 열린 의식을 가진 사람이어야 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역사에 대한 기도는 역사의 대한 주인의 의식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역사의 주인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역사를 바꾸려는 기도를 하려면 역사의 주인에 대한 믿음이 전제되어 있어야 합니다. 역사의 주인이 누구십니까 물론 하나님입니다. 그분만이 역사를 주관하시고 역사를 바꾸시고 역사를 새롭게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창조자이시요. 동시에 섭리자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역사를 가리켜서 영어로는 히스토리(History)라고 합니다. 히스토리. 그런데 이 단어가 매우 흥미롭습니다. 히스(his)라는 단어와 스토리(story)라는 단어가 합성된 단어 아닙니까 그래서 신학자들은 히스토리는 바로 그의 이야기. 즉 하나님의 이야기라고 말합니다. 역사학자들이 역사를 바라보는 기독교인들을 바라보는 관점을 말할 때 기독교 역사관을 가리켜서 섭리사관이라고 말을 합니다. 섭리사관. 역사는 하나님의 섭리의 스토리. 역사를 주관하시고 편찬해 나아가시는 하나님 자신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역사를 섭리하시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이 우리는 역사를 바꾸는 기도를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저와 여러분이. 우리가 그를 역사의 주관하시는 분으로 믿는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말입니까 무엇을 믿는다는 말입니까
그것은 첫째로 하나님은 문제보다 크신 분 이심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은 문제보다 크신 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5절에 드디어 느헤미야의 기도가 시작합니다. 시작하면서 그가 하나님을 부르면서 제일 먼저 하나님에 대해 붙여진 수식어가 어떤 단어였습니까 가로되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그리고 그 다음에 무슨 하나님이라고요 두려우신 하나님. 제일 먼저 사용한 단어가 크신이라는 단어입니다. 크신 하나님. 소위 Great GOD. 크신 하나님. 그는 자기 민족이 직면한 문제가 큰 문제였지만,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니었지만, 심각한 문제였지만, 그러나 그가 지금 기도하고 있는 대상의 하나님은 그 문제를 직면하고 있는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직면한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만일 우리가 기도할 때에 하나님보다도 우리가 직면한 문제가 더 커다란 문제로 자꾸 보인다면 어떻게 될까요 나중에 가서는 하나님은 보이지 않아요. 그냥 문제만 보여요. 그냥 지금 내가 부딪혀 있는 문제만 자꾸만 크게 보여요. 눈을 감아도 기도를 해도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자꾸 문제만 보여요. 꼼짝없구나! 나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요 결국은 우리 앞에 있는 문제에 눌려서 절망에 빠져 버리고 말 것입니다. 왜냐하면 더 이상의 희망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저는 그것이 바로 물위를 걸어가던 베드로가 물속으로 다시 빠져 들어간 모습이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는 한 때 물위를 걸어 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의 시선이 주님께 맞추어져 있을 때 주님이 크게 보였을 때 그는 물위를 걷는 기적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한순간 베드로가 파도를 주목하기 시작을 했습니다. 그러니 이 굉장한 파도. 물결만 눈앞에 보여요. 나중에 주님이 보이지 않아요. 그리고 마침내 그는 파도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만 것입니다 .파도만 크게 보였어요. 그리고 그는 믿음 없는 사람처럼 두려워 하고 절망속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앞에 있는 문제가 아무리 크고 심각하게 보여도 하나님이 더 크게 보인다고요. 결코 작지 않은 문제가 오늘 내게 엄습해 왔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이 문제를 능히 감당하실수 있으셔. 그리고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계시고 내 기도를 들으신단 말이야. 이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 그 하나님을 우리가 믿을 수만 있다면 우리가 주저앉아 절망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사랑하시는 여러분! 오늘에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 고단한 역사가 바꾸어 지기를 소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다시 한번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 그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하나님을 신뢰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두 번째로는 우리가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믿는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는 분 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5절에서 계속 기도를 합니다. 뭐라고 합니까 5절을 보십시오.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뭐에요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 이렇게 기도를 합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그가 처한 역사적 현실이 아무리 참담해도 그는 아직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있다고, 붙들고 있다고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약속의 책입니다. 그리고 성경의 하나님은 약속의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오늘이 아무리 열악한 현실이어도 이 백성을 축복하시고 이 백성을 사용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지금도 유효하다고 느헤미야는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에게 약속대로 자기의 사랑하는 조국인 이스라엘을 회복시켜 달라고 지금 주님앞에 나아와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또한 지금 곧 우리의 하나님이심을 믿으십니까 우리는 때때로 구약을 읽을때 이것은 뭐 이스라엘 백성과 관련이 있는 것이지... 이 한반도에 살고 있는 한민족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이런 질문을 할때가 종종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역사의 샘플일 따름입니다. 이스라엘을 다루시던 하나님은 다른 민족도 동일하게 다루신다는 샘플로 이해하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에게 주셨던 약속은 궁극적으로 그 백성만 겨냥했던 약속이 아니라, 이스라엘과 같이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모든 민족에게 약속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성경은 옛언약 이외에 새로운 언약인 이 신약을 첨부하신 것입니다. 약속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예컨대 사도행전 2:39절을 보십시오. 저 유명한 오순절날 사도 베드로가 설교하면서 그날 오순절날에는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이스라엘인들과 이방인들이 또한 동참하고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약속의 본질, 물론 약속중에 가장 중0요한 약속은 이제 우리에게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 약속의 의미를 첨명하면서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사도행전 2:39절입니다. 한번 같이 읽어 보십시오.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그 약속은 누구에게 주어진 것인가 누구에게 적용되어야 마땅한가 그것은 비단 이스라엘 백성뿐만 아니라 모든 먼데 있는 사람. 이것은 이방인을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먼데 있는 사람.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사람에게 약속은 주어진 것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을때 이것은 나를 위한 약속이다. 우리를 위한 약속이다. 이런 마음으로 이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오늘의 삶이 고단하십니까 환경에만 시선을 두지 마세요. 삶이 고단할수록 성경을 펴서 하나님 앞에 서십시오. 약속의 말씀을 펴서 이 말씀을 읽으세요. 그리고 이 말씀 가운데 나에게 희망으로 다가오는 어떤 말씀이 있다면 이 말씀을 꽉 붙드세요. 그리고 이 말씀을 주장하십시오. 그리고 이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앞에 외치십시오. 주님! 나는 주님이 이 약속을 나에게 주신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그 약속을 약속하신 대로 그 약속을 이루어 주실 줄, 그리고 그 약속을 지키어 주실 줄 제가 믿습니다. 그렇다면 그 약속은 여러분을 위한 희망의 약속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대로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하나님. 내가 바라보고 있는 하나님이 내게 약속을 지키어 주실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그것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역사의 주인을 믿는다는 고백. 그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긍훌을 베푸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바닥으로 가라앉을 때 우리의 마음속에는 이런 질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이렇게 되어버린 나에게도 하나님은 아직도 관심을 갖고 계시구나! 이렇게 실패한 나에게도, 혹은 이렇게 좌절한 나에게도,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별것 아닌 나에게도 하나님 정말 관심이 있으신가요 19세기부터 시작해서 특별히 20세기 초까지 기독교가 이 세상의 신랄한 비판과 공격앞에 놓인 한때가 있었습니다. 그 비판중에 하나는 이 기독교라는 종교가 약한 자들보다는 강한자들. 가진자들. 소위 기득권을 가진자들에게만 관심을 가지는 종교가 아닌가 라는 의심과 공격을 받았던 한때가 있었습니다. 이 공격을 받았던 과정중에 하나는 이 기독교가 복음을 선교하는 과정에서 지나치게 식민주의적인, 혹은 제국주의적인 방법을 취했고 그리고 정치적이고 물량적인 방법을 동원해서 많은 약한 나라들을 밟았던 역사가 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정치와 결탁하는 일들이 적지않게 있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기독교는 강자의 종교. 혹은 강자만을 위한 종교로 곡해되는 상황이 있었던 것입니다. 20세기가 되면서 이런 일들에 대해 일부 신학자들 가운데 심각한 자기 반성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과연 기독교가 그런 종교인가 성경은 어떻게 가르치는가 그래서 성경을 다시 읽기 시작을 했습니다. 이 성경을 강자의 관점이 아니라 약자의 관점에서 다시 읽고 해석하는 신학적인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런 신학운동이 여러분도 들어봤을거에요. 소위 해방신학운동으로 나타났습니다. 소위 liberaty theology 라는 해방신학운동으로 나타났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해방신학을 수용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해방신학의 많은 강조점들은 매우 반 기독교적이고 반성서적인 존재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해방신학이 기독교에 중요하게 공헌한 바가 한가지 있어요. 한가지 공헌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면 약자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을 다시 일깨울수 있었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분명하게 의미심장하게 다시 배울 부분이었습니다. 자! 이제는 하나님의 관심. 이들이 그런 눈으로 성경을 바라보니까 놀랍게도 이 성경속에는 약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과 애정들이 적지않게, 아니 적지않게 정도가 아니라 놀랍게 많이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 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특별히 성경에서 하나님은 네 가지 종류의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신 것을 그들은 발견해 내었습니다. 이 네가지 종류의 사람이 누군지 아세요 첫째는 고아입니다. 고아. 고아의 얘기가 성경에 엄청 많이 나옵니다. 둘째는 과부입니다. 과부. 외롭게 혼자사는 여인. 그 다음에 세 번째는 가난한 사람들. 그리고 네 번째는 나그네들입니다. 집없이 다른 나라에 가서 나그네가 되어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의 대한 성경이 얼마나 많은지 아세요 그래서 어떤 한 학자는 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관심은 거의 하나님의 편애에 가깝다. 이런 말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관심과 하나님의 편애에 대한 이유는 무엇때문일까요 저는 가장 큰 이유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속성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이 하나님됨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품성이 하나님 자신안에 있어요. 그 품성이 뭐냐하면 바로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이신것입니다. 긍휼이 무엇입니까 이 긍휼이 바로 약자들이나 혹은 약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대한 불쌍하게 여기시는 덕을 가리켜서 우리는 일반적으로 긍휼이라고 말을 합니다. 바로 이 느헤미야는 이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붙들고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하나님 내 민족의 불쌍한 처지를 하나님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자! 5절의 하반부를 보십시오. 자! 느헤미야의 기도가 시작되면서 마지막으로 주님을 어떻게 부르고 있는가를 보십시오. 마지막부분에 뭐라고 했어요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 이렇게 기도를 합니다.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 주께서는 이런 기도에 어떻게 응답하실까요 물론 기뻐하시고 즐거워하시며 넉넉함으로 주께서 베푸실 것이라고 저는 확신을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런 하나님이시기에. 성경은 그를 가리킬때 자주, 종종 그는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 이렇게 기록을 합니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 여기서 풍성함이란 끝이 없는 넉넉함을 가리켜주는 단어입니다. 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빈민선교를 하시는 목사님이 한분 계셨는데 이분이 쓴 글에서 이런 글을 읽었어요. 한번은 도시에 있는 빈민촌에 있는 청소년들을 데리고 그들가운데는 한번도 바다를 구경한 적이 없다고 그랬어요. 그를 데리고 바다 구경을 시키기 위해서 차를 태우고 해안가로 바닷가로 갔습니다. 그래서 모래가운데 아이들을 풀어놓았더니 그 중에 한 아이가 그 광활한 바다를, 파도치는 바다를 바라보더니 갑자기 울더래요. 그래서 목사님이 너 왜우니 라고 물었더니 이런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목사님! 저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넉넉함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저는 지금까지 태어나서 넉넉함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내 눈으로 보고 있잖아요. 이 광활한 바다를 바라보면서 이 아이가 이렇게 대답을 하더랍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그 아이를 꼭 안아주면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 맞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은 이 끝없는 바다같이 넉넉한거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긍휼은 이 바다처럼 넉넉한거야. 이런 말을 주었다고 합니다. 일찍이 예레미야 선지자는 주의 백성들이 범죄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여전히 그들이 살아서 숨쉬는 이유를 고백하면서 저 유명한 예레미야 애가 3:22절 이하에서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들어보세요.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니이다. 무궁하다는 말이 끝이 없다라는 것입니다. endless.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다. 우리가 아직도 살아 있는 이유. 하난미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 아멘!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이 오늘이라는 역사의 현실이 답답하고 고통스럽게 느껴지시는 분이 있으십니까 그렇다면 역사의 주인되시는 하나님앞에 나아오세요. 기도를 시작하세요. 그의 끝이 없는 자비와 그리고 풍성한 그 분 앞에 구해보십시오. 당신에 가슴에 숨겨져 있는, 아직도 포기할수 없는 희망의 약속과 이야기들을 그분앞에 풍어놓고 아뢰십시오. 그러면 새 역사가 쓰여 질 것입니다. 고통의 역사는 바꾸어 질 것입니다. 희망의 역사가 지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여러분과 저는 역사를 바꾸는 기도의 주인공이 될줄로 믿습니다. 기도하십시다.
이동원목사 느헤미야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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