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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는 알파요 오메가입니다 (계 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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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主)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 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어떤 일이든지 그 처음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처음에 일을 어떻게 시작하느냐에 따라서 그 일의 태도와 방향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 용두사미(龍頭蛇尾)라는 말처럼, 종종 우리는 일의 처음은 좋 았으나 마지막이 흐지부지한 경우들을 주변에서 보게 됩니다.

바울 사도는 빌립보서 1장 6절에서 주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유명한 고백을 했습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 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우리 속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분이 반드시 마치시겠다는 선언은 그분이 처음과 마지막이시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I am Alpha and Omega) .

알파(A)는 헬라어의 첫 글자이고, 오메가(Ψ)는 마지막 글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은 우리의 처음과 마지막이십니다라 고 고백을 합니다. 우리의 기도 가운데에서도 처음이요 나중이신 주님이시여라고 주님을 부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알파와 오메가라는 말씀의 구체적인 의미는 무엇 입니까? 성경 기자는 이 말씀을 어떤 맥락 속에서 우리에게 전달 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가 처음과 마지막이라는 말씀의 그 구체적 인 의미를 본문을 통해서 네 가지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역사의 주(主)가 되시는 그리스도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 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계 1:7).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리라는 선언입니다. 우리는 이 날을 역사 완성의 날이라고 부릅니다. 성경의 기자들은 이 날을 그리스도 예수의 날이라고 말합니다. 이 날은 그리스도인의 승리의 날(Victory day)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D-day 혹은 V-day라는 말을 쓰는데, 이것은 원래 제 2차 세계대전과 관련된 말입니다. 즉, 연합군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안겨 주었던 노르만디 상륙 작전의 개시일을 가리켜서 D -day라고 하고, 제 2차 세계대전의 전승 확정일을 가리켜서 V-day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초림(初臨)이 D-da y였다면, 그분의 재림(再臨)은 그리스도인의 V-day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담 당하심으로써 속죄의 길을 여셨는데, 이 구원의 사역은 그리스도인 의 결정적 승리와 사단의 결정적인 패망을 약속한 것입니다. 그분 은 다시 오셔서 이 모든 일을 완전하게 성취하실 것입니다.

 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을 가리켜서 역사의 극점(極點) 이라고 말합니다. 역사를 만드는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사건 이라는 뜻입니다. 역사가들 중에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의 오심도 재림의 희망도 중요하게 취급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두 사건은 역사 속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개의 분수령입니다. 하나님 의 역사는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이라는 두 개의 기둥을 통해서 만들어집니다. 재림은 바로 그 완성의 날인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그 재림의 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재림의 날이 임박하고 있다는 사실은 마지막 역사의 파노라마(panorama) 를 전개하는 요한계시록의 첫번째 장(章)에서 선포됩니다.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7절).

또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장(章)인 22장 12절 이하를 보십시오 .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 요 시작과 끝이라(12,13절).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장, 성경 최후의 장을 닫으면서 다시 한번 알파와 오메가이신 바로 그분의 오심을 확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역사의 마지막 오메가! 최후의 완성을 위해서 그분께서 오십니다.

그날은 성도들에게 상급이 내려지는 날입니다. 그리고 그분을 위 해서 살았던 우리들의 삶이 결산되는 날입니다. 한 번 더 그 사 실이 선언되면서 하나님 말씀의 마지막 장이 닫히고 있는 것입니다 .

 사도 요한이 이 묵시록을 기록할 당시의 로마 황제는 저 유명한 도미티아누스(Domitianus)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핍박이 시작되고 노골적으로 황제 숭배가 강요된 때가 바 로 이때였습니다. 로마의 통치 아래 있었던 민족들은 모두 다 이 도미티아누스 상(像)을 향하여 시이저(Caesar/황제)는 주님이시다라는 고백을 하도록 강요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 스도인들에게 주님은 한 분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황제 숭배 뿐만 아니라, 이 고백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 만이 주님이십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 말 속에는 무슨 의미가 들어있습니까? 시이저는 주님이 아닙니다라는 의미입니다. 시 이저가 주님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라는 고백이었던 것 입니다. 이 고백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황제의 명령에 불복종한다 는 이유로 핍박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직장에서 쫓겨나고, 사회에서 추방되고, 순교를 당하고, 말할 수 없는 위협을 당하 며 어둡고 긴 터널을 통과해야 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은 사도 요한을 통해서 이 묵시록의 메시지를 그들에 게 주신 것입니다.

 묵시록의 첫 장이 열리면서 선포된 말씀을 주목하십시오.

주(主)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이 선언의 강조점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십시오. 이 말씀은 단순히 그분이 처음이시고 마지막이시다라는 사실을 선언하는 것이 아 닙니다. 그분은 역사의 처음과 마지막이시며, 역사는 바로 그분의 이야기입니다. 역사라는 의미의 영어 단어인 「History 」는 「His Story」, 즉 그분의 이야기입니다. 역사의 주인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본문 8절을 다시 보십시오.

주(主)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여기에서는 단순히 주님이 처음이고 마지막이다, 그분이 창조자요 마지막 완성자가 될 것이다라는 사실만 강조한 것이 아닙니다.

이 고백 속에 들어 있는 중요한 강조점은 처음을 처음 되게 하 시고 마지막을 마지막 되게 하실 그분이 지금도 다스리신다는 사실 입니다. 그분은 이천 년 전에만이 아니라, 지금도 역사를 통치하 시는 주님이십니다.

 바울 사도의 입술을 빌려서 고백된 로마서 11장 36절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역사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고백을 듣게 됩니다.

이는 「만물이 주(主)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 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여기에서 중요한 구절은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라는 것입니다. 만물은 창조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왔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지탱되고 있습니다. 그분은 창조자이실 뿐 아니 라 섭리자요, 진행자요, 주관자이십니다.

그 다음에 강조된 것은 주에게로 돌아감이라는 말씀입니다. 만 물은 결국 주님에게로 돌아갈 것입니다. 주님에게서 끝날 것입니다 .

로마서 11장을 공부하면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11장에는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가 기록되어 있습니 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당신의 백성으로 선택하시어 그들 에게 메시야를 약속하시고 특별하게 섭리하셨건만, 그들은 하나님을 거절하고 하나님의 사역에 불순종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이 스라엘 백성들을 어떻게 다루셨습니까? 이스라엘이 그리스도를 거절하자, 이스라엘이 아닌 이방인들에게 그 리스도가 전파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원 히 버림을 받고 만 것은 아닙니다. 마지막 부분에 보면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 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2 5절).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될 만큼 전파된 후에는, 하나님께서 처음 역사를 시작하셨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음의 역사(役事)가 다 시 일어날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는 예수님을 믿 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그들 가운데 영적인 회복 운동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역사의 완성이 매우 가깝다는 중요한 증거가 됩니다.

예언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근래에 유대인 가운데 예수 믿는 사람 들이 서서히 생겨나고 있는 것을 굉장히 주목합니다. 아직은 두드 러지지 않지만, 복음이 유대인 가운데 확산되려는 조짐을 보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서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거절하자, 이방 나라들인 전 세계로 그리스도가 전파 되었습니다. 서서히 역사의 시침(時針)은 다시 이스라엘로 되돌아 가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역사는 마침내 종결될 것입니다. 이스라 엘을 중심으로 한 하나님의 역사 섭리의 전개 과정을 기록하던 바 울 사도는 로마서 11장 마지막 부분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33절).

 이스라엘이 그리스도를 버리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이런 의문을 가 졌을 것입니다.

아니 왜 선민(選民)인 유대인들이 예수를 안 믿지? 왜 그리스 도를 버리는 걸까? 그렇다면 복음이 이방인들 가운데서만 꽃피고 이스라엘은 영원히 버림을 받았단 말인가? 그러나 그게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드디어 하나님의 역사 경륜이 밝혀졌을 때, 우리는 바울과 한가지로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主)의 마 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롬 11:33-36).

 역사를 경륜하시는 주님! 역사의 주가 되시는 그리스도! 그러나 로마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핍박 아래 있던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이 역사 속에 과연 주님이 일하실까? 주님이 주관하신다면 이런 환난이 있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았 을 것입니다. 주여! 당신은 어디에 계시나이까?라는 하소연이 그리스도인들의 입술을 통해 고백되고 있었을 그 상황에서, 하나 님께서는 요한을 들어 이 메시지를 선포하셨습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처음과 나중이라. 시작과 끝이라!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의 주님이십니다.

 개개인의 삶의 주(主)가 되시는 그리스도

그리스도는 역사의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그분은 또한 우리 개개인 의 삶의 주가 되십니다. 요한계시록 1장의 나는 알파와 오메가 다라는 말씀이, 단순히 재림의 선언에 대해서만 말한 것은 아님 을 주목하십시오. 17절입니다.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

이 말씀은 주께서 묵시록의 기자였던 사도 요한에게 주신 말씀입니 다. 요한은 주님의 영광스러운 형상을 보았을 때 그 발 앞에 엎 드러졌습니다. 그 엄위하시고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그분의 영광과 거룩함 앞에 사람들은 엎드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때 주께 서 사도 요한에게 손을 얹고 말씀하십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처음이요 나중이니.

 당시 사도 요한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이 요한계시록이 기록된 곳 이 어디입니까? 밧모 섬입니다. 요한은 밧모라는 섬에 유배(流配 )당했던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잡혀 밧모 섬에서 귀양살이하 고 있는 사도 요한! 이 고도(孤雁)에서 그는 얼마나 외롭고 고 통스러웠겠습니까? 사랑하는 이들에게서 단절된 그의 아픔은 얼마나 컸겠습니까? 사도 요한에게도 이런 마음이 들었을지 모릅니다.

내 인생이 이게 전부인가? 이 외딴 섬에서 이대로 끝나고 마는 것은 아닌가? 그때 자신을 보이시며 나타나신 주님! 그분이 이 놀라운 선언을 하신 것입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나는 처음과 나중이라! 이것은 만물에 대한 그분의 선포일 뿐만 아니라 요한 개인에게 하 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요한의 인생 속에서도 그분은 처음과 나 중이시라는 이야기입니다.

네 인생의 시작이 나였느니라. 네 인생의 마지막도 나이니라.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나는 처음과 나중이다.

 하나님께서는 역사(歷史) 속에서 한 개인을 섭리하시면서 동시에 이 개인의 역사를 하나님의 역사 속에 포함시키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역사는 나의 역사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역사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역사에 대한 관점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순환론적 역사관 이 역사관은 역사는 특별한 시작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냥 돌 고도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즉, 역사는 마치 원처럼 순환한다 는 주장으로, 인도교나 불교처럼 윤회설(輪廻說)을 주장하는 종교 나 이런 문화권의 배경 속에서 주로 주장되는 이론입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봅시다. 만약 우리가 역사를 순환론적으로 이 해한다면 우리는 어떤 영향을 받게 되겠습니까? 우리 인생은 돌고 돌아 언젠가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리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따 라서 지금 안 되면 먼 훗날 후생(後生)에 다시 해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급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역사관을 받아들인 민족이나 나라들은 대개 그 역사가 발전하지 못하고 퇴행 (退行)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관 자체가 알게 모르게 사람들 의 삶 속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둘째/실존적 역사관 우리는 역사가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다만 우 리가 알고 있는 분명한 사실은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여기에 살아 있다는 사실뿐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역사관을 실존적 역사 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의 역사관은 하나의 점으로 나타낼 수 있습니다. 즉, 역사는 점과 같이 한 순간을 살아가는 것이 라는 말입니다. 물어도 소용이 없으니까 과거를 묻지 말라는 식입 니다. 단지 살고 있을 뿐, 존재하고 있을 따름이라는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가 역사를 실존적으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어떤 영향을 받게 되겠습니까? 아마 쾌락주의적 인생관에 빠지기 쉬울 것입니다 . 목적도 없고, 의미도 없고, 알 수도 없는 불가지론(不可知論 )적인 역사관 속에서 사람들은 다만 찰라에 몰두할 수밖에 없습니 다.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즐길까?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내 손에 움켜쥘 수 있을까? 이것만이 문제일 따름입니다. 이 역사 관도 우리에게 건강한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셋째/목적론적 역사관(종말론적 역사관, 기독교적 역사관) 역사는 어떤 시작점에서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끝을 향해 가는 것이다라는 역사관입니다.

순환론적 역사관을 원(圓)으로, 실존적 역사관을 점(點)으로 표 시한다면, 목적론적 역사관은 선(線)으로 표시할 수 있습니다.

선에는 반드시 시작하는 점과 끝나는 점이 있습니다. 어디인가에서 시작하여 분명한 끝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 시간은 분명한 시작 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시간은 분명히 끝날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의 기독교적 역사관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 그냥 흘러만 가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흘러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종말론적인 역사관이라고도 합니다.

이것은 역사에만 국한(局限)되지 않습니다. 이 역사 속에 태어난 우리 개개인의 삶에도 분명한 시작이 있고 끝이 있습니다. 이 말은 오늘이라는 순간이 다시는 되돌아올 수 없는 시간이라는 뜻입 니다. 인생은 다시 연습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만큼 심각하 고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장난처럼 살아버리기에는 너무나 엄숙하고 소중합니다. 우리는 한 번밖에는 오지 않는 시간을 걸 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우리 되게 하시고 이 역사 속에 태어나게 하셔서, 한 순간의 삶을 시작하게 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를 향한 뜻을 갖고 계십니다. 역사를 향해서만이 아니라, 우리 개인을 향 한 삶 속에도 하나님의 기대와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 목적론적 역사관은 삶에 목적과 의미를 부여합니다. 인생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삶에는 의미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경험하는 고통 속에도 목적과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보겠습니다. 사도 요한은 지금 고독한 밧 모섬에 유배되어 있습니다. 인간 관계에서 철저히 단절되어 있고 전혀 내일을 예측할 수 없는 외로움과 절망감 속에 빠져 있는 것 입니다.

그러나 그때 주께서 요한에게 다가와 말씀하십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처음과 나중이다! 이것이 사도 요한에게 어떤 감회와 어떤 각성을 불러일으켰겠습니까 ? 아마 그는 소스라치게 놀랐을 것입니다.

아, 이 밧모 섬의 주인도 주님이시구나! 이 고통스러운 시간 속에서도 그분은 여전히 내 삶의 주님이시구나!

개인의 삶의 주가 되시는 그리스도! 그분이 오늘 당신의 삶 속에 도 주인이신 것을 믿으십니까? 고통스럽고 짜증나는 오늘의 삶도 목적과 의미가 있어서 허용하시는 줄을 믿으십니까? 환난 중에 도우시는 그리스도

본문 9절을 보십시오.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환난에 동참하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밧모 섬의 사건은 주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고난이었음을 사도 요한은 고 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이 주님을 위해 그리고 주님 때 문에 일어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여전히 두려움이었을 것입니다.

언제까지 이 귀양살이를 계속해야 하나? 나에게도 내일이 있는가 ? 어느 한 순간에 여기서 내 삶이 끝나는 것은 아닐까? 이런 많은 두려움이 사도 요한의 마음과 영혼을 붙잡고 있었을 것 입니다.

 그때 누군가가 다가옵니다. 눈을 들어보니 너무나 놀라운 모습입니 다. 정신을 잃고 엎드러져 까무러칠 정도가 되었습니다. 너무나 거룩하신 예수님 앞에서 그는 더욱 두려워하며 꼬꾸라지고 만 것입 니다. 이 장면은 이사야가 여호와를 뵙고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 6:5)라고 한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그 순간 주님 손의 따스한 체온이 전 해지며 자애로운 사랑의 음성이 들립니다.

두려워 말라! 주님이십니다. 아, 나의 주님! 벅찬 가슴을 억제할 수 없습니다 . 모든 두려움과 회한이 사라지고 가슴 뭉클한 가운데 복받치는 기쁨의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립니다. 환난 중에 도우시는 주님! 알파와 오메가라고 말씀하시는 주님! 이것은 구약성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배경을 좀더 잘 이해 하기 위해서 구약성경의 몇 구절을 찾아보겠습니다. 이사야서 48 장 12절 이하의 말씀을 보십시오.

야곱아 나의 부른 이스라엘아 나를 들으라 나는 그니 「나는 처 음이요 또 마지막이라」 과연 내 손이 땅의 기초를 정하였고 내 오른손이 하늘에 폈나니 내가 부르면 천지가 일제히 서느니라(1 2,13절).

아주 놀라운 말씀입니다. 그분은 어떤 분이라는 말씀입니까? 그분 은 창조자이십니다. 나는 처음이요라는 말씀은 언제나 그분이 창조자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서 44장 6절을 보 십시오.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속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

여기에도 처음이요 마지막이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이것은 하나 님께만 사용되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지금 요한계시록 1장에서 예수께서 나는 알파요 오메가라 나는 처음과 마지막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님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계 1:1,8). 예수님이 창조자이 십니다. 그뿐 아니라 그분이 왕이시고, 이스라엘의 구속자이십니다 . 그 백성이 마땅히 서야 할 자리에 서지 못했을 때 대가(代價 )를 지불하고 그들을 사서, 다시 제 자리에 있게 하신 구속자이 신 하나님! 이 하나님께 사용된 독특한 표현들이 요한계시록 1장 에서 놀랍게도 예수 그리스도에게 사용됩니다. 사도 요한에게 개인 적으로 다가오신 그분이 창조자요, 구속자요, 왕이시라는 것입니다 .

 당신이 아주 고통스러운 가운데 있을 때 제가 찾아가서 두 손을 잡고 기도하며 두려워 마세요라고 말한다면, 그래도 어느 정도 위로가 될 것입니다. 이렇듯 사람들의 말로도 위로가 될 수 있 다면, 창조자요 구속자요 왕이신 예수님의 말씀은 얼마나 위로가 되겠습니까? 그것은 보통 사건이 아닙니다. 얼마나 놀라운 선언입 니까?

이제 요한계시록 1장 17절부터 다시 보겠습니다.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매 그가 오 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 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17,18절).

그분이 창조자이고 구속자이고 왕이라 해도 현재 그분이 돌아가셨다 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돌아가셨다고 생각 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돌아가신 것 처럼 여기고 살아갈 때가 있지 않습니까? 절망과 공포와 낙심과 두려움 속에 있던 요한에게 다가오신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살아 있는 자니라! 나는 지금도 역사(役事)할 수가 있느 니라.

이것은 얼마나 위대한 선포이겠습니까?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살아 계신다는 사실을 종종 잊곤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그분의 백성들에게 자주 상기시킬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 이 순간 당신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아직도 살아 있다!

신명기 32장 40절에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백성들에게 선포 하신 메시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를 통해 마지막으로 계시하 신 유언 같은 메시지입니다.

내가 하늘을 향하여 내 손을 들고 말하노라 「나의 영원히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은 얼마 동안 살아계십니까? 영원입 니다. 우리말 개역 성경에 영원히 삶을 두고 맹세한다고 했는 데, 오늘날 문법대로 하면 영원한 삶을 두고 맹세한다입니다.

그런데 피조물인 인간들이 너무 자주 이 사실을 망각하므로 하나 님이 이렇게 선포하실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나의 영원한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하나님도 맹세하십니다. 사람들은 맹세할 때 자기보다 더 높은 권 위를 걸고 맹세합니다. 하늘을 두고 맹세한다는 말은 이런 뜻 입니다.

너희가 나는 믿을 수 없을지 모르지만, 하늘은 진실하니까 하늘 을 두고 맹세한다.

히브리서 6장 13절 이하에는 재미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 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가라사대…(1 3,14절).

하나님보다 더 높은 권위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맹세하실 때 자신을 걸고 맹세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나의 영원 한 삶을 두고 맹세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환란과 고통 속에서 도우시는 그리스도! 이 살아계신 주님이 나와 함께하셔서, 정말 나를 도울 수 있는 하나님이신 것을 참으로 믿으십니까?

궁극적으로 승리케 하시는 그리스도

그리스도는 우리 성도들의 궁극적 승리자가 되십니다. 요한계시록 1장 18절의 마지막 부분에는 그분이 열쇠를 가졌다고 했습니 다.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陰府)의 열 쇠를 가졌노니」.

음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그러나 제일 단순하 고도 중요한 평면적인 뜻은 죽은 사람이 거하는 곳입니다. 인생의 마지막은 무덤입니다. 죽음입니다. 무덤과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 마다 고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이 종말인가? 정말 그것이 우리 인생의 마지막인가? 죽음은 우리를 한없는 고독과 두려움에 떨게 합니다. 이 말씀을 기록한 사도 요한은 서서히 죽음의 그림자가 자기를 덮쳐 오고 있 는 것을 밧모 섬에서 느꼈을지 모릅니다.

이렇게 끝나야 하는가? 무덤이 내 인생의 결산인가? 그때에 요한에게 나타나서 하신 주님의 말씀! 나는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나중이라. 그리고 사망과 음부의 열쇠도 내가 쥐고 있느니라.

죽음의 영역 아니 그 다음의 영역까지도 지배하시는 분! 무덤 이 편에서만 살아 있어 나를 인도하시는 분이 아니라, 무덤 저 건너 편에서까지도 나의 삶을 주관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 이 고백이 사실이라면 당신은 누구를 두려워하겠습니까? 무엇을 두 려워하겠습니까?

당신은 복음 성가 「주 하나님 독생자 예수」를 자주 부를 것입니 다. 그 후렴구처럼 그분께서 살아계시기 때문에 나는 기쁨으로 나 의 미래를 직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주 나의 참된 소망 걱정 근심 전혀 없네.

사랑의 주 날 인도하니 내 모든 삶에 기쁨 늘 충만하네.

 저는 바울 사도의 메시지를 평생토록 제 고백으로 삼고 싶습니다.

로마서 8장 31절부터 보십시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 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訟事)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31-33절).

하늘과 땅의 심판자요, 창조자요, 주인이신 바로 그분이 우리를 의롭다고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계속되는 말씀을 보십시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 는 자니라(34절).

그렇습니다. 주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위해서 간구하고 계십니다.

이 창조자, 구속자(救贖者), 왕이신 주께서 우리를 위해서 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 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主)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 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 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 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35 -39절).

이 얼마나 확고하고 위대한 하나님의 약속이며 보장입니까? 예수님 은 우리의 마지막 승리자가 되십니다. 그러므로 그 안에 있는 우 리도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잠깐 동안만이 아니라 영원토록 말 입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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