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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천년왕국의 비전 (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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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요한계시록 전체를 통해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난해성 때문에 본문은 사람에 따라 그 해석이 달라집니다.

천년왕국에 대한 두 가지 논쟁점
첫째/천년왕국의 시기
천년왕국의 시기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분분한 해석은 주님의 재림과 연관시켜서 크게 두 가지로 나뉠 수 있습니다. 즉, 천년왕국 전에 예수님이 재림하신다는 「전천년설」과 천년왕국 후에 예수님이 재림하신다는 「후천년설」이 있습니다. 후천년설은 지금 역사가 천년왕국을 향해서 흘러가고 있으며 천년왕국이 이 땅 위에 이루어진 후에 예수님이 재림하신다는 입장이기 때문에 세상이 점점 좋아진다는 낙관적인 견해를 갖습니다.

둘째/천 년이라는 기간
이것은 천 년을 문자적으로 이해해야 하는가 혹은 상징적으로 이해해야 하는가의 문제입니다. 천년왕국을 문자적으로 이해하게 되면 문자 그대로 천 년 동안 지상에 왕국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전천년설이나 후천년설을 믿는 사람들은 지상에천 년 동안 주께서 통치하시는 왕국이 이루어진다는 입장을 지지합니다.
그러나 상징적으로 해석하게 되면 이 천 년이라는 기간은 일정한 어떤 기간이기는 하지만 문자 그대로 꼭 천 년이 아닐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많은 숫자들이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등장하는 것처럼 이 천 년이라는 숫자도 주께서 통치하시는 영광스러운 기간을 상징할 따름이라고 주장하는 「무천년설」이라는 입장이 있습니다.
무천년설을 믿는 사람들은 대부분 천년왕국을 상징적으로 풀어서 생각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영광스럽게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신 후 다시 재림하실 때까지의 기간을 천년왕국의 기간이라고 봅니다. 무천년설에 따르면 지금 우리는 바로 천년왕국의 기간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무천년설이란 요한계시록 20장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와 일치시켜, 천년왕국을 예수의 초림부터 재림까지의 역사적 기간으로 보는 입장입니다.
천 년을 문자 그대로 보지 않기 때문에 무천년(無千年)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천 년이라는 기본적인 성경의 개념을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천 년이라는 숫자에 상징적으로 접근할 뿐입니다.
간혹 전천년설을 믿는 사람들 가운데도 예수님이 재림하신 후에 이루어질 천년왕국의 기간이 반드시 천 년이 아닐 수도 있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조지 래드라는 유명한 학자가 바로 그런 입장을 취합니다.
이렇게 해석에 차이가 나는 이유는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자기가 가지고 있는 신학적인 선입관 때문입니다. 아주 영향력 있는 사람에게서 어떤 사실을 전수받았다면 과거에 배운 그 입장을 바꿀 가능성은 좀처럼 없게 됩니다. 일종의 선입견이요 제 나름의 신학적 입장인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안경과 같습니다. 자기 안경을 통해서 보면 자기 주장이 맞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선입견은 성경 해석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합니다.

둘째, 성경 자체가 이런 문제에 관해서 넉넉한 계시를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먼저 재림하시고 천년왕국이 이루어지느냐 아니면 천년왕국이 먼저 이루어지고 예수님이 재림하시느냐라든가 천년왕국은 문자적 의미이냐 상징적 의미이냐 하는 것에 관해 성경은 충분히 계시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반드시알아야 할 모든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계시했습니다.
그러나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되는 문제들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다루고 있는 종말에 관한 부분은 비본질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주께서 충분하게 계시하지 않으신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 나타난 본문만 가지고 해석할 때 사람들의 입장과 시각에 따라서 차이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일찍이 어거스틴은 성경 해석에 관해서 대단히 중요한 말을 했습니다.본질적인 것에 관해서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에 관해서는 관용을, 그리고 모든 것에 관해서는 사랑으로.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예수님은 반드시 재림하신다와 같은 진리는 본질적인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성경이 분명하게 가르쳤습니다. 열린 마음으로 성경을 객관적으로 읽는 사람들은 아무도 그것을 부인할 수 없도록 충분히 명확하게 계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질적이지 않은 문제를 가지고 싸울 필요는 없습니다. 기독교 교회사에 기록된 불행한 사건들은 종종 그리스도인들이 비본질적인 문제를 가지고 지나치게 흥분했기 때문에 빚어진 것이었습니다.저에게도 종말에 대해 제 나름대로의 입장이 있습니다. 그러나 당
신이 꼭 저와 같은 입장을 취할 필요는 없습니다. 같은 교회 교인들간에도 입장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다양함이 오히려 흥미로울 따름입니다.
저는 무천년설의 입장에 상당히 공감하고 있기는 하지만, 천년왕국에 관한 한 아직도 역사적 전천년설의 입장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제가 요한계시록 18장에서 20장까지를 쭉 해석해 보니까 전천년설이 가장 자연스러운 흐름 같아서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연대기적 입장을 가지고 상당히 역사적으로 서술되어 있습니다. 18장에는 주로 바벨론의 멸망, 즉 바벨론으로 상징된 이 세상 역사의 최후의 모습들이 나옵니다. 19장에는 심판이 끝났다는 선포가 나옵니다. 그리고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대한 선언이 나옵니다. 그 다음에 19장 11절 이하에 다시 오시는 주님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내가 하늘이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11절).
승자로 역사 속에 귀환하시는 주님의 모습이 나타난 후에 19장 마지막에 가면 역사를 어지럽히던 두 장본인인, 짐승으로 상징된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가 잡힙니다. 그리고 20장에 와서 처음으로 사단이 결박을 당하고 그런 후에 천년왕국이 선포됩니다. 그러니까 18장부터 쭉 보면 종말에 있을 일들이 연대기적 역사적 흐름으로 전개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흐름을 뒤집는다는 것은 상당히 무리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저는 전천년
설의 입장에서 요한계시록 20장을 조망했습니다.

천년왕국의 성격
20장에 보면 내가 보매라는 말이 첫 부분에 세 번 나옵니다. 다시 말하면 사도 요한은 천년왕국에 대한 세 가지 환상을 본 것입니다. 그 세 가지야말로 천년왕국의 성격을 규정짓는 중요한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첫째로, 천년왕국은 마귀가 결박됨으로써 이루어진 나라입니다.
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 손에 가지고 하늘로서 내려와서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단이라 잡아 일 천 년 동안 결박하여 무저갱에 던져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 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다가 그 후에는 반드시 잠간 놓이리라(1-3절).
천년왕국이 마귀가 결박됨으로써 이루어지는 나라라고 한다면, 지금 이 시대는 마귀가 결박되지 않고 활동하고 있는 시대입니다. 물론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사단이 결정적으로 패배할 무대는 이미 마련되었습니다. 무천년설을 따르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그때 이미 사단은 결정적으로 패배를 하고 더 이상 활동하지 못한다고 주장합니다. 이 입장에도 일리는 있지만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역사를 충분히 반영하는 데는 아직도 많은 무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세계가 정말 우리가 생각해 온 그 이상향, 곧 주께서 영광스럽게 통치하시며 모든 악이 사라지고 모든 죄가 척결된 그런 세계처럼 느껴집니까? 십자가를 통해서 영광스런 구원의 길이 예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사단은 이 땅에서 맹렬한 위세를 떨치며 활동하는 것 같습니다. 이 세상 임금 사단이 패배할 날이 다가오고 있지만 아직도 활동하고 있는 모습을 주님은 보셨습니다.이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두 가지 중요한 교훈을 따라야 합니다.
첫째, 사단을 경계해야 합니다. 사단은 우리보다 훨씬 지혜롭습니다. 또 우리보다 훨씬 능력 있습니다. 정신 차리지 않으면 이 사단 때문에 언제든지 넘어지고 쓰러지고 죄짓고 파멸할 가능성이 우리에게 항상 있습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사단은 아직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하라고 권면합니다. 사단을 과소평가하지 말아야 합니다.
에베소서 4장 27절에서 바울 사도는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사단은 우리를 넘어뜨릴 기회를 항상 노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 어떻게 쓰러질지 모릅니다. 섰다고 자만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해야 합니다. 사단이 아직 결박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는 사자처럼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는 그 사단 앞에 항상 깨어 있지 않으면 우리는 언제든지 넘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고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지키고 있다 해도 함정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둘째, 사단을 대적해야 합니다. 마귀가 결박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이 마귀를 대적하고 그와 싸워야만합니다. 성경은 마귀를 대적하라고 끊임없이 권고합니다.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 4:7).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이 땅 위에 오신 후에 마귀가 완전히 패배했고 결박당했기 때문에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그 근거로 마태복음 12장 28,29절을 늘 인용합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이 구절은 주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귀신들이 패배당할 수 있는
놀라운 길이 열렸음을 말하고 있을 뿐 사단이 결박되어 있음을 선포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이 구절이 1차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사단(마귀)이 아니라 귀신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을 힘입어 사단의 능력을 제압하고 귀신들(악령들)을 제압할 수 있는 놀라운 권세를 갖게 된 것은 사실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얼마든지 사단을 제압할 수 있고 또한 귀신들(악령들)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마귀와 대적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름과 권세를 사용해야 합니다. 그러나 아직 마귀는 결박당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아직도 우리와 더불어 대결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칠십 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눅 10:17).귀신들은 성경에 항상 복수로 씌어 있지만 마귀(사단)는 항상 단수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눅 10:18).
이 구절도 사단이 최초로 타락하는 순간을 주님이 목격하셨다는 말인지 아니면 주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사단이 패배하는 것을 주께서 목격하셨다는 선언인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눅 10:1
9).
귀신들은 활동하고 있지만 우리가 그들한테 패배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귀신들을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졌다면 패배는 합리화되지 않습니다. 나는 어쩔 수 없어서 패배했습니다나 사단 때문에 죄를 지었습니다라는 식의 변명은 용납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악령들을 제어하고 이길 수 있습니다. 주께서는 주를 신뢰하는 백성들에게 귀신들(악령들)을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을 이미 주셨습니다. 그 능력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찬양할 때 우리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 마귀는 완전히 결박될 것이고, 그때 비로소 인간 세상을 혼란하고 악하게 만들었던 사단의 역사는 완전히 땅에서 제어될 것입니다.
둘째로, 천년왕국은 성도들이 세상을 심판하고 왕 노릇 하는 나라입니다.
또 내가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4절).
여기에 나오는 보좌는 주님의 보좌가 아니라 이 땅의 싸움에서 늘 승리하는 성도들의 보좌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심판하는 권세를 받아 마지막 세상을 심판할 자들입니다. 이 구절에 따르면 우리는 주님이 오시고 나서 주와 더불어 이 세상을 심판할 자들입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계속 언급되는, 아직 성취되지 않은 대단히 중요한 약속입니다. 예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치 못하겠느냐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고전 6:2,3).
장차 이 세상을 판단할 자들이 자기들끼리 생긴 문제 하나 해결하지 못해서 예수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에게 판단받기 위해 세상 법정에 서느냐는 것입니다. 바울은 성도들의 시비(是非) 문제를 얘기하다가 실로 놀라운 사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영광스런 약속입니다. 마지막 심판자는 주님이십니다
. 그러나 그분과 함께 판단할 자는 바로 우리들입니다. 주께서 이 놀라운 특권을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주셨다는 놀라운 사실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자신을 하찮은 존재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런 맥락에서 고린도전서 4장을 다시 읽어 보면 매우 재미있습니다.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부요하며 우리 없이 왕 노릇 하였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의 왕 노릇 하기를 원하노라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같이 미말(微末)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8,9절).
이 구절의 배경을 좀더 이해하기 위해서는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이 순교자로 원형 경기장에 야수의 밥이 되기 위해 끌려 들어오는 광경을 생각해야 합니다. 제일 먼저 왕이 들어오고 귀족들이 입장하고 맨 끝에 사자의 밥이 될 그리스도인들이 끌려 들어옵니다.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같이 미말에 두셨으매란 바로 그 말입니다. 이렇게 세상에서 천대와 멸시를 받지만 그들은 어느 날 주(主)와 더불어 온 세상을 다스려 왕 노릇 할 자들이라는 것을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사람들에게 알려 주고자 한 것입니다.
이런 맥락들이 신약성경에 자주 반복해서 강조되어 나옵니다.
미쁘다 이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딤후 2:12).
핍박과 고난을 경험하고 있던 당시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도 바울은 앞날의 희망한 가지를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때때로 복음 때문에, 이 진리 때문에, 복음과 이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핍박당하고 짓밟히고 구경거리가
되고 있지만 어느 날 우리는 세상을 판단하고 통치할 것이다.
이 사실이, 박해를 당하면서도 절대로 굴하지 아니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를 바라보면서 죽음의 자리까지 그들이 순종할 수 있었던 비결이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마 19:28).
주님이 이 말씀을 하신 배경도 굉장히 재미있습니다. 이 말씀은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27절)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던 것입니다. 이 약속의 성취가 바로 천년왕국입니다.

셋째로, 천년왕국은 주를 위해 고난을 받은 성도들에게 상급으로 예비된 나라입니다.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4절).초대 그리스도인들이 겪었던 고난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세계 도처에서 지금도 그리스도인들이 고난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장차 이루어질 천년왕국의 주인공들, 곧 거기에 앉은 자들(본문 4절)은 도대체 누구일까요? 사도 요한은 제일 먼저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성경에서 영혼이란 말은 육체와 구별된 개념이 아니라 사람들을 뜻한다. 주께서 이 영혼들을 사랑하사 하면 그것은 영혼만을 나타낸 것이 아니다)을 언급합니다. 즉, 순교자들을 말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고난받았던 그리스도인들이 천년왕국에서는 가장 영광스러운 대접을 받는 주인공들입니다. 그러나 순교자들만이 기업을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적그리스도 혹은 그런 세력 앞에 굴복하거나 타협하지도 아니하고 주님을 바라보고 주께 끝까지 충성을 다하며 살았던 이들, 그래서 그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모든 사람들이 천년왕국의 주인공들입니다.
그들에게는 부활의 영광이 주어집니다. 어떤 분들은 이것을 영적 부활로 해석하는데, 본문을 살펴보면 육체적 부활이 좀더 자연스러운 해석입니다.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살아서란 단어가 그 다음 5절에도 나옵니다.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 살아서란 단어는 육체적 부활로 보아야 합니다. 성경은 그것을 첫째 부활이라고 말합니다.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6절)
.
이것은 영광스런 부활입니다. 천년왕국에서 하나님의 기업과 영광을 누리고 주님의 놀라운 위로를 경험하는 부활입니다.
첫째 부활이 있다면 둘째 부활도 있겠지요? 첫째 부활이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부활이라면 둘째 부활은 복 없고 거룩하지 못하고 수치스러운 부활일 것입니다. 예수님도 부활을 말씀하실 때 두 가지로 구별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만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불신자도 부활합니다. 마지막에는 다 부활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성격은 판이할 것입니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
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9).
주님은 두 가지 부활 사이에 존재하는 시간적 간격에 대해 말씀하시지 않았지만, 요한계시록 20장을 문맥 그대로 자연스럽게 해석하면 시간적인 간격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천 년이 지난 후 부활할 악인들은 마지막 심판을 위해서 심판의 보좌 앞에 서게 됩니다. 생명의 부활인 첫째 부활에 대한 약속은 고린도전서 15장의 약속과도 통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을 보통 부활 장이라고 부릅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받기 전에 먼저 부활부터 합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51,52절).
이 부활 장은 어떻게 끝납니까?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58절).
부활의 약속이있기 때문에 바울은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부활의 약속은 다시 천년왕국의 비전과 연결됩니다.
사실 바울이 부활을 약속하는 이런 편지를 쓴 동기는 당시 핍박받
는 성도들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이 다음 구절에 나와 있습니다.
또 어찌하여 우리가 때마다 위험을 무릅쓰리요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30,31절).
그들이 삶의 현장에서 얼마나 위험을 겪었으면 나는 날마다 죽는다고까지 했겠습니까? 이것은 영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자 그대로 날마다 죽음을 당할 위험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번에는 32절을 보십시오.
내가 범인(凡人)처럼 에베소서에서 맹수로 더불어 싸웠으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느뇨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할 것이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초대 교인들이죽음을 무릅쓰고 복음을 전한 이유는 부활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구절을 가장 실감했던 것은 에베소에 갔을 때였습니다. 에베소는 터키에 있습니다. 소아시아 일곱 도시 중에 가장 잘 복원되어 있습니다. 터키에 가면 마치 A.D. 1세기의 에베소 거리를 걷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럴 정도로 땅 속에 있는 것을 그대로 땅 위에 올려놓았는데 거기에는 엄청난 규모의 원형 경기장이 남아 있습니다. 그곳의 사자 굴 앞에서 기도할 때는 사자들과 싸우던 초대 교인들의 모습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싸울 수 있었던 용기는 바로 부활의 소망에서 나왔던 것입니다.우리의 수고는 주 안에서 헛되지 않다.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 하나님의 나라는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 뿐만 아니라 지상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천년왕국의 찬란한 비전입니다.
1세기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을 받을 때마다 얼마나 많이 다음의 약
속을 떠올렸을까요?
현재의 고난은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이때의 영광이란 어떤 영광을 말하는 것일까요? 이어지는 말씀을 보십시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救贖)을 기다리느니라(19-23절).
생존 경쟁과 싸움과 부패와 멸망은 인간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도 마찬가지입니다. 파괴되어 가는 자연에 가만히 귀 기울여 보십시오. 자연의 신음 소리가 들립니다. 사람들만 고통하고 신음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도 신음하고 통곡하고 있습니다.그러나 우리가 부활의 몸을 얻을 그때는 자연도 새로워집니다.이사야서에 나타난 많은 대목들은 장래에 대한 이런 비전이 없이는 해석할 수가 없습니다. 자주 인용하는 이사야서 11장 6-9절을 보십시오.
그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그때를 소망합니까? 샬롬의 때, 하나님의 평강이 이루어지는 천년왕국, 그 나라는 고난받는 성도들에 대한 상급으로서 예비된 나라입니다. 그 나라를 바라본다면, 그나라가 약속되어 있다면 오늘의 고난을 두려워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고난에는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그냥 받는 고통은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안이하고 편안한 환경 속에서 때때로 복음의 감격도 잃어버리고 복음을 위한 고난의 뜻도 저버리고 살고 있지만
, 지금 이 순간에도 복음 때문에 고난을 받는 형제들이 있습니다
. 복음 때문에 고난을 경험하는 자마다 이 땅에 임할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도 그 나라를 대망하며 고통을 이겼던 것입니다.
오, 하나님! 편안한 삶에 안주하는 자 되지 말게 하시고 주를 위해 수고하는 땀을 흘리게 하소서. 복음을 위해서 고난을 영광스럽게 받으며 그 고난에 참예할 줄 아는 우리가 되게 하소서. 작은 수고도 피했다면 그날 주님 앞에 어떤 모습으로 설 수 있겠습니까? 그날의 영광을 위하여 오늘의 고난을 부끄러워 아니하는 우리가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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