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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려면 (눅 17:2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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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요즈음 북한에 대한 관심이 부쩍 많아지고 있다. 북한에서 남한으로 넘어오는 사람들도 전보다 훨씬 많아지고 있다. 그리고 러시아에는 벌목장을 탈출한 동포들이 많이 있다고도 한다.

2.북한은 사회주의 사상으로 통치를 하는 정부가 들어서 있다. 사회주의란 모두가 잘사는 사회를 목표로 하는 이념인데, 명분상으로는 매우 훌륭한 이념이다. 어떻게 보면 성경에 나오는 초대교회의 모습과도 비슷하다.

3.하지만 인간이 사는 세상에 그런 낙원은 실현된 이유가 없다. 전혀 현실성이 없는 하나의 꿈일 뿐이다. 북한통치 50년의 결론은 먹을 식량마저 구할 수 없는 파탄지경임이 드러났다.

4.이러 저런 일들로 인하여 근래 우리들은 어떤 체제가 이상적인 것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정답은 없다. 인간이 사는 세상은 다 그렇고 그렇다.

5.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다면 어떻게 될까 그곳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곳이다. 감히 짐작을 할 수 없는 나라다. 그러나 그 나라가 이루어지기까지는 치뤄야할 댓가가 있다.

I.고난을 통과해야 한다(20-25).
A.하나님의 나라는 어느 곳에 위치할까(20-21).

1.우리는 먼저 보이는 현상세계가 창조세계인가 아니면 자연계인가를 분명히 결정해야 한다. 답은 당연히 창조세계다.

2.그러면 지구의 타락과 우주의 타락은 동일한가 동일하지 않은가를 또 결정해야 한다. 인간의 타락은 지구에 황폐화를 불러왔다. 인간의 타락이 우주에 까지 영향을 미쳤다면 천국은 현상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과 우주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면 천국이 현상세계에 존재 할 가능성은 있다. 이것은 하나의 가정일 뿐이다.

3.사람들이 주님께 질문하였다. “과연 하나님의 나라는 어디에 있습니까” 주님의 대답은 어느 특정한 장소가 아님을 선언하셨다. “바로 너희 가운데 있다”. 그러면 그 가운데라는 곳은 어디일까

B.반드시 고통의 댓가를 치뤄야 한다(22-25).

1.누가복음이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주님이 다스리는 나라다. 그러니 주님이 계셔야지만 주님의 나라요, 하나님의 나라다. 하지만 주님은 얼마 후 십자가를 지셔야만 한다. 물론 제자들은 전혀 알지못하는 사실이다.

2.그래서 주님은 “십자가 이후”의 현상을 대비해서 “다시 돌아와”라는 말씀을 하셨다. 물론 이것은 “재림”을 일컫는 말이다. 즉,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주님의 재림이 이

루어져야 한다는 말씀이다.

3.그러면 재림이 이루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십자가와 부활”이 있어야 한다. 십자가가 없이는 주님의 재림은 이루어질 수 없다.

4.그 십자가는 어떤 것인가 “무서운 고통”을 치뤄야만 하는 것이다. 마취된 상태에서 잠자는 것처럼 죽는 안락사가 아니고, 살을 찢고 피를 흘려야 하는 무서운 고통을 통과해야지만 얻어지는 결과가 재림이다.

5.그렇다면 “너희 가운데”가 어디를 일컫는 말인지 짐작이 간다. 주님의 고통을 이해하고 동참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시작이 된다.

C.고난없는 재림은 불가능하다.

1.주님이 재림을 하시기 위해서는 반드시 십자가를 져야 한다. 무서운 고통의 아픔을 통과해야만 한다.

2.믿음은 고통이라는 댓가를 지불해야 한다. 희생이라는 댓가를 지불해야 한다. 때로는 물질을 포기해야 하고, 때로는 자존심을 포기해야 한다. 명예를 포기해야 할 때가 있다. 권리를 과감히 던져버려야 할 때가 있다.

II.끝까지 관심을 가져야 한다(26-30).
A.노아의 때와 똑같다(26-27).

1.노아는 창세기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이다. 그는 그 시대에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 였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배를 지으라고 명령하셨다. 그리고 노아는 오랜 세월에 걸쳐서 하나님이 명령하신 그대로 방주를 지었다.

2.그 당시의 사람들은 노아의 행동을 모두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좀 바보스런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노아를 비웃었다.

3.노아가 방주를 완성하고 모든 동물들과 식구들이 배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도 그들은 노아의 일에 대한 의미를 알려하지 않았다. 즉,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4.그러나 그들이 매사에 무관심한 것은 아니었다. “자기”를 위한 일에는 대단히 열중했다.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일이라면 마다하지 않았다. 그것은 오늘날도 조금도 다르지 않다.

B.롯의 때와 같았다(28-30).

1.롯은 아브라함의 조카였다. 그는 삼촐과 헤어져 문화가 발달했던 도시로 들어가 살던 사람이다. 그러나 그가 살던 도시는 퇴폐와 향락으로 극을 치닫던 종말의 도시였다.

2.하나님은 역시 천사를 통하여 롯을 그곳에서 불러 내셨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 심지어는 롯의 사위들 까지도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이들 역시 돈과 향락에만 관심이 있었다. 이들은 마치 먹고 즐기기 위해 인생을 사는 사람들과 같았다.

3.내일 세상이 망하는 것도 모르고 자기도취에 빠져서 분주하게 세상을 살고있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주님이 재림하실 때 사람들 역시 그런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C.하나님의 일에 관심을 갖자.

1.지금 나의 관심은 어디에 있는가 갈수록 우리의 관심은 하나님과 멀어만 가고 있다. 편안한 세상살이에 좀더 깊이 들어가 보고 싶다. 궂이 경건이라는 귀찮은 일에 신경쓰고 싶지 않다.

2.새로운 제품이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새로운 모델로 교체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사고 싶은 것이 한없이 많다. 그래서 거액을 헌금하는 사람들을 보면 왠지 의아스럽게만 느껴지고 그들의 행동이 이상하게만 생각된다.

3.어디에 가면 내게 더 이익이 있을까가 궁금하다. 어느 목회자의 설교를 들으면 내게 더 유

익이 있을까가 궁금할 뿐이다. 능력이 충만한 종은 없는가 말씀이 충만한 종은 없는가 사랑이 충만한 종은 없는가 이것만이 우리의 관심일 뿐이다.

4.그러나 이제 관심을 돌리자. 내가 관심을 바꾸지 않는한 아무리 유능한 목회자의 설교를 듣고 축복기도를 받아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모든 것은 헛된 수고에 지나지 않는다.

III.택함받은 자가 되야 한다(31-37).
A.뒤를 돌아보지 말라.

1.롯의 처는 불타는 자기의 재산을 쳐다보다가 자신도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다. 너무나 아까웠기 때문이다. 나의 손때 묻은 재산들이 바로 나를 파멸시키는 올무가 된다는 사실이다.

2.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수는 없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택이다. 베드로에게 믿음의 고백을 하도록 한 것은 그의 인간성이 아니라 바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였다.

3.주님은 불의한 재판관과 억울한 일을 당한 과부의 비유를 들려 주셨다. 우리는 모두 억울한 사람들이다. 사단에게 피해를 보고 있으니 이 얼마나 억울한 일인가 그 과부 처럼 우리가 하나님아버지에게 간구한다면 우리는 모두 선택받은 자가 될 것이다. 하나님은 구하는 자의 기도를 들어주시기 때문이다.

4.나와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나와 영적인 운명을 달리하는 것이 인생이다. 두 사람이 맷돌을 갈았다는 것은 한 식구가 아닐까 밭일을 같이 했다면 필시 한 동네에 거주하는 마을 사람일 수 있다. 바로 이웃이다. 심지어는 함께 잠을 자는 사람 중에도 운명은 다르다.

B.모두가 구원에 참여하자.

1.하나님의 일에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한다. 자기의 이익만을 좇아 분주하게 정신없이 헤메는 사람이 아니라 노아처럼 미련스러워 보이는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2.롯의 처 처럼 세상의 미련을 끊지 못하면 그 인생은 종말에 이르고 만다. 더 이상의 희망은 없다.

3.우리의 관심은 “끝까지 계속되어야”한다.

4.이 말씀 바로 다음에 해주신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를 잊지말자. 우리 모두는 사단에게 피해를 당한 억울한 인생이라는 사실을 잊지말자. 그래서 선택에 참여하는 길은 오직 “부르짖는 것”뿐임을 잊지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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