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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가 실상을 안다. (계 02: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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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인구가 11억이나 됩니다. 그리고 그 나라는 아시다 싶이 공산국가입니다. 죽의 장막이라고 불릴 정도로 폐쇄적인 나라가 이제 문을 열고 개방을 시작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이곳에 교회가 세워지고 복음 전도가 시작이 되었습니다.
중국에는 여건상 두 종류의 교회가 존재합니다. 공인 교회가 있고 지하 교회가 있습니다. 공인 교회는 정부가 인정하는 교회로 건물도, 목사도 있으면 정부에서 자금의 지원도 받습니다. 반면 지하 교회는 어느 성도의 가정의 골방이나 산 속이나 바위틈이나 숲 속에 비밀이 모이는 교회입니다. 물른 건물이 있을 턱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지하 교회에는 많은 성도들이 모이는데 어떤 경우에 300명씩 모이는 교회도 있습니다. 중국의 교회는 대부분이 이런 지하 교회입니다.
공인 교회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공인 교회에는 불문율의 명령이 내려져 있습니다. 그것은 ①.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말을 하지 말 것. ②.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라 하지 말 것. 그리스도를 만 왕의 왕이라고 하지 말라. 교회의 머리는 공산당이라고 가르치라고 합니다.

3.요한 계시록을 본문으로 한 설교를 하지 말 것. 다시 말하면 종말론적인 주제의 설교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공인 교회가 이런 제재를 받았음으로 지하 교회는 자연이 이 세 가지 주제를 주로 해서 설교를 합니다. 지하 교인들은 주님이 다시 재림하신다는 메시지를 열심히 사모하고 경청합니다. 그래서 한국 방송을 듣고 보낸 편지에는 대부분 '주님이 오실 날이 가까워 온 이 때에'라는 서두가 있습니다. 지하 교회는 종말론적인 메시지를 복음의 중심으로 하여 교회가 확장이 되고 철저한 그리스도적 신앙으로 무장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 계시록은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보낸 종말적인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종말적인 메시지란 믿는 우리들에게 구원이 완성되는 메시지이고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가능성이 없어지는 메시지입니다.

여기 기록된 일곱 교회는 시대를 초월한 모든 교회의 대표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교회를 특징적으로 분류하면 이 일곱 교회 중에 하나가 되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일곱 교회들은 하나님의 칭찬을 받기도 하고 책망을 받기도 합니다. 즉 교회의 잘한 일과 잘못한 일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가 내려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독 서머나 교회만은 책망을 받은 일이 없이 칭찬을 받고 있어서 모든 교회 중에 가장 아름다운 교회, 모범 된 교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당시 서머나는 에베소 다음 가는 큰 도시였습니다. 오늘도 소아시아와 에게 해 주변 지역에서는 가장 큰 상업 도시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현재는 이즈미르(Izmir)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으며 인구는 20만이 넘습니다. 그 중에 1/3 이상이 기독교인들입니다. 이처럼 서머나는 역사적인 도시입니다.
서머나라는 이름은 그 어원에 '몰약'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 말은 고난이라는 뜻입니다. 서머나 교회는 지금 큰 환난을 겪고 있습니다.
첫째, 이 환난은 전쟁이나 가난이 아니라 교회가 당하는 고난 즉 핍박과 고문과 처형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끌려가서 온갖 고문을 당하고 처형을 당하는 것입니다.
둘째, 재산의 몰수와 추방, 소금에 저린 가죽옷을 사막으로 추방되어 유리 방황하다가 죽는 것입니다.
셋째, 모든 사회적 지위를 박탈당하고 일가 친척까지 고난을 당하는 연대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서머나 교회가 격은 환난입니다.
저들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고문을 당하고, 추방을 당하고, 사형을 당하여야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가난하게 되고 그 사회에서 소외되고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었습니다. 그것도 잠시 받는 고난이 아니라 100년도 200년도 더 오래 계속이 되는 고난이었습니다.

서머나 성도들은 이런 환난 가운데 에수님을 믿고 교회를 지켰습니다. 간혹 절망하고 낙심할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견디기 어려운 시험이었습니다. 믿다가 낙심이 되어 교회를 떠난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성도들은 굳게 예수님을 믿고 있었습니다. 고난이 그들을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재산도 명예도 평화도 건강도 없습니다.
흔히 말하듯이 에수님을 믿고 복을 받는다. 평안을 얻는다라는 것과는 거리가 먼 믿음의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현실적으로 에수님에게 얻는 것이라고는 고난받게 없었습니다. 이것이 당시 서머나 교회의 실상이었습니다.

여기에 또 다른 고난이 있었습니다. 사람이 고난을 당할 때 누가 옆에서 위로를 해 주면 훨씬 견디기 쉬울 것입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이 의로운 행위에 대해서 누군가 알아주는 사람이 있겠거니 하고 실제로 그런 식의 위로를 받으면 고난의 보람이라도 있을 것입니다.

에이즈에 걸린 사람의 가장 큰 고통은 병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그를 이상하게 죄인 취급하는데 있다고 합니다. 꼭 부정한 짓을 해야 그 병이 걸리는 것이 아닌데도

서머나 교회 성도들의 고난은 그런 것이었습니다. 욥이 고난을 당할 때 견딜 수 없어 한 것은 그의 친구들이 그를 정죄하는 것이었습니다. 서머나 교회의 성도들도 그런 고난이 겹쳐 있었습니다. 고난 속에 비난과 조롱, 몰이해와 오해가 견디기 어려운 시련이었습니다. 외롭고 때로는 부끄럽기 까지한 고통, 이것이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고통입니다. 서머나 교회는 그런 시련을 당하고 이었습니다. 아주 오랫동안

2차 대전 말기의 이야기입니다. 온 세계를 손에 넣겠다고 광분하고 있는 히틀러를 보고 본 헤퍼 목사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히틀러를 죽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 그는 히틀러에게 체포되고 캄캄한 감옥에서 처형 날짜를 기다립니다. 그는 감옥에서 편지를 썼는데 그것을 사람들은 본 헤퍼의 '옥중 서신'이라고 부릅니다. 그의 글 가운데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내가 고통을 당하는 것, 내가 매 맞는 것, 내가 죽은 것-이것이 그리 심한 고통은 아니다. 나를 참으로 괴롭게 하는 것은, 내가 감옥에서 고난을 당하고 있는 동안 밖이 너무 조용하다는 사실이다. 그가 교회를 위해 고난을 당하고 있을 때 바깥 사람들은 침묵을 하고 있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한 마디로 말해서 밖에 있는 사람들이 데모라도 해야 힘이 날텐데 정의를 위한 탄원서라도 내야 힘이 날텐데, 어쩌면 이렇게 철저히 조용한가라는 것입니다. 이 외롭고 정당한 투쟁에 왜 힘을 합하는 사람이 없는 가라는 것입니다. 왜 뜻을 같이하여 불의와 싸우는 사람이 없는 가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본 헤퍼의 고통이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초대 교회도 같은 고통이 있었습니다. 더욱이 오늘 본문에서 본바 와 같이 거짓된 자들의 비방과 조롱이 있었습니다. 거짓 유대인들이 득세를 하여 의인 인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잘 섬기는 것 같으나 사실 사단의 하수인들이 세상을 지배한 듯하고 진실한 하나님의 종들은 너무 약해서 힘이 없어 보입니다. 이런 것들이 믿는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약화시킵니다. 충성심을 약화시킵니다.

요새는 큰 소리 내는 사람이 힘이 있는 사람 같습니다. 없어져 주었으면 딱 좋을 사람들이 세상을 위하고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위한다고 큰 소리를 치고 다니는 것을 보면 사람 바뀌는 개혁을 느끼게 됩니다.

서머나 교회의 모습이 바로 그런 모습입니다. 악한 자들은 잘되고 진실한 성도들은 핍박이나 받고 힘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런 사실을 미리 아시고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 의인의 고난에 대하여 불만을 가지지 말라. 우리 힘으로 우리 믿음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세상은 이렇게 모순 투성이고, 무질서하고, 죄악으로만 가득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아무 것도 하시지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의 실상을 안다. 너의 환난을 알고, 궁핍을 알고, 고난을 알고, 가난을 알고, 원수가 누구며, 그들이 너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도 안다. 그 잔인한 수법도 알고, 그들의 배후 세력도 알고, 모든 것을 안다. 그런데 너에게 또 한가지 아는 것이 있다. 그것은 사실 네가 가난한 것 같지만 부요한 자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아는 것 보다 주님이 우리들을 더 잘 아시고 정확한 것입니다. 서머나 교회에 대하여 부요하다고 하시는 것은 그들의 믿음이 남다르기 때문에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다는 것은 부요함을 의미합니다. 믿음에 약속이 있고, 믿음에 기업이 있고, 믿음에 모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어도 믿음이 없으면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강하고, 믿음이 있으면 모든 것을 가진 자며, 믿음이 있으면 행복한 사람이고, 믿음이 있으면 완전한 사람이다 라고 하십니다.

기독교 역사에는 순교자들의 이야기를 기록한 순교史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순교사의 금자탑이라고 하면 서머나 교회 감독 폴리갑의 순교입니다. 그는 2세기 초 중엽부터 서머나에서 복음을 전하던 감독이었습니다. 그는 86세까지 하나님의 교회를 섬겼습니다. 고결한 인격의 소유자인 그를 선도들은 물른이고 불신자들도 존경하고 흠모를 했습니다. 심지어 기독교를 핍박하는 사람들도 그를 존경할 정도였습니다. 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폴리갑을 죽일 수밖에 없게 된 사형 집행관은 말했습니다. 감독님, 나는 이렇게 나이 많은 노인의 몸으로 비참하게 죽어 가는 것을 원하지 않오. 그러나 거짓으로라도 제발 예수를 믿지 않겠다고 말해 주시오. 그러면 당신을 놓아줄 구실이 생기지 않겠오. 자유를 얻은 다음에 어느 시골에 가서 당신이 좋아하는 예수를 전하든 말던 상관하지 않겠오.' 그 때 그는 말하기를 '86년 동안 나는 그 분을 섬겨 왔습니다. 그 분은 내게 아무런 잘못도 없고 거짓 말을 하신 일도 없으십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그 분, 아니 나의 왕을 모독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한마디로 거절을 했습니다. 그리고 세계와 교회를 위해 두시간 동안 큰 소리로 기도한 후에 화형을 당했습니다. 얼마나 위대하고 당당한 죽음입니까 당시 온 교회가 그의 순교를 애도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유럽에서는 해마다 폴리갑의 순교 일을 기념하는 행사가 거행되고 있습니다.

서머나 교회는 결코 가난한 것도, 약한 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위대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 있는데 어떻게 약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보실 때 그 교회는 부자 교회입니다. 믿음의 부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는 부자다.” 조금도 불행하지 않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자칭 유대인이라고 하는 자들 ‘스스로 잘 난 척하고 부자인 척하는 자들은 사단의 회’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그 잘난 것들을 유황불 못에 던지겠다고 하십니다.

주님은 아십니다. 이 세상의 모든 역사, 인물, 자연, 영적인 것, 자연적인 것, 지나 간 일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들, 장차 일어날 일들을 모두 잘 아시고 계십니다. ‘주님이 아신다’는 말에 사람들은 두 가지 반응을 나타냅니다. 감사와 찬송을 나타내는 사람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두려움과 염려를 가지는 사람들은 죄인들입니다. ‘주님이 아신다’는 말에 무관심한 사람들은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유일한 위로와 감사는 우리들의 모든 것을 ‘주님이 아신다’는 말씀에 다 들어 있습니다.

페루의 어느 지방에 성당이 있었습니다. 그 교회는 대단히 큰 교회여서 신부가 여러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자들이 유난히 한 신부에게만 열심히 고해 성사를 하고 다른 신부에게는 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신부들은 이 일을 심히 불쾌하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니 그 신부는 귀머거리였습니다. 신자들은 귀먹은 신부에게 죄 고백하기를 좋아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죄를 신부라 할지라도 알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에게만 말씀하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속 깊은 진실을 누가 압니까 하나님이 아시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사람을 아는 것 같지만 잘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설혹 모든 것을 다 안다고 해도 문제를 해결하고 진실을 보존하기에는 역부족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들의 모든 것을 다 아시면서 우리들의 진실을 보존하시고 은혜와 축복과 구원을 주십니다.

주님의 위로의 말씀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하십니다. 주님이 아시기에 어떤 환난, 어떤 오해, 어떤 핍박이 와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씀은 매우 귀한 말씀입니다. ‘충성’의 헬라어는 ‘피스티스’입니다. 이 말씀을 자세히 설명하면
첫째, 진리에서 출발하는 순수한 동기.
둘째, 매사에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독일에 한 경건한 노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가족도 없이 혼자 사는 이 노인은 외롭고 고독한 중에도 언제나 경건한 생활을 했습니다. 이를테면 길을 갈 때도 좋은 길은 놔두고 나쁜 쪽으로만 걷습니다. 주님에게 좋은 길을 내 드리고 자기는 나쁜 쪽을 걷는 것입니다. 식사를 하면서도 자기 자리보다 더 좋은 의자를 앞에 놔두고 음식도 좋은 음식을 앞에 두었습니다. 그것도 주님을 대접하는 마음이 그렇게 하게 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는 날 그 노인은 가장 좋은 의자를 자기 머리맡에 두게 했습니다. 그 분은 그 의자에 주님이 앉아 계시면서 자기의 임종을 보고 계시다고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 노인의 장례식 때에는 하늘에서 이상하고 밝은 빛이 비추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충성입니다. 한 순간도 주님을 떠나 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사는 사람. 늘 가장 좋은 것을 드릴 줄 아는 사람, 주님이 보시고, 주님이 아시고, 주님이 들으시고, 주님이 처리해 주신다고 믿는 사람, 그리고 그렇게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아신다는 것으로 만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이 아신다는 말씀 가운데는 우리들의 문제 해결,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가 모두 포함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아신다는 믿음, 그것은 우리들에게 최고의 행복이 되고, 지혜가 되고, 능력이 되고, 충성이 됩니다.

충성의
세 번째 특징은 진실한 중심을 가지고 성실히 사는 것을 말합니다. 마음으로 진실한 것만이 아니라 그 진실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충성의
네 번째 요건은 인내입니다. 하다가 말면 아니한 것만 못하다는 우리 속담도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 부딪치던 주님이 아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끝까지 인내하여 하나님에게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씀은 두 가지고 해석을 합니다.
(1). 죽음에도 충성하라는 말씀입니다.
경제적인 손실, 체면, 명예 훼손, 죽음의 고통이 있어도 주님에게 충성하라는 말씀입니다. 죽은 한이 있어도 진실을 버리지 말고, 믿음을 버리지 말고, 사랑을 버리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2). 숨을 거두는 그 시간까지 진실을 잃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기대하는 바는 죽음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죽도록 까지 충성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이렇게 다시 말할 수 있습니다. “내가 네 실상을 다 안다. 그대로 죽어라. 죽도록 충성하다 똑바로 죽어라. 그러면 천국에서 생명의 면류관을 주어 행복하게 영생을 얻도록 해 주마” 이것을 종말적 메시지라고 합니다.

누명을 벗겨 주겠다. 원수를 갚아 주마. 기어코 사람들 앞에서 너를 높이겠다. 물른 이런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원수를 갚아 주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우리가 천국에서 생명의 면류관을 쓰는 것과 비교하면 별로 가치 있는 일들이 아닙니다.

영생의 생명의 면류관, 그것이 충성하는 사람에게 약속하신 최고의 영광입니다. 주님은 구 최고의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죽도록 충성하여 최고의 영광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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