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잃은 것을 걱정하지 말라 (삼상 09:15-21)

첨부 1


이스라엘에 기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목축업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암 나귀를 잃어 버렸습니다. 목축을 하는 사람이 짐승을 잃는 것은 재산을 잃은 것이기 때문에 보통 일이 아닙니다. 기스는 그 아들을 불어서 잃은 나귀를 찾아오라고 했습니다. 생각하면 이것처럼 막연한 일이 없습니다. 나귀가 어디를 간 줄 알아서 나귀를 찾으려 다닌다는 말입니까 기스라는 사람은 답답하고 안타까워 그저 아들을 내 보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아들은 군소리 하나 없습니다. 어쩌다가 나귀를 잃어 버렸느냐 묻지도 않고, 어디 가서 찾으라는 말인가 라고 따지지도 않습니다. 반드시 찾는다는 보장도 없이 아버지가 말씀하시니 그저 집을 나선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그는 그렇게 막연하게 사흘을 헤매고 돌아 다녔습니다. 이 골짜기 저 골짜기, 이 마을 저 마을로 찾아다닙니다. 더구나 그것은 살아 움직이는 짐승이어서 한군데 가만히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런 식으로 무엇을 찾아다니는 것을 암중모색이라고 합니다. 기스의 아들은 암중모색을 사흘이나 하고 생각한 끝에 “아버지가 걱정을 하시겠구나. 사흘씩이나 소식을 전하지 못했으니 얼마나 걱정을 하실까” 그래서 가던 길을 멈추고 같이 다니던 사환에게 말합니다. “그들이 숩 땅에 이른 때에 사울이 함께 하는 사환에게 이르되 돌아가자 내 부친이 암 나귀 생각은 고사하고 우리를 위하여 걱정 하실까 두려워하노라[삼상 9:5]”
사환이 이 말을 듣고 대답하기를 돌아 갈 때 돌아가더라도 사무엘 선지자가 살고 있는 곳이 여기서 가까우니 그곳에 들려 한번 물어 보고 돌아가자고 권합니다. 어디로 가야 암 나귀를 찾을 수 있을는지 가르쳐 주실 지 어떻게 알겠느냐 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울에게 한가지 걱정이 생깁니다. 선지자를 찾아가려면 이 보다 더 좋은 구실이 있어야 하는데 나귀 찾아 달라고 선지자를 찾아가는 것이 쑥스럽고, 그냥 빈손을 가지고 가자니 면구스럽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털었습니다. 그랬더니 은 한 세겔의 1/4의 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극히 작은 예물이지만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기 때문에 그것을 가지고 가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봅시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이 이르기 전에 이미 사무엘에게 이렇게 말씀을 해 놓으셨습니다. “내일 이맘때에 내가 베냐민 땅에서 한 사람을 네게 보내리니 너는 그에게 기름을 부어 내 백성 이스라엘의 지도자를 삼으라 그가 내 백성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리라 내 백성의 부르짖음이 내게 상달하였으므로 내가 그들을 돌아보았노라 하시더니[삼상 9:16]”
하나님에게는 별개 아니겠습니다만 우리들에게는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미리 사울이 나귀를 찾기 위해 선지자를 찾아 올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엄청난 다른 명령을 하신 것입니다.
사울이라는 사람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라는 말씀이 것입니다. 사울은 이 하나님과 사무엘 선지자 사이에 그에 관한 어떤 결정이 있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고 사무엘을 찾아갑니다. 그런데 사울은 사무엘을 찾아가서 당나귀 찾은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당시에 최고의 지도자이던 사무엘 “나와 함께 먹고 여기서 집을 자고 내일 돌아가라”는 말씀을 들은 것입니다.
사울은 이것이 어찌된 영문인지 전혀 알 길이 없습니다. 나귀를 잃어버린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나귀를 찾다가 찾을 수 없어 나귀 소식이나 알아보려고 사환의 말을 쫓아 사무엘에게 왔는데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게 되었으니 어안이 벙벙하고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나귀를 찾으려 심란한 심정으로 집을 나서서 고생고생을 했지만 나귀는 다시 찾고 그 덕택에 왕이 되었으니 이런 일이 다시 있다 하면 나귀가 아니라 준마라도 잃어버릴 것입니다. 처음에는 우울하게 시작한 이 사울의 영광의 스토리가 상상할 수 없는 해피 엔딩으로 끝이 난 것입니다.

알고 보면 사울이 한 일은 단순히 아버지의 말에 순종한 것밖에 없습니다. 그런 일이 있으리라고는 상상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 계산도 없었습니다. 그저 아버지의 말씀대로 순종한 것뿐입니다. 그런데 그는 엄청난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의 서신 가운데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벧전 1:6]”

사는 사람에게는 걱정이 늘 있습니다. 생각이 없이 사는 사람은 걱정을 그대로 희색 시키지 않고 받아 걱정을 걱정합니다. 생각하며 사는 사람은 그 걱정을 좋게 해석하려 합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은 걱정을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재료로 생각을 합니다. 잠깐 걱정하게 된 일로 인해 오랫동안 하나님의 축복을 받습니다. 걱정을 억지로 떨쳐 버리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걱정에 너무 집착하거나 매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무 비가 많이 온다고 걱정하지 말고 많은 비가 온 후에 깨끗해지는 공기를 생각하라’는 말입니다.
야고보는 1:2에서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약 1:2]” 걱정거리가 생기면 걱정에 매이지 말고 오히려 이 일로 인해 생길 하나님의 축복을 생각하고 크게 기뻐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걱정을 잘 소화하며 사는 사람을 기독교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사는 사람이 왜 걱정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걱정을 걱정으로 받지 말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받으라는 것입니다. 잃은 것을 염려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무기물은 존재하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물이나 돌들은 흐르는 것으로, 그자에 가만히 있는 것으로 존재의 가치와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유기물인 동물이나 식물은 성장하므로 자기의 가치를 나타냅니다. 성장하지 않는 동물이나 식물은 존재의 가치가 없습니다.
더욱이 사람은 존재하는데 만 머무르는 것이 아닙니다. 창조적 인간 됨의 의기가 있습니다. 살았다는 것, 존재한다는 것으로만은 사람의 의미가 없습니다. 놓여진 형편대로, 직선적으로 그저 살아가는 것이 사람이 사람되게 하지는 못합니다. 역경을 무릅쓰고, 환난을 이기며, 어려운 걱정거리를 뚫고 나가 이를 통해 역사를 만들어 내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어야 인간이 됩니다.

‘근심’이라는 말은 본디 ‘마음’이라는 말과 ‘나누인다’라는 말이 합해 된 말입니다. 마음이 나누어져 걱정거리가 생깁니다. 두려움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고 근심은 내 속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어느 보고서에 의하면 미국에서는 하루에 600만개의 수면제가 팔린다고 합니다. 하루에 그 만큼 많은 사람들이 수면제를 먹어야 잡을 잘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그 사람들이 걱정과 고통과 흥분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기인우천이라는 고사 성어가 있습니다. 옛 날 중국 '기'라는 나라에 청년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늘 길거리에 앉아 걱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 걱정 때문에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지나가던 사람이 물었습니다. '무슨 걱정이 그렇게 많오' 그는 말했습니다. '하늘이 무너질까 걱정이 되어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이 어이없는 대답을 듣고 그 사람이 말합니다. '옛 날에 한번도 하늘이 꺼진 적이 없고 앞으로도 하늘은 무너지지 않을 것이요. 또 무너진다고 해도 우리 인간이 무엇을 어떻게 하겠오.' 그제서 청년을 떨떨 떨고 일어났다고 합니다.

주님이 하신 말씀을 들으십시오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지 말라마 6:31” 주님이 우리들을 보고 염려 말라 하신 것은 까닭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먹이시고 입히시고 살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마 6:27]”-걱정해 보아도 소용없는 일을 왜 걱정만 하느냐 하시는 것입니다. 네가 스스로 자랄 수 있느냐 스스로 젊음을 다시 찾겠느냐 죽을 사람이 다시 살아나겠느냐 무슨 유익이 있어 밤 낮 그렇게 걱정에 쌓여 살고 있느냐 걱정 근심이 있거든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찾아라. 하나님을 더 잘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걱정의 방향을 돌려라. 무엇을 먹을까. 어떻게 하면 더 잘 살까를 생각하는데서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릴 수 있을까로 방향을 돌려라 하십니다.

예수님은 또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 이 말씀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실 모든 근심은 불 신앙에서 옵니다. 하나님의 경륜을 믿고, 하나님의 능력을 진실로 믿는다면 염려 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에게 걱정이 생기면 내 믿음에 문제가 생기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지 하나님의 사랑이나 하나님 자신에게 문제가 발생한 것은 아닙니다. 믿음이 있는 곳에는 염려가 없습니다. 우리는 염려를 할 것이냐, 하나님의 사랑과 보살피심을 믿고 평안한 마음을 가지고 살 것이냐의 양자택일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세상 걱정에 매여 살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걱정이 생기거든 믿음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사람이 걱정을 하는 이유는 일을 한가지 방향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좋은 방향이 아니라 나쁜 방향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좋지 못한 집착은 결국 사람을 망칩니다. 정신의 안정을 잃게 합니다. 감정을 분열시키고, 믿음을 약하게 하고, 인격을 파멸로 이끌어 갑니다. 객관적 판단을 흐리게 하고 결국 인생을 망하게 합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이 근심을 해결하는 사울의 경우를 봅시다.

1. 그는 아버지의 염려를 맡았습니다.
잃어버린 나귀를 찾아오라는 막연한 명령에 의의를 달지 않았습니다. 어쩌다가 잃어버리고, 나보고 그것을 찾아 오라 하느냐 하지 않습니다. 어디서 찾을 것인 가도 말하지 않습니다. 찾아오너라 하시니 찾으려 가는 것입니다. 순종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앉아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을 했다는 것입니다.

걱정은 대게 앉아서 합니다. 서서 걱정하는 사람은 적고, 열심히 일하면서 걱정에 사로잡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염려가 있거든 열심히 일을 하십시오. 뛰면서 걱정하십시오. 생각으로 ‘된다 안된다’에 사로 집혀 근심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되든 안되든 부딪쳐 보는 것입니다. 앉아서는 생각나지 않던 일이 일을 하면서 생각이 나고, 막상 태산같던 일이 사실 속이 빈 강정 같은 것일 경우가 많습니다.

샬로테라는 여왕에게 공주가 있었습니다. 나이 어린 공주는 책을 좋아했습니다. 어느 날 그 공주는 아주 큰 책을 보고 있다가 갑자기 울면서 '마마, 이 책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여왕은 그 딸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면서 말하기를 '울지 말라. 오늘은 몰라도 내일은 알게 될 것이다.' 그 공주는 이제 겨우 6살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마 6:34]”
앞에 일을 미리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 일에 대한 걱정은 그 때 가서 해도 늦지 않습니다. 오늘은 평안히 사십시오. 미리 땅겨 걱정하느라고 속을 끌이고 잠을 못 자고, 마음이 어두워지고 행동이 마비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그 어려운 일을 내가 해결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늘을 보고 큰 한숨 한번 쉬고 너털 웃고 잊어버리십시오. 하나님에게 아끼십시오. “수고하고 무거운 집을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해 주겠다”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2. 사울은 염려를 하면서도 생각을 돌립니다.
사흘씩이나 열심히 돌아다닌 끝에 새로운 생각을 합니다. 나귀 찾으라 보낸 아들이 돌아오지 않으니 나귀는 고사하고 아들 잃어버리겠다 라고 생각할 아버지를 생각한 것입니다.
여러분도 걱정이 있으시거든 방향을 한번 돌려 생각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다른 각도로 다른 가능성으로 생각을 바꾸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소원을 두고 몇 년씩 기도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대단히 좋은 믿음의 태도입니다. 그러나 그 기도가 응답이 되었다고 다른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고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

사울은 이제 아버지를 걱정합니다. 나귀의 일이 아니라 자기 때문에 걱정하실 아버지를 생각합니다. 이제 훨씬 더 높은 인간적인 걱정을 하게 됩니다. 이것을 연단 가운데 성숙해진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건강을 잃는 것은 인생의 모든 것을 잃는 것이다’ 우리에게 주요한 것은 건강이고, 믿음이고, 진실입니다. 건강을 해쳐 가면서 걱정하고, 천국을 포기하는 불 신앙을 가지고 염려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우리에게 근본적이고 가장 높은 가치가 있는 것은 우리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걱정에 사로잡혀 고민하는 우리들을 걱정하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3. 우리는 사울에게서 또 한가지 배워야 할 점이 있습니다.
사무엘을 찾아 간 그 태도입니다. 하나님에게 여쭈어 보려는 것, 하나님의 종을 찾아가 문제의 해답을 얻으려는 것, 기도로써 하나님의 응답을 받으려는 것등이 사울의 좋은 점입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하십니다.
걱정거리가 있습니까 기도하십시오. 걱정을 멈추고 기도를 하되 아무 염려를 말고 기도하십시오. 기도 없이 걱정만 하는 것은 마귀의 온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결국 시험에 빠지고 낙심이 되어 죽을 지경이 되고 맙니다.

우리가 걱정하고 있는 일을 하나님은 이미 해결하시고 계실 때가 많습니다. 보십시오. 사울이 걱정하고 있던 나귀는 이미 사흘 전에 찾아 집에 들여놓고 있었습니다. 사흘 전은 바로 사울이 아버지의 명령을 받고 집을 떠났던 시간이 아닙니까 말하자면 사울은 사흘씩이나 쓸데없는 걱정과 수고를 하고 다닌 것입니다. 사흘 전에 사무엘을 찾아 왔더라면 헛수고를 안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걱정이 생기면 제일 먼저 하나님에게 와 의논을 하십시오. 사흘 전에 문제가 해결되었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은 얼마나 하나님에게 드릴 제물 때문에 걱정이 많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이미 “여호와 이레”로 다른 제물을 준비해 놓으셨던 것입니다.

안식일 새벽에 여인들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갑니다. 그들의 손에는 예수님의 시신에 바를 향이 들려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그 향과 함께 걱정도 가득했습니다. 가나마나 그 무덤에는 로마 병사들이 버티고 있을 것이고, 그 무덤 앞에는 돌문에 무겁게 막혀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여인들은 그 무덤을 찾아갑니다. 그들은 어쨌든 해 보자 하고 새벽에 그곳을 갑니다. 만일 가보나 마나 다 라고 포기를 했다면 어떤 일이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그 무덤에 갔을 때는 병사도 무덤의 문도 이미 없어지고 부활하신 예수님만이 계셨습니다.

여러분, 얻은 것을 생각하십시오. 돈은 잃었지만 진실을 얻었고, 건강을 잃었어도 믿음을 잊은 것 아닙니까 그리고 고난 속에 명에와 겸손을 얻은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신비가 있고 여기에 인생의 즐거움이 있는 것입니다.

끝없는 염려와 걱정의 뿌리가 무엇입니까 혹 그것이 돈이나 질병이 아니라 우리들의 불 신앙이며, 개으름과 원망에 있지 아니한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기도하므로 문제를 해결하신 주님을 만납시다.

“네 암 나귀를 염려하지 말라. 찾았느니라”내가 잃은 것을 이미 찾았다. 이제 너는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이다.

걱정이 있어도 믿음으로 나가십시오. 이미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이 걱정을 해결해 주셨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