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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나셨다 (사 09:1-7, 마 04: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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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때때로 문득문득 생각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 가운데는 우리에게 좋은 인상을 준 분으로 기억되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고 부정적인 인 상을 준 사람으로 가끔 기억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에게도 이미 세상을 떠난 분들 가운데 위로와 희망을 주는 분으로 기억되는 한 분이 있습 니다. 그 분은 거창 고등학교 설립자이신 故 전영창 교장이십니다. 저는 그 분에 대한 자세 한 소개는 생략하고, 그 분에게 있었던 일화 한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분이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귀국해서 첫 번째 부름을 받은 곳이 폐교 직전에 있던 거 창에 있는 한 학교였습니다. 교장에 취임하기 위해 서울에서 거창으로 내려가 그 다음날 교 장 취임식을 가졌을 때 전교생 이백여명의 학생 중에서 취임식에 참석한 학생은 겨우 여덟 명이었습니다. 나머지 학생들은 다 인근 학교로 가버렸습니다.

 그는 빚더미 학교를 인수하고 나서 확고한 신앙심에 바탕을 둔 신념을 지닌 선생들외에 교 사로서 자질이 부족한 선생들을 내보냈습니다. 그리고 선생들의 월급을 삼만환으로 조정했 습니다. 그러나 그 삼만환마저도 지불할 수가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얼마 안되어 학교의 어 려운 사정을 안 선생들은 교장을 찾아와서 자진해서 월급을 반으로 줄이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는 교장으로 취임한 후 처음으로 희망의 빛을 보았다고 술회했습니다.

 월급을 자진해서 반으로 줄인 선생들의 열정은 불꽃처럼 타올랐습니다. 보충수업을 서로 하 려는가 하면 수업시간도 서로 맡으려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꽁보리 밥만 삶아 먹다가 그것 도 없으면 국수를 삶아 먹고 그것도 없으면 감자를 삶아 먹었습니다. 그마저 없으면 굶었습 니다. 선생들의 뜨겁고 숭고한 열정에도 아랑곳없이 학교 재정은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전임 교장이 남긴 빚의 이자가 날로 불어났습니다. 매일같이 빚쟁이들이 교장실로 들이닥쳐 아우 성을 쳤습니다. 그 많은 부채 중에는 정부 기관으로부터 대부받은 것도 있었습니다.

 드디어 그 기관으로부터 학교를 차압하겠다는 최후 통첩을 받았습니다. 그는 교장실 문을 닫고 의자 앞에 엎드려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기도는 천정 이상 더 올라가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밤을 새워가면서 기도를 해봐도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지 않는 것 같아서 그는 교장실 문을 박차고 나가 운동장 한 가운데 서서 하늘에 반짝이는 별을 바라보며 외쳤 습니다.

 하나님, 도대체 있습니까 없습니까

만약 있다면 내 기도를 듣고나 계십니까

내 기도에 응답을 하실 겁니까

차압 기간이 점점 다가오는데도 응답은 없었습니다. 그는 견디다 못해 하나님과 최후 담판 을 하기로 작정하고 거창읍에서 40리쯤 떨어진 웅양면에 있는 굴을 찾아 갔습니다. 일주일 작정하고 금식기도를 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모든 불평을 다 털어 놓았습니 다.

 하나님, 내가 거창에 돈을 벌려고 왔소

아니면 내 명예를 위해서 왔소 복음을 전한다고 당신이 보내서 왔지.

 그런데 왜 학교 운영할 만한 돈을 주지 않습니까

만약 빚을 못갚아서 제가 거창서 보따리를 싸 짊어지고 나가면 누가 더 창피하겠소

하나님이 더 창피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하나님 제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성경과 찬송가 외에 평소 탐독하던 우찌무라 간조의 로마서 주석과 담요 한 장만을 가지고 산에 온 그는 성경을 읽다가, 찬송을 하다가, 우찌무라의 책을 읽다가 너무 피곤하고 답답하 면 잠깐동안 눈을 붙이면서 나흘 동안을 하나님께 애걸복걸 하였지만 아무 도움도 없었습니 다. 마음만 더욱 초조하고 답답할 뿐이었습니다.

 나흘째 되던 날 오후에 그는 더 견디지 못하고 동굴에서 나와 그 앞에 있는 바위위로 올라 갔습니다. 참담한 심정으로 바위 위에선 그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이고 무엇이고 다 집어치우고 하나님이 없다는 광고를 일간 신문에다 큼지막 하게 내 고 싶었습니다. 고향에 마지막 남아있는 전 재산인 논 열세 마지기를 다 팔아서라도 광고를 내서 다른 사람은 하나님에게 속아서 피해를 입지 않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바위 아 래를 내려다 보았습니다.

 아래는 깊은 골짜기였습니다. 그는 문득 학교에서 배운 것이 생각났습니다. 이 지구는 자전 을 하면서도 공전을 한다는데 그 속도는 제트기로 백두산과 한라산을 한 시간에 오갈 수 있 는 속도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털털 소리가 나고 어지러울 텐데 아무소리도 없이 털 털거리지도 않고 아주 조용하게 달리지 않는가. 기계는 완전하면 완전할수록 소리가 없고 또 부드럽게 움직이지 않는가. 그렇다면 이 큰 지구가 이렇게 빨리 달리는데 그것도 자전을 해가면서 소리 하나 나지 않고 부드럽게 달리는 그 배후에는 이 지구를 지으신 분이 없단 말인가

이런 생각에 잠겨 있는 바로 그때, 해는 함양쪽에 있는 산 너머로 막 넘어가려는 순간이었 습니다. 석양의 아름다움! 하늘을 붉게 물들이면서 산능선에 걸린 태양은 장엄하다 못해 신 비로웠습니다. 어디 그뿐인가, 저녁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연두빛 잎새들의 생명의 윤기, 저 녁 노을에 비친 풀잎과 나뭇잎은 한 폭의 그림 이상의 그 무엇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물었습니다.

 영창아, 이 아름다운 그림의 배후에 화가가 없을까

화가 없이도 이렇게 아름다운 그림이 그려질까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면서 어둠이 서서히 짙어지자 주위의 새들이 울기 시작하고 이름 모를 벌레들의 울음소리도 들렸습니다.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는 소리, 계곡에서 흐르는 물 소리, 그것은 자연이 완벽한 화음을 이루어 빚어내는 아름다운 합창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영창아, 이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는 음악가가 없을까

그는 자신도 모르게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리고는 깊이 고개를 숙이고 하나님께 숙연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죄송합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한 것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다시는 하나님의 존재와 사랑을 의심하지 않겠습니다. 제 빚을 다 갚아 주시든지 갚아 주시 지 않든지 거창고등학교에서 일하겠습니다.

 기도를 하는 그의 두 뺨에 뜨거운 눈물이 흘렀습니다. 기도를 마친 그는 그날 밤 굴속에서 평온하게 잠을 잤습니다. 학교에 돌아오니 미국에서 온 전보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당신 구좌에 2,050불. 조우 보기.

 곧장 서울로 올라가서 달러를 바꾸어 정부 기관의 빚을 다 갚았습니다.

 학교 채무로 깊은 흑암에서 고통받던 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빛이 비치었습니다. 그가 무겁 게 멘 채무의 멍에에서 그를 해방시키셨습니다. 무거운 채무의 멍에를 메고 고통을 겪는 한 사람의 고통을 외면하시지 않는 하나님은 역시 한민족 공동체가 겪는 어두움의 고통도 외면 하시지 않습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본문에서 바로 그 하나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메시아의 노래입니 다. 어두운 가운데서 하나님의 빛으로 오실 메시아을 찬양하는 시입니다. 이사야서에는 고난 의 종의 노래가 있고 메시아의 노래도 있습니다. 본문에 기록되어 있는 스불론과 납달리는 이스라엘 남단과 북단에 위치한 이스라엘 지파들로서 강대국 앗수르 침공 때 가장 고통을 많이 받았던 지파입니다. 그 대지 위에는 흑암이 짙게 덮여있었습니다. 예언자는 그 흑암 가 운데서 고통을 겪고 있는 백성들이 큰 빛을 보고 기뻐할 것을 예언했습니다.

 그 때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기뻐할 것입니다. 그 때 그들의 기쁨은 추수때의 즐거움이나, 탈취물을 나눌 때의 기쁨보다 더 클 것입다. 예언자 이사야의 예언은 반드시 어 느 지역을 국한 시키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에 나타난 지역은 어디까지나 상징적 의미 를 갖고 있습니다. 그렇게 고통과 억압으로 신음하는 사람들에게 장차 하나님의 구원의 빛 이 임할 것을 예언했습니다.

 흑암 가운데 행하는 사람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구원의 빛이 인간의 역사에서 한 아기의 탄 생의 사건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한 아기의 탄생이 흑암 가운데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빛의 사건입니다.

 그 아기의 이름은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현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이십니다.

이렇게 한 아기에게 많은 이름이 부여되는 것은 그가 고통받는 사람에게 주는 다양한 영적 의미를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의 역사에서 한 아기의 탄생과 함께 그들이 메고 있던 무거운 멍에서 풀려나는 경험을 여러 번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애굽의 억압의 사슬에 얽매어 신음하 고 있을 때 모세의 탄생은 그들의 억압의 사슬에서 풀려나는 기회였습니다. 그들이 블레셋 의 억압의 사슬에서 신음하고 있을 때 아이 사무엘의 탄생은 흑암 가운데서 고통받든 이스 라엘 백성에게 빛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아기 삼손의 탄생 역시 그들이 억압의 사슬에 서 풀려나는 해방의 시간을 알리는 사건이었습니다.

 예언자 이사야가 예언하는 한 아기의 탄생 역시 흑암 가운데서 고통하는 백성들에게 빛을 비추는 사건입니다. 그런데 그전의 아기들과 차이점은 이 아기의 탄생으로 미치는 그 빛의 영향은 이스라엘이라는 한 나라의 영역에 국한되지 않고 전 인류에게 파급됩니다.

 예수께서 유대땅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을 방문하셨을 때 복음서 기자 마태는 그 사건이 예언자 이사야의 예언의 말씀의 성취로 보았습니다. 그때부터 어두운 역 사의 밤이 새로운 아침으로 시작되고 있음을 내다보았습니다. 궁극적으로 만물을 새롭게 하 시는 하나님께서는 지난날 역사의 한 시점에 인간으로 방문하셔서 하나님 자신의 계획을 분 명히 드러내신것입니다.

 태초에 온 우주가 어둠으로 덮여있을 때 하나님의 영이 수면에 운행하시면서 먼저 어두움 가운데 빛이 있게 하신 하나님은 그 후 계속 빛으로 어둠이 우리의 대지를 뒤덮는 것을 허 락하지 않으십니다. 그의 피조물들이 어두움 가운데서 신음하며 고통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 으십니다.

 한 아기의 태어나심 가운데서 빛으로 임재해 오시는 하나님의 현존이 어두운 대지 위에 새 로운 형태로 나타나셨습니다. 그것은 평화의 왕으로 오셔서 세상을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이 아기의 탄생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포기하시지 않으셨다는 유일한 확인입니다. 어둠의 세 력이 이 세상을 지배할 수 없다는 분명한 선언입니다.

 대강절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 주는 기간입니다. 일년중 한 해를 거의 다 보내면서 대강절을 맞이 한다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현실에서 언제나 희망의 시간을 기다리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오시고 계시는 하나님의 때입니다.

 우리의 현실이 비록 어둡고 고통스러운 때도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적절한 때에 우리 에게 기묘자(카운셀러), 모사, 전능하신 분, 영존하시는 분, 평강의 왕으로 찾아오셔서 우리 의 멍에를 벗겨 주시곤 합니다.

 금번 대강절에 우리는 평강의 왕으로 오시는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립니다. 우리 개인적으로, 국가적으로, 세계적으로 그 어느 때보다 우리에게 평강의 왕으로 오시는 하나님이 기다려지 는 때입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새해, 좀더 나아가서 우리의 미래가 영원한 흑암의 고통으로 끝난다면 우리가 살아야 할 의미는 없습니다.

 그러나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새해에 우리에게 평강의 왕, 우리의 고통과 멍 에를 벗겨주시는 위로자로, 모사로, 우리에게 찾아 오실 것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어두운 역 사의 현실에서 빛으로 오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대강절에서 내다보는 새로운 한해는 우리에게 희망과 기대를 갖게 합니다. 그 희망은 공허 한 것이 아닙니다. 오시고 계시는 하나님께 대한 희망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언제나 실재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 실재 앞에서 초조, 불안, 조급함에서 벗어나 젖먹이가 어머니 품에 안 겨 깊이 휴식을 취하는 것처럼 평온 가운데서 잠잠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분이 진정 하나 님 되심을 보곤 합니다.

 우리 개인의 역사, 인간의 역사는 그러한 반복 가운데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반복 가운데서 계속해서 성숙된 그리스도인으로 되어가게 됩니다. 우리를 얽어매고 있는 모 든 멍에를 벗어 버리며 자유인으로 되어갑니다.

 금년 한해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시지 않았다면 금년 한해는 매우 어두웠을 것이며, 우 리의 삶은 매우 무미건조하고 지루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금년 한 해도 오시고 계시는 하나 님은 우리의 삶에 깊이 찾아오셔서 개입해 주셨습니다. 금년 한해 살아온 결론도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진정 살아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겸손히 그분 앞에 머리를 숙이는 것이 금년 한해의 삶의 결론입니다.

 그러면서 다시 시작되는 한해를 그 하나님의 오심과 함께 시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어두움이 있는 현실에서 희망으로 시작해서 위로와 감사로 한해를 마감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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