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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앉은뱅이1-기적의 의미 (행 03: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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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의 대표적인 사건은 오순절 성령강림이다. 그 뒤를 이어 베드로와 요한에 의하여 앉은뱅이를 고치는 사건이 나온다. 사도행전은 왜 처음에 이런 시간들을 서두에 놓은 것일까
이런 일들은 복음서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시고 가르치시고 기적을 일으키시며 귀신을 쫓아내신다. 그러나 이것이 예수 믿으면 행복하고 병에 걸리지 않으며 꼭 귀신이 쫓겨난다 이렇게는 말할 수 없다. 성경은 이 사건들을 그런 의미로 도입하지 않는다. 우리는 사도행전 3장에 나오는 베드로와 요한에 의하여 앉은뱅이를 고치는 사건과 똑같은 어떤 하나의 모형을 마태복음에서 우선 만날 수 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색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저희를 고치시더라”(마 4:23-24)
복음서에는 복음을 전했다는 것과 귀신을 쫓아냈다 환자를 고쳤다는 것이 늘 뭉쳐진 사건으로 소개되고 있다. 여기서 첫 번째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하시던 일이 교회에 옮겨졌다는 지적이 사도행전 기록의 첫 번째 목적이다.
복음서에서는 예수님께서만 혼자 하늘나라에 관한 말씀들을 하시고 그 권세를 시행하시며 제자들은 모두가 그 일에 대한 대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사도행전에 오면 주님께서 하시던 일이 교회에, 즉 신자들에게 이양된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오늘날 교회가 가져야 하는 책임과 권리를 찾아보게 되는 구절을 만난다.
“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서 요단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신대 요한이 말려 가로되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마 3:13-16)
주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맨 처음으로 시작하는 사건이 세례 받은 일이다. 그리고 4장 초기에 나오는 것같이, 시험받으시고 난 뒤에 복음을 실제로 전하신다. 이와 똑같이 사도행전도 이 예수님의 처음 공생애를 염두에 두고 배열을 그렇게 한 것 같다. 성령이 임하고 천국복음을 전하되 그 전함으로 말미암아 나오는 기적이 한데 어우러져 나오는 것으로써 사도행전을 기록하고 있는 셈이다.
교회에게 준 이 권세, 즉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이것이 어떤 권세냐 하는 것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옛날에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오셔서 하셨던 일, 즉 우리가 이제 구원을 얻어 도대체 어떤 부름을 받았느냐 하는 것을 먼저 아는 것이 이 문제를 푸는 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열쇠가 된다.
그래서 귀신을 쫓아낸다든지 기적을 일으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주님의 공생애에 있어서도 천국복음을 전하는 것과 이것이 뒤섞여 나오는가를 알아야 한다. 사도행전에서도 초대교회에 허락된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것과 그 실행하는 일에 있어서 왜 기적이 도입되는가 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먼저 우리가 알 것은 기적이 우리로 불행을 면하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 것만이 일차적인 목표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 때에 귀신들려 눈 멀고 벙어리 된 자를 데리고 왔거늘 예수께서 고쳐 주시매 그 벙어리가 말하며 보게 된지라 무리가 다 놀라 가로되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하니 바리새인들은 듣고 가로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 내지 못하느니라 하거늘 예수께서 저희 생각을 아시고 가라사대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리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사단이 만일 사단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저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 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저희가 너희 재판관이 되리라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마 12:22-29)
이 말씀 가운데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이 하나님 편에 선 것이 아니라는 사람들이 나온다. 종교 지도자들과 권세자들은 예수님을 나쁜 사람으로 몰아야 될 입장에 서 있었다. 그들은 눈 앞에서 벌어지는 기적을 부인할 방법이 없으니까 예수님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귀신이 서로 싸울 리 없고, 기적이 나타나는 것은 빛이 비추는 곳에 어두움이 쫓겨가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말씀하신다. 병을 고쳐 내고 귀신을 쫓아내는 일이 복음전파와 함께 등장하는 일은 이 이유 때문이다.
우리는 사망과 죄악의 종 된 자들이다. 우리를 주께서 구원하시려면 먼저 우리를 붙잡고 있는 주인을 쳐서 항복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구원이란 우리가 주의 말씀을 듣고 동의하고 항복해서 마음에 감동하여 온 것이 아니고 우리를 붙잡고 있던 주인이 우리를 붙잡고 있던 힘을 빼앗긴 것이라는 것이다. 구원은 이와 같은 두 가지 국면이 있다.
대표적인 설명으로 출애굽 사건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서 맨 처음에 해야 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동의를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붙잡고 있는 애굽이라는 나라를 깨뜨리는 것이다. 바로가 항복해야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는다. 이것이 구원이다. 이렇게 죄와 사망의 노예가 되어 저주와 심판 아래 있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우리를 붙잡고 마귀 사단을 쳐서 우리를 꺼낸다. 그것이 복음이라는 뜻이 이런 기적으로 설명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기적이 갖는 가장 중요한 뜻이다.
그런데 바로 이 대목, 이 부분이 권세에 관한 싸움이며 일차적으로 우리와의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들어와 이 흑암의 권세를 깨뜨려 우리를 꺼내는 문제라는 것을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한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골 1:13)
구원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우리의 동의, 결심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아닌 제 삼자끼리의 문제가 먼저 해결되어야 한다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한다. 지금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향하여 명령하는 것은 바로 이런 권세가 이양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교회와 신자란 이런 권세를 갖고 있는 것이다.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낫게 할 수 있다는 권세가 아니라 바로 신령한 의미에서 흑암의 권세들에게 빛을 비춰 저들을 쫓아내고 눈 멀고 귀 먼 자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해 낼 수 있는 일을 부여받고 그 권리와 권세를 갖고 있는 자로 서야 하는 이 특권과 이 사명이 있다는 것을 설명하고 싶은 것이 사도행전 3장 서두에 이 기적의 말씀이 있는 것이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엡 2:1-2)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엡 4:17-19)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 5:8)
이상은 불신자와 신자를 나눌 때 가장 대표적인 설명들이다. 그러니까 빛이다 하는 얘기는 마태복음에서 요구하는 것같이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생명과 영원과 절대를 알고 있는 자들이다. 불신자들은 이것을 모르고 있는 자들이다. 사실은 그래서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있어서 이 복음을 내용으로 전할 방법이 없다. 그래서 기적이 도입되곤 한다. 너희가 알고 있는 법칙이 전부가 아니다. 죽으면 끝이다. 그런데 어떻게 살았느냐. 죽음이 끝이 아니다. 영원한 생명이 있다. 내세가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체계, 우리가 알고 있는 질서와 법이 전부가 아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기적이 같이 도입되고 있는 것이다.
신앙의 궁극적인 목표는 단순한 병의 치료에 있지 않고 영원을 준비케 하는 데 있다. 세상 편하고 육신이 편하면 예수 믿는 경우가 드물다. 그래서 우리가 갖고 있는 형편이 어렵고 힘들어 오늘 이 자리에 오게 됐다면 그것도 감사한 일이다. 사도행전 26장에서 바울은 자신의 사명, 자신을 부른 주님의 부름에 관한 설명 속에서 이것을 뚜렷하게 밝히고 있다.
“내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니이까 주께서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일어나 네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사환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저희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행 26:15-18)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겠다는 것이다. 성경의 복음증거는 무감각하고 관심 없는 한 영혼에게 가서 갖은 수단을 써서 녹여서 예수 믿게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복음에 대한 증거를 방법론적으로는 그렇게 할 수 있다.
병고침을 위해,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사업의 성공을 위해 교회에 오도록 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이 내용이 되면 안된다. 성경의 내용은 결단코 우리의 세상 삶을 편하게 하며 세상에서의 승리를 약속하는 어떤 비상이 아니다. 성경이 일차적으로 우리에게 명한 일을 우리만이 세상의 빛이고 소금이라서 저 악한 무리들이 자기 휘하에 눈 멀게 하고 복음을 못 듣게 그들의 재산을 지키고 있는 곳에 우리만이 돌격대로 그 흑암의 권세 속으로 침투해 들어가는 특공대라는 것이다. 우리가 이르는 곳에 빛이 나고 우리가 이르는 곳에 소금이 맛을 내고 우리가 들어감으로써 빛이 들어가면 어두움이 물러가듯이 먼저 객관적인 전투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권세자들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교회가 갖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런 하나의 조직체라는 의미에서의 교회가 아니라 교회라는 집단으로 모이든 신자라는 개인으로 존재하든지 모든 신자는 이 권세와 책임을 가졌다는 것이 사도행전이 우리에게 오늘 가르쳐 주고 싶은 내용이다.
우리는 우리가 상대하는 한 심령 앞에서 저들을 붙잡고 있는 권세들이 우리를 두려워함으로 도망가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즉 우리는 모든 사람 앞에 은과 금으로 대비되지 말고 내게 있는 것으로 대비되어야 한다. 세상적이지 않은 것으로 그들 앞에 우리의 존재와 책임과 특권이 발휘되는 것이다. 그것이 교회여야 하고 우리들 개인이어야 한다.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신자의 책임이고 권세이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엡 5:15-17)
이것이 모든 신자의 책임이고 권세이다. 이것 외에 신자가 신자로서 서야 할 아무런 내용도 이유도 없다. 이것을 빼앗기면 맛잃은 소금이 되는 것이다. 예수 믿는다는 것이 세상 사람들 앞에 어떤 영적인 충격이 되어야 한다. 교회는 분명히 세상과는 달라야 한다. 우리는 잘 먹고 잘 살기 위하여 교회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답게 살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리고 그런 일을 하지 않는 한 우리는 교회에 올 때마다 부끄러움을 느껴야 한다. 우리의 소원이 더 주를 닮고 주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일을 충성되이 한 것으로 만족하기까지는 스스로에 대하여 화가 날 줄 알아야 한다.
신자답게 사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하나님은 교회를 허락하시고 주의 말씀을 주시는 것이다. 신자답게 살아야 한다. 우리는 각자가 선 자리에서 은과 금을 누리는 사람이 아니라는 지적을 받아야 한다. 우리가 가진 것은 나사렛 예수인 것을 증명해야 한다. 안되면 될 때까지 해서 하나님 앞에 인정받고 세상 앞에서 우리가 빛이고 소금이라는 뜻이 무엇인지를 생애 가운데 체험해 내어야 한다. 그것을 하기까지는 스스로에게 만족해서는 안된다.
더 많이 기도하고 더 많이 말씀을 따라 우리를 경건으로 신령하게 약속 위에서 든든한 믿음으로 스스로를 단련하고 실천해야 한다. 때로는 좌절하면서 갈등 속에서 울고불고해야 한다. 그 일이 없기 때문에 기도도 없고 가슴 아픔도 없고 슬픔과 좌절이 없으므로 대신 기쁨도 없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의 이름이라” 우리가 아는 모든 사람 앞에 우리가 내어 주는 유일한 것이 되어야 하고 우리 모두가 그것만을 얻으러 모이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이제부터 새로운 결심과 각오와 충성을 주 앞에 약속하는 그런 기억할 만한 날이 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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