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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힘써 배우자 (행 08:2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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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좋은 일을 하고, 또 다른 사람에게 좋은 영향과 유익을 주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바로 배우되 힘써 배워야 합니다. 배우지 않는 사람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어떤 기대도 할 수가 없습니다. 성장도 없고, 발전도 없습니다.
그래서 ‘아는 것이 힘이다. 배워야 산다’라고 하는 말은 그 의미가 매우 큽니다.
세상 학문을 배우는 것도 귀한 일이거든, 하물며 신앙과 행위에 기본이 되는 생명의 말씀을 읽고, 듣고, 배운다는 것은 가장 복되고 귀한 일이 아닐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열심히 배우려는 향학열이 있어도 재정적으로 형편이 되지 못해서 배우지 못하는 안타까운 일이 이 사회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또한 좋은 선생님을 만나지 못해서 애타는 학생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귀한 지혜의 말씀이요, 생명의 말씀이요, 축복의 말씀인 하나님의 말씀은 값없이, 돈 없이 들을 수 있고 배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얼마든지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 있습니다.
만일 세상 학문과 그 가치를 따져서 성경을 배우는데 등록금을 내라고 한다면 너무 비싸서 세상의 어떤 재벌도 감당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저 배우라고 하니까 그 가치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모두가 다 거저 주셨습니다. 물도, 공기도, 햇빛도, 대 자연도 그저 주셨습니다..... 그뿐입니까 우리의 생명도 그저 주셨습니다. 더욱이 큰 것은 생명의 떡이요, 천국에 이르는 구원의 말씀입니다.
인생의 목표를 정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사람들이 성경을 읽고 배울 때 바른 목표를 깨닫고 진정한 삶의 의미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죄인 읽을 때 회개하고 새로워집니다.
교만한 사람이 읽을 때 겸손한 사람이 됩니다. 상한 심령이 읽을 때 위로와 고침을 받게 됩니다. 낙심하여 실망한 사람이 읽을 때, 소망과 용기를 얻게 됩니다. 어리석은 자가 이 말씀을 읽을 때 지혜를 얻게 됩니다.
헨델처럼 예술가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놀라운 영감을 얻게 됩니다. 과학자가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됩니다. 정치가가 성경을 읽을때 나라를 바로 다스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성경을 읽을때 바른 인격자를 길러냅니다. 군인이 성경을 읽을때 더욱 용감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읽고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이 예언의 말씀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한 것입니다.
이 놀라운 지혜의 비밀을 그저 나와서 배우게 하신 것이 얼마나 큰 은혜요 축복입니까 고마운 줄 알아야 합니다. 적은 것에 대해서는 고맙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큰 은혜에 대하여 진정으로 감사 할 줄 모른다면 이것은 큰 불행입니다. 어리석은 일입니다.
이 귀중성을 깨달으면 깨달을 수록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자 하는 열심히 더욱 큰 것입니다. 힘써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배우는 한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그가 바로 에티오피아 사람, 구스 내시입니다. 에티오피아는 흑인종의 나라인데 애굽과 아라비아 사이에 있는 나라입니다. 그는 그 나라 여왕 간다게의 국고를 맡은 사람입니다. 요새 말로 하면 재무부장관쯤 되는 것 같습니다.
그는 유대 교인으로써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는 길인데 구약 성경 이사야서를 읽으면서 병거를 타고 가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보면 그의 열심히 얼마나 컷으며,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사모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모하는 자에게 은혜와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재무부 장관쯤 되면 얼마나 바쁘겠습니까 시간을 내는 것은 매우 힘든 일입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는 성경을 읽는 것에 열심을 다했습니다. 그는 성전에서 성경을 일고 배우는 것도 부족해서 병거를 타고 길을 가면서도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때는 아스팔트도 없었고, 조용한 승용차도 없었습니다. 흔들리는 마차였습니다. 여기서 성경을 읽는다고 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 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사모하였습니다.
구약에 보면 하박국 선지자는 ‘성도들로 하여금 달리면서 읽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정말 구스 내시는 달려가면서 성경을 읽었습니다. ‘달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활이 가만히 앉아서 성경을 읽을 만큼 평탄하지 못했음을 의미합니다. 히브리말에 평안이란 말은 샤칸(Shakan) 곧 ‘앉는다’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달린다’라는 말은 그와 반대로 위기, 불안과 시간에 쫓김을 의미합니다.
오늘 이 시대야말로 정말 달리면서 읽어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모두가 쫓기는 생활입니다. 직장에 가면 일에 쫓깁니다. 가정에 돌아오면 살림에 쫓깁니다. 교육에 쫓깁니다.
또 사람 구실 해보려니까 윗사람, 아랫사람 모두가 체면에 쫓겨다닙니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이같이 복잡한 환경을 흔적 떠나서 산 속에 들어가 조용히 기도하며 성경을 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그런 환경을 만들기란 퍽 어렵습니다. 참으로 바쁜 세상입니다. 사실 오 분, 십 분 내기도 힘든 때가 많습니다. 동분서주, 늘 달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달리면서 읽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일에 는 그 이상 힘쓰라는 말입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빼앗는다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침노한다는 것은 여유를 가지고 하는 일이 아닙니다. 이를 위해서는 다른 것이 희생될 수도 있습니다.
군인이 전쟁에 임할 때에는 개인 생활에 근거되는 모든 일도 중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가정과 사업과 민족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달리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야 합니까 무엇 때문에 이 바쁜 생활 속에서 피곤할 때 좀 쉬라고 할 것이지 성경을 읽으라고 합니까
성경은 우리의 생명의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영전에 임하는 십자가의 군병들에게 무기와 군량미가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바쁜 세상일 수록 하나님의 말씀을 더 많이 읽고 배워야 합니다. 이것이 만가지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실패한 사람은 기독교 역사상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과 기적을 체험하였고 놀라운 은혜와 복을 받았습니다.
학생, 청년, 장년, 노년 할 것 없이 우리 온 교회가 말씀을 사모하며, 읽고, 배우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교회 부흥의 원동력이요, 은혜의 샘터요, 축복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이 바쁘고 어려울수록 우리는 성경을 더 읽고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을 가지고 사모하는 것만큼, 그 이상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관심을 두시고,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며, 성령님께서 우리를 늘 은혜의 푸른 초장으로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열심과 사모하는 마을을 보시고 빌립을 보내셨습니다.
29-30절에 보면 그때 성령님께서 빌립으로 하여금 에티오피아 내시가 탄 병거로 나아가게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빌립이 이사야서를 읽고 있는 그를 보고 말하기를 ‘읽는 것을 깨닫느뇨’라고 물었습니다.
그의 대답이 명답입니다. 31절에 보면 “대답하되 지도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뇨 하고 빌립을 청하여 병거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하니라”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전하고 가르치는 사람 없이 배울 수 없는 것입니다. 배우는 일도 중요합니다.
그런가 하면 가르치는 일은 더욱 중요함을 알 수 있습니다. 훌륭한 교사 없이 좋은 학생, 훌륭한 일군은 나지 않는 것입니다. 더욱이 성경을 가르치는 교사나, 교역자는 배우고자 원하는 학생 이상으로 열심히 기도하며, 정성을 다하여 준비하되, 중요한 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해야 하며,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가르쳐야 합니다.
가르치는 자나, 배우는 자가 사모하는 마음과 열심히 할 때에 하나님께서 지혜와 능력으로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이번 성경 학교야말로 가르치는 자나 배우는 자가 사모하는 마음과 정성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말씀을 통해서 자신을 재발견하고 새롭게 되시기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말씀을 통해서 주시는 신령한 은혜로 새 힘을 얻고 복음을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귀히 쓰임을 받기를 바랍니다.
구스 내시가 빌립을 병거에 같이 앉게 한 것을 볼 때에 그가 얼마나 겸손하며 은혜를 사모하고 있는 가를 알 수 있습니다. “지도하는 자가 없이 어찌 깨달을 수 있느뇨”
이것은 정중하게 자신의 부족을 말하는 진실하고, 겸손한 태도입니다.
사람이 겸손하지 못하고, 교만하면 아무것도 배울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아예 배우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가르치는 자까지도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되지도 못하고 된 줄로 착각하는 사람들의 불행입니다. 겸손한 자만이 좋은 학생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는 내가 혼자 읽고, 혼자 연구해서 스스로 알 수 있다는 교만이 전혀 없었습니다.
발전성이 있는 사람은 언제나 자신의 부족을 깨닫고 겸손히 배우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나 혼자 배울 수 있으니 지도자가 무슨 필요가 있는가’이렇게 자신을 모르고 교만한 사람은 별 볼일 없는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영적 교만에 빠져 가지고 ‘나는 하나님과 직통하는 신령한 사람이니까 누구한테 배울 필요도 없고, 구구하게 이 책 저 책 뒤적거릴 필요도 없다’고 멍청하게 자기 교만과 무지를 폭로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대개 이단의 교주들이나 그를 추종하는 자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입니다.
32-33에 보면 구스 내시가 읽고 있던 성경 구절이 바로 사53:7절 이하에 있는 말씀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 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라고 하였습니다.
구스 내시가 그 말씀을 다 읽고 나서 빌립에게 물었습니다. ‘여기 어린양은 누구를 가르치는 것입니까’ 그때 빌립은 그 어린양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분명하게 일러주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아이심을 깨달았을 때 너무도 기쁘고 감격스러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빌립의 간단한 세례 문답을 마치고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37-38절)
진리를 깨닫는 심령에 참된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진리를 소유한 자에게 참된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오늘날 인간의 비극은 진리가 되시는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지 못하고 그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생명수 근원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구스 내시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며, 기회를 빼앗아서 그 말씀을 읽고 배우고 그 안에 거하므로 말씀을 통해서 주시는 풍성한 은혜와 복을 다 받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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