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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법궤의 귀환과 하나님의 은혜 (삼상 06:1-12, 롬 05: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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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과 6장은 세 가지의 국면을 소개 하고 있습니다.
첫번째 국면은 다곤 신전에 궤를 안치한 결과에 대한 내용입니다(5:1-5).
하나님의 능력의 기적적인 개입에 의해 다곤은 두 번씩이나 하나님의 궤 앞에 엎드러져 얼굴이 땅에 닿아 있었습니다. 그 중 두번째 경우에는 이 우상의 “머리와 두 손목은 끊어져 문지방에 있”었습니다. 이것은 블레셋의 영웅 골리앗의 운명에 관한 무시무시한 예고입니다.(5:4. 17:51).
(삼상17:51) 다윗이 달려가서 블레셋 사람을 밟고 그의 칼을 그 집에서 빼어 내어 그 칼로 그를 죽이고 그 머리를 베니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 용사의 죽음을 보고 도망하는지라
두번째 국면은 그 백성이 주와 “독종”에게 패해당한 모습을 보여줍니다(5:6-12). 쥐가 농작물이나 생산물과 관련이 있다는 것은 6장에서 그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달래기 위해 금쥐를 제물로 바쳤다는 사실에 암시되어 있습니다.
(삼상5:7) 아스돗 사람들이 이를 보고 가로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우리와 함께 있게 못할지라 그 손이 우리와 우리 신 다곤을 친다 하고
그래서 그들은 그것을 옮기기로 하고 가드로 가져갔습니다. 그러나 그 곳에서도 똑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그 궤를 에그론으로 보냈으나 그 결과 이전보다 더 많은 사람이 죽고 병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블레셋 사람들은 통치자들에게 “이스라엘 신의 궤를 보내”자고 필사적으로 요청하였습니다(5:11).
또 궤를 보관함으로써 겪은 슬픈 경험의 세번째 국면에서 블레셋 사람들은 그 궤가 그들이 겪고 있는 고통의 근원인지 아닌지 시험할 계획을 세웠습니다(6:1-9). 그들은 그 고통의 근원이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있음을 알앗지만, 전쟁에서 이기고 그 궤를ㄹ 가져온 것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 시험 결과가 그 궤를 보관해도 좋다는 쪽으로 나오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들은 먼저 “블레셋 사람의 방백의 수효대로 금독종 다섯과 금쥐 다섯으로” 속건제를 드리러 올라갔습니다(6:4). 블레셋의 제사장은 하나님께서 애굽에 재앙과 죽음을 보내신 후에 애굽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떠나보낸 일을 상기하고서 백성들에게 바로처럼 마음을 강팍케 하지 말라고 조언했습니다. 이들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블레셋 사람들은 궤를 속건제물이 들어 있는 상자와 함께 새 수레에 싣고, 새끼를 낳았으며 멍에를 결코 메어본 적이 없는 두 마리의 암소에게 끌도록 함으로써 이 문제를 시험해 보기로 결심했습니다. 즉 그들은 이것을 길로 내보내 놓고 관찰하기로 했습니다. 만일 이것이 이스라엘 영토로 올라가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신 분이 하나님이며, 그렇지 않으면 이 재앙은 우연히 그들에게 임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6:7-9). 수레가 새 것이었고, 이 소들 역시 이전에 멍에를 메어본 적이 없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속건제와 마찬가지로, 이것들도 희생 제사의 성격을 지녔습니다. 소와 수레 모두 세속적인 용도로 사용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소들에게서 새낄들을 떠에놓았다는 사실은 그 소들이 본성상 새끼에게로 되돌아갈 것임을 의미합니다. 그런데도 그 소들이 송아지를 떼어놓고 이스라엘로 올라간다면, 이것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그들이 당한 모든 화의 근원임을 확증해 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결과는 오래 기다릴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 소들은 힘들이지 않고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였던 것입니다(6:12). 그 궤는 제 나라로 돌아간 것입니다.
이렇게 사건이 시작되어 진행되어 가는 동안 하나님께서 하나님되심을 더욱 드러나시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블레셋에게는 불신앙의 본질을 여실히 드러내 보인 것입니다.
불신앙의 본질
성경에 나타나 있듯이 죄는 하나님과 그의 계시된 뜻에 대한 반역입니다. 불신앙은 하나님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상태를 말합니다. 잘못은 불신앙의 행동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진리와 반대되는 잘못은 죄가 하나님을 치는 지점입니다.
궤를 탈취해 간 블레셋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리신 것에 관한 완벽한 설명은 로마서 1:18-19절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롬1: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롬1:19)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불신앙은 진상이 드러날 때, 그것을 불의하게 억누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영적으로 맹목적으로 진리를 거부한 자의 훌륭한 예입니다. 그들이 궤르 ㄹ어떻게 다루었는지 주목해 보십시오.
그들은 이스라엘 역사를 알았으나(4:8, 6:6). 물고기 신의 우월성에 대한 찬양의 표시로 궤를 다곤의 발에 둠으로써 하나님을 공공연히 멸시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곤을 쓰러뜨렸을 때에도 그들은 그 사건에서 메시지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 다곤의 목이 떨어져나가 그 머리가 신전 문지방에 있는 것을 보고도 그들이 자랑하는 ‘신’의 무능하다는 것을 인정치 않고 그들은 다곤의 머리가 떨어져 나간 지점을 성지로 만들었습니다(5:5). 이 개들은 자신들이 토해낸 것을 다시 먹은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한 가지 진리를 말하지만, 불레셋 사람들은 그것을 정반대되는 말로 받아들였습니다.
죄의 원리는 진리를 혐오하는 것에 강력하기 때문에 인간의 마음을 사로 잡고 모든 합리적인 과정에 선입견의 흔적을 남깁니다. 이런 선입견에 도전하는 사실들은 선입견에 유리하게 재해석되고 마음과 양심은 모두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말로 바꾸어 버립니다.
(롬1:25)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이단에 사로잡힌 자들이나 거짓종교에 매료된 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리석다는 것을 깨달을 수록 더욱 거짓에 최면을 당하고 맙니다.
또한 불신앙은 하나님께로 향하지 않고 그의 진로를 피하려고 합니다.
7개월간 재앙을 거친 후 블레셋 사람들은 자신들이 궤 때문에 고통을 당했음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그에게 영광을 돌려야 한다고는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대신 그들은 궤를 제거함으로써 하나님의 진노를 피해야 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마치 예수님을 만난 거라사 광인은 예수님을 무조건 떠나달라고 간청했던 것과 같이 말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기 위해 사용한 방법도 그들의 불신앙의 비극을 통찰하게 해줍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로를 달래기 위해 노력했으며,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롬1:20)을 인식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 어떤 식으로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 또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서 진노를 거두시는지를 단 한번도 이스라엘의 제사장에게 가서 물어본 적이 없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행위에 대해 이런 식으로 반응을 보입니다. 불교도, 유대인, 명목상의 그리스도인 혹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바로 이런 사람들입니다. 어떤 형태이든 불신앙은 자기 합리화의 종교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시도는 자아 만족, 즉 살아 계신 참되신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마음을 변화시키지 않고 합리화와 마음의 평안을 구하려는 훈련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정상적인 신앙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전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받아서(엡 2:8) 그분의 은혜 안에서 자라갑니다(벧후 3:18). 그뿐 아니라 그들은 자신의 노력이나 공로에 의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은혜 아래서 강해질 수 있습니다(딤후 2:1). 따라서 우리 신앙인과 하나님의 은혜와는 결코 뗄래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지식은 우리 신앙인의 삶에 많은 유익을 가져다 줍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타난 바 블레셋인에게 빼앗겼던 법궤의 귀환 기사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몇 가지 특성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의 특성들은 어떤 것들일까요

1. 노력없이 얻은 은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블레셋인들에게 빼앗긴 법궤를 되찾기 위해서 아무런 시도나 노력도 경주하지 않았습니다(3절).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기억하시어 법궤가 돌아오도록 은혜를 베푸사 블레셋인들이 자발적으로 법궤를 이스라엘 백성에게로 귀환시키게끔 주권적으로 섭리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는 이와같이 결코 우리의 노력이나 혹은 은혜를 받을 만한 어떤 삶의 공로로 인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인간에게 베풀어지는 것입니다. 이로써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의 본의(本義)를 인간의 공로로 전락시킬 수 없는 것이며, 그것을 교만하게 자랑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엡 2:9).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더이상 자기의 의나 공로를 내세우지 말고 겸손히 그분의 은혜를 감사함으로 받아야 하겠습니다.

2. 특별한 방법을 통한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자연적 본능에 역행한 피조물 곧 소의 행동을 통해 나타났습니다. 즉, 멍에를 한번도 메어보지 않았던 소가 자기 송아지를 버려두고 한번도 가보지 않았던 벧세메스로 직행하였던 것입니다(12절). 그렇습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은총은 인간의 생각과 방법을 초월한 초자연적인 역사를 통해 우리에게 나타납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특이한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친히 성육신하셔서 인류의 죄를 위해 십자가의 형벌을 담당하신 일입니다(빌 2:6-8). 사실상 그분은 피조물이 아닌 창조자로서, 하나님 자신이셨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않고 자기를 낮추시고 인간의 모양을 입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죄 없으신 몸으로 십자가를 홀로 감당하셨던 것입니다. 실로 이 모든 것은 도저히 인간의 이성(理性)으로는 헤아릴 수조차 없는 심오한 비밀이요 신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사고를 초월한 특별한 방법으로 주어진 은혜를 받은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한 주권적 은혜에 감사하게 되며, 또한 그러한 은혜를 받은 자답게 살 것을 다짐하게 되는 것입니다.

3. 분명하게 나타난 은혜입니다.
여호와의 궤를 멘 소는 다른 성읍을 지나지 않고 벧세메스로 곧장 나아갔습니다(12절). 즉, 그 소는 블레셋 지방의 어느 곳이 아닌 이스라엘 땅으로 가기 위해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직행했습니다. 이것은 여호와의 언약궤를 이스라엘로 귀환시키기 위한 은혜로우신 하나님의 특별하고도 분명한 역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은혜는 분명하고 현저하게 우리의 눈에 펼쳐집니다. 이런 점에서 사도 요한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사건을 일컬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나타난 바되었다고 천명했던 것입니다(요일 4:9). 또한 사도 바울도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우리에게 대한 하나님 자신의 사랑을 나타내 주셨다고 역설했던 것입니다(롬 5:8).3성도 여러분!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는 추상적이거나 이론적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우리에게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직은 구원의 날이고 은혜받을 만한 때인 지금 우리 모두가 이 하나님의 분명한 은혜를 순수하게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고후 6:2).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 가운데서 가장 놀라운 은혜는 앞에서 말한대로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진 은혜입니다. 즉, 우리는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았지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인해 주어진 구원의 은혜를 가리킵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노력이 개입되지 않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이자 분명하게 나타난 은혜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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