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베드로에게 나타난 환상 (행 10:9-23)

첨부 1


하나님은 이스라엘인들만 찾은 것이 아니라 이방인들도 찾으셨습니다. 이방인을 찾으셨는데 이방인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뜨거운 마음이었습니다. 열화와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얼마만큼 이방인을 하나님이 찾으셨는가 하면은 자기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포기하고 버리는데까지 이방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사도바울은 에베소서 2:13이하에서 16절까지 다음과 같이 표현을 했습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이방인과 유대인을 하나로 만드는 둘의 막힌 담을 허시는 둘이 화목케 하시는 일이었다.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에수 그리스도는 유태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이방인을 위한 구원자로 속죄자로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너무나 간절하게 이방인들이 구원받기를 원했습니다. 그 당시의 사고방식은 이방인들은 개처럼 취급을 당하였습니다. 더러워서 구원받을수 없는. 개처럼 취급받는. 그래서 유태인들에게는 이방인에게는 구원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은 유태인들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열방과 이방인들에게까지도 하나님의 백성임을 선포하고 구원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간절한 소망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을 대표해서 경건한 한 군인을 택하여 주셨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고넬료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경건하며 구제에 열심이며 기도하는 정말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고넬료를 택했을뿐만 아니라 유대인 가운데서도 이 고넬료를 만날 수 있는 한 사람을 준비시켰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사도 베드로였습니다. 사도 베드로를 택하여 하나님은 이방인의 문을 열도록 하나님께서 섭리하셨습니다. 9절부터 11절까지를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이튿날 저희가 행하여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시간은 제 육시더라.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이 준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하나님은 이방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베드로에게 환상을 보여 주심으로 당신의 뜻을 명확하게 표현해 주셨습니다. 베드로가 본 환상은 어떤 큰 보자기 같은 한 그릇에 대한 환상이었습니다. 9절을 보면은 육시에 정오입니다. 기도를 하려고 지붕에 올라갔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나라 지붕은 그냥 이렇게 삼각형으로 생겼지만 유대인의 지붕은 여러분들이 알다시피 지붕이 평평합니다. 그냥 성냥갑처럼 생겼습니다. 그 지붕에 올라가면 바로 옥상이고 거기서 아주 편안하게 기도할 수 있는 그런 공간입니다. 베드로가 약속된 기도시간에 기도하려고 올라갔습니다. 바로 그 때가 정오 때가 되어서 아주 시장 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음식이 그리워질 때였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베드로를 위하여 음식을 준비를 하고 있는 그 무렵이었습니다. 갑자기 시장해서 음식을 한참 생각하고 있을 그 때에 아마 베드로가 음식을 묵상하고 있지 않았을까도 생각해 봅니다. 음식을 먹고 싶은 바로 그 때에 사람들이 음식을 준비하니까 아마 그때에 음식냄새가 나지 않았나 싶습니다. 바로 그 때에 베드로가 쓰러진거예요. 일종의 비몽사몽간에 바로 쓰러진 그 순간에 환상을 보았습니다. 환상에 내용에 대해 우리가 얘기하기 전에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두가지 부분을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기도할 때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언제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나는가 언제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가 물론 하나님은 반드시 당신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언제 하나님이 그 일을 하시는가 기도할 때입니다. 사람이 기도할 때. 베드로에게 아무리 하나님이 계시가 나타나고 싶어도 만약에 베드로가 기도하지 않았다면 그 계시와 환상을 보여 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마침 베드로는 시간에 맞추어서 기도하고 있던 사람입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은 베드로의 기도시간을 이용 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보면은 우리가 베드로의 다양한 활동과 그 외적인 모습에 쉽게 우리가 인상을 갖습니다. 그런 생각을 갖게 되는데 사실 베드로는 능력과 기적의 사람입니다. 능력과 기적을 베풀기 이전에 그는 개인적으로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하는 그런 기도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예수님! 그러면 갈릴리 해변에서 문둥병을 고쳐주시고 앉은뱅이를 일으켜 주시고 귀신을 쫓아주시고 또 예수님을 생각하면 죽은자를 살리시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시고 그리고 바다를 잠잠케 하시는 그리고 물위를 걸어오시는 그런 예수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물론 예수님이 그런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예수님은 기도하셨던 분입니다. 5천명을 먹이시고 12바구니가 남기는 엄청난 기적을 베푸신 다음에도 예수님은 군중을 떠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먼저 보내시고 군중을 떠나서 그는 홀로 개인시간을 갖습니다. 예수님의 언제나 하나님과 대면하는 그런 개인적인 시간을 가졌던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은 밤이 맞도록 기도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오히려 예수님이 기도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하기전에 그 분은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비둘기처럼 임했을 때 예수님이 사역하기 전에 무엇을 했습니까 40일동안. 금식기도 했습니다 영적싸움을 위하여. 이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외모양을 봅니다. 그러나 내면의 깊은 세계. 그가 하나님과 대면하는 그런 세계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가장 결정적인 위기는 십자가를 지는 시기였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는 개인적인 영적 시간이 있었습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입니다. 행전 3장에 보면은 제 구시에 오후 3시쯤 되지요. 요한과 더불어 기도하려고 성전에 올라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전에 올라가면서 나면서 앉은뱅이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그런 기적의 사람이었지만 그러나 시간을 정해놓고 개인적으로 경건시간을 갖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성경에도 보면은 정오에 시간을 정해놓고 지붕에 올라가서 기도했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보면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람들을 보면은 사실은 능력과 기적의 사람 이전에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사도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빌리보에 빌립보교회를 세우러 간 것이 아니라 빌립보 그 지경에 가다가 기도처를 찾았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6장에 보면은. 기도처를 찾다가 한 여자를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에게 전도를 합니다. 거기서 기도를 합니다. 그러다가 거기서 루디아라는 장사하는 여자를 만나서 교회를 세운 것이 빌립보 교회입니다. 데살로니가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를 세우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그 지방에 가서 사도바울은 자기의 규례대로 기도하고 어느 곳에 가던지 기도처를 찾았고 그리고 누구를 만나던지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회당을 빌려서 바울은 3주일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합니다. 그러다가 생긴 것이 데살로니가교회입니다. 그렇게 보면은 사도행전의 사람들은 집이 있거나 없거나 기도처가 있거나 없거나 그들은 어디를 가던지 기도를 했고 성경말씀을 가르쳤다는 것이지요. 기도하다 생긴 것이 교회요. 성경말씀 가르키다가 생긴 것이 교회라는 것입니다. 바로 베드로가 기도의 사람이었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과 일을 하십니다. 이 말을 바꾸면 하나님은 일을 하지 않는 사람과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열심인 사람과 일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능력있는 사람과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든 조건을 다 갖춘 사람과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과 일을 하십니다. 사도행전의 사람들은 기도하는 사람들이었고 성령받은 사람들의 특징은 기도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나는 온누리교회가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라고 우리 온누리 교회에 속한 사람들이 어떤 위대한 사역을 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습니다. 숨어서 할 수도 있고 나타나서 할 수도 있습니다. 숨던 나타나던 크던 작은 일이던간에 우리 모두가 하나님으로부터 기도하는 사람이라면 그런 말을 듣게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은 환상을 보여주시던지 음성을 들려주시던지 무슨 얘기를 할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어떻게 말씀해 주기 어려울거예요. 방법이 하나 있지요. 꼬꾸러지게 하는것. 그래야 들려지지요. 사도바울처럼 꼬꾸러 지게 해서 눈을 멀게 한다던지. 그래야 어떤 음성을 들려 주시지 않겠습니까 둘째, 여기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하나님은 적절한 때에 일을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고넬료의 종들이 성에 가까이 갔을 때에 하나님은 베드로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실 때 그냥 오신 것이 아닙니다. 말라기가 끝나고 사도행전에 중간기를 거쳐서 때가 차매 하나님은 정확하게 시간을 계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때가 차매 여자로부터 예수님이 세상에 태어난 것입니다. 저는 분명히 믿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올실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적당히 예수님이 기분내키면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시간을 계산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여러분의 시간도 계산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죽을때 죽으니까 안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함부러 죽지도 않고 일찍 죽지도 않고 늦게 죽지도 않습니다. 꼭 죽을 때 여러분이 죽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안심하고 열심히 일하시기 바랍니다. 아프다고 일찍 죽는 것도 아니고 교통사고 났다고 먼저 죽는 것도 아닙니다. 다 죽을때가 되면 죽고 살 때가 되면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때에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방법으로 일을 하십니다. 사람의 때에 하나님이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이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믿을을 가진 사람은 때를 아는 사람입니다. 징조를 아는 사람입니다. 구원받을 때를 아는 사람입니다. 은혜받을 때를 아는 사람입니다. 저는 바로 여러분이 은혜받을 때요. 구원의 날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지금 여러분이 지금 변화받을 때입니다. 지금 헌신해야 할때입니다. 이 시기를 놓치면 그 시기를 놓치면 다른 결과가 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때와 구원의 방법을 가르쳐주시는데 어떤 때는 성경말씀을 읽다가 깨닫게 하십니다. 그래서 꼭 말씀을 읽게 되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읽지 않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계시해 주겠습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다가 그 기록된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말씀하게 되실 것입니다. 성경 읽게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를 해야 음성을 듣게 되고 성경을 읽어야 당신의 뜻을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지요. 어떤때는 특별히 하나님이 성령의 음성을 들려주셔서 어느 순간에 굉장한 하나님의 은혜에 빠질 때가 있어요. 오늘 베드로에게 들려주셨던 것처럼 하나님은 기도할 때 환상을 보여주시기도 합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은 환경을 통해서 들려주시기도 합니다. 갑자기 위기에 부딪히기도 하시고 갑자기 집에 불나게도 하시고 생각지도 않았던 일들이 오게도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의미 하게 온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어떤 메시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을 겪을 때 어려운 환경을 겪을 때 그것을 무의미하게 들으면 아무 메시지도 못받게 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어떤 환경을 통하여 귀를 기울여 보면 하나님의 뜻이 반드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때에 일을 하시는데 더 놀라운 사실은 다양한 방법으로 양쪽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방법으로 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하나님의 어떤 계시가 나에게 임했습니다. 하나님의 감동이 내게 임했습니다. 이것으로 끝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경으로 확인하게 하시던지. 어떤 기도하는 사람을 찾아오게 하신다던지. 또 어떤 독특한 환경을 있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사실을 종합적으로 이해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려고할 때 이 본문의 나와 있는 원칙 두가지를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과 일을 하신다. 기도하는 사람을 통하여 일을 하신다. 일 많이 한 사람하고 일을 하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사람하고 일을 하신다. 하나님은 반드시 자기 때에 일을 하신다. 그리고 자기 때에 일을 하시되 양쪽에서 체크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역사하신다는 것을 우리가 여기서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베드로가 본 환상은 무엇입니까 첫째는 오늘 성경에 보면은 10절을 보면은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이 준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첫째 무엇입니까 하늘이 열리고. 베드로가 본것은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계시록 4장 1절 이하를 보면은 사도요한이 밧모섬에서 묵상할 때에 하늘이 열리고 그것을 보았습니다. 두 번째는 하늘이 열렸는데 갑자기 네 귀를 맨 어떤 보자기 같은 그릇이 내려왔다는 것입니다. 보자기 네 개가 뭉쳐저서 어떤 그릇이 내려왔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일이지요. 갑자기 보자기가 내려오니까. 그런데 그 보자기 안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내용이 있었습니다. 12절 입니다. 시작!-배고픈데. 먹지 못할 음식이 있어요. 이상한 음식들. 아주 기피하는 음식들. 유대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짐승들이 거기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나오는 모든 짐승들은 유독 레위기와 신명기에서 말한 부정한 음식들. 즉 동물들. 짐승들 새들이 있었지요. 13절을 보십시오. 13절 시작.!-예. 얼마나 기막히고 엄청난 일들입니까 네발달린 짐슴들. 먹을수 없는 짐승들이 거기에 있었는데 아! 그 짐승들을 잡아 먹으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 음성을 듣자 마자 단호하게 14절에서 다음과 같이 항변을 합니다. 읽어 주십시요. 시작!-레 11:1 이나 또 신명기14장에 보며은 다음과 같은 율법이 있습니다. 부정하여 먹을 수 없는 물고기나 쇠고기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는데 읽어보며은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지상의 동물에는 약대, 사반, 토끼, 돼지. 동물들이 있는데 이런 짐승들은 부정해서 먹지 말아야 할뿐 아니라 그 조금도 만져서는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바다의 고기중에는 지느러미가 없는 것과 비늘이 없는 것들은 먹어서는 안됩니다. 하늘에 나는 새 종류것들중에는 독수리, 부엉이, 매. 매종류, 까마귀종류, 타조. 갈매기, 다호마스, 올빼미, 노자, 부엉이, 따옥기, 방학, 학, 황새, 박쥐 이런것들은 먹으면 안됩니다. 곤충종류에는 메뚜기, 베짱이, 귀뚜라미 외에 날개가 있고 기어다는 것은 다 안됩니다. 땅에 기는 것중에는 족제비. 쥐. 도마뱀종류, 석청등 다 먹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다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것을 잡아 먹으라는 것입니다. 구약에는 그런 것을 먹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만지게 되면은 옷까지 다 빨아야 됩니다. 담겨졌던 그릇은 다 깨버려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 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것을 먹으라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얼마나 충격을 받았겠습니까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아무리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할지라도 베드로는 순종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보면은 베드로는 대단한 사람입니다. 오늘 여기에 나타난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왜 이런 거룩하지 않은 부정한 것들을 보여주시고 먹으라고 하는 것입니까 바로 여기에 나타난 부정한 음식들이 이방인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거룩한 백성들. 이방인들은 그렇게 취급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음식들을 먹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너희가 속되다고 하는 이방인들도 다 하나님이 거룩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피로 이 모든 것을 사했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거룩하고 깨끗한 음식을 먹는 것처럼 유대인만 구원받은 것뿐만 아니라 이방인도 다 정결하게 하시고 구원받게 하시고 모든 죄를 다 용서해 주셔서 먹을 수 있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것을 깨달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전통 유대의 틀에 얽매여서 그 세계관속에서 그 선입관 속에서 볼때 그것이 가능하지 않은 일들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구원은 자기만 있는 거로 압니다. 많은 사람들은 구원은 우리교회에만 있는 것으로 압니다. 다른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에 대해서 그렇게 별로 심각하게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에게 관심이 있지만 우리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깊은 관심이 있으십니다. 1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시작!-보자기가 한번 왔습니다. 베드로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절대로 이 더러운 것들을 먹어본적도 없고 먹어 볼수도 없습니다. 보자기가 또 내려왔어요. 먹으라고 그래요. 하나님께서 깨끗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십니다. 하나님! 이것이 물론 부정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깨끗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구원받을수 없는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깨끗게 하셨습니다. 우리를 구원받을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깨끗하다고 한 것을 왜 네가 속되다고 하느냐 16절을 보십시요. 이런일이 몇 번 있었다고 그랬습니까 3번이나 있었다고 반복해서 그랬습니다. 3번씩이나 그랬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뜻이 확정적이다라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갈등은 이것입니다. 그는 신앙의 전통, 유대인의 전통에 얽매여 있습니다. 이런 더러운 짐승들을 먹지 말라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지금 먹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누구의 뜻을 따를까요 그렇게 먹지 말라고 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이 먹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누구의 말을 따라야 합니까 우리가 가끔 전통에 얽매여서, 문화에 얽매여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를 방해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전통이나 문화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 자체가 진리가 아닙니다. 어떤 진리가 만들어놓은 그 시대의 전통입니다. 어떤 진리가 그 시대에 만들어 놓은 문화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전통과 문화를 소중히 하다 보니까 전통과 문화를 진리처럼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토속문화가 있습니다. 토속 전통이 있습니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자기 것이 소중하다는 말처럼 그것은 중요한 것에요. 자기의 것을 모르면 안됩니다. 그러나 우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리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보다는 더 위대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언제나 전통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전통을 깨버리고 더 놀라운 진리로 우리를 이끌어 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때는 문화적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문화에 노예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요즘 TV를 보면은 너무나 미신적인 것이 많아요. 온갖 무당들 다 불러냅니다. 거기서 무슨 이상한 마술을 다합니다. 그래서 굉장히 그런 풍조가 생기는 현상을 우리는 우려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그렇게 사람들은 전통문화라는 이름으로 일들을 끌어 가는것입니다. 그렇게 끌어가는 것이 나라를 사랑하는 것이고 올바른것처럼 생각을 합니다. 물론 전통과 문화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가 그 뿌리에서 자랐기 때문에 그러나 그것을 초월할수 있어야 합니다. 진리로 갈 수 있어야 합니다. 바로 베드로가 가지고 있어야 하는 고민이 그것이었습니다. 전통적으로 생각을 하면 먹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 전통을 깨뜨리고 유대인의 전통의 벽을 깨뜨리고 민족주의의 벽을 깨뜨리고 세계로 나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민족주의에서 세계로 나아가는 우주적인 세계로 하나님이 우리를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이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천국복음을 전할 때 그들은 전통적인 가치와 예수님이 주시는 메시지와 부딪힌 거예요. 오늘날 우리교회에서 오래 다니시는 분이 이런 딜레마에 빠지는것입니다. 성경의 놀라운 능력들이 나타날 때 이것들을 우리가 받아들여야 하느냐 받아들이지 말아야 하는냐 전통적인 역사에 우리가 머물러야 하느냐 새로운 성령의 역사에 우리가 적극적으로 참석해야 하느냐 두가지 갈등이 똑같이 갖게 되는 것입니다. 전통은 소중합니다. 문화도 소중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전통적인 문화를 사용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통안에 갇히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기의 전통안에 있기를 바랍니다. 자기식으로 하나님이 존재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자기 문화속에 존재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문화안에 계실 수가 없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문화를 만드시는 분이시지 인간이 만든 전통이나 문화안에 계시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의 문제를 가지고 고민을 했습니다. 안식일은 거룩한 날이니 너희들이 거룩하게 지켜라! 그래서 사람들은 그 안식일이 어떻게 지키는 것이 거룩하게 지키는 것이냐 아! 그들은 바느질을 두 번하면 죄가 아니고 세 번하면 노동이다. 그렇게 다 만들어놓았습니다. 몇km까지 가면 죄가 아니고 몇km까지 가면 그것은 노동이다. 글자를 두자 읽으면 괜찮은데 세자읽으면 노동이다. 그것은 공부하는 것이다. 그것은 거룩한 날을 거부한 것이다. 이렇게 사람들이 자기 나름대로 율법을 600몇가지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것을 잘 지키면 예수 잘 믿는 사람이고 하나님 잘 믿는 사람이고. 그걸 안지키면 안된단 말이죠. 예수님이 안식일날 사람을 고쳤습니다. 예수님이 안식일날 사람을 고쳤습니다. 그것은 노동을 한거예요. 죽을 사람을. 병든 사람을 고친것에는 관심이 없고 율법에 관심이 있었고 전통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유대이이 부딪히기 시작했습니다. 헌금에도 문제가 마찬가지 입니다. 기도하는데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문제가 다 걸린거예요. 분명히 예수님이 하신일이 옳긴 옳은데 전통적인 생각에서보니까 이것이 다 부딪히는 것입니다. 누구를 따라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구약에 이렇게 이런 음식을 먹지 말라고 하셨지만은 아 하나님께서 고치신다는데 누가 그것을 막을자가 있겠습니까 베드로가 여기서 깊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부정하여 먹을수 없는 그런 이방인이지만그 음식을 하나님이 깨끗하게 만들어 주신것처럼 모든 이방인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깨끗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음식을 먹을 뿐만 아니라 이제 유대주의안에 머무르지 않고 예루살렘에 머무르지 않고 나아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온누리교회에도 그렇게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온누리 교회를 이렇게 부흥시켜 주신것에는 너희들끼리 잘먹고 너희들끼리 잘 놀고 너희들의 왕국을 만들려고 이렇게 부흥시켜 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헌금도 주시고 사람도 주시고 방법도 주시고 비젼도 주시고 능력도 주신 것은 우리가 받은 이 은혜를 가지고 나아가서 나누어주라는 하나님의 거룩한 명령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은 여러분에게 갔지만 여러분에게서 끝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을 통하여 여러분의 학교에 여러분의 직장에 여러분의 일터에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능력과 사랑이 나타나기를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탕자의 비유를 선교적인 각도에서 해석을 해보면은 큰 아들은 유태인과 같고 큰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과 같습니다. 둘째 아들은 이방인과 같고 둘째 아들은 예수를 믿지 않는 백성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둘째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큰 아들이 그 마음을 갖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큰 아들은 그 마음을 갖지를 못했습니다. 둘째 아들이 돌아오는 것을 보면서 분노를 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위해 저렇게 헌신을 했는데 저렇게 재산을 다 가지고 가서 허랑방탕한 자식을 환영한것에 대해서 첫째 아들이 분노를 했습니다. 하나님이 몹시 마음이 상했던 것을 볼수가 있습니다. 온누리 교회가많은 사역을 합니다. 온누리 교회가 많은 축복을 받고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야 합니다. 사역 자체를 위해서 사역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또 일하다 보면은 정부 관리들이 대부분 그러지요. 일하다보면은 이게 중요해요. 그래서 일하다보면 사역자를 위해서 사역이 필요할때가 있어요. 그 사람 월급 주기 위해서 일이 필요한거예요. 그래서 자기가 쫓겨나간다던지 자기가 다치게 된다고 그러면 법을 바꾸게 된다던지 환경을 바꿔버리는거예요. 그 사역은 그 사람을 위해서 있는게 아닙니다. 그 사역은 사역 자체를 위해서 있는 것도 아닙니다. 왜 우리가 교회에서 사역을 합니까 사역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 분의 영광을 위하여 사역을 하는 것이 사역의 본질적인 것입니다. 17-8절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시작!-베드로의 고민이 시작되었습니다. 나는 거룩하지 않은 것을 절대 먹어본적도 없고, 안먹겠습니다. 그랬어요. 내가 깨끗하다고 했는데 왜 너가 더럽다고 하는냐 하나님이 야단을 쳤습니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 베드로는 참 대단한 사람이예요. 그래도 순종안해요. 고민해요. 가끔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지면 순종하기 보다 고민하는 사람이 많아요. 할까 말까 고민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고민한다고 되는게 아니예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고 했어요. 너희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라. 그게 쉬운일인줄 아세요 이런 모험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신앙의 입문을 하지 않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다 자기가 평안하게 다 자기의 안정권속에 다 자기의 모든 것이 세큐리티 한 것속에 있으면서 예수 잘 믿겠다는 거에요. 신앙은 뿌리를 흔들어 놓는 것입니다. 너의 근거를 흔들어 놓는 것입니다. 그리고도 너의 하나님이냐 그래도 너 하나님 믿을거냐 하나님을 신뢰할거냐 이렇게 묻는거에요. 그게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도전하신거예요. 모세도 하나님이 흔들어 놓았어요. 그는 애굽의 왕자에서 아무것도 아닌 광야로 버려버린 것입니다. 거기에서 믿음이 생긴것입니다. 여러분! 절대로 온실에서 신앙의 안주하는 안일한 환경에서 예수 잘 믿기를 바라지 마십시요. 어떻게 보면 하나님은 우리의 근본적인 문제를 흔들어 놓는거예요. 누가 예수를 제일 잘 믿냐면요 사형선고 받은 사람입니다. 당신은 3개월밖에 못삽니다. 이 말 딱 들으면 정신이 바짝 나는 것입니다. 정말 신앙이 뭔지를 압니다. 집이 불로 한번 확 나봐야되요. 그래야 근거를 흔들어 놔야 하나님과 내가 일대일로 대결을 하는거에요. 모든게 다 되어 있고 은행에 돈이 있고 집이 있고 직장이 있고 빽이 있고 전부 사람들이 사건이 탁 터지면은 사람들이 하나님 제일 먼저 안찾고 배경부터 찾잖아요. 자기 도와줄 사람. 배경찾고 돈찾고 해서 일 해결하지 않습니까 거기에 무슨 신앙이 있어요 거기서 무슨 하나님 의지하는거예요 없다고요. 존재의 근거가 흔들려봐야 정말 내가 하나님 믿는가! 이런 것들을 우리가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고민을 했어요. 베드고라 고민을 하는 그 때에 한참 고민을 시작하는 그때에 자기집에 노크소리가 들린거에요. 뭐 그때는 초인종이 없었겠지만, 누가 찾아왔어요. 고넬료의 종이 찾아온거예요. 우리는 여기서 성령의 역사가 얼마나 절묘하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신앙이란 바로 이런 긴장감이예요. 다 되는 것 같으나 결정적인 순간에 안되고요. 안되는 것 같은데 결정적인 순간에 되는거고요. 이런 긴장감 속에 뿔꽃 튀는 속에서 사는 것이 바로 예수 믿는 것입니다. 뭐 그런것도 없이 무슨 예수를 믿고 삽니까 성령의 역사가 막 살아 움직이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교과서적인 것이 아닙니다. 내가 죽느냐 사느냐 내가 정말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냐 이런 절대 위기속에서도 하나님의 신실함을 믿으면서도. 이게 바로 요셉아닙니까 감옥에 들어가고. 그 우물속에 들어가고. 오해를 받고. 고난을 겪으면서도 절묘하게 하나님이 그때 그때마다 길을 열어주시고. 바로 이런 것입니다. 이런 것에 연속이예요. 주님 갈 때까지 이것이 계속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기도하지 않을 수 없는 거예요. 바로 이런 것을 여기서 봅니다. 절묘하게 베드로가 심각하게 고민을 할때 사람이 찾아온거예요. 사람이 찾아 왔습니다. 베드로가 그 사람을 맞이하러 막 나가려고 하는 그 순간에 성령님께서 베드로에게 음성을 들려주십니다. 19절입니다. 19절 시작!-일어나 내려가 의심치 말고 함께 가라 내가 저희를 보내었느니라 여러분! 베드로가 본 환상은 다른거예요. 환상이 아니예요. 어떤 성령님의 감동이 아주 강렬하게 베드로를 사로잡은 거예요. 베드로야 일어나 내려가라! 이런 소리가 들렸다는게 아니라 그런소리가 정확하게 들리는것처럼 느껴지는거예요. 그래서 그렇게 예언하는 사람은 그렇게 얘기하면 그렇게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성령의 감동감화를 받아 보신적이 있으십니까 있기를 바랍니다. 그저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면 한번 쯤은 있어야지요. 자주있을 수는 없다 할지라도, 이런 살아있는 삶에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중요한 시간에. 결정적인 시간에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는거예요. 이런 인도함을 받으면 그것이 결과가 좋던 안좋던. 가능하던 안가능하던 그것이 중요하지 않아요. 확신이 생겨요. 두려움이 없어져요. 그냥 그길로 가는거예요. 베드로는 분명히 성령의 사람이었고 성령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자주 들었다 이렇게 말 할 수는 없지만 아주 중요하고 결정적인 시간에 그 성령의 인도하심이 있었다는 것이지요. 저는 오늘까지 온누리교회를 이끌면서 분명히 성령의 인도하심이 있었던 것을 고백합니다. 그 중에 하나가 제가 성령사역으로 돌이킬 때 그것은 분명히 제가 인도함을 받고 한 것입니다. 그것은 누가 반대하고 뭐라고 해도 그것은 바꿀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내게 준 감동이기때문에. 그런 일들이 온누리교회 목회하면서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온누리교회 방향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제가 인위적으로 책을 보고 공부를 해서 아는게 아닙니다. 누가 하면 좋대더라 해서 하는게 아닙니다. 이것은 내 신앙의 고백이고 성령의 감동이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온누리교회에게 맡겨 주셨던 사명이었던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에게도 이런 여러분의 생애를 인도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인도함이 있기를 바랍니다. 사람을 보고 의논하거나 책을 보고 만들어지거나 세상의 풍습에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인생을 걸어감에 있어서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이 나를 이길로 가게 하신다! 라는 그런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확신의 인도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예수를 믿는다고 할때 예수를 관념으로 믿는게 아닙니다. 지식으로 믿는게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하나의 경험이나 과학이나 상식이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과 나와의 영적인 관계인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적으로도 올 수가 있고 개인적으로도 올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자주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여러분의 결정적이고 중요하고 가장 큰 길은 하나님이 친히 인도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큰 결정들. 중요한 결정들. 그것을 위해서 우리가 너무나 기도하는 시간을 안가졌던 것에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안들려 주었다는것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그것을 위해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고 금식을 하고 기다리는 그랬던 시간이 여러분이 너무나 약하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한번 해 보십시오. 그런 시간을 가져보십시오. 결사적으로, 심혈을 기울여서.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역사하실 것입니다. 베드로에 나타난 성령님의 음성은 세가지입니다. 네 사람이 찾아온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의 초청에 예스를 하라 그 얘기에요. 그리고 그 다음에 그 사람들을 의심하지 말라는 얘기예요. 그리고 그 사람들은 내가 보냈다는 내용입니다. 21절과 2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시작!-베드로가 불러들여 유숙하게 하니라! 이런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베드로는 선입관과 유대교의 모든 전통을 그 즉시 포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순종을 했습니다. 그가 환상을 보고 순종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음성을 듣고 순종한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이요. 성령의 능력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인생을 살아갈때에 우리 주변에 크고 작은 많은 불가능들이 있습니다. 고통도 있습니다 고통은 부자들에게는 없는가! 권력있는 사람들에게는 없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장군에게 없는 고민이 쫄병에게 있습니다. 쫄병에게 없는 고민이 장군에게 있습니다. 쫄병이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고민이 장군에게 있습니다. 부자에게 없는 고민이 가난한자에게 있습니다. 돈이 없는 고민이. 동시에 가난한자에게 없는 고민이 부자에게 있습니다. 가난한자들은 없는가운데 행복할 수가 있지만, 부자들가운데 행복한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다 사람들은 나름대로 하나님 앞에서 해결받아야 할 문제들을 가지고 있어요. 지성인은 지성인 식으로 고민이 있고 무식한 사람은 무식한 식으로 고민이 있을 뿐이예요. 똑같아요. 다 하나님이 필요해요. 우리는 언제나 불가능앞에 서있는거예요. 내 지식, 내 지능, 내 돈. 내 배경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항상 뒤따르기나름인거예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럴 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러분! 불가능한 일들이 있을 때에 너무 겁을 먹지 않기를 바랍니다. 뭐 고민한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몸부림쳐서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돈이 없다고 기죽을 것도 없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뜻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면 불가능이 아무것도 아닙니다. 어 저 같은 사람에게도 뭐 집회해 달라 뭐 해달라는 초청이 너무 많아서 거의 대부분 거절을 합니다. 제가 시간 보내는 데에는 교회하고 두란노 밖에 없어요. 그 외에는 다 거절을 합니다. 여기도 아마 베드로를 초청했을 때에 거절을 했을 거에요. 그러나 성령이 했기 때문에 응답을 했어요. 어떤 초청 같은 경우에는 제가 다 거절하지만 제가 안들어 줄수 없는 게 있어요. 가만 보면 그 사람 믿음이에요. 기도하고 온거예요. 그러면 안에서 다 자르지요. 비서가 다 자르지요. 그래도 구멍 빠져서 설교하고 와요. 하나님의 성령이 시킬때는 거절할 수가 없어요. 이 법으로 막아지지가 않아요. 여러분! 구하면 구하라! 열릴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두드리라 열리게 될 것이니라. 하나님의 뜻이면 밀고 나가세요. 그러면 되요. 안되는게 어디있어요 하나님의 뜻인데. 안된들 상관없어요. 안되어도 상관이 없어요. 그냥 가는 거예요.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성령의 역사가 이렇게 일어났던 것입니다. 두려워 하지 마십시요! 불가능 앞에 좌절하지 마십시요! 믿고 기도하고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어린 아이와 같이 여리고를 향하여 돌진하십시오! 그대에 하나님의 군대장관이 여러분을 인도하시게 될 것을 믿습니다. 어 또 하나 놀라운 사실을 보면은 여기서 아주 재밌는 현상을 봅니다. 종들의 태도입니다. 이 종 들이 말이죠. 이 종 들이 베드로에게 무슨 말을 합니까 저희가 대답하되 뭐라고 했지요 백부장 고넬료는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 우대 온 족속이 칭찬하더니 저가 거룩한 천사의 지시를 받아 너를 그 집으로 청하여 말을 들으려 하느니라. 자! 여기서 보면 가만 보십시요. 이 종들이요. 얼마나 자부심이 있습니까 아주 겸손하면서도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한 대단한 자부심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종들에게서 나는 자유함을 봅니다. 참 놀라운 일이예요. 대부분의 가정이나 직장에는 무엇입니까 같이 먹고 함께 일하는데 서로 피차 존경하지 못하고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입니다. 여러분! 상사를 이렇게 존경을 합니까 그분 왔다야!-나는 정말 그분을 위해서 뭐든지 하고싶어. 그러면 무슨 일이 되어도 피곤치 않은거예요. 나는 모든 아내가 우리 남편은 보증수표야! 내가 살아 봤는데. 분명해! 괜찮아! 좋아! 이 말을 들으면 그 부인은 무슨 고생을 해도 행복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돈을 갖다 주고 옷을 사다주고 반지를 사다줘도 이 신뢰가 무너지면 피곤한 거예요. 나는 여러분의 아내가 그런 사람이기를 바랍니다. 남편들이 생각하기를 ‘내 와이프는 어떤 상황이어도 나는 믿는다’. 이게 있어야 합니다 이게 ‘부부’입니다. 내가 일하는 직장의 상사가 그분은 의인이요. 그 사람들이 그랬잖아요. 고넬료는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요. 온 유대에 칭찬을 받는 사람이고 그는 천사의 음성을 듣는 사람이다. 종이 이렇게 신뢰를 하면 더 이상 물질적 관계가 아니예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 줘서 갖는 고용의 관계이지, 그런 사랑과 존경의 관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피곤한 거예요. 다 사람이 인격이 아니라 물건이고 이용할 가치이기 때문에 피곤한 거에요. 돈을 줘도 피곤한 거고. 받아도 피곤한 거에요. 일을 해도 피곤하고 안해도 피곤한거예요. 외롭고 고독한 것은 그렇게 오래 살았건만 부부는 그런것입니다. 너는 너고 나는 나고. 네 스타킹은 네 스타킹이고, 내 양말은 내양말이다. 그러나 서로 신뢰하고 존경하고 믿어줄 때, 아! 내 남편은 이런 사람입니다!-내가 남편을 위해서 무슨 일을 못하겠습니까 도둑질도 하지요. 이렇게 되야 합니다. 이렇게. 종에게서 그것을 봅니다. 결국 우리는 이 고넬료와 베드로를 통해서 이방인을 찾으시는 하나님을 봅니다. 여러분 마음에도 이런 뜨거운 열정이 하나님의 열심이 여러분 안에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주의 성령이 오늘 우리게에 함께 임하여 주셔서 우리에게도 성령의 음성을 듣게 하여 주시옵시고 하나님의 하시는 일들을 느끼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