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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원한 언약 (창 17:15-27)

첨부 1


오늘 말씀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말씀 중에 가장 복음적인 의미를 담은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여러 차례 약속을 받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지키는데 있어서 일단 실패한 사람입니다.
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떠나라는 말씀을 믿고 그대로 고향을 떠납니다. 갈 곳을 알지 못하고 떠났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믿고 이방 땅에서 유리 방황하면서 나그네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이 약속을 그가 굳게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는 흉년이 들 때 하나님 앞에 기도하거나 의논 한마디도 하지 않고 애굽으로 내려가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지키지 못하고 휘청거린 것입니다.
② 또, 하나님이 자식을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많은 자식을 주어서 “열 국의 아비가 될지라”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식을 주리라고 하신 그 약속을 믿고 10년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약속도 지키는데 실패를 했습니다.
가나안에 나온 지 10년만에 사래와 의논을 해서 이스마엘을 얻었습니다. 편법으로 서자를 얻었습니다.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15:4)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데도 그 약속을 잊어버리고 휘청한 것입니다.
이렇게 실패했을 때 하나님은 또 아브라함이 99세 때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하시며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언약을 확신시키십니다. “너는 열 국의 아비가 될지라”(17:4) 많은 자식을 낳아서 열 국의 아비가 되며 나라들이 네게로 쫓아 일어나며 열 왕이 네게로 쫓아나리라고 하십니다. 그 증거로 하나님이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이름을 바꾸어 주시며 불러 주셨습니다. 또, 할례를 행하도록 하여 소변을 볼 때마다 살에 새긴 “할례”를 보면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도록 합니다.
15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또”가 나옵니다. 하나님이 “또”라고 하시며 하는 말씀은 아브라함이 잘 안 지키니까 “또” 17:9절 15절에 “또” 하시는 것입니다. 이제는 사래를 사래라 하지 말고 사라라 하라고 했습니다. 사라는 “열 국의 어미”라는 뜻입니다. 사라가 열 국의 어미가 되며 사라를 통해 민족의 열 왕이 나리라고 하셨습니다. 사라의 이름까지 바꾸어 주시며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신다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①이름을 바꾸어 주시고 ②할례를 행하게 하시고 ③사라의 이름을 바꾸어 주시며 원점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셨습니다. 또 돌아오는 것을 용납해 주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아브라함의 실수를 하나님께서 이해해 주셨고 그 회개를 기꺼이 받아 주셨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회개를 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받아 주시지 않으신다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내 회개를 하나님이 인정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잘못되었다고 하고 하나님 앞에 이야기한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그래 이제 후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라’ 고 하시고 그 회개를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셔야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은 회개, 또 뉘우침, 후회는 한 평생 후회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회개란 것은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하나님이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함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회개란 것은
그 동안 한 일이 잘못 되었다고 하는 그런 뉘우침과 후회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회개는 심리적인 것도 있지만 이 보다 더 강한 것은 행동에 있다는 것입니다. 원점으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도망가서 어디에 숨어 살아 버리는 것이 아니라 흔히 말하기를 멀리 가서 속죄하는 맘으로 귀양가서 고생하면 되겠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생, 아니 평생을 해도 잘못된 것이 회생되는 것이 아니오, 내가 입힌 손해가 다시 달라지는 것이 아니고, 또 내가 죽인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내 회개, 나 혼자만의 회개라고 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참 회개를 하나님이 받아 주셔야 온전한 회개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가운데 18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에 대해서 회개 기도를 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고하되(고하되를 ‘기도하기를’ 이라고 했으면 좋겠습니다.) 이스마엘이나 하나님께 살기를 원하나이다”
이렇게 기도를 했을 때 이스마엘에 대한 것을 하나님이 책임지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스마엘이 서자이기는 하지만 아브라함의 아들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내가 좀 외도해서 편법으로 얻기는 했으나 이 아들이나 살아 남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여 이스마엘이나 주의 축복 가운데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내 실수로 인해서 이루어진 것이니까 여기에 대해서 벌이 내려진다면 이 아들은 죽는 것입다. 그런고로 아브라함은 이 시간에 이스마엘을 위해서 간절하게 기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이 이스마엘은 내 실수로 태어났습니다. 이 이스마엘에게는 죄가 없습니다. 이 이스마엘이 하나님 앞에 살아남기를 원합니다. 이 얼마나 간절한 기도입니까
이에 대해여 하나님은 오늘 본문에 무엇이라고 대답을 하십니까
20절을 보십시오. “내가 네 말을 들었다”고 하십니다. 네 기도를 들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마엘에게 이르러는 내가 네 말을 들었나니” 하십니다. 아브라함은 회개했습니다. 이스마엘을 얻게 된 것이 잘못된 것인 줄 알았습니다. 깊이 회개를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마엘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스마엘은 태어났습니다. 아브라함은 뼈가 아프도록 회개했습니다. 왜요 명년에 아들을 낳을 거라고 그러십니다. 네 아내 사래가 아들을 낳을 거라고 하니(21) 얼마나 후회가 되겠습니까 이럴 줄 알았다면 그런 실수는 하지 않았을 것을, 참는 김에 좀더 참아 기다릴 것을 하며 얼마나 후회했겠습니까 않그렇습니까 이건 우리가 이성적으로 봐도 답답합니다. 조금만 더 참았더라면 되는 것을 가지고 안타까운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아브라함은 얼마나 가슴을 쳤고 얼마나 사라가 후회를 했겠습니까 후회하고 통회자복 했습니다. 분명히 회개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잘못한 죄의 결과로 이 아들이 자기 앞에서 죽는 것을 보아야겠습니까 그래서 기도하는 말입니다. “하나님, 내가 잘못했습니다.” 회개합니다. 그러나 “이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아남기를 원합니다”기도했어요. 이스마엘이나 탈없이 잘 자라기만을 하나님께 기원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래 ! 네 말을 내가 들었다” 하시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계속 말씀하십니다.
이스마엘은 살 것이고,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생육이 중다하여 그로 크게 번성케 할지라 그가 열두 방백을 낳을 것이라”고 하십니다.(25:13-15) 또, “내가 그로 큰 나라가 되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20)
실수는 아브라함이 했는데, 아브라함이 진정으로 회개할 때 그 상처를 주께서 싸매어 주시고 주께서 책임져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복음이란 말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죄는 내가 지었고, 죄에 대한 회개는 내가 했고, 하나님은 용서했는데 그 책임이나 보응을 내가 다 받는다거나 내가 지고 있다면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또, 혹은 이 세상에서 내가 지은 죄에 대해서 죄 값을 내가 치르고 하나님 앞에 가서 영생을 얻는다 하십시다. 그것도 복음이 아닙니다. 실수는 아브라함이 했습니다. 그러나 책임은 하나님이 지셨습니다. 네 말을 내가 들었다 이스마엘은 내가 책임을 진다, 걱정 마라-이것이 복음입니다. 아주 엄청난 복음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약속을 어기고 이스마엘을 낳은 것은 큰 죄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짓을 만든 자가 누구입니까
이런 일이 이렇게 되도록 꾸민 자는 누굽니까 사라 입니다. 사라거든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사라의 죄를 책망하신다면 살아남겠습니까 너 하는 짓은 꼭 하와와 같구나 너는 못쓰겠다 하면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사라는 편법을 쓰고, 휘청휘청 하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약속을 꾸준히 지키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일방적이요, 절대적인 것입니다. 내 약속은 그대로 있다. “네 아내 사라가 내년에 아들을 낳으리라” 이것은 아무리 생각을 해 보아도 은혜 위에 은혜요, 큰 복음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사라가 한 짓을 보면 못됐거든요, 가만히 보면 잘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잘못, 그의 회개를 들으시고, 이제 하나님은 약속하신 대로 변함없이 그 약속을 이루어 가십니다. 네 아내 사라가 내년에 아들을 낳으리라 또, 내가 그녀에게 복을 주어 그로 열 국의 어미가 되게 하며 그녀의 후손 가운데 많은 왕들이 나리라(16) 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아브라함은 땅에 엎드려서 웃으며 심중에 이르기를 어찌 이런 일이 하며 웃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얼마나 좋았으면 웃었겠습니까 얼마나 좋고 기뻤겠습니까 아이 참, 진작 제게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고 하는 그런 생각인 것 같습니다. 얼마나 좋았으면 땅에 엎드려 혼자 웃었겠습니까
한편으로 생각하면 기가 막히거든요 100세에 무슨 아들을 낳겠나, 내 아내 사래는 90살인데 어찌 생산하리요, 내가 정말 이럴 수 있느냐 100세와 90세,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 그는 웃었습니다. 이 웃음은 복잡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의심하는 믿음은 아닙니다. 그가 의심을 하고 있는지 아닌지는 하나님이 아십니다.(23-27)
그가 비웃는 것은 아닙니다. 그가 비웃고 있다면 천벌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는 기쁜 가운데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느냐” 하며 웃었습니다. 나이가 얼마인데, 단산한지 언제인데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느냐 이렇게 웃고 있습니다. 사라가 저 장막 뒤에서 내년에 아들을 낳는다니까 그 소리를 듣고 웃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너 왜 웃었느냐’ 하고 물으니까 사라가 하는 말이 안 웃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웃었느니라” 그러십니다. 실재로 사라는 웃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웃는다고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기가 막혀서 웃는데 그것을 가지고 너 왜 웃느냐 그러시지 않습니다. 인간의 나약함을 그대로 받아 주십니다. 우스울 것이다,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본래 내가 약속한 것은 그대로 이루리라 “내 언약은 내가 명년 이 기한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실수가 있었어도 그는 약속을 받았고, 또 사라도 실수가 있었으나 하나님을 믿었고 이 시간에 와서 또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약속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이제 앞으로 태어날 아기의 이름은 ‘이삭’이라 하라 하셨습니다. 이삭은 “웃었다”하는 뜻입니다.
전에 이런 타임지 기사를 보았습니다. 어느 유명한 화가가 85세에 뒤늦게 결혼을 해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85세에 아들을 안고 많은 사람 앞에서 사진을 찢으면서 하는 말이 “다 같이 웃읍시다”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약속은 웃음을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가정에 웃음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이삭 “웃음”이라 지었습니다. 우리가 신앙하는 전능한 하나님은 우리를 웃게 하십니다.
우리가 가다 휘청 휘청 해도 다시 회개하면 그 회개를 받으시고 용서하시며 그 약속을 성실히 이행하시며 웃는 날을 주시는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내 언약을 이삭과 세우리라’고 하십니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는데(19,21)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것이 절대적인 은혜입니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그 자녀를 앞에 놓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내가 그와 언약을 세우리니 그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확실한 언약입니다. 절대적인 약속입니다. 이러한 약 속의 말씀을 마치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떠나 올라가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러한 복음 속에, 이러한 능력 속에, 이러한 약속 앞에 아브라함은 이제부터 성실했습니다. 흔들거리거나, 휘청함이 없습니다. 바로 그날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씀하신 대로 이스마엘과 집에서 생장한 모든 자와 돈으로 산 모든 자, 모든 남자들을 데려와 할례를 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즉각적인 순종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까 온 가정 식구가 할례를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이 할례 받을 때는 99세였고, 이스마엘은 13세라 그랬습니다. 이제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을 낳고 13년간 허우적거리며 자식에게 빠져 소시민적으로 살 때, 하나님이 나타나 “너는 열 국의 아비가 될지라” 영원한 언약을 주십니다. 그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즉시 영접하는 것으로 할례를 받았습니다. 이 할례 받는 것, 아브라함은 회개의 표시로도 받은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철저히 회개할 때 다 용서하시고 다시 연약한 아브라함을 세워 쓰시듯이 죄짓고 회개하고 흔들흔들 휘청 휘청 해도 우리를 쓰시는 전능한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 앞에 구원의 확실한 약속인 십자가를 바라보며 “너는 열 국의 아비가 될지라”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영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996.

3. 3

1. 주일 낮 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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