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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스라엘의 소망을 인하여 (행 28: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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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로마인의 손에 죄수로 내어준바 됨

우리가 로마에 들어가니 바울은 자기를 지키는 한 군사와 함께 따로 있게 허락하니라 드디어 사도 바울이 로마에 들어 섰다.

그때의 로마는 지금의 로마가 아니었다.

지금처럼 베드로 성당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콜로세움이 그곳에 없었다.

수도 로마에는 주피터 신전과 대 요새가 있었다.

그래서 바울이 로마에 발을 들여 놓는 순간 가장 먼저 눈에 뛴것은 마르스 신전이었을 것이다.

로마는 당시 이교의 중심지였다.

그리고 로마의 인구는 절반이 노예 신분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당시 나라의 형편은 말이 아니었다.

바울이 로마에 발을 들여 놓을 당시에는 네로라는 분이 로마의 황제였다.

네로라는 황제는 로마의 역대 황제중에 가장 악질적인 황제였다.

로마의 황금시대는 이미 사라진 뒤였고 점차 전제 군주들이 국민의 권리를 불법적으로 강탈해 오고 있었던 터였다.

당시 네로는 25세를 넘지 않은 젊은 나이로 학자들은 추정을 한다.

그러나 이미 그의 손은 살인의 피로 물들어 있었다.

그의 모친인 아그립피니아 ( Agrippina)는 바울이 로마에 도착하기 약 1년 전 쯤 살해 되었었다.

그의 아내인 옥타비아(Octavia)도 이미 살해 되었던 것 같으다.

무능한 네로의 자리에 앉아 온갖 잔인한 행동과 음란한 짓을 일삼고 있었다.

이교의 우상들로 가득차 있고 음란으로 난무한 시대였고 정치적으로도 나라의 운명이 기울고 있는 때였다.

바로 그때 사도 바울이 로마에 발을 들여 놓은 것이었다.

그것이 요즘처럼 관광으로 로마에 입국한 것이라면 그런데로 관전할 것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사도 바울은 로마에 죄인의 신분으로 들어 서고 있는 것이다.

죄인이 아니더라도 이스라엘인을 못살게 굴었던 당시에 죄인의 신분으로 로마에 발을 들여 놓은 일은 예사 일이 아니다.

20절 그러하므로 너희를 보고 함께 이야기하려고 청하였노니 이스라엘의 소망을 인하여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바 되었도다

2,동족들의 반대를 받은 바 됨

19절 유대인들이 반대하기로 내가 마지 못하여 가이사에게 호소함이요 내 민족을 송사하려는 것이 아니로다 여기에 사도 바울이 자기를 반대하고 있는 무리들이 누구라고 햇는가 유대인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럼 유대인은 누구란 말인가 유대인이란 바로 바울 자기의 동족이 아닌가 바울이 지금 로마에 온게 된 것은 이방인인 로마인들 때문이 아니었다.

18절을 보면 로마인은 나를 심문하여 죽일 죄목이 없음으로 놓으려 하였으나 오히려 이방인인 로마인들은 호의적이었고 호의적이어야 할 동족은 로마인들이 심문한 결과를 놓고 죄가 없다고 판단되어 방면할려는 것을 가로 막고 로마로 가께끔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지금 자기가 이런 신세가 된것은 이스라엘의 소망을 인함이로 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오늘 우리들이 이것을 배워야 한다.

자기를 헐뜻고 비방하고 때리고 옥에 가두고 또 죽일려고 하는 무리들이지만 바울은 조금도 미워하지 않고 도리혀 그들에게 하늘의 소망을 줄려고 자신이 로마로 오게 되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를 향해 저주하는 사람들에게 인정사정 없이 죽을 매를 치는 사람들에게 아므런 영고 없이 옥에 가두고 또 죽일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기위하여 살고 있는 아름다운 사도 바울이다.

사랑하는 사람끼리 사랑하는 일 누가 하지 못하는가 친한 사람들끼리 주고 받는 일 누가 하지 못하는가 잘 알고 지내는 사람들끼리 웃는 일 그 누가 못하는가 할 수 있는 그런 일들 말고 누구나 잘 하는 그런 일들 말고 사도 바울처럼 동족이지만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고 있는 못난 사람들이지만 사랑하면서 소망을 주고 있음같이 우리들도 바울의 뒤를 따르자.

예수님께서 그렇게 사시었다.

사도 바울을 위하여 여기 계시는 저와 여러분들을 위하여 조롱을 받으시면서도 참으셨다.

핍박을 받으시면서도 참으시었다.

십자가 지시고 죽으시면서도 그들을 위하여 기도를 하시었다.

사도 바울이 이 예수 그리스도를 닮으신 것이었다.

고전11;1절에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고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말할 수 잇었던 것이다.

 3,쇠사슬에 매인바 됨

20절 하반절에 ...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바 되었노라 바울은 지금 굵은 쇠사슬에 매인채로 로마에 호송되어 왔었다.

사도 바울이 무슨 죄를 범했는가 사도 바울이 무슨 죄를 저질렀는가 사도 바울이 무었을 어떻게 했길래 차거운 쇠사슬에 매인 것인가 17절 사흘 후에 바울이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을 청하여 내가 이스라엘 백성이나 우리 조상의 규례를 배척한 일이 없는데 예루살렘에서 로마인의 손에 죄수로 내어준 바 되었으니 바울은 조상의 규례를 배척한 일이 없다고 했다.

조상의 규례란 하나님의 말씀인 구약성경을 말한다.

18절엔 로마인은 나를 심문하여 죽일 죄목이 없음으로 놓으려 하였으나 로마인들이 바울을 심문하였다.

당시 법이 가장 잘 발달한 나라가 로마였다.

그만큼 법이 엄하게 시행되었던 나라도 로마였다.

그 로마가 바울을 심문했었는데 아무런 혐의를 찾을 수가 없었다고 했다.

사도 바울은 조상의 규례를 배척한 일이 없었고 로마인들의 심문 결과도 아무런 형의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 바울은 굵은 쇠사슬에 매여 있는 것이다.

왜 사도 바울이 쇠사슬에 매여 있는 것이가 20절이다.

다 같이 읽자.

이러하므로 너희를 보고 함께 이야기 하려고 청하였노니 이스라엘의 소망을 인하여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바 되었노라 사도 바울이 지금 이렇게 쇠사슬에 매이게 된 것은 자기의 어떤 허물때문도 아니었고 또 자기의 어떤 영달 때문도 아니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쇠사슬에 매이게 되게 된 것은 순전히 이스라엘에게 소망을 주기 위함이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이여

잠시 우리들의 주위를 살펴 보자.

정가는 정가되로, 학원은 학원대로, 사업장은 사업장되로, 갈등과 불안, 격동과 혼미를 거듭하고 있는 것이 우리들의 주변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져 원인이 뭔가를 캐고 따질려고만 한다.

그리고 누가 이렇게 했더라면 이런 사태는 되지 않았을것인데...

이는 아무개가 무능했기 때문이다.

아무아무개를 갈아 치워야 한다.

또 어떻게 해서라도 상대에게 짐을 뒤집어 씨울려고 야단들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사도 바울처럼 동족을 위해서 이스라엘의 소망을 위해서 쇠사슬에 매일려고 자진하는 사람은 없다.

우리의 구세주이신 주 에수 그리스도 처럼 자진해서 십자가를 지고자 하는 사람들이 없다.

2000년전 바울이 전한 기독교는 타락하고 부패한 로마를 소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도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만 우리들이 지고 간다면 우리들이 믿는 십자가의 도리가 이 사회와 이 민족을 구원할 것으로 믿는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로마를 위해 십자가를 지자.

동족의 소망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자.

그리고 미듬의 형제들을 위하여 사슬에 매일 수 있는 사람이 되자.

바울 한 사람을 통하여 이교도 였던 로마가 복음화되고 흩어진 동족에게 새로운 소망을 심어 줄 수 있었던 것처럼 여러분 한 사람 때문에 여러분 주위가 산 소망을 가지고 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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