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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비시디아 안디옥 전도 여행 (행 13: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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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과 바나바가 구브로 전도를 마치고 다시 육지로 올라왔습니다. 13절에서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9절 이전에는 언제나 바나바와 바울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 와서는 바울과 바나바로 소개가 됩니다. 바나바는 먼저 예수를 믿은 사람입니다. 바나바가 바울을 도와주었습니다. 바나바가 사울을 예수 믿었을 때 자기들의 공동체 속에서 보호해 준 사람이 바나바입니다. 연륜적으로나 신앙적으로나 성숙한 인격과 인품을 가진 사람입니다. 정말로 좋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전도 여행을 떠나면서부터 그 위치가 이제는 조금 바뀝니다. 바울이 언제나 이 선교 여행을 이끌고 가는 주체가 된다는 것입니다. 설교를 해도 바나바가 설교를 하는 것이 없습니다. 언제나 바울이 합니다. 선교 여행도 언제나 바나바가 끌고 가는 것이 없습니다. 바울이 끌고 갑니다. 여기서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지도자를 볼 수 있습니다. 바울과 같이 앞에서 이끌어 가는 지도자적인 형태의 사람입니다. 바나바는 어떤 사람입니까 앞에 나가서 설교를 하거나 사람을 끌고 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바나바는 도와주는 사람입니다. 협력자의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나바는 선봉자가 아니라 내조자입니다. 그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는 언제나 뒤에 숨어서 일 뒤처리를 해주는 사람입니다. 교회는 이 두 가지의 사람들이 필요로 합니다. 어떤 사람은 나가서 설교를 하고, 외치고 끌고 나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만 있는다고 해서 교회가 일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뒤에서 숨어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을 마무리해 주고, 일을 정리해 주고, 일을 도와주고, 협력해 주고, 내조해 주는 그런 사람이 필요로 합니다. 이 두 가지는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누가 높으냐, 누가 낮으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은사에 따라서 그런 일을 행할 때에 하나님의 교회는 아름답고 사랑이 생기고 든든하게 서가는 것입니다.
구약에 이런 관계가 있습니다. 바로 여호수아와 갈렙입니다. 그들은 모세 밑에서 잘 자랐습니다. 그들은 모세를 따라서 하나님의 일들을 잘 감당을 했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나이 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이때 모세는 하나님의 명을 받들어 여호수아나 갈렙 이들 둘 중에 한 사람을 택해야 했습니다. 그 때 여호수아에게 모세의 지도력이 이어집니다. 문제는 갈렙일 것입니다. 갈렙이 얼마나 고민이 많았겠습니까 모세를 섬길 때는 갈등이 없습니다. 격이 다르니까, 그런데 여호수아는 같은 동기에요. 같은 격인데. 그런데 이 여호수아를 리더로 세우려니 갈렙이 얼마나 갈등이 많았겠어요. 여호수아서를 보면 갈렙이 나타나지를 않아요. 죽는 것이 아니라 숨은 것입니다. 언제나 여호수아가 나와서 지휘를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언제나 뒤에는 갈렙이 있었던 것입니다. 갈렙이 있었기 때문에 여호수아가 그 일을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갈렙이 나타난 때가 있습니다. 그의 나이 85세 때입니다. 그는 40년 동안 숨어 있었습니다. 여호수아 그늘 밑에서 그는 나타나지 아니하고 협력자로, 내조자로, 보조자로 존재합니다. 85세 되었을 때에 한 번 나타납니다. 우리는 겉으로 나타난 여호수아 보다도 안으로 숨어 있는 갈렙의 인격과 신앙의 깊이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는 이와 같이 두 가지 지도력이 필요로 합니다. 또 존재해야 합니다.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하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신 은사가 각각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다음에 13절에서 한가지 더 발견할 수 있는데
“요한은 저희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가고” 중요한 말입니다. 이는 마가요한입니다. 그는 바나바와 바울을 좇아서 전도 여행을 좇아갔습니다. 그런데 바보에서 버가에 가는 길목에서 마가라는 요한이 왜그런지 모르지만 자기는 안가겠다는 것입니다.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것입니다. 전도 여행 포기한 것입니다. 요한은 저희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어쨌든 시험에 들어서 도중하차하고 맙니다. 왜 그랬을까요 ‘나는 매일 뒤에서 일하고 이게 뭐냐 혹은 전도 여행이 힘들어서 인지도.“ 하여튼 집으로 가버렸습니다.
우리도 가끔 일하다 보면 교회에서 이런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처음에는 열심히 합니다. 그런데 며칠 지나 보면 없어져요. 마가와 같은 케이스입니다. 여러분 처음도 잘하지만 끝도 잘하기를 바랍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고난이 오는 것입니다. 시험이 있는 것입니다. 항상 여러분을 천사 대접하지 않습니다. 아주 신경질 나는 일들도 생깁니다. 더구나 오해를 받을 때는 더 참을 길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썅”하고는 일을 놓고 가버립니다. ‘내가 할 일이 없어서 여기에 있느냐’ 가버립니다. ‘내가 월급받냐’ 하고 가버립니다.
마가는 어떤 사람입니까 준비되지 않은 사람입니다. 준비되지 않은 사람이 일을 했습니다. 이 문제는 초대 교회에서 굉장히 중요한 문제로 나타납니다. 이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15장 36절에 2차 전도 여행 할 때 이 문제가 다시 등장을 합니다. 사도행전 15:36-40을 읽겠습니다.
1차 전도 여행 마쳤습니다. 전도하고 온 사람들이 궁금합니다. 잘믿고 있는지. 시험에 들지는 않았는지. 그래 다시 심방하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바울은 바나바에게 다시 떠나자고 말합니다. 이때 바나바가 마가도 데리고 가자고 했습니다. 이제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바나바는 자기들을 버리고 떠났던 사람이지만 마가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고자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아주 싫어합니다. 그 사람 데려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 무슨 일을 할지 모르니 그 사람 데려가지 말자는 것입니다. 바나바와 바울이 마가 문제 때문에 논쟁이 붙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 “서로 심히 다투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나바도 싸웠던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싸우지 않았을 것 같았는데 싸우는 것 보니까 기분이 좋네요. 그런데 서로 다툰 정도가 아니라 서로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서로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마가 문제 때문에. 여러분 바나바가 옳습니까 바울이 옳습니까
바나바는 사람을 중요시하는 겁니다. 일을 중요히 여기지 않습니다. 사람이 상처나면 일을 포기하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나바는 교회를 세웠다는 말이 없습니다. 또 일을 많이 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사람을 키운 사람입니다. 한편 바울은 사람은 좀 손해를 보더라도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3차에 걸쳐서 전도 여행했고 바나바의 3차 전도 여행 그런 말이 없습니다. 그는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웠고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이 두사람이 누가 좋고 누가 낫다는 것보다는 은사가 다르다는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역할이 서로 다를 때 이것은 상호 협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르다는 것은 서로 보완을 말하는 것입니다. 상대의 약점이 보이는 것은 내가 그 약점을 보완하라고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앞으로 상대의 약점이 보이거든 내가 그것을 덮어서 이루어 가시기를 바랍니다. 다르다는 것은 상호 보완을 말합니다. 우리는 서로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역시 인간은 인간이구나’라는 점입니다. 바울과 바나바, 굉장히 위대한 사람들이지만 서로 싸울 때도 있고, 서로 헤어질 때도 있는구나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여기서 조용한 것을 발견하는데 바나바와 바울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위대한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을 아브라함 되게 하신 하나님이 위대하신 것입니다. 바울이 위대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을 바울되게 하신 하나님이 위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위대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이 위대하신 것입니다.
또한 가지 발견하는 것은 ‘역시 사람은 헤어질 수도 있구나’하는 점입니다. 이들의 헤어짐은 오히려 축복의 계기로 마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수많은 고통과 아픔과 그런 사건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나바는 결국 마가라는 요한을 끌어안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마가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골 4:10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바울의 편지에 마가가 나타납니다. 바울이 마가를 미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마가가 찾아오거든 그를 따뜻하게 대접하라 는 것을 보게 됩니다. 바울은 마가를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또 딤후 4장 11절에도 마가에 대한 언급이 또나타납니다.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마가는 신앙이 어렸을 때는 변덕이 있었지만 그러나 그러한 실수를 통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유익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예수를 믿고 부딪히는 사람들이 있거든 그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그 사람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에게 배신을 주고, 상처를 주고 아픔을 주었지만은 그 사람도 하나님을 위해서 굉장히 크게 일할 수 있는 사람임을 잊지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것을 마가가 바나바와 바울을 떠났던 사건을 통해서 전체적으로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드디어 이제 바울은 비시디아 안디옥에 도착하게 됩니다. 그리고 안식일에 회당에서 설교를 합니다. 설교가 굉장히 깁니다. 여기에서 전도 설교의 모형을 볼 수 있습니다. 길지만 4가지의 유형으로 보면 아주 쉽습니다.
17정부터 22절까지를 보면 바울이 구약의 이야기를 전해 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구약의 말씀을 인용해서 어떤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가만히 보니까 애굽땅에서 나온 사건, 광야에서 40년간 살았던 사건, 그리고 사사를 주었던 사건, 그리고 사울 왕을 세웠던 일, 그리고 하나님에게 합한 왕 다윗을 세운 일까지 나옵니다. 여기까지 안으면서 느끼는 것은 바울은 구약을 아주 잘 알았다는 것입니다. 정통합니다. 구약을 여러분들도 잘 알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떤 사람은 사사기를 찾으라고 하면 신약에서 찾는 사람이 있어요. 바울이 얼마나 구약을 잘 아는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을 때 잘 인용했습니다. 그럼 왜 구약의 이야기를 합니까 다윗 왕 이야기를 하려고 그래요. 다윗 왕 이야기를 왜 합니까 그 왕의 씨에서 메시야가 나오니까
그 다음 두 번 째 메시지 23절에서 25절까지입니다.
사도바울의 관심은 메시야입니다. 메시아인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하고 싶어서. 약속된 메시아. 그 메시아가 지금 바로 여러분들 앞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메시지에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가 초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는 기호만 다면 어디에 있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싶은 겁니다. 감옥에 있던지, 어디에 있든지..
세 번째 메시지를 봅시다. 26절부터 37절까지입니다.
다윗은 썩었지만 예수는 썩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씨에서 메시아가 나오고 그 메시아가 누구냐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냐 이 세 번째의 이야기의 주제입니다.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여 다시 살아나셨고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라는 것입니다.
네 번째 이렇게 예수님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난 바울은 그 결론을 38절에서 41절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결론은 두 가지입니다. 이 사람.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그런데 이것도 다 구약에서 예언이 되었던 것이고, 무덤에 묻혔다가 너희를 위하여 부활하여 다시 살아나시고, 이것도 역시 구약에 예언이 된 것인데, 다윗의 육체는 다썩어버렸지만 이분의 육체는 썩지 않았다. 이분이 계시는데 이 사람을 힘입어 이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으면 죄 사함을 얻을 것이다. 38절의 메시지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라. 다윗은 썩었지만 이분은 썩지 않았다. 이분을 믿으면 너는 죄사함을 받게 될 것이다. 이게 그분의 설교입니다. 또한 가지 너희가 모세의 율법으로는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지 않느냐. 39절의 메세지.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이것이 결론입니다.. 예수를 믿어라. 그분은 죽은 분이 아니다. 그분은 메시아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구약에 약속된 메시아인데 이분은 죽었지만 죽지 않으셨고 다시 살으셨으며, 이분을 믿으면 구속 곧 죄사함을 얻을 것이고,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 곧 의롭다 함을 얻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울의 설교입니다.
지금 바울은 회당에 있습니다. 회당장이 있고 그들을 얼마나 율법을 잘 압니까 율법에 정통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는 구약의 율법을 가지고 접근을 하는 것입니다. 그 상황에 맞게 적절하게 대응을 합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17장에 가면 사도바울이 아덴에 갑니다. 거기에서는 구약의 율법을 말하지 않습니다. 바로 그 상황에 맞게 이끌고 갑니다. 여러분 지혜롭게 전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열정만 가지고는 시험에 들기가 쉽습니다. 사람에 따라서 대상에 따라서 전하는 메시지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대상이 다를지라도 다르지 않은 것 한 가지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결혼을 하십시오. 예수님을 위해 돈을 버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위해 성공하시기를 바랍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여러분이 예수님을 위해 기꺼이 무엇이든지 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대분분의 많은 사람들은 누구를 위하여 예수가 필요합니까 내 자식을 위해서 예수님이 필요해요. 내 성공을 위해서 예수님이 필요해요. 내 사업을 위해서 예수님이 필요해요. 주님은 간곳 없고 나만 홀로 남았도다. 아닙니다. 나는 간곳없고 주만 홀로 남아야 합니다. 이분이 바로 바울이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에게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체면이 조금만 깎여도 펄쩍펄쩍 뜁니다. 여러분의 체면이 깎이기를 바랍니다. 창피를 좀 당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오해도 한 번도 안받아본 사람들. 자기 체면도 한 번 깍여보지 못한 사람들. 얼마나 부끄러운 사람들입니까 예수를 위해서 손해를 봐야 합니다. 예수를 위해서 손해도 봐야 합니다. 예수를 위해서 잠못자는 시간도 있어야 합니다. 예수를 위해서 매를 맞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바울의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삶은 어떻습니까 정말 예수를 위해서 손해본 것이 있습니까 시간 손해본 것이 있습니까 자존심을 손해본 것이 있습니까 사랑하는 사람들이 사랑한다고는 하면서도 서로 희생하지 않는다면 그게 정말 사랑입니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정말 희생을 해야합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을 위하여. 그것이 사도 바울의 인생의 전부였습니다.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예수에 인생을 바치는 이런 사람이 되어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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