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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데살로니가, 베뢰아 전도 (행 17: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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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을 보면 유럽의 첫 복음 전파된 빌립보를 떠나서 데살로니가로 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 보게 되는 것은 데살로니가와 베뢰아입니다. 2차 전도 여행의 도시들을 보면 아덴과 고린도와 데살로니가, 그리고 베뢰아, 에베소 등 아주 중요한 도시들을 전도하고 있습니다.
1, 2절
사도바울의 복음 전도 여행에는 몇 가지 특징들이 나타납니다. 첫째는 한 도시에서 다른 도시로 갈 때는 대체로 핍박이 일어나 더이상 그 도시에 머무를 수 없을 때 떠난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1차 전도 여행 때에도 마찬가지이지만 빌립보, 데살로니가, 그리고 베뢰아를 보면 그 도시에서 핍박이 일어나 더 이상 그 도시에서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떠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빌립보에서 바울이 많이 두들겨 맞고 깊은 감옥에 들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5절을 봅시다.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할 때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데 이때 사람들이 일어나서 바울 일행을 아주 핍박을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할 수 없어서 머무르지 못하고 그 옆에 동네인 베뢰아로 떠나게 됩니다. 베뢰아에서 복음을 전합니다. 무슨 일이 생깁니까 13절 보십시오.
데살로니가에서 바울을 핍박했던 사람들이 베뢰아까지 옵니다. 그리고 베뢰아에서도 복음을 전하지 못하도록 바울을 핍박하고 공격을 합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바울은 베뢰아를 떠나서 아덴으로 움직이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즉 핍박이라고 하는 것은 그 도시를 떠나라고 하는 하나님의 일종의 신호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계획해서 이만큼 전도하고 그 도시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한 곳에서 열심히 전도합니다. 그리고는 핍박이 일어나고 더 이상 있을 수 없게 되고 이렇게 해서 그들은 한 도시에서 다른 도시로 옮겨갔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울과 그 일행은 언제나 어느 도시에 가든지 유대인의 회당이라고 하는 거점을 사용했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빌립보에서는 회당이 없었기 때문에 기도하는 기도처를 찾았습니다. 기도처가 있는가 하여 찾아보다가 루디아라는 여자를 만난 것입니다. 오늘 17장 1절에 보면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10절을 보십시오. 베에 가자마자 그가 찾은 곳은 유대인의 회당이었다는 것이죠. 이렇게 볼 때에 바울의 전도란 유대인의 회당을 거점으로 움직였습니다. 무작정 아무도 모르는 이방인의 세계에 뛰어 들어가서 전도한 것이 아니었고, 길거리에서 전도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언제나 그가 잘 아는 그에게 익숙한 그런 거점을 통해서, 그리고 유대인들에게 먼저 전도하고 이방인들에게 전도하는 이런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이 방법은 사도바울의 1차, 2차, 3차 전도 여행에 사용한 방법이었습니다.
유대인은 같은 동족입니다. 회당은 사도바울에게 어렸을 때부터 자라난 익숙한 장소입니다. 처음에 알듯이 바나바와 바울이 전도 여행을 떠났을 때 구브로라는 섬을 선택했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구브로라는 섬은 바나바의 고향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아는 곳이었습니다. 익숙한 곳이었습니다. 모르는 곳부터 뚫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아는 데를 통하여 모르는 데로 들어가고, 익숙한 데를 통하여 익숙하지 않은 곳으로 들어가는 이런 방법을 쓰고 있다는 것을 바울의 전도를 통하여 볼 수가 있습니다.
세 번째 특징입니다. 바울은 어느 곳에 가든지 하나님께서 만나게 하시고, 준비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무작정 많은 사람들에게 전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몇몇 소수의 사람들을 통해서 전도를 하게 됩니다. 익숙한 사람들을 통해서 전도를 하게 됩니다. 그 때 하나님이 만나게 해 주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만나게 해 주는 사람들을 만나는데 먼저 무엇을 합니까 말씀을 강론을 합니다.
2절을 보면,
“자기의 규례대로”, 참 중요한 말입니다. 자기 법칙대로 가기가 어디를 가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늘 하는 우선 순위가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스타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 말씀을 전합니다. 빌립보에서는 바울의 자기 규례가 있었는데 먼저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바울에게는 두 가지의 자기 스타일이 있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이 두 가지를 우선 순위로 했다는 것입니다. 처음에 기도처를 찾는 일이고 두 번째는 말씀을 증거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도하고 말씀을 전하는데 어찌 기적이 안 일어나겠습니까 그리스도의 복음은 반드시 전해지고 영광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는 어느 장소를 택하든 무조건 기도하고 시작하는 겁니다. 사람을 만나면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나지는 사람들과 더불어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사람을 모아 가지고 기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기도하고 있을 때 사람이 만나 지고, 말씀을 전할 때 사람이 만나 지면 ‘그 사람이 하나님이 보낸 사람이다.’ 그렇게 믿고 그들과 함께 그들을 위하여 복음의 수고를 감당했다. 우리는 너무나 복음보다는 복음 외의 것을 생각을 하고 신경을 많이 쓰고 시간을 보낼 때가 많습니다.
네 번째입니다. 바울이 전도하는 시간들이 대체로 짧다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에 몇 날을 있었습니까 2절에 보니까 “세 안식일” 3주입니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바울이 지나는 곳마다 열매가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오래 같이 살지만 아무런 영향력을 주지 않는 사람이 있어요. 평생을 같이 살지만 아무 영향력이 없어요. 세월만 보내는 거에요. 어떤 사람을 짧게 만났는데 그 사람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시간을 오래 보낸다고 모든 것이 다되는 것이 아닙니다. 짧은 시간이라 할지라도 결정적인 것으로 사람에게 영향을 줄 수 있고,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시간에 문제도 문제지만 무엇을 전했느냐 입니다. 여러분 무엇을 가지고 사십니까 무엇을 전하면서 사십니까 어떤 사람은 일년을 십년처럼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십년을 일년처럼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무 변화가 없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영향력을 주었습니까 여러분이 만나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그리스도를 보여 주었습니까 이것은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내용의 문제입니다.
3절을 봅시다.
3주 동안에 짧은 시간이었지만 바울의 메시지를 이것이었습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명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사도바울의 메세지는 십자가와 부활이었습니다. ‘너의 모든 죄를 위하여 예수님은 해를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그 예수를 네가 죽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죽은 예수를 다시 삼일만에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메시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전도를 할 때 ‘교회 갑시다.’ 합니다. 그러나 ‘예수 믿으세요’ 이 말은 잘 못합니다. 그게 잘 안됩니다. ‘교회 가면 잘 됩니다.’ 이 말은 쉽지만 ‘회개하고 예수 믿으시오’ 이 말은 하기가 어려워요. 그 말을 하려면 가슴이 벌렁벌렁해요. 그래서 자꾸 휘어 가요.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을 위해 죽었고 당신을 위해 부활하셨습니다.” 그가 전한 첫 번째 메시지였습니다.
두 번째는 3절을 다시 한번 봅시다.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예수가 그리스도다. 이분이 메시아다. 예수가 그리스도다. 이것은 모든 신약의 핵심을 이루는 말입니다. 구약에서 약속하신 분, 메시아가 바로 여기에 있다. 예수가 메시아다. 이것보다 더 주요한 메시지가 없고, 이것보다 더 급한 메시지는 없습니다. 사도바울은 짧은 시간에 제한 된 공간에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메시지를 전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메시지를 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위해 죽었고, 당신을 위해 사셨고, 지금도 통치하고 계시며 그분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야입니다. 그분을 믿으십시오.” 이런 메시지가 선포되면 언제나 두 가지의 반응이 나타납니다. 하나는 메시지에 대해서 긍정적이고 이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반응이 있고요, 하나는 이 메시지에 대해서 부정적이고 이 메시지를 거부하는 이런 반응이 나타납니다.
4절,
사도바울의 메시지를 듣고 경건한 헬라인 중에서 많은 사람들, 또 적지 않은 귀부인들, 이런 분들이 메시지를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라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복음에 대해서 깨닫는 것이 있는데 복음은 많은 지식과 합리적인 설명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긍정적이 반응을 갖게 된 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우리는 흔히 그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설명이 부족해서 저 사람이 예수를 믿지 않느냐’ 그렇지 않아요. 설명을 충분히 했기 때문에 예수를 믿느냐 그것도 아니에요. 물론 우리가 굉장히 지혜롭게 말해야 하지만, 그것 때문에 사람이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에요. 그 사람이 예수님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사람의 지혜의 말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인 것입니다.
“주 예수를 믿어라” 말하면 두 가지의 반응이 나타납니다. ‘저 사람이 미쳤나’ 이런 반응이 있고, 어떤 사람은 그 말을 듣고 어린아이처럼 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까 귀부인들이 그 말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바울이 간수에게 발한 것을 기억합니다. 앞뒤가 없어요. “선생들이여 어떻게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할 때에 구약부터 설명했다든지, 이런 것이 없어요. “주 예수를 믿어라 그러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여러분 이런 의미에서 성령의 능력을 믿고 전도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능력을 믿고 쓸데없는 주변의 말들은 하지 말고 단도직입적으로 딱 들어가야 합니다.
두 번째 또다른 반응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거부하는 반응입니다. 5절, 6절,
예수님에 대해서 반항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그냥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감정적입니다. 그러니 이것도 역시 지식이나 합리성의 문제가 아닙니다. 영적인 문제입니다. 예수를 거부하는 것은 비합리적이기 때문에 안 믿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영적인 문제입니다. 사탄이 대개 이렇게 개입을 합니다. 마귀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드러나면 소동을 합니다. 처음에는 유혹을 하지만 그것이 먹히지 않을 때는 소동을 하고 폭력을 가합니다. 사람들은 쉽게 이 방법을 씁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가 이런 방법을 씁니다. 이것이 사탄의 방법입니다. 우리는 이런 방법을 택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무엇입니까 모세가 바로와 싸울 때 절대 데모 안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일대일로 영적인 싸움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떼거지로 몰려와서 세상의 힘을 사용합니다. 마귀가 계속해서 쓰는 방법입니다. 우리의 생애에 이런 방법에 동참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옳은 방법이 아닙니다.
7절, 8절, 9절,
6절에서도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사람들이다” 바울의 일행에게 이렇게 누명을 씌웁니다. 7절에도 보니까 예수님의 문제를 가이사의 문제와 연결을 시킵니다. 예수님과 가이사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러나 이 사람들은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말하면서 예수의 문제를 정치적인 문제로 끌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예수를 로마의 황제와 대항하는 인물로 바꾸어서 거짓 주장을 가지고 바울 일행을 고발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더 이상 전도하지 못하고 그 옆 동네에 전도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10, 11절, 12절,
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 사람들 보다 훨씬 예의가 있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성경을 열심히 읽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실이 그런가 안 그런가를 살피는 그런 태도가 있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많은 귀부인과 남자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에서 이렇게 소란을 피우고 정치적인 문제로 끌고 갔던 사람들이 베뢰아까지 쫓아옵니다. 이것을 보면 확실히 마귀가 역사하는 것을 알 수 가 있습니다. 자기가 아니면 아니었지, 거기까지 쫓아 올 거 없거든요. 그런데 거기까지 쫓아오는 것을 보면 뭔가 어떤 영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13, 14절,
복음을 전하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이런 일은 똑같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을 환영하는 데가 어디 있겠습니까 다 복음을 환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다른 구원의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15절,
너무나 급박해서 동료들은 남겨두고 바울만 배를 타고 아덴이라는 도시로 피신을 합니다. 나중에 다시 만나게 됩니다. 상황이 급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2차 전도 여행입니다. 이렇게 해서 복음은 세계에 전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지만 대가를 치뤄야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위하여 대가를 치룬다면 억울한 일이 있겠지만 하나님을 위하여 대가를 치룬다는 것은 고통 중에도 기쁨이요, 고난 중에도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귀한 일에 참여시켜 주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바울의 생애는 인간적으로는 그렇게 행복한 생애는 아니었을 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감격스런 모습으로 살았습니다. 우리 자신만 보지 말고 하나님과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을 향한 값진 희생이 우리에게 있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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