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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덴에서의 바울의 설교1 (행 17: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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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바울이 아덴이라는 도시에 오게 됩니다. 어떻게 바울이 아덴이라는 도시까지 오게 되었을까 바로 이것이 성령님께서 아시아 전도를 막으시고 마게도냐로 가게 하신 이유입니다. 또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었는데
사도행전의 역사는 세 가지 단계가 있는데 첫 번째 단계는 예루살렘에서의 복음의 역사입니다. 이때는 베드로라고 하는 사람을 세워서 유대와 사마리아 땅을 전도하게 합니다.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어느 한 곳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머물러 있어서는 안됩니다. 계속 발전해 나가야 합니다. 두 번째 단계는 안디옥을 중심으로 소아시아로 확산해 가는 과정입니다. 구래서 예루살렘 교회에 핍박을 주신 것입니다. 언제든지 핍박을 받을 때에, 개인적으로 꼭 생각해야 할 것은, 이게 왜 우리에게 어려움과 고난이 있는가 그것을 복음과 연관을 시켜 봐야 합니다. 세 번째 단계는 소아시아에 마케도냐 쪽으로 가라고 성령께서 말씀하십니다. 그 당시의 세계의 중심은 그리스와 로마입니다. 바울로 하여금 그리스의 땅을 밟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로 하여금 로마의 땅을 밟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이제 오늘 우리는 로마 땅을 밟기 전에 바울로 하여금 그리스 땅을 밟게 하는 것을 게 됩니다. 그리스, 특별히 아덴이라고 하는 이곳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했던 철학자들을 배출한 곳입니다. 예를 들어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등등의 고향입니다.
16, 17절,
첫째는 복음이라고 하는 곳은 농촌과 어촌과 미개한 지역에만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도시에도 복음이 전파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문화와 철학과 예술이 발달한 곳에는 우상이 아주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과학이 발달한다고 미신이 없어질까요 아닙니다. 더 많아집니다. 일본에 가보면 최고의 첨단 과학이 발달했는데 아주 놀랍게도 그것이 우상과 미신과 만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베뢰아에서 핍박을 받아 아덴으로 도망을 왔습니다. 그는 동료들이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때 사도바울은 아덴이라는 도시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이 때 그는 기막힌 세계를 그가 본 것입니다. 그것은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하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음악이 발달했다, 과학이 발달했다, 예술이 발달했다. 이런 것도 보았겠지만 그 기초에는 엄청난 우상과 미신의 세계다.
우상이나 미신이라고 하는 것은 미개한 사람들의 것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타락한 모든 인류의 전유물입니다. 무식한 사람은 무식하게 표현을 하는 것뿐이요, 유식한 사람은 유식한 모양으로 갖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인간에게는 두 가지의 신이 있습니다. 자신이 신이든지, 아니면 수많은 잡신과 우상과 미신을 갖든지, 두 가지 중에 하나입니다. 문화가 발달할수록 우상은 정교하게 파고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아덴은 우상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이것을 본 사도바울의 반응은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분노로 가득 찼습니다. 바울은 문화적인 아름다움을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굉장한 분노가 생겼는데 죄에 대한 분노, 우상에 대한 분노, 사탄에 대한 분노에. 여러분 이런 거룩한 분노를 느껴 본 적이 있습니까 우리는 쓸데없는 분노를 잘해요. 진짜 분노는 못하고. 내안에 있는 죄에 대해서 분한 생각을 가져 본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 마귀가 역사 하는 것에 대해서 정말 분해 본 적이 있습니까 정말 가슴을 쳐 본적이 있습니까 아덴이라는 곳에는 2만 5천개내지 3만개의 우상이 있었다고 합니다. 우상을 보면서 갖는 영적 분노, 죄를 보면서 갖는 영적 분노, 바울에게는 이런 반응이 있었습니다. 왜 이 땅에 죄가 없어지지 않는가 그것은 죄를 보면서, 사탄의 역사를 보면서 분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적당하게 과학의 한 현상으로, 문화의 한 현상으로 그것을 해석하고 넘어가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그것을 이용합니다. 마귀가 그곳을 통해서 들어오는 것입니다.
두 번째 반응은 사도바울은 복음을 선포합니다. 두곳에서 복음을 선포합니다. 유대인의 회당에서, 두 번째는 사람들이 막 사는 시장에 가서, 대중들에게 복음을 변증합니다.
18절,
거기서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의 학파들을 만납니다. 그들은 바울을 향하여 말쟁이다라고 말합니다. 왜 말쟁이라고 말합니까 이는 예수와 또 몸의 부활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예수를 전할 때 무엇이라고 했겠습니까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라고 말했겠지요. 그들의 신관과 역사관에는 맞지않아요 또 몸의 부활을 말했는데 그들에게 그런 철학은 없었어요. 예수가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세계관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격렬히 논쟁을 한 것입니다. 여기서 또한 가지 사실을 알 수가 있는데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세상의 철학과 종교를 전혀 달리한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많은 종교들은 자기들과 예수교가 비슷해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거기에도 구원이 있고, 우리에게도 구원이 있다고 해라. 선을 행하면서 살자 이런 선에서 이야기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안됩니다. 왜 우리가 생명을 걸고 예수를 전하는데요 여러분 세상과 우리는 다릅니다. 세상에 속해서 살지 마십시오. 사람의 철학과 사람은 달라요. 같을 수가 없어요. 그리고 사람의 철학과 방법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인간이 만든 철학과 종교 속에 어찌 인간에 대한 구원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구원은 인간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밖에서부터 오는 것입니다. 선을 행함으로 구원에 이른다면 하나님은 필요 없어요. 왜냐면 자기가 잘하면 되니까 선을 행한다고 거기에 구원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19-20절,
아레오바고를 갑니다. 그 당시 재판과 법을 주관했던 곳입니다. 바울을 이곳으로 데려온 것입니다. 그리고 네가 주장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21절,
이상한 것에 대해 관심이 많아요. 21절에 보니까 항상 새로운 것에 관심이 많아요. 유행이지요. 대도시는 예나 지금이나 유행에 관심이 많아요. 항상 새로운 것이어야 해요.
여러분 항상 새롭고 유행을 따라가는 사람들은 마음이 허한 사람들입니다. 허해서. 가득차 있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마음이 허해서. 이래도 만족을 못하고, 저래도 만족을 못하고 그래서 새로운 것만을 추구해요. 변덕이 심해요. 자꾸 바꿔요. 그래야 마음이 편해요. 바울은 그들에게 딱 잘라서 말하면서 복음을 전합니다.
22절,
바울의 시작이 놀랍습니다. 바울은 특이한 사람이에요. 유대인들의 회당에서 복음을 전할 때는 절대로 구약에서부터 출발을 합니다. ‘너희들의 조상이’하면 꼼짝없이 듣습니다. 그러나 이방인들, 범신론자들에게는 그런 방법을 쓰지 않습니다. 우상과 미신을 섬기는 사람들에게의 접근 방법은 전혀 다릅니다. 여러분들도 범신론자들과 무신론자들을 만날 때는 이런 접근 방법을 쓰십시오.
바울은 아덴에 있는 미신과 우상을 보고 마음이 분했어요. 그런데 그것을 표현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웃었을거에요. ‘아덴 사람들아! 그대들은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이렇게 접근해 갑니다. 그러니 이 사람들은 기분이 좋겠지요. 우리를 영적인 사람으로 취급해 주니 얼마나 좋겠어요. 전도할 때는 내 관심에서 이야기를 하면 안되고 그 사람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먼저 생각하고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 사람이 제일 잘 아는 것, 그 사람의 전공을 가지고 그 사람의 마음의 문을 엽니다.
종교성이 많다는 특징을 잡았습니다.
23절,
사실 우상을 보고 그는 분을 품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신들이 있던지 이름을 짓다, 짓다가 지쳐서 지을 수가 없어서 알지 못하는 신에게 드리는 우상 이렇게 붙여 놨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너희가 종교성이 많고 하나님에 대한 관심이 많다는 것을 알겠다. 그러나 너희가 알지 못한다고 하는 신을 내가 너희에게 오늘 알려 주겠다. 이렇게 하면서 접촉을 시작합니다.
24-25절,
사도바울은 맨 먼저 가르쳐 주어야 했습니다. 그는 제일 먼저 신관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신관이 있으니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바른 신관이 없는데 인생관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생각은 실제적인 것입니다.
네 가지로 하나님을 설명합니다. 첫째 너희들이 알지 못한다고 말했던 그 하나님은 이런 분이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여러분,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은 여기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하나님은 우주와 역사와 지구와 인간을 창조하신 분이시다.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니 인간에 대해서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 것은 마치 부모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자식과도 같습니다. 아무리 인정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고 해도 부모님은 부모님입니다. 내가 아무리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것과 같습니다. 니체는 하나님이 죽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고 니체가 하나님은 죽지 않았습니다. 니체 자신이 죽을 뿐.
여러분이 하나님을 부인한다고 해도 하나님은 부인을 당하지 않습니다. 다만 여러분들에게 오는 축복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으셔야 합니다.
두 번째 하나님은 창조주일 뿐만 아니라 천지의 주제이시다라는 것입니다. 주관자이시다. 인생과 우주와 역사를 창조하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섭리하시고 통치하시는 그런 분이시다 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생의 방관자가 아니고 역사를 주관하는 분이십니다. 통치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 하나님은 우주를 만드셨고 인생을 창조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손으로 지은 곳에 안 계신다는 것입니다. 손으로 지은 곳에 하나님은 없어요. 우상이라는 것은 누가 만들었습니까 사람이 만들었습니다. 자기가 만들어 놓고 하나님이라고 해요. 얼마나 어리석어요. 자기가 조각을 해서 만들어 놓고 그것을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참으로 어리석습니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이 지은 어떤 물건에 계시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회에만 계시고, 집에는 계시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십니다.
또하나 따라서 하나님이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느껴서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 드리는 헌금이나 제물을 받아먹고 사시는 분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도와주려는 분이 있습니다. 얼마나 교만합니까 어떻게 하나님을 도와줄 수 있습니까
네 번째 우리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모든 인류에게 생명과 호흡을 주시는 분이요, 인간이 필요한 만물을 공급해 주시는 분이시다.
에피쿠레오 사람들이나 스토이고 사람들은 아주 신기하게 생각했습니다. 여러분은 평소에 이렇게 생각해 오셨습니까 그렇게 믿으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정말 살아 계시고, 우주를 창조하시고, 그분은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지금도 성령으로 오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이심을 믿습니까 그렇게 믿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알고 체험하십시오.
하나님은 믿음의 대상일 뿐 만 아니라 체험의 대상입니다. 사랑의 대상입니다. 살아 역사 하시는 창조주 하나님, 나에게 생명과 호흡과 모든 것을 주시며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까지 아낌없이 주셨던 그 하나님을 여러분의 믿음 속에서 경험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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