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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행 19:2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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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는 사도 바울의 3차 전도여행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를 잘 말해주는 말씀이 (행19:20)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말씀에 힘이 생기고 그러니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부흥이 일어나니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2년이 지난 후에 사도 바울의 마음 속에는 한 생각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마음을 사로잡는 한 환상이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로마를 보아야 되겠다라고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당시에 세계의 중심이라고 말하는 이 로마를 보고 싶다는 것입니다. 로마에 대한 간절한 생각을 갖게 됩니다.
21-22절,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지나서 예루살렘으로 가겠다고 계획하는 데 예루살렘에 가는 이유는 로마 때문입니다. ‘내가 로마를 가고 싶다.’ 그는 로마에 대해서 눈을 뜨기 시작했습니다.
인생이란 눈을 뜨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는 보는 세계와 깨닫는 세계가 작습니다. 눈이 감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른이 돼 가면서 눈을 뜨기 시작합니다. 자신에 대해서 눈을 뜨기 시작하며, 사랑에 대해서 눈을 뜨기 시작하고, 이성에 대해서도 눈을 뜨기 시작합니다. 어떤 사람은 돈에 대해서도 눈을 뜨기 시작하고, 자기의 성공에 대해서도 눈을 뜨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하나님에 대해서 눈을 뜨기 시작한 것입니다. 영혼에 대해서 눈을 뜨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일이 잘못 되었을 때 그것은 잘못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서 눈을 뜨게 하는 하나의 작업입니다. 새로운 것을 보라고, 지금까지 보던 것을 보지말고 새로운 시각으로 보라고하는 하나님의 싸인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만 보여주기를 원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은 세계를 보여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눈을 뜨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눈을 뜨지 않았을 때 하나님은 여러분의 자리를 흔드십니다.
바울은 세계를 보는 눈을 떴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세계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온 우주에 충만하십니다.
바울은 여러지역을 전도하면서 점점 마음이 넓어집니다. 그리고는 이제는 로마도 보아야 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럼 왜 로마를 보아야 합니까 로마는 세계의 중심입니다. 복음이 세계 중심을 강타해야 한다고 꿈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럼 ‘내가 로마를 보아야 하겠다’라고 했는데
그 뜻이 무엇입니까 두가지를 생각할 수 있는 데 첫째는 성령님의 생각입니다. 행 1:8에 보면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그리스도인은 일에 빠져 있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명령에 관심을 가진 사람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의 하는 일에 관심이 있습니다. 주님에게는 관심이 없습니다. 일에 관심이 아니라 주님에 대한 관심을 갖기를 바랍니다.
또한 내가 로마까지 가겠다라는 뜻은 로마라는 장소는 중요하지 않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로마를 보아야겠다고 하니까 로마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할 수 있어요. 그러나 사도 바울의 마음은 그것이 아닙니다. 로마라는 그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로마라는 데 까지도 가겠다는 뜻입니다. 그말은 다른 데도 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로마까지도 점령을 한다면 로마보다 더 큰데가 있다면 그는 또 거기를 갔을 것입니다.
롬15:22-24을 보면 사도 바울의 관심이 로마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또한 내가 너희에게 가려 하던 것이 여러 번 막혔더니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려는 원이 있었으니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교제하여 약간 만족을 받은 후에 너희의 그리로 보내 줌을 바람이라”
로마가 아니라는 것을 여기서 볼 수가 있습니다. ‘내가 로마를 보아야 하리라’라고 바울이 말했는데 내가 로마를 꼭가야겠다. 세계의 수도를 점령 해야겠다라고 말했는데 15장을 보니까 내가 거기에 가는 이유는 너희하고 잠깐 교제하고 난 다음에 더 중요한 데를 가고 싶어서 그렇다. 그것이 서바나다. 로마가 그당시 세계의 중심이라고 말한다면 서바나는 세계의 끝이라는 곳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거기가 좋은지 나쁜지는 알 수는 없지만 세상의 끝이라고 하는데까지도 복음을 가지고 가겠다. 그런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어디로 가느냐 그 장소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는 언제든지 툴툴 털고 언제든지 떠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미련이 없는 사람입니다. 사람에 대해서도, 장소에 대해서도, 집에 대해서도, 자기 위치에 대해서도 미련이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들은 일을 너무나 중요시합니다. 장소를 중요시합니다. 그러나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중요한 것입니다. 하라면 하고 하지 말라면 안하고, 가라면 가고 가지 말라면 가지않고.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이런 생각을 사도 바울만 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의 생각이었습니다. 23:11을 보면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여러분, 현실을 보면 늘 비참합니다. 그러나 미래를 보면 늘 영광스럽습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올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미래가 없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현재의 고난밖에는 보이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이루어질 하나님의 그 영광스러운 세계를 보지 못하니까 고난을 이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영광스러운 미래를 보는 사람은 현실의 고난이 문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용기가 생깁니다. 기쁨이 생깁니다.
걱정하지 마라. 너는 로마를 보게 될 것이다. 그러니 사도 바울에게 확실한 것이 있습니다. 로마를 보기 전에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유라굴로가 그를 해하지 못합니다. 왜 하나님이 그렇게 말했으니까. 내가 너는 반드시 로마를 가게 하겠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무슨 꿈을 가지고 있습니까 앞으로 여러분은 몇 년을 더 살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10년, 20년, 30년. 그 살아있는 동안에 여러분이 꾸어야 할 꿈은 무엇입니까 무엇을 위해서 사셔야 합니까 먹고 입고 사는 것은 기본입니다. 그런데 너무 여기에 목매다는 사람이 있어요. 월급 올라가면 ‘할렐루야’하고 집한채 사면 잠을 못자요. 너무 좋아가지고. 여러분의 꿈이 뭡니까 어떤 야망을 가지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현실의 고난을 위해서 사십니까 미래의 꿈을 위해 사십니까
어떤 의미에서 가장 비참하고 불쌍한 사람이 있다면 미래를 포기하고 꿈 없이 동물처럼 그날 그날 사는 사람일겁니다. 주님을 위한 꿈을 꾸십시오. 주님께서 주신 꿈을 가지십시오. 그것을 위해서 욕도 보고, 손해도 보는 그런 영광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입니다.
꿈은 꿈이고 현실은 현실입니다. 이런 꿈이 있는 바울에게 언제나 낭만적인 현실이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언제나 그의 주변은 소용돌이였고, 갈등이었고, 괴로움이었습니다.
23절,
복음을 전하는 것 때문에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그 소동은 데메드리오라고 하는 은장색, 그 사람 때문에 일어난 소동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많은 직공들을 데리고 아데미 신상을 만드는 사람입니다. 아데미 신상을 팔아서 그들이 생활을 유지합니다.
25-26절,
그런데 바울이 전하는 복음 때문에 자기들의 직업이 망하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 천해지게 되었습니다. 아데미 신상이 모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 위엄이 다깍이게 되었습니다.
27절을 보십시오.
그래서 사람들은 분노에 떨게 되었고 온 성에 순식간에 이 소동이 파급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크다 에베소의 아데미여’하며 선동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을 따라 다니는 두 사람을 끌고 가고, 큰 공연장으로 사람들이 다 몰려가게 되었습니다.
28-29절,
사도 바울은 괴로웠습니다. 자기를 따라다니던 사람이 괴로움을 당하게 되었고, 가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어려움을 당하게 되었기 때문에 그는 연극장으로 뛰어들어가서 변론하고 싶었습이다. 그렇지만 그 주변에 있는 그리스도인들과 제자들이 사도 바울의 그런 행동을 제제합니다.
30-31절,
복음전한다는 것이 낭만이 아님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꿈을 가진 사람에게는 고난이 따른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여러분, 꿈을 택하겠습니까 안락한 생활을 택하시겠습니까 아주 모든 것이 부족함이 없는 그런 삶을 원하십니까 아니면 고난이 있고 배고픔이 있고, 속상한 것이 있다 하더라도 예수님 때문에 위대한 꿈을 가지고 살고 싶습니까 위대한 꿈을 가지고 평안하게 사는 법은 없습니다. 편안하게도 살고, 꿈도 갖고. 그것은 안됩니다. 위대한 꿈을 가진 사람은 대가를 치루어야 합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는 것”입니다. 부름받아 나선이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해놓고는 가긴 어디를 가요. 조금만 자존심이 상해도 못살아요. 그러면서도 영광스러운 것은 다 가질려고 그래요. 그렇지 않습니다. 꿈을 가진 사람, 세상적인 성공이 없어요. 대가를 치루는 거에요. 그러나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32절,
대중이라는 것이 이런 것입니다. 사람들이 막 흥분해서 세상을 다 뒤집어 엎을 것 같으데 성경에 보니까 태반이나 어찌하여 모였는지도 모르고 모였다. 시끄럽게 소리를 지르는 데 왜 모였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반이나 넘었다는 것입니다. 대중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소수의 변화받은 사람입니다.
33-34절,
알렉산더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얘기를 하려고 했는데 34절 보니까 두시간 동안이나 무슨 소리를 했습니까 “크다 에베소의 아데미여”
바울은 영적 영향력을 주었습니다. 교회가 크다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과연 세상에 뿌리를 뒤흔들만한 영적 영향력이 있느냐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교회를 몇 년 다녔냐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정말 여러분의 생애가 영향력을 줄 수 있는 생애냐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그렇게 많고, 그리스도인은 그렇게 많아도 세상이 변화되지 않는 것은 오늘 본문과는 너무나 대조적입니다.
오늘 한 사건을 보았습니다. 경기장에서 사람이 수없이 모여서 사람들이 흥분하고 난리를 칠 만큰 그 사회를 흔들어놨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힘이 사람을 바꾸고 세상을 바꾸는 이런 영적 영향력이라는 것입니다.
35절,
서기장이 나오는 데 아주 유능한 정치가입니다. 그 흥분한 사람들을 몇마디 말로 싹 잠재웁니다. 아주 순식간에 그들을 흩어버립니다.
‘너희가 말하는 바 아데미가 위대하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게 외칠 필요가 있느냐 정말 위대하다면 안외쳐도 위대하다는 것이죠. 가만히 있어도 그 위대함이 나타난다면 너희들이 흥분하고 경솔하게 행동할 것이 아니다.
37-39절,
데메드리오의 고소가 맞다면 법에 따라 진행하면 되고, 법적인 문제가 아니면 민사소송을 하면 될 것이다. 이렇게 하지 말아라.
40-41절,
이렇게 집회를 하면 오히려 너희들이 소요죄에 걸리게 된다. 또 나는 불법집회를 이유가 없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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