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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행 2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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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1장부터 28장까지는 새로운 주제가 전개됩니다. 오늘부터 우리는 21장을 공부하게 되는데 지금까지는 1차 전도 여행, 2차 전도 여행, 3차 전도 여행을 마감하는 그런 말씀이었습니다. 3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그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얘기가 21장에서 시작됩니다. 21장부터 28장까지 전개되는 얘기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도 바울이 겪는 결박과 환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제부터 사도 바울은 죄수의 몸으로 살게 됩니다. 이것이 28장까지 계속되는 주제입니다. 1-3절까지 읽음으로써 어떻게 예루살렘까지 가는지 여정을 알 수 있습니다.
밀레도에서 작별하는 내용을 지난 시간에 보았습니다. 밀레도에서 배를 타고 고스라고 하는 곳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로도에서, 그리고 바다라라는 곳으로 하루를 지내고 그 다음날에는 베니게로 건너가는 배를 타고 구브로를 지나게 됩니다. 구브로는 1차 전도 여행 때 갔던 곳입니다. 구브로섬을 옆에 끼고 수리아를 거쳐서 드디어 예루살렘 가까운 두로라는 곳에 도착을 합니다. 두로는 예수님께서 전도하신 곳이었습니다. 여기에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두로에서 얼마를 머물렀으며 무엇을 했는지 4절을 보면 나타나 있습니다.
4절,
제일 먼저 두로에서 행한 일은 그리스도인이 있는가하여 그리스도인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7일 동안 거기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제자들을 찾아 거기에 7일을 머무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관심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너무나 강렬하게 그를 붙잡았기 때문에 다른 곳에 시선을 팔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너무나 강렬하게 붙잡힌 사람은 다른 데 시선을 뺏길 수가 없습니다. 세상 것이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들에 눈을 돌리거나 마음을 뺏기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 믿기 전에 세상의 것들을 참 좋아했더라도 예수를 알고 난 후에는 그것들이 우리와 상관이 없게 됩니다. 자꾸 예수에 빠지다 보니까 전도하는데 관심 있고, 성경 공부하는데 관심이 있게 됩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사도 바울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예수였습니다. 그의 눈에는 오직 예수였습니다. 그가 입을 열어 말하는 것은 예수를 전하는 것. 그가 만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제자들만 골라서 만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다른 데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세상에 관심이 많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직 예수님에게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두로에 도착했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두로에 도착하자마자 그리스도인을 찾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엔 별로 관심이 없고, 다른 사건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거기서 아주 신실하고 놀라운 성령 충만한 성도들을 만났고 교제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들과 교제를 하면서 성령님께서는 또 역사해 주셨는데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면 체포를 당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는 것이 좋겠다. 이런 권면을 받습니다.
5-6절,
7일 동안의 짧은 교제입니다. 피차 서로 몰랐던 관계입니다. 그러나 헤어질 때 보니까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그 처자와 함께 성문 밖까지 전송했다”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이 모습은 바로 밀레도에서 최후의 작별을 하던 모습과 같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행전 적인 만남의 특징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계실 때는 말씀 듣고 그냥 헤어졌습니다. 기적을 보고, 이적을 보고는 바로 헤오졌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만남이 사도행전에 들어오면 형태가 달라집니다.
오늘 우리들의 만남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진정한 만남이 없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스쳐 가는 것은 있으나 만남이 없습니다. 왜 외롭습니까 만남이 없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만나고 또 만납니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나서는 고독한 것입니다. 언제나 홀로 있는 것처럼 느낍니다. 왜 그러냐면 정말 만남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 심장을 떼어 주고, 내 삶을 나누어 줄 수 있는, 내 생명을 나누어 줄 수 있는 그런 친구와 그런 우정과 그런 관계가 없습니다. 어떤 거리를 두고 만납니다. 더 이상 가까이 하지 않습니다. 그런 만남이 교회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도 있습니다. 주일날 예배만 왔다갔다합니다. 모임도 어느 정도 손해보지 않는 범위에서, 시간 뺏기지 않는 범위 내에서 내가 일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만남에서 무엇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어떤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무 변화도 없습니다. 떠나도 헤어져도 잊을 수 있는 관계여야 합니다. 그것이 만남입니다. 내 삶의 일부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령의 관계요, 영적인 관계입니다. 이런 관계가 필요합니다. 정말 좋은 관계는 손해볼 수 있는 관계입니다. 손해 보는 것이 재미있고, 손해보는 것이 즐거워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가 다 이익을 챙기는 것입니다. 시간을 따지고, 모든 것을 따져서 만나기 때문에 거기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헤어지면 더 공허하고. 그렇습니다. 나는 여러분들의 만남이 긴 만남이 아닐지라도 우리 교회에서 만나는 만남이 바울과 같은 축복된 만남이 되기를 바랍니다. 7일을 교제했지만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관계, 마음과 마음이, 영과 영이 통하는 그런 관계. 우리는 만나면 일단 사람을 이용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모든 것을 이기적인 동기로 보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바울은 어디를 가든지 아름다운 만남의 관계를 가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7-8절,
두로에서 배를 타고 떠납니다. 돌레마이에 이르렀습니다. 또 하룻밤을 잡니다. 사도 바울은 어디를 가나 너무나 단순하고 간단합니다. 만나는 사람 간단하고 하는 일 간단하고. 그리고 그 다음 날 가이샤라로 갑니다. 거기에 초대 교회 일곱 집사 중에 하나였던 빌립집사가 사는 곳입니다. 거기에 바울이 빌립집사를 만나서 거기에 유하게 됩니다. 오랜 만남입니다. 그들은 너무 좋아서 그날 밤에 지금까지의 일을 모두 간증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성령께서 이렇게 인도하셨다고 밤새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빌리에게는 네 딸이 있었습니다.
9절,
예언하는 자입니다. 그날 아가보라고 하는 선지자가 그 집을 방문하게 됩니다.
10-12절,
그 아가보라고 하는 선지자가 오자마자 띠를 빼어서 손을 묶습니다. 말을 하지 않고 행동을 합니다. 당신이 예루살렘에 가면 이렇게 묶일 것이다. 사람들이 그 말을 듣고 굉장히 불안했습니다. 염려를 했습니다. “바울 사도님, 예루살렘 가지 마세요.” 이렇게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 가면 결박과 환난이 기다린다고 하는 사실을 한두 번이 아니라 여러 차례 계시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자신도 압니다. 밀레도에서 그랬고, 두로에서도 성령 받은 어떤 사람들이 그 말을 했습니다. 가이사랴에서도 똑같이 그런 말을 했습니다. 왜 이렇게 자주 반복적으로 이런 일들이 계속됩니까 그러나 여기서 한가지 주의 깊게 관찰할 부분이 있습니다. ‘네가 예루살렘으로 가면 결박과 환난이 기다린다.’는 말씀을 성령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는데 성령님께서 ‘돌아가지 말라.’라는 말은 안했다는 것입니다. 돌아가지 말라는 말은 누가 했습니까 사람이 했습니다. 여기에 이 메시지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 얘기를 들으니까 예루살렘에 가서 체포를 당하고 고난을 겪으면 어떻게 하는가 그러니 안가는 것이 좋겠다라고 말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성령님께서는 가라 말라는 말보다는 네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면 환난이 기다리고 있다. 핍박이 기다리고 있다. 그것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성령님께서 한 번 말했으면 됐지 가는데 마다 왜 이 말을 하느냐 입니다. 그것은 바울을 준비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면 환난과 핍박과 고난을 겪게 될 것이다. 네가 준비됐느냐’ 가라는 말도 없습니다. 가지 말라는 말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셔야 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앞에 바로 섰을 때 그는 이 십자가를 피하고 싶었습니다,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를 했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내가 마셔야 합니까” 하나님은 대답이 없습니다. 십자가만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들의 부름이 그런 것입니다. 가라, 가지 말라는 말보다는 십자가만 있는 것입니다. 네가 져야 할 십자가. 네가 겪어야 할 십자가만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그렇습니다. 네가 죄수로 살아야 로마를 간다는 것입니다. 네가 죄수로 있어야 복음이 전파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너는 나를 위하여 죄수로 살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가는 곳마다 ‘너는 예루살렘으로 가면 고난을 당한다.’ 사람들은 열심히 말합니다. 절대로 가면 안됩니다. 그러니 사도 바울도 그 유혹을 얼마나 받았겠습니까 ‘그래 그 말이 맞지. 내 양떼도 있는데 내가 죽으면 어떻게 하나. 내가 잡히면 어떻게 하나. 내가 피해서 살아야지.’ 그러다가도 그 음성이 또 들립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13절을 보십시오.
밀레도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여기서도 바울의 마음은 변함이 없습니다. 바울의 마음은 결정이 되어 있습니다. 바울의 마음은 죽기도 결정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죽기로 결심된 사람은 무서운 것이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결심을 하지 못합니다. 자기 인생을 결심을 못합니다. 이렇게 살아도 좋을 것 같고, 저렇게 살아도 좋을 것 같고. 오늘은 이렇게 생각하고, 내일은 저렇게 생각하고. 결정을 하지 못하고 삽니다. 결정을 하지 못하면 방황을 하게 됩니다. 천국이 결정되지 않은 사람은 방황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결정된 사람입니다.
우리가 13절에서 사도 바울이 대답하고 있는 말을 자세히 살필 필요가 있는데 그 첫째는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하는 말을 살펴봅시다. 여기 ‘상하게 한다’는 말은 ‘내마음을 약하게 하느냐’ 입니다. 내 마음을 왜 흔드느냐.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안 갈 수도 있어요. 그러나 그는 가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안 살수도 있어요. 여러분들이 좋은 환경에 그대로 있을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렇게 안 살기로 작정을 한 것입니다. 그것뿐입니다.
십자가를 향하여 걸어가는 사도 바울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심정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를 믿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아는 정도는 다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겉만 압니다. 어떤 사람은 십자가까지 압니다. 여러분은 어느 정도입니까 어느 정도까지 예수님을 압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것이 아는 겁니까 아니에요. 그것은 객관적인 지식일 수 있습니다. 진짜로 여러분의 삶에 그것이 있느냐입니다. 거기까지 갔느냐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입니다. ‘나는 주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굉장히 중요한 표현입니다. 바울은 롬1:5에서도 비슷한 표현을 썼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우리의 사도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나의 사랑, 나의 전부, 그 분의 이름을 위하여. 이것은 사도 바울의 전부입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문학이나, 예술이나, 철학이나, 그 어떤 것도 그의 마음을 빼앗을 수가 없었어요. 그는 가정도 결혼도 그의 마음을 빼앗을 수가 없었어요. 그에게 있는 것은 오직 하나. 주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세 번째입니다. 주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그는 결박을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를 했다. 이제 그는 예루살렘을 초연히 걸어갈 수 있습니다. 나의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여러분은 여러분이 가는 길을 알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가는 길에 자신이 있습니까 바울은 자기의 길을 알았습니다.
14절,
권면을 받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더 이상 만류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사도 바울의 예루살렘을 향한 발걸음은 무거운 발걸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유로운 발걸음, 가벼운 발걸음. 편안한 발걸음이었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 많은 것을 가지고 있고 다 성취를 했는데 여러분 보시기에 어떻습니까 그분들이 행복해 보입니까 불행해 보입니까 여러분의 친척들, 여러분의 주변에 있는 사람. 마음에 편안해 하고 삽니까 불안해하고 삽니까 예수 안 믿는 사람뿐만 아니라 예수를 믿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직도 방향을 잡지 못하고 방황하며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교회를 왔다갔다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인생이 결정이 되었느냐.
많은 사람들이 불안해합니다. 찬송을 해도 편안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으면 염려와 불안이 오기 마련입니다.
여러분, 정말로 신뢰합니까 신뢰한다면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삶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모든 것을 다 가졌으나 모든 것을 다 취했으나 불안하고 쫓기는 삶입니까 여러분의 인생은 어떻습니까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15-16절,
사도 바울은 행장을 준비했습니다. 어디로 예루살렘으로. 거기는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주 자연스럽게 행장을 만들고 떠나는 것입니다.
인생은 길입니다. 어딘가 가는 것입니다.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어떻게 가는 것입니까 여러분이 선택한 길이 어떤 것입니까 바울처럼 이렇게 자유로운 길입니까 어쩌면 내가 가는 길이 행복을 약속해 주지 않는 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가난하게 살아야 되고, 이름 없이 살아야 되고, 어쩌면 약간의 고난도 동반한 삶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그 길은 자유롭고 평안한 길입니다. 어느 길을 가는 것이 좋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처럼 분주히 사는 것이 옳은 것입니까 좀 좁지만 평안하고 자유롭게 사는 것이 옳습니까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살았던 바울을 보면서 우리의 삶이 결정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여러분과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오늘 나의 삶이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하나님! 나의 삶이 결정되게 하옵소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게 하시고 세상에 화려하고 세상에 행복을 약속해 주는 것 같은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옵소서. 주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살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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