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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바울의 회심1 (행 21:37-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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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다. 돌아와 보니 두 가지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 수만 명의 유대인들입니다. 또하나는 초대 교회와는 달리 영적인 영향력과 능력을 잃어버린 무기력해진, 겁에 질린 예루살렘 교회입니다.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수만 명의 사도 바울에게 적대감을 가진 유대인들은 성난 폭도들로 변합니다. 이성을 잃어버리고 사도 바울을 붙잡고 그를 죽이려고 성문 밖으로 나갑니다. 그리고 성문 밖에서 사도 바울을 구타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그때 이러한 소문을 듣고 로마 군인들이 달려옵니다. 천부장을 위시해서 로마 군인들이 달려와서 사도 바울이 구타당하고 있는 것을 빼냅니다. 그리고 체포를 합니다. 쇠사슬을 묶습니다. 그리고 보호를 합니다. 성난 군중들은 사도 바울을 뺏겼기 때문에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로마 군인들은 다시 사도 바울을 데리고 성문 안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바로 그때였습니다. 다시 성문으로 들어갈 때 공포 속에 있어야 할 사도 바울이 천부장에게 ‘잠깐만’ 하고 소리를 지릅니다. ‘나에게 말할 기회를 주십시오’
37-38절,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 일에 관심이 많습니다. 매사에 모든 일을 자기 식으로 해석을 합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매를 실컷 얻어맞고 죽을뻔 했다가 로마 군인에 의해 성문 안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도 바울의 관심은 매를 맞든지 안 맞든지, 좋은 형편이든지 아니든지 간에 그의 관심은 예수였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그는 예수를 전하고 싶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공이냐 실패냐 관심이 없습니다. 건강이냐 병든 것이냐 여기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감옥이냐 안방이냐 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그분의 관심은 얻어맞더라고 복음만 전하면 되는 거예요. 이것이 사도 바울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가 중요하고, 월급이 중요하고, 진급이 중요하고, 자기 환경이 중요하고, 자녀가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자기만을 압니다. 예수를 믿어도 자기 식으로 믿어요. 좀 예수님 식으로 믿으면 간단할 텐데 언제나 자기 고집대로, 자기 성격대로, 자기 좋아하는 대로 예수를 믿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물을 보는 관점이 언제나 자기 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무엇에 관심이 있느냐가 그 사람입니다. 좀더 쉽게 말하면 24시간 동안 당신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유야 어떻든 간에. 실현 당해서 여자를 열심히 생각하고 있으면 그것이 그 인생이에요. 어떤 사람은 결혼을 계속 묵상하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돈을 묵상하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고민을 묵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무슨 고민이냐 물으면 몰라요. 고민을 묵상해요. 고민해야 사는 것 같아요. 당신이 생각하는 것이 당신이에요. 아무리 생각으로 예수를 잘 믿어도 현재 당신이 시간을 제일 많이 보내고 있는 것이 당신이에요.
천부장의 관심은 뭐냐 그는 치안 책임자로서 그의 관심은 오늘 보니까 이전에 난을 일으켜 사천의 자객을 거느리고 광야로 가던 애굽사람이 체포가 안되었어요. 그 자객들은 다 체포가 되었는데 예루살렘을 왕창 뒤집어 놓은 이런 난리를 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을 못 잡아요. 바울이 이렇게 소요를 일으키는 것을 보니까 혹시 이 사람이 그 사람이 아닌가. 역시 천부장의 눈에는 그것밖에 안보여요.
바울은 무슨 생각을 하느냐. 죽으나 사나 예수에요. 어떻게 하면 예수를 전해 볼까. 나를 때리면 사람을 때리면 감정이 생기죠. 그러나 사도 바울은 감정이 전혀 없어요. 맞는 것에 대한 감정이 전혀 없어요. 자기가 욕먹은 것에 대한 감정이 전혀 없어요. 그의 관심은 예수를 전하는 것입니다.
39-22:1절
자기는 유대인이라고 자기의 신분을 밝힙니다. 나는 길리기아의 다소에 시민이라고 말합니다. 이곳은 시골이 아니다. 시골에서 촌사람이 온 것이 아니다. 나는 도시 시민 사람이다. 나에게 말하기를 허락하라. 천부장이 허락을 합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허락을 받자마자 층계로 올라갑니다. 손짓을 하며 “조용하라” 이제 조용히 시켰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부름을 받은 사람입니다. 유대인이지만 이방인을 위해 살아라. 그러나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는 자기 동족에 대한 아픔이 있었습니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시간만 나면, 기회만 주어지면 자기 동족들에게 예수를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1차, 2차, 3차 전도 여행을 하는 것을 보면 가는 곳마다 유대인의 회당을 먼저 찾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복음 전하는 것을 계속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지금 성난 유대인들이 자기를 죽이려고 때리고 구타를 했습니다. 그렇지만 사도 바울은 그들이 나를 얼마나 때렸느냐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지금 헤어지기 전에. 지금 성문만 들어가면 사람들과 헤어져요. 헤어지기 전에 유대인들에게 예수님 얘기를 하고 싶어요. 우리는 여기서 사도 바울의 간절한 심정을 만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일을 합니다. 감정도 없이, 그냥 일을 합니다. 어떤 사람은 간절한 심정을 가지고 일을 합니다. 여러분, 사람이 전달된다는 것은 일이 아닙니다. 가슴이 전달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직 그에게 남아 있는 것이 있다면 예수밖에 없어요. 예수를 위할 수 있다면 감옥에 들어가서 매를 맞아도 좋고, 예수를 위한다면 죽어도 좋고, 굶어도 좋고 그런 것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에요.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중요합니까 예수님이 중요합니까 여러분을 위해서 예수님이 필요한 것입니까 예수님을 위해서 여러분이 필요한 것입니까 우리의 신앙의 질문이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을 안 믿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안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나오면서도 언제나 내 상황, 내 입장, 내 환경이 중요한 것이 문제입니다.
그는 사람을 조용하게 한 다음에 익숙한 히브리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그 순간 찬물을 끼얹듯이 조용합니다. 왜냐하면 자기들에게 익숙한 히브리 방언으로 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말을 시작하면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변명을 들어주십시오” 사도 바울을 보면 자존심이 없는 사람 같습니다. 그냥 예수가 자존심이라고 할까. 오직 그분만 전해질 수 있다면 무슨 일을 당해도 좋아요.
2-3절, 그가 말하기 시작합니다.
어떤 분에게 간증을 하라고 하며 눈이 둥그래집니다. 오늘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정확하게 자기의 인생을 말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자기의 인생을 정확하게 말할 수 있습니까 예수를 만난 사람은 자기의 인생이 정리가 됩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의 이야기를 짧게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예수를 믿기 전의 삶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첫째는 자기의 출생에 대해서 말합니다. 나는 길리기아 다소 출신이다. 여기 보면 자기 집이 얼마나 큰가, 자기 집에 금송아지가 몇 마리가 있는가 하는 얘기는 없습니다. 나는 다소 출신이다. 두 번째 그는 학문의 배경에 대해서 말합니다. 나는 가말리아 문하에서 조상들의 율법을 엄하게 교육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이 가말리야 문하는 양대 산맥을 이루는 문하였습니다. 아주 율법에 대성을 한 가말리야의 문하에서 율법 교육을 받은 것입니다. 오늘 식으로 말하면 그는 학자입니다. 공부하는 사람입니다. 학문을 연구하는.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예수 믿기 전의 자신을 설명할 때 자신이 엄격한 율법 아래에서 훈련을 받았을 뿐 아니라 실제로 자신이 그런 율법 속에서 살아왔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지금 너희들이 나를 핍박하고 있다. 너희들이 나를 죽이려고 하고 있다. 그것을 나는 옛날에 너희처럼 했다는 것입니다. 아니 그것보다 더 철저하게 율법을 실천했다고 말합니다. 그런 얘기가 4-5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4-5절,
너희들은 지금 나를 핍박하고 죽이려고 흥분하고 있지만 나는 그 정도가 아니었다.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집어넣고. 이러한 사실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잘 알고 있다. 지금 나는 다메섹에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잡으려고 공문을 가지고 가고 있다. 그렇게까지 나는 율법에 열심이었고 실천적인 사람이었다. 바울에게 하나의 특색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를 믿기 전에도 그가 옳다고 생각되는 일에는 목을 건 사람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약점이 무엇입니까 생각대로 행동이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고난이 오면 생각이 휘어 버리는 것입니다. 손해가 오면 슬그머니 빠져 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율법대로 살려는 행동적인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좋아하십니다. 이런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아무리 많이 알고 있어도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 사람, 하나님 나라에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있습니다. 그 이름도 유명합니다. 가진 것도 많습니다. 그런데 주일날이면 평생 왔다갔다합니다. 그걸로 죽을 때까지 합니다. 그 이상 아무 것도 없어요. 그에게는 아무 일도 없습니다.
이러한 사도 바울의 성격을 사용하셔서 그를 변화시켜 그 성격을 그대로 이용을 하십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를 믿기 전의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서 옥에 가두고 다메섹에까지 가서 사람들을 잡으려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일 인줄 압니다.
이러한 바울이 어떻게 예수를 만나게 됩니까 6-8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6-8절,
다메섹에 가는데 갑자기 빛을 만난 것입니다. 빛을 만나는 순간에 그는 거꾸러졌습니다. 거꾸러지는 순간에 음성을 듣습니다. 그 음성은 놀랍게도 자기가 핍박하는 사람들이 믿는 예수님이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사도 바울이 얼마나 놀랬겠습니까 빛을 만난 것도 놀랄 일인데 음성까지 들었으니 얼마나 놀라겠어요. 지금 바울이 음성을 듣고 있는데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음성을 못 듣습니다. 바울만 듣고 있습니다. 바울이 너무나 놀라서 “주여 당신이 누구십니까”
루이스는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예수는 놀라운 사기꾼이든지, 아니면 하나님의 아들이다.” 결코 중간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중간에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안 나오는 것도 아니고, 예수를 안 믿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 이상을 넘어가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는 그냥 예수에 불과하고, 예수는 나에게 힘을 주지 않습니다. 기쁨이 되지 않습니다. 그냥 교회만 다닙니다.
“ 주여 당신은 누구십니까” 라는 말의 대답에 “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주님은 우리들에게 무어라 대답하겠습니까 “ 나는 네가 무시하는 예수다. 나는 네가 무관심하는 예수다. 도대체 믿는지 안 믿는지 모르는 예수다.” 혹시 여러분에게 그런 대답을 하지는 않겠습니까 도대체 예수는 여러분에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예수는 정말로 여러분의 구주이십니까 생명이십니까 기쁨이십니까 여러분, 예수님 때문에 정신없이 노래부른 적이 있습니까 찬송 불러 본 적이 있어요. 예수님이 너무 좋아서 밤새도록 기도해 본 적이 있어요 아 그런거요. 옛날에 다 해봤어요. ....
사도 바울은 예수를 만났습니다. 그럼 사도 바울은 어떻게 예수를 만났습니까 그분은 율법학자입니다. 그는 지성인입니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예수를 만났습니까 논리로 해석하고 지성으로 해석하지 않았습니다. 이성으로 따지지 않았습니다. 신학교 가서 믿는 것도 아닙니다. 공부해서 믿은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 예수는 지식으로나 공부로나 논리로 믿어지는 분이 아닙니다. 어느 정도 도움은 받습니다. 그러나 논리로 가면 마지막에는 질문이 또하나 남습니다. 논리를 논리를 낳기 때문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예수를 만날 수 있습니까 만나는거에요. 간단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의 율법의 논리로 만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했습니까 다메섹으로 예수 믿는 사람 잡으러 가다가 예수에게 그냥 콱 잡힌 겁니다. 이게 예수 믿는 겁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만남이 있어지기를 바랍니다. 예수는 만나는겁니다. ‘누구는 안 만나고 싶은지 아세요’ 정말로 예수를 만나기를 원합니까 그런 절박함이 없습니다. 정말로 절박하게 그를 만나고 싶어한다면 그를 만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내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논리로 만나지 않았습니다. 이성으로 만나지 않았습니다. 율법으로 만나지 않았습니다. 그냥 만났습니다. 예수를 만난다는 것은 이성을 통하여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것은 그분이 만나 주셔야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9절,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사도 바울이 들었던 소리를 듣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건 무슨 이야기입니까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극히 개인적으로 만나고 있다. 극히 개인적으로 부름을 받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교회를 공동체적으로 부르셨습니다. 오순절 날에 마가 다락방의 120명의 성도들에게 성령은 공동체적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개인적으로 만나 주십니다. 개인적 부름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나만 아는 겁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요. 비밀이에요. 여러분에게는 개인적 부름이 있습니까 그렇게 살기를 바랍니다.
지금 사도 바울에게 하나님께서 개인적으로 들려주시는 음성이 있습니다. 아무도 몰라요. 이것이 바울의 생애를 결정하는 겁니다. 그래서 많은 어려움을 이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10절,
부름을 받았습니다. 논리가 아닙니다. 이성이 아닙니다. 그냥 만났습니다. 예수는 그냥 만난 겁니다. 내가 예수를 찾은 것이 아니라 그분이 나를 찾은 겁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던 때부터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셨고,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를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논리로 예수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만나지는 겁니다.
그 부름을 받으면 당장 나오는 말이 ‘그럼 나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그것이 사역입니다. 여러분 왜 불렀을까요 심심해서 그냥 불러 봤을까요 아닙니다. 내가 누구를 부를 때는 무엇을 물어 보거나 무엇을 시키기 위해서 부르는 겁니다. 이것이 사명입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 이미 사명을 받은 것입니다. 무의미하게 태어나서 그냥 죽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분명한 사명을 가지고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를 만나고 나서 질문합니다.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 대답이 재미있습니다. ‘너는 이방인을 위한 나의 택한 그릇이다.’ 이렇게 말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여기서는 안그럽니다. “다메섹으로 가라.” 바울이 어디로 가도 있었습니까 다메섹.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도 다메섹으로 가라. 참 재미있습니다. 장소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뭐가 변했어요. 의미가 변했어요. 목적이 변했어요. 예수믿기 전에는 다메섹은 내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으러 가는 장소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고 난 후에는 다메섹은 다른 장소로 변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명입니다.
이와 비슷한 말씀이 요한 복음 4장의 수가성 여인입니다. 그는 물동이를 내려 두고 어디로 뛰어들어갑니까 동네로 뛰어들어갑니다. 그 여인에게 있어서 동네는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그전에 살던 동네가 아니에요. 이제는 내가 찾아가는 동네는 내가 메시아를 만났다고 전하는 동네 에요. 이런 의미에서 여러분의 직장은 달라져야 합니다. 어제도 갔던 직장이지만 오늘 예배를 드리고 가는 직장은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또하나 ‘정한바 나의 행할 일을 가르쳐 줄 것이다.’ 신앙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내일 일은 뭡니까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날의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다. 신앙이란 일일분입니다. “월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이틀 분도 아닙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이러한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인생의 방법이요, 하나님을 믿고 사는 사람들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살았으면 감사하는 것입니다. 내일 일은 내일 하나님이 인도하실 것입니다. 따라서 정말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오늘 죽어도 좋다.
괜찮아요 ‘아니야 나는 며칠 더 살아야 돼.’ 라든지 ‘나는 몇 달을 더 살아야 돼.’ 이것은 잘못된 겁니다. 오늘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신앙의 본질은 오늘 사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 자체로서 만족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세상이 감당을 못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세상은 어쩔 줄을 모릅니다. 그 사람에게.
또하나 네가 다메섹에 가면 이런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이다. 여기에는 이런 의미가 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하는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준비하신다. 하나님은 예비하신다. 선교사가 선교를 떠납니다. 전혀 알 수 없는 지역인데 하나님이 준비한 사람이 있습니다. 절대 걱정하지 마세요. 다 살게 되어 있습니다.
아나니아라는 사람을 사도 바울이 어떻게 알아요. 그렇지만 사도 바울이 믿고 다메섹으로 가서 기다리고 있으니까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자기 발로 찾아와요. 놀라운 겁니다.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기도하는 사라, 하나님의 사람을 분명히 만나게 됩니다. 이런 만남의 축복이 저와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이 노력해서 얻은 것이 몇 개나 있습니까 소중한 것들은 모두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노력해서 얻은 것은 그렇게 쓸모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에게 아나니아를 준비하십니다.
11절,
사도 바울은 빛을 보고 난 후에 시력을 잃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의 그 영광의 빛이 그에게 임했을 때 그의 눈은 멀게 되었습니다. 그의 심정이 어떻겠어요 눈을 뜨고 살다가 순식간에 아무 것도 안 보이는 사람의 심정이 어떠하겠어요 하나님은 바울의 세상에 대한 눈을 감게 합니다. 우리는 세상에 대해서 너무나 눈을 크게 뜨고 있습니다. 열심히 뜨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여러분의 눈을 감게 만듭니다.
세상에 대해서 눈을 감았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해서 눈을 떳다는 말이 됩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해서 눈을 뜨기 시작합니다. 사도행전 9장에 보면 아나니아에게 또다른 환상이 나타나게 됩니다. ‘아나니아야 너는 직가라는 곳으로 가라. 거기 유다라는 집에 가면 사울이라는 청년이 기도하고 있다.’ 세상에 대해서 시력을 잃어버리는 순간에 그는 하나님에 대해서 열심히 눈을 뜨기 시작한 것입니다. 부도난 것을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사업이안되고 몸에 병든 것, 그렇게 나쁜 것 아닙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욕심과 세상에 눈을 감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내가 무능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내가 내 발로 걸어갈 수 없고 이제는 누구의 손에 의해서 걸어다닐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에 그 때 하나님은 여러분 안에 자리 자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이 그때부터 생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해서 잠깐 눈을 감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되고, 내 삶의 현주소를 발견하게 되고,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를 잘 파악하게 될 것입니다.
12-16절,
오늘 여러분들은 사도 바울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간증이 곧 여러분의 간증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도 바울처럼 그런 주님을 보게 하소서. 세상에 대하여 눈을 감게 하시고, 하나님에 대하여 눈을 뜨게 하옵소서. 기도하는 사람은 반드시 기도하는 사람을 만나게 됨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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