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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행 26: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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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믿는다는 사실은 이 세상에서 볼 수 있는 위대하고 훌륭한 성자나 철인이나 영웅이나 종교 창시자들을 믿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류 역사상 인류의 빛이 되었던 그 훌륭하고 위대한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은 한 인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여기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시지만 본래 하나님으로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점이 다른 것입니다. 인간의 철학이나 종교심에는 인간의 부활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부활신앙을 체험합니다. 이것이 다른 이유입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180도 그의 인생이 회전을 합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정말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변화지 않을 수가 없고 미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사도바울이 만난 예수님은 위대한 한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는 벨릭스와 베스도 총독 앞에서도 담대했습니다. 감옥에 있을지라도 담대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아그립바 왕 앞에서도 그가 예수를 어떻게 만난는지를 그는 이야기를 합니다.
16절,
자기를 고발하고 감옥에 집어넣는 사람들처럼 ‘나도 옛날에는 예수를 그렇게 핍박했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감옥에 집어넣은 사람이다. 나도 당신과 똑같은 과거를 가진 사람인데 예수를 만나고 나서 나는 생각이 달라졌다. 그분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야다. 나는 그를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다.’ 아그립바 왕에게 사실을 그대로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사실을 얘기하는 것보다 더 설득력이 있는 것은 없습니다. 사실을 얘기하면 그것이 힘이에요. 그것이 능력이죠.
17-18절,
아그립바 왕에게 계속 말합니다.
‘사람들은 내가 예수를 만난 것과 그 예수를 말하는 데 많은 유대인들이 자기를 죽이려고 하고 핍박을 하고 자기를 감옥에 집어넣다’는 것입니다.
19-21절,
사도 바울은 거짓말을 하거나, 도적질을 하거나, 사기를 쳤거나 살인을 해서 감옥에 들어오지 않았어요. 사도 바울이 감옥에 들어와서 재판에 서게 된 동기는 ‘내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말씀을 순종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나를 잡아서 죽이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겪었던 고난은 예수님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를 증거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다 보니까 그런 어려움을 겪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고난은 그렇지 않습니다. 현실적으로 우리들이 겪고 있는 고민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 다 내 문제 때문에 고난을 겪고 있습니다. 내가 내 몸을 잘못 관리해서, 내가 내 인생을 잘못 관리해서. 욕심이 많아서. 어떤 이기적인 마음 때문에. 그런 일로 인해서 고난을 겪고 있는 것이지 정말 예수 믿다가 얻은 고난이 아니라는 겁니다. 예수님 때문에 내가 가슴 아파하고 괴로워 하는가, 아니면 내 문제 때문에 그러는 것인가.
우리들은 간혹 자기가 욕심에 미혹되어서 자기가 잘못해서 고난을 겪어 놓고도 뭐라고 하냐면 ‘하나님이 나에게 고난을 줬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까 우리는 바울이 당하는 고난과 우리가 당하는 고난이 다르다고 하는 사실을 여기서 볼 수 있습니다.
22-23절,
22절에 보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우리가 쓰는 것과 바울이 쓰는 것과는 좀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는 말은 언제 씁니까 죽을 고비를 넘겼다든가, 살아났다. 내가 위기에 부딪쳤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났다. 전부 이런 종류의 해석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는 말을 다른 뜻으로 해석을 합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내가 오늘날까지 높고 낮은 사람 앞에서 복음을 증거하게 된 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병들었거나 위기에 처해 있거나, 내가 편안하거나,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어떤 형편에서든지 내가 예수님을 증거할 수 있는 기회를 내게 주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다. 이것이 하나님이 나를 도우신 것이다. 이렇게 해석을 합니다. 우리하고는 좀 다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과 나에게 복음을 전할 많은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도움이라고 생각해 본적이 있습니까 그것을 하나님이 은혜로 주었다고 해석한 일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나에게 전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은혜로 보지 않고, 은혜로 여기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도움이라는 것은 내가 위기에 처해있을 때 빠져 나오는 것만을 은혜라고 생각을 합니다. 나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를 가진 것을 기회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그렇게 해석을 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성공과 실패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주를 위하여 죽고, 살고 죽는 것도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해를 해도 괜찮습니다. 오해를 해서 복음을 전할 수만 있다면 좋습니다. 병들어서 복음을 전할 수 있다면 그것도 좋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리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어도 우리가 병들면 하나님이 나를 쳤다고 생각을 합니다. 바울하고 우리는 이런 차이가 있습니다. 고난의 해석이 다릅니다. 축복의 해석이 다릇습니다.
이렇게 보면 바울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미친 것입니다. 미쳤지요. 정상적인 사람의 눈에 보면 다 미친 겁니다. 미쳐도 단단히 미쳤죠.
많은 어른들은 이런 얘기를 합니다. 자식이 예수를 잘믿으면 처음에는 봐주다가 좀 정도가 지나치면 ‘예수는 그렇게 믿는 것이 아니다. 정신차리고 믿어라.’ 이말이 뭐냐면 ‘하나님 중심으로 믿지 말고 사람 중심으로 믿으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바울의 변증을 듣고 있던 총독 베스도가 굉장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을 합니다.
24절,
“바울아 네가 미쳤구나” 이 말은 베스도 총독이 흔들리고 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내가 받아 들이건 받아들이지 않건 간에 진리가 선포되면 흔들립니다. 사실이 전달되면 흔들립니다. 무슨 얘기를 하다 상대방이 화를 내죠. 왜그러냐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사실이 아니면 흥분을 안합니다. 사실이기 때문에 당황하고 흔들립니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바울은 무식한 사람이 아닙니다. 베스도가 인정했던 것처럼 그는 율법에 정통한 학자입니다.
총독 베스도의 눈에는, 믿음 없는 사람의 눈에는, 믿음 가진 사람들을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믿음은 상식을 초월합니다. 누가 바울을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믿고 계신 분이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분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이 사실이라면, 그분이 부활하신 것이 사실이라면 바울처럼 사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삶의 태도가 바뀌어야 합니다. ‘주님이 나를 위해 피흘려 돌아가셨는데 나도 바울같이 살아야겠다.’ 결정해야 합니다.
오순절날 성령이 임했을 때에도 미쳤다고 했습니다.
예수를 만난 사람들은 다른 어떤 종교를 만난 사람과는 다릇습니다.
25-26절,
“바울이 가로되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정신차린 말을 하나이다” 사실 미친 사람이 자기 미쳤다고 합니까 그러긴 하지만 바울은 참되고 정신차린 말을 하고 있습니다. ‘왕께서 이 일을 모르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 일이 어디 구석에서 되어진 일입니까 온 천하가 다 아는 일이 아닙니까’
베스도의 시각에서 보면 바울의 언행이 미쳤다고밖에 볼 수 없습니다. ‘왜 스스로 고난을 당하는가 왜 스스로 손해를 보는가 변명할 기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변명을 안하는가’ 하는거죠.
결국 가장 무서운 싸움은 자기 자신 안에 있습니다. 남하고 싸우는 것이 아니고 나하고 싸우는 것입니다. 참무섭고 처철한 싸움은 나하고 싸우는 것입니다.
27절,
드디어 바울은 아그립바 왕에게 도전을 합니다. 당신들이 그렇게 존경하고 사랑하는 선지자들을 믿으십니까 아그립바 왕은 더 이상 들을 힘이 없어요. 그는 베스도 총독이 흔들렸던 것처럼 아그립바 왕도 당황하고 있습니다.
28절,
정신 안차리면 예수 믿을뻔 했어요.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여러분, 이 기회야말로 베스도 총독이나 아그립바 왕이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습니다. 만약에 아그립바 왕이나 베스도 총독이 병에 걸렸거나 감옥에 있거나 했으면 예수를 믿었을거에요. 힘이 없거나 권력이 없으면 예수를 믿었을거에요. 그러나 왕된 것이 화근이요, 총독된 것이 화근이에요. 예수를 믿을 수 있는 기회가 왔는데도 그의 주변 환경이 쉼게 예수를 영접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여러분에게는 없습니까 여러분의 성공함이, 여러분의 자신만만함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을 막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의 주변 환경이 주님을 섬기는 데에 방해가 됩니까 도움이 됩니까 흔들릴 때 믿으세요.
29절,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한다”
이 말씀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서 나는 뭐냐’ 질문해 봅니다.
바울을 보면 “내가 부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성공했기 때문이 아니라, 내게 예수가 있기 때문에 다 나와 같이 되라.” 얼마나 자유롭고 정말 놀라운 말입니까
이 말씀 속에서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최악의 상황에서도 삶의 의미를 주시는 분이다. 바울이 이렇게 말할 수 있도록 해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었다. ‘다 나처럼 되라’
여러분은 여러분 자녀에게 이처럼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아버지의 직업을 계승해라. 나처럼 살아라’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이렇게 살았지만 나처럼 살지 말아라’ 바울은 ‘내가 결박당한 것은 닮지 말아라. 그러나 다 나처럼 되라.’ 그렇게 하게 하신 예수님을 봅니다.
인생이 뭡니까 무엇을 가리켜 인생을 성공했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바울과 같은 말을 할 수 있다면 인생을 잘 산 것입니다. ‘나처럼 살아라’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그분은 후회없는 인생을 마감한 것입니다. 여러분과 내가 그렇게 말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나는 세상적으로는 성공못했다. 그러나 내가 너한테 분명히 말하는데, 내가 믿은 예수. 나는 평생 후회가 없다. 그분은 신실하게 나를 인도해 주셨다” 이런 간증을 자기 자식들에게 할수만 있다면 여러분은 성공한 겁니다.
32절,
아그립바 왕은 바울의 진실과 그 믿음을 본겁니다. 우리를 핍박하고 우리를 괴롭히는 사람에게도 나를 괴롭히지만 그 사람이 내 진실을 알게 해야 합니다. ‘저 사람은 진실하다. 저 사람의 믿음은 진짜다.’
바울은 아그립바 왕에게 그렇게 했습니다. 아그립바 왕에게 설득을 시켰습니다. 그래서 아그립바 왕이 ‘당신이 가이사 왕에게 호소합지 않았더라면 오늘 내가 석방시켜 줄 수 있었을 텐데.’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사람의 손에 있지 않습니다. 석방할 기회가 있을지라도 바울은 로마로 가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아 너는 미쳤구나. 이런 소리를 들었습니다. 우리도 그런 비슷한 소리를 듣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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