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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본 그대로 오시리라 (행 0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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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기독교 복음의 핵심은 예수님께서 육신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시고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 다시 이 땅에 재림하시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적어도 사도행전적 신앙 고백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재림이 집약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렇게 확실하고 중심적인 신앙을 떠나서 세속적이고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욕망을 앞세운 때가 너무나 많았음을 솔직히 시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의 최대의 관심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나와의 관계, 예수님의 부활과 나와의 관계, 예수님의 교훈과 나와의 관계에 있고 또 그래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부활사건과 재림사건 사이에 승천사건이 있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재림의 약속을 읽을 수 있습니다. 흔히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서는 그것을 강조하는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그리고 재림에 대해서도 비교적 많이 생각합니다. 그러나 승천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실은 승천이야 말로 재림과 부활을 다 확실하게 설명해 주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승천 사건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이 승천에 관한 기사는 마가, 누가 등의 복음서와 이 사도행전에 그리고 히브리서 4장 14절 등 성경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기사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으나 오히려 그 차이를 대조해 보면 승천의 역사성과 사실성을 깨닭는데 큰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이들의 기록은 한 점 모순도 없이 예수님의 승천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같이 감람산을 말씀하셨고, 성령에 대하여 말씀하신 다음에 승천하신 것으로 말씀하였고, 사명을 주시고 분부하신 다음에 승천하신 것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들은 하나의 커다란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의 같은 사건을 같이 체험하고 그 체험한 것을 저마다의 스타일대로 요약해서 정리한 것이므로 각도에 조금씩 차이가 있다고 해도 부각된 본질은 하나임을 우리는 충분히 파악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여기에는 약속이 있습니다.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여러분, 만일 성경에 승천을 말씀하는 기록이 없었다면 부활 사건의 역사성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아마 희박해졌을 것이고 철학화, 관념화해져 버렸을 것입니다. 이렇게 승천의 사건은 우리 주님의 부활과 재림의 역사성부터를 확실하게 설명해 주는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과 재림의 중간 사건에 승천사건을 못박듯이 확실하게 자리함으로써 부활과 재림은 비로소 확실하게 구체성을 띄고 현실성과 역사성을 지니게 된 것입니다. 승천이라고 하는 사건은 이렇게 중요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충분히 한번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나 좀더 냉정하게 생각해 보십시다. 예수님의 부활이 확실하기는 하지만 조금 삐딱하게 생각하면 아리송한 구석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제자들과 먹고 자고 하시면서 며칠동안 함께 지내신 것이 아닙니다. 잠시 나타나셔서 저희들과 함께 지내시고 잡수시고 이야기하신 것에 불과합니다. 분명히 부활하신 것이 틀림없다 싶었는데 다시 보니 사라지고 안보이셨다가 또 다시 어떤 때에는 문을 잠거고 그 안에서 벌벌 떨고 있는 저들 앞에 홀연히 나타나셔서 평안하뇨 하십니다. 그러니 부활하셨다고 할 수도 없고 안하셨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것을 신학적 용어로, 보이는 몸 혹은 영적인 몸이라고 합니다. 곧 뵐 수 있는 몸으로 만질 수도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십자가를 지시기 전의 그런 몸이 아니라 신령한 몸, 부활하신 몸입니다. 배가 고프면 먹어야 하고 졸리면 자야 하는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우리 몸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차원이 아주 다릅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성경 상에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에 승천하시까지 사람들 앞에 열한번 나타나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 나타나시고, 저기 나타나시고 하시다가 승천하시게 되는데, 그 몸을 육체가 아니라고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십자가 지시기 전에 그 예수님이라고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도데체 이 어르신이 부활하신 것인지 안하신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말입니다. 역사상 단 한번 밖에 없는 이 사건을 도데체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물론 예수님의 육신을 직접 만져보기도 했습니다. 함께 식사도 하고 이야기도 나누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확실히 부활하셨습니다. 틀림없이 부활하셨습니다. 그런데 다시 보니 사라지고 안계십니다. 그런가 하면 다시 또 문이 잠겨져 있는데도 어디로 나타나셨는지 홀련히 저들 앞에 나타나 계십니다. 이러니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결국 승천이라는 사건이 없었다면 부활하신 주님의 존재가 한낱 환상적인 존재로 비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영적인 존재로 순간 순간 우리가 알아 볼 수 있도록 나타난 것으로 간주하기가 십상인 것입니다. 그런데 승천이라는 사건이 있습니다. 승천 사건이 있음으로 해서 저같은 모든 의혹이 사라지고 만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그 몸은 신령한 몸입니다. 우리가 지니고 있는 육체적 조건의 몸이 아니라 더 높은 차원의 몸입니다. 우리가 뭐라고 가름할 수 없는 몸입니다. 그 몸이 이제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리워 가십니다. 구름밖으로 사라지십니다. 저들은 멀쩡히 뜬 눈으로 보는 가운데 승천하십니다. 비로소 저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확실한 사건으로 믿게 되었던 것입니다. 만일 승천이라는 사건없이 무시로 여기 나타나시고 저기 나타나시고 하는 것이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부활을 온전히 믿을 수가 없게 되었을 것입니다. 문제가 심각해 집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당신의 육체를 얼마동안 나타내시고는 승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부활 사건에 대한 모든 의혹은 말끔히 사라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육체의 부활을 믿게 되었고, 그 공간성을 믿게 되었고, 시간성을 믿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승천 사건이 있음으로 해서 부활의 구체성이 분명해 진 것 처럼 재림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신다고 하는데 이에 대해서도 오해가 많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영으로 재림하실 것이라 하고, 어떤 사람은 이상한 꿈 하나를 꿔놓고 예수님을 뵈었다는둥 만났다는둥 헛소리를 하는 판입니다.
그러면 재림에 대하여는 어떻게 설명할 것입니까 그렇지 않아도 재림은 관념적이고 철학적이고 환상적이기에 여로모로 문제가 많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을 한번 보세요. 고맙게도 예수님께서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리워 가십니다. 올리워 가실 때에 하늘로써 음성이 있었습니다.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이 구절이 없었더라면 큰일날 뻔했습니다.
여러분, 성경은 우리가 부인할 수 없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보세요. 예수님께서 승천하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분부하십니다. 땅끝까지 이러러 내 증인이 되리라 (행 1:8) 너희는 온천하에 다니면서 복음을 전파하라 (막 16:15)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마28:20) 이처럼 말씀하시고 나서 몸이 하늘로 올리워가십니다. 구름이 가리워보이지 않게 되십니다. 사람은 구름밖에 보지 못합니다 멀리 높이 올라가신 것입니다. 그리고 음성이 들려옵니다. 본 그대로 오시리라 그러니 시시한 이야기는 믿지 말아야 합니다. 본 그대로 오시겠다고 하셨는데 쓸데없는 이야기가 어찌 그리 많습니까 추상적이나 환상적인 이야기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본 그대로 오시리라. 재림의 역사성, 그 구체적인 사건에 대하여, 약속에 대하여 우리는 현실적으로 믿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승천 사건은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7절을 보면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볼 것이요 찌른 자도 볼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리하리라 아멘 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1:8절에서는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고 했습니다. 7-8절 두 구절만으로도 재림하실 주님의 모습이 어떤 모습으로 오시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베들레헴 마굿간에 오셨던 초림 때의 그 모습이 아닙니다. 헤롯 왕의 추적대를 피해 애굽으로 도망치던 아기 예수, 나사렛 동네에서 목수 요셉을 시중들던 소년 예수, 십자가를 지고 가파른 골고다 언덕길을 올라가던 예수가 아닙니다.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다시 오실 예수는 천군 천사의 호위를 받으며 구름을 타고 지구상의 모든 인간들이 바라보는 가운데 오실 것입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왜 주님은 다시 오셔야 합니까 왜 우리는 마라나다 라고 기도해야 합니까 거기엔 다음의 세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약속의 실현을 위해서입니다.
주님 자신이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마태 24:44절에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치 않은 때 인자가 오리라 고 말씀하셨고, 요한복음 14:18절에서는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않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고 흰옷을 입은 천사가 증언했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셨던 주님께서 삼 일만에 부활하신 후 40일을 세상에 계시면서 자신의 부활을 제자들에게 확신시켜 주신 후 감람산에서 500명의 증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승천하셨습니다. 승천하시는 주님의 모습은 실로 장관이었던 것입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흰옷을 입은 두 천사가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고 말씀해 주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믿는 주님은 신실한 분이십니다. 주님의 신실성은 그의 약속과 성취로 증명됩니다. 구약과 신약을 살펴보면 수를 셀 수 없는 약속과 예언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과 예언은 단 한 가지의 오차도 없이 그대로 성취되고 실현되었습니다.
예수님에 관한 예언의 경우를 보아도 그것은 너무나 자명합니다. 베들레헴에 오신다는 예언도 성취되었고, 고난받으시리라는 예언도, 십자가에 죽으시리라는 예언도, 다시 사실 것이라는 예언도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직 성취되지 않은 한가지 사건만 남아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주님의 재림인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은 인간의 예언도 그대로 성취된 것을 성경은 증명하고 있습니다. 하물며 주님 자신이 내가 다시 오리라고 하신 그 약속이야 말로 불변의 약속이며 확고 부동한 예언이 아니겠습니까
주님은 요한복음 14:3절에서 내가 가서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고 하셨습니다. 마지막 하나 남은 그 약속의 실현을 위해 주님은 반드시 다시 오실 것입니다.
마라나다!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둘째는:기다리는 사람들 때문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들이며, 그들은 곧 주님의 재림을 믿기 때문입니다. 도미시안이나 네로와 같은 폭군들이 초대교회 교인들을 박해할 때 그들은 주님의 재림을 기다렸습니다. 그 이유는 주님이 어서 오셔야 고난의 역사가 끝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소망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소망의 반대어는 절망입니다. 대개 절망은 기다릴 것이 없다든지 기다려도 소용이 없다고 포기했을 때 일어나는 심리현상입니다.
미국 미쉬간 대학의 사회과학 연구소의 연구 보고에 의하면 미국인 세 사람중 한 사람은 일 년 내내 절망 속에 빠진 채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정신적으로는 만성적인 냉소주의자가 될 뿐만 아니라 매사에 부정적이고 비판적이고 파괴적이어서 문제의 사람이 되는가 하면, 신체적으로는 위궤양, 신경통, 두통, 요통을 일으키게 된다는 것입니다.
임상심리학자인 데이비드 부랜트 박사는 절망의 유형을 세가지로 분류했습니다.
첫째 유형은 자기 중심형입니다. 자기를 남달리 대우해주기를 바라고 특별히 인정을 바라는 형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신의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금방 실망해버리고 맙니다.
둘째 유형은 냉소형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폐증으로 자기 방어에 급급할 뿐만 아니라 불평불만이 떠나지 않습니다.
세째 유형은 복종형입니다. 이런 사람은 눈치와 아첨으로 다른 사람의 관심을 모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곧 실망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참을성이 없는 사람들은 대개가 희망을 버린 사람들입니다.
(가정 방문이야기) 마냥 즐거운 이유 두가지
첫째는, 예수 믿고 나서부터 세상이 밝아졌고 원망과 짜증스러움으로 가득찼던 삶이 기쁨과 감격으로 변했기 때문이었고,
둘째는, 3개월 후면 강남에 새로짓고 있는 아파트가 당첨돼 새 집으로 이사를 가게됐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다리는 마음이 있으면 인생살이가 지루하거나 짜증스럽지가 않습니다. 지금 이 지구상에는 수억의 사람들이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라면서 주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기다리는 사람들 때문에 주님은 다시 오실 수 밖에 없습니다.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세째는:심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항상 고백하는 사도신경의 끝 부분을 보면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써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는 고백이 있습니다. 주님은 심판하시러 이 땅에 다시 오십니다. 이 세상이 이대로 끝나버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주님은 다시 오십니다. 선과 악을 구분하고, 의와 불의를 구분하고, 믿음과 불신을 구분하여 심판하기 위해 주님은 반드시 다시 오십니다.
요한계시록 6:15-17절을 보면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자가 굴과 산 바위 틈에 숨어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임금들, 왕족들, 장군들, 부자들, 강한 자들이란 성도들을 핍박하던 자들로서 세상 권력을 업고 부귀영화를 누리며 예수를 훼방하던 불의한 세력을 의미합니다. 지금도 옳게 살고 께끗하게 살려는 사람들을 비웃으며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여 치부하고 영화를 누리며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그들의 횡포에 밀려 그늘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영화의 화면이 바뀌듯 역사의 장이 바뀔 때가 옵니다.
왕과 왕족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이 하나님의 심판이 두려워 산과 바위를 향하여 나를 가리워달라고 절규할 때가 오게 됩니다. 산과 바위가 가려준다는 것은 산과 바위가 덮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날의 심판이 얼마나 두렵고 무서운 것인가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환란과 고난을 참으며 믿음 지키는 사람들 때문에, 바로 믿고 바로 살아가는 사람들 때문에, 하나님을 훼방하고 우상을 숭배하는 패역한 무리들 때문에 주님은 반드시 다시 오십니다.
계시록 22:11절을 보면 불의를 하는 자는 그 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 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 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 대로 거룩되게 하라 고 했습니다. 바로 그런 종류의 사람들을 심판하시기 위해 주님은 다시 오십니다. 베들레헴에 오셨던 주님이 나를 위해 오셨던 것처럼 다시 오실 주님도 나를 위해 다시 오신다는 것이 우리들의 신앙이고 결론이어야 합니다.
마라나다!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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