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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광야교회의 모습 (행 07:3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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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데반의 설교도 이제 끝부분에 와 있습니다. 지금 스데반은 광야교회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과 이스라엘의 그 무리를 하나의 교회로 보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교회가 지금 그릇하고 있다는 것을 경고하기 위하여 광야교회를 들어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다는 사실과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죽이려고 했다는 사실과 그 맥락이 같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모세를 죽이려고 했던 그 광야교회 사람들이 오늘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을 죽였다는 것입니다. 그뿐아니라 예수님을 죽이고도 모자라서 그 제자들을 죽이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스데반은 이제 그 말씀을 하고 죽게 됩니다. 그 모든 맥락을 통해서, 그 구약적인 역사를 통해서 오늘 이 순간 스데반은 자신이 처한 당시의 교회를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는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요, 그 구약적인 역사를 통해서 오늘 이 순간 스데반은 자신이 처한 당시의 교회를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는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요, 그 때의 이스라엘 백성은 오늘의 모든 교인의 전신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렇게 연결하여 저들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성령을 거슬렀고, 말씀을 거슬렀고, 계시의 역사를 거슬렀고, 하나님의 역사를 거슬렀고, 하나님의 아들을 죽였을 뿐 아니라 오늘도 하나님의 사람들을 죽이려고 한다는 것을 아주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 속에서 광야교회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광야교회-대단히 중요한 단어입니다. 성경에 단 한 번 나타나는 단어입니다. 광야교회는 의미상으로는 성경 어디에나 있는 단어입니다마는 이렇게 ‘광야교회(테 에크레시아 엔 테 에레모스)’라고 딱집어 나오는 것은 성경에 딱 한 번뿐입니다. 그것이 그렇게 의미 깊은, 아주 신비로운 표현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계시적이요 영감적인 성경해석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렇듯 스데반은 구약성경을 교회론적 입장에서 보고 있습니다. 구원론적 입장에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광야교회라고 한 마디로 말씀하는 것입니다.
먼저, ‘광야’라는 말을 생각해봅시다.
우리나라에는 광야라고 일컬을만한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미국을 가든가, 중국을 가든가, 유럽을 가든가, 아프리카를 가든가 하면 광야를 볼수 있습니다. 광야는 참으로 무서운 곳입니다. 사람이 살지 못합니다.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입니다. 그래서 이 광야를 바다와 같이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처럼 바다나 광야는 전부 사람이 살수 없는 곳입니다. 한마디로 육지와 육지 사이에 있는 것이 광야입니다. 육지와 육지 사이에 모래로 덮여있고, 선인장만 자라나고, 무서운 짐승들이 들끊는 곳이 광야입니다. 전갈이나 뱀들만이 살아갈수 있는 곳이 바로 광야입니다. 도저히 사람은 살수가 없는 곳입니다. 문명이나 과학이 발달한 지금도 여기에 한 번 나갔다가는 잘못하면 돌아오지 못하고 죽습니다. 참으로 무서운 곳입니다. 이것이 광야입니다.
스데반이 설명하고 있는 이 광야교회는 세 가지 차원의 구원을 생각나게 합니다.
고린도전서 10장을 보십시오. 사도 바울이 이 이론을 그대로 받아가지고 광야교회에 대하여 좀더 자세한 해석을 내리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놓고 생각해 보십시오. 애굽은 세상을 상징하는 것이요, 가나안은 영원한 하늘나라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광야는 교회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광야교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임시적인 것입니다. 세상에서 하늘 나라로 가는 노정입니다. 하나의 과정에 불과합니다. 이 광야에 영원히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지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광야입니다.
사도 바울은 광야교회에 대하여 구원론적이자 교회론적인 의미의 해석을 내리고 있습니다. 바울은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고전 10:1,2)”라고 바다의 세례를 말씀합니다. 홍해를 건넌다는 것은 세례를 받는다는 것과 같습니다. 옛사람은 죽고 새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율법으로 죽고 은혜로 다시 사는 것입니다. 과거와의 관계를 단절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례입니다.
요단강은 하늘나라로 가는 또 하나의 과정입니다. 요단강은 광야 생활과 영원한 가나안 땅의 중간에 있는 것입니다. 영원한 가나안 땅에 가기 위해서는 요단강을 건너가야 합니다. 이것은 죽음을 상징합니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 291장은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요단강은 강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광야를 지나 요단강을 지나 가나안땅으로 들어가는 역사를 배경으로 하여 종말론적 구원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하는 것은 ‘죽어서 만나리’하는 소리와 같습니다. 죽음의 강을 건너간다고 비유적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때에 구원이라는 것은 일단 애굽에서 홍해를 건너 광야로 옮겨지는 것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이것이 일차적 구원입니다. 세상으로부터 구원받는 것입니다. 과거로부터의 구원이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그리고 요단강을 건너가는 것이 종말론적 구원입니다. 오늘 이 광야에 살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많은 시험에 빠졌습니다. 끝까지 믿음을 지키지 못하고 시험에 빠진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시험에 빠짐으로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그 시험에 이김으로,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믿음에 굳게 섬으로 구원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현재적 구원입니다.
성경에 보면 구원 얻었다. 구원 얻으리라, 구원하라, 구원을 위하여 힘쓰라,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구원 얻었다-곧 애굽에서 나왔다는 말입니다. 구원 얻으라-곧 천국가라는 말입니다. 오늘 구원을 위하여 힘쓰라-곧 시험에 빠지지 말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주기도문에서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하는 것은 ‘날마다 당하는 시험에서 우리를 구원해주소서’하는 현재적인 기도인 것입니다. 삼차원의 귀한 구원론은 이렇게 설명이 됩니다.
애굽은 곧 노예생활입니다. 자유가 없습니다. 죄와 우상에 노예가 되어서 아무런 자유도 없이 죽을 고생을 합니다. 이것이 바로 애굽입니다. 애굽에서는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자기를 구원할 수 없는 참으로 무서운 노예생활에 붙들려 있습니다. 지금도 보면 이 세상에는 나쁜 취미와 성격, 못된 생각과 정욕에 노예가 되어 헤어나지 못하는 불쌍한 심령들이 많습니다. 죄와 사망에 붙들려 있는 불쌍한 심령들이 많습니다. 애굽은 완전히 버려진 죄악 세상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광야는 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땅으로 가는 과정입니다.
가나안은 완전한 자유입니다. 요단강을 건너가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면서 사는 영광된 세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애굽, 광야, 가나안-이렇게 세 공간을 상징으로 해서 우리에게 중요한 구원론적 의미를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좀더 중요한 문제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분명히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논리적으로나 지정학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분명히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다시 애굽으로 돌아 갈수는 없습니다. 홍해를 건넌 다음에는 말입니다. 분명히 저들은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몸은 나왔는데,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나왔는데, 지정학적으로는 분명 출애굽이 된것 같은데, 정작 마음이 출애굽을 하지못했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마음은 여전히 애굽에 있습니다. 몸은 여기에 있는데 마음은 저기에 있습니다.
오늘도 보면 이 자리에 나온 여러분 가운데 몸은 여기에 있는데 생각은 집에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금 텔레비젼에서는 내가 좋아하는 연속극을 하고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고 앉아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몸만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지금 마음이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그런가 하면 설교말씀 들으면서 ‘이것은 내 남편이 꼭 들어야 할 말인데..’하는 생각만 하고 앉아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마음이 지금 여기에 있지 못한 것입니다. 여러분, 몸만 가지고 자기를 옮겨 놓았다고 해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언젠가 제주도에 갔다가 기가 막힌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신혼여행을 와서 몰래 옛 애인한테 전화를 걸다가 남편에게 들켜 가지고 매맞고 이혼당한 신부가 있다고 합니다. 신혼여행을 왔으면 그대로 남편하고 즐길 것이지, 왜 옛날 애인한테 전화는 겁니까 이 사람 결혼한 것입니까 아닙니까 결혼식도 굉장하게 치르고 제대로 다 된 것 같았는데 정신상태는 그렇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분면히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나오기는 했는데 온전히 나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문화적으로 그렇고, 신앙적으로 그렇습니다. ‘ALREADY, BUT NOT YET'-이미 구원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직 받지 못했습니다. 아직 구원받지 못한 부분이 많습니다. 바로 그것이 광야교회입니다. 아주 오묘하고도 깊은 진리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하루빨리 남북이 통일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꿈에도 소원은 통일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통일이 지정학적으로나 정치적으로는 가능할지 몰라도 문화적으로, 정신적으로, 사상적으로는 아직 거리가 멀었습니다. 여러분은 민족의 동질성을 회복하기도 전에 무조건 통일만 이루면 된다고 생각합니까 휴전선이 무너진다고 통일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선 문화적으로 민족의 동질성을 찾고 나서 그 다음에 정치적인 통일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저 감상적으로 무조건 통일을 외치는데 그것은 정치적인 구호에 불과할뿐 되지도 않을 소리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입니다. 사상이 문제요 민족성이 문제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정치적으로 달려든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자리를 옮겨놓았다고 해서 해결된 것이 아닙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온 것이 얼마나 극적인 사건이었습니까 얼마나 드라마틱했습니까 얼마나 굉장했습니까 애굽에 내린 열가지 재앙을 보면서, 모세의 기적으로 갈라진 홍해를 건너면서 틀림없이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정신은 아직 출애굽하지 못했습니다. 광야교회가 무엇입니까 이제부터 진짜 출애굽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우리는 ‘광야교회’를 보게됩니다. 그 교회 안에서 되어지는 일을 보십시오. “우리 조상들이 모세에게 복종치 아니하고자 하여 거절하며 그 마음이 도리어 애굽으로 향하여(39절)”-저들이 모세를 거역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광야교회의 믿음에 대해서는 지난 시간에 이미 공부한바 있습니다
먼저,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습니다. 둘재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속 지시하시고 계십니다. 저들은 하나님의 말씀만 따라가면 됩니다. 가라시면 가고, 오라시면 오고, 기다리라면 기다릴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입니다. 세 번째로, 모세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믿는 믿음이 있습니다. 분명코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지명하신 사람입니다. 따라서 저들은 모세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믿고, 모세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따라야 합니다. 모세를 따라가는 것이 하나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모세의 말씀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요, 모세를 거역하는 것이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저들에게 모세 중심적인 신앙을 원하셨습니다. 다른 사람을 통해서는 일절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오직 모세를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을 보십시오. ‘왜 하필이면 모세냐 아론도 있는데...... 아무나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되지, 왜 모세 말만 들어야 하느냐’ 하고 말들 하다가 광야에 엎드러져 죽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아닙니다. 내가 모세를 지명했는데 너희가 왜 딴소리를 하느냐 그 말씀입니다. 나는 모세를 통하여 너희들과 이야기한다, 그것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들은 이것을 부정했습니다. 모세를 거역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통치를, 심지어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하나님의 구원하심과 하나님의 약속, 가나안에 대한 약속까지도 다 부인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믿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광야교회에서 범했던 저들의 죄입니다.
저들이 광야교회에서 법한 죄가 또하나 있습니다. 바로 원망죄입니다. 특별히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에서 누누이 말씀합니다. “그러나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고전 10:5)”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고전 10:10)”-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죄를 지었다, 하나님깨서 진노하심으로 저들을 광야에서 엎드러져 죽게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원망죄 때문입니다. 원망이란 무엇입니까 원망은 불신앙에서 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기에 원망이 생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기 때문에, 이미 구원하심에 대한 감사가 없기 때문에 원망이 싹틉니다. 원망-아주 큰 죄입니다.
우리는 율법을 어기는 것만이, 십계명을 지키지 않는 것만이 죄라고 생각합니다마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한 뒤에 광야에서 범한 죄가 더욱 큽니다. 그것이 바로 원망죄입니다. 좁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렇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이 범한 죄는 살인죄요 강간죄요 거짓말하는 죄입니다. 그러나 특별히 믿는 사람만이 범하는 죄가 있습니다. 바로 원망죄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것은 죄가 안되는 줄로 아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원망죄야말로 가장 큰 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분명히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일단 구원을 받았습니다. 일차 구원입니다. 그러나 원망하다가 결국은 광야에 엎드러져 죽고 말았습니다. 불신앙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완전한 반항이었습니다.
본문 말씀을 보십시오. “그 마음이 도리어 애굽으로 향하여(39절)”-여기에 광야교회에 있었던 세 번째 죄가 나옵니다. 저들의 마음이 얘굽으로 향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현재 고난이 좀 있다고해서 애굽을 생각해서야 되겠습니까 물론 하나님께서도 저들에게 어려운 고난을 주시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훈련이었습니다. 목적이 있어서 고통을 가하셨던 것입니다. 의미없는 고통이 아니었습니다.
오늘날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어떤 고난을 당하든지 그 고난에 목적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때로 우리는 왜 이 고난을 당하는지 그 이유를 모릅니다마는, 하나님께는 분명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어떠했습니까 조금 어려운 일을 당한다고 해서 원망했습니다. 말이 됩니까 그 고난은 하나님께서 저들을 훈련시키시기 위하여 내리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엄연한 교과과정을 가지고 저들을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부모가 자녀들을 가르칠 때에 때로 어려운 일을 시키는 것과도 같습니다.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하고 가르치기 위하여 때로 잘못할 때에는 매를 들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 매는 어떤 마음으로 맞아야 합니까
요새 아이들은 눈치가 너무 빨라서 괜히 때린다고 오히려 대듭니다. 엄마는 아버지한테 싫은 소리 들어놓고 화풀이는 나한테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문제입니다. 이유 있어서 맞는 것이 아니라 동쪽에서 뺨맞고 서쪽에서 눈흘기는 식으로 나를 야단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맞는 매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바로 이해하고 보면 이유 없는 매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유 없이 고통을 가하는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바로 그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로 인도하신 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들은 이것을 감당하지 못하고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 심지어는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선동하는 무리까지 생겨났습니다. 저들은 지금보다 애굽땅에서 고기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가 좋았다고 하며 불평했습니다. 아니 노예생활 하면서 까짓 고기 좀 먹는 것이 그렇게 좋습니까 차라리 광야에 나가서 죽는 것이 백번 낫습니다.
무릇 사람에게는 지난 시절을 미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날 죽을 고생을 해놓고도 오늘 돌이켜서는 그 때가 좋았다고 합니다. 신문이나 텔레비젼을 보십시오. 오늘을 가리켜 총체적 위기에 처했다고 합니다. 지난날이 오히려 좋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몇 년 지나보십시오. 오늘의 총체적 위기가 그 때에는 좋은 시절로 둔갑할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오늘이 진짜 위기’라고 떠들 것입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옛날의 고통스러웠던 일은 다 잊어버리고 좋은 것만 생각하려고 하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습니까 이렇바에는 차라리 광야에 나가서 죽어버리자 하는 생각을 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출애굽하여 광야에 이르러서는 그런 옛날이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노예생활이었지만 배는 굶지 않고 살았는데, 하면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합니다. 얼마나 큰 죄입니까
그뿐입니까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우리를 인도할 신들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40절).” 저들은 아론을 충동해서 금송아지를 만들게 합니다. 여기에는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저들이 금송아지를 만들 때에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자 하는 차원에서 만든 것이 아닙니다. 저들은 하나님을 믿고 모세를 믿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간지 40일이 지나도록 보이지 않자, 저들은 불안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급기야는 모세가 죽었다고 판단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부득이 무엇인가 눈으로 볼 수 있는, 가시적인 하나님이 있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가시적인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든 것이 바로 황금 우상이었습니다.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놓고들 하는 소리를 들어보십시오. “이는 너희를 애굽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출 32:4).” 하나님을 모두 떠나서 우상을 섬기자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 우상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입니다. 실로 엄청난 범죄입니다. 이것이 단순히 우상을 섬긴 죄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우상화한 죄입니다. 하나님을 우상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무서운 죄입니다. 바로 이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크게 진노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우상을 섬길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많이 참으셨습니다. 그러나 당신을 우상화하는 저들의 작태에 이르러서는 더 참으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는 저들이 성전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는, 그 굴욕적인 거슬림을 당하시고도 참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저들이 당신의 성전에서 당신을 우상화하여 섬기는 데 이르러서는 그 성전까지 헐어버리실 정도로 크게 진노하셨습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우상화하는 죄야말로 으뜸으로 무서운 죄입니다. 보세요. 이스라엘 백성은 금송아지를 만들어놓고 “이는 너희를 애굽땅에서 인도하여낸 너희 신이로다”합니다. 하나님께서 마침내 크게 진노하사 그것을 때려부수시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진노하심으로 땅이 꺼져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죽음을 당했습니다. 명심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계시 방법에 불만을 품고, 볼 수 없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형상으로 만들어 섬기려 했습니다. 여기에 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모독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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