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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첫 번 순교자 (행 07:54-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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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의 말씀은 스데반의 장엄하고 아름다운 순교 장면을 보여줍니다. 보시다시피 스데반은 기독교 역사상 최초의 순교자인 동시에 참순교의 표본인 것입니다. 무릇 기독교적 순교자라면 당연히 스데반과 같은 모습으로 죽어간 사람만을 순교자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이 ‘순교자’라는 제목의 소설을 썼습니다. 저는 그 소설을 읽어보고 실망을 했습니다. 순교자로 부각시킨 주인공이 끝에 가서 보면 안죽으려고 갖은 수단을 다 서서 애를 쓰는 것이었습니다. 그게 못마땅해서 제가 작가를 만났을때에 물어보았습니다. “한국의 순교자들, 이렇지 않았는데 왜 이런 모습으로 그렸습니까” 그 작가는 대답합니다. “그건 소설입니다. 역사 기록이 아닙니다.”
참순교자는 죽음 앞에 비굴하지 않습니다. 결코 억울하게 죽는 것 같은 모습으로 죽지 않습니다. 어디까지나 순교자 입니다. 스데반과 같은 모습으로 죽어간 사람이라야 순교자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 순교자의 전형이라 할수 있고 대표적 크리스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은 마땅히 이렇게 죽어야 합니다. 여러분, 부디 죽는 준비를 잘 합시다. 병원의 의사선생님들은 특별히 죽음을 많이 봅니다. 그런 의사선생님들이 고백하는 것을 보면 딱히 통계를 낼수는 없으나마 대체로 기독교인들이 아름답게 죽는 편인데, 간혹 보면 직분이 있는 교인인데도 마지막 장면에서 영 이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싶은 유감스러운 모습으로 죽는다고 해요.
하나님을 부인하거나 원망해서냐 하면 그렇지는 않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내 기도를 왜 안들어주시나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안타깝게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어찌하여 내 생명을 연장해 주시지 않는단말인가 하고 원망 아닌 원망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필경에는 원망에서 감사로 돌아가서 죽어야 되는데 이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원망하는 그대로 꼴깍 죽고마니 안타깝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유감스러울 수가 없어요.
여러분, 아무쪼록 죽는 준비를 잘합시다. 단단히 준비해야 될 문제입니다. 끝에가서 어떻게 가야 하겠습니까 스데반의 죽음은 참으로 귀한 것입니다. 본받아야 할 모델이요 표본입니다. 부럽기 이를데 없는 아름다운 죽음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스데반의 이 죽는 장면을 지극히 사랑합니다. 얼마든지, 언제 상고해보아도 은혜가 넘치는 본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본문을 가지고 많은 곳에 다니면서 설교를 해보았습니다. 정말 말씀드릴 때마다도 은혜가 있는 귀한 본문인 것입니다.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가해자, 순교자, 그리스도의 세가지 모습이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도대체 누가 스데반을 죽였느냐 어떤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을 죽이느냐-가해자의 모습이 환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못된 사람들에게 돌에 맞아 죽는 스데반의 장엄한 모습, 위대하게 아름다운 그 모습이 부각됩니다. 그리고 또하나, 오늘의 본문에 멀리 비춰지는 것은 기독론입니다. 예수가 누구냐-예수님의 모습이, 기독론이, 누가가 보여주는 휼륭한 기독론이 여기에 결정적으로 보입니다. 본문에서 읽을 수 있는 오묘한 진리입니다.
첫째로, 가해자를 봅니다.
이들은 산헤드린 공희회 의원들입니다. 당시의 유대사람들 중에서는 소위 귀족 축이요, 종교지도자요, 하나님만을 섬긴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로마 사람들이 아닙니다. 스데반이 강도나 깡패한테 맞아죽은 것이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자처하는 종교인들이 스데반을 죽입니다. 이 점에서 심각하게 듣지 않을수 없는 문제인 것입니다. 스데반은 7장 전체를 통해서 기나긴 설교를 폅니다. 저들은 그 설교를 다 듣고나서 돌로 쳐죽이는 것입니다. 말씀이 들어오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말씀이 들려졌습니다. 복음을 못들어서가 아닙니다.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유가 무엇이건 듣는 현장에서 마음문을 열지 못할 때에는 악의에 찬 사람이 된다는 말입니다. 늘 말씀드리는데로 말씀에는 심판적 요소가 있습니다. 똑같은 말씀을 듣는데도 한사람에게는 그 말씀이 구원의 계기가 되고, 한 사람에게는 멸망의 계기가 됩니다. 제일 불쌍한 사람이 말씀을 들으면서 마움문을 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교회 안 나오는 사람이 교회를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나오는 사람이 교회를 허는 것입니다.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자처하는 그 사람들이 스데반을 죽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나서입니다. 특별히 충격적인 것은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54절)”-저들이 말씀을 들었을 뿐만 아니라 마음에 찔리기까지 했다는 사실입니다. ‘찔렀다’-‘디에프리온토’라고 하는 이 말은 ‘화살이 꽂혔다’라는 말입니다. 정곡을 찔렸다는 것입니다. 남의 이야기로가 아니라 나를 두고 한 말씀으로 알아들었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빗나갔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말씀은 나와 상관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이것은 내게 말씀한 것이다. 아, 저분은 나한테 이야기하고 있다.-과녁에 화살이 꽂히듯 마음에 찔렀습니다. 분명히 찔렀습니다. 이제 어떻게 되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제가 인천에서 목회할 때, 어느 집사님댁에 심방을 갔다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때마침 먼데서 온 손님이 들어서는 것이었습니다. 피할수 없는 손님이라 영접을 하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해서 안집사님이 가정부 보고 “미안하지만 오늘은 혼자 갔다 와요”하고 가정부만 교회에 보내놓고 손님을 집안으로 맞이했습니다. 그랬는데 이 가정부, 예배 마치고 돌아오더니 집안에 들어서자마자 주저앉고는 대판 통곡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주인 내외는 깜짝 놀랐습니다. “왜, 왜 그래요, 아줌마” 하고 눈이 휘둥그래진 안집사님 보고 가정부는 마구 원망을 해댑니다. “아, 이럴수가 있어요 내가 잘못한 것이 있으면 바로 대고 꾸중을 하실 것이지 왜 목사님한테 고자질은 해서 나 혼자 욕 실컷 얻어먹고 오게 하시는 거예요” 목사님이 오늘은 자기보고 처음부터 끝까지 욕을 하시는데 견딜수가 없더라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에 그렇게 고자질을 할 수가 있느냐고 원망하는 가정부에게 집사님은 그런게 아니라고, 내가 왜, 무슨 고자질을 하겠느냐고, 목사님이 그럴 리가 있느냐고 아무리 타일러도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이 그렇게 내 사정을 잘 알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게 ‘찔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찔렸으면 회개를 해야 하는데 그에 앞서 누군가가 고자질했나 싶고, 목사님이 나를 왜 이렇게 미워하느냐 싶은 것입니다.
스데반의 설교로 마음에 찔림받은 저들은 회개는 커녕 오히려 돌을 들어 그를 치지 않습니까 같은 마음입니다. 저들은 마음에 찔렸습니다. 당연히 찔려야지요. 찔림받기 위해서 온 사람들입니다. 무슨 말씀을 주시든지 ‘이건 내게 주시는 말씀이다’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내게만 주시는 말씀이다’하고 그야말로 화끈하게 찔려야 하는 것입니다.
똑같은 맥락의 이야기가 사도행전 2장37절에도 있습니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가 3천명 앞에서 설교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설명하면서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36절)” 합니다. “너희가”라고 말씀하지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은 그실 몇 사람뿐입니다. 로마군인들이 못박았어요. 그 원인을 제공한 사람은 빌라도입니다. 또 그 뒤에는 가야바가 있고, 가롯 유다까지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3천명을 향하여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았다’했으니 듣는 사람들이 가만있을 문제입니까 내가 그 자리에 있었더라도 ‘말조심하시오. 내가 언제 그런 짓을 했단말이오’하고 대들 상황인 것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자기들 보고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았다”라고 엄청난 심판의 무서운 말씀을 하는데도 이 말씀을 듣고 모두가 ‘옳습니다. 나 때문에 예수님은 죽으셨습니다’하고 저들은 군말없이 받아들입니다. 나아가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하고 묻습니다. 마음에 찔릴 때에 곧 회개를 한 것입니다. 해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에서는 마음에 찔린 사람들이 이를 갈았어요. 회개할 생각은 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더 굳어진 것입니다. 악의가 생겼다는 뜻입니다. 4장을 보면 기독교인들을 잡아다가 위협을 했고, 5장을 보면 채찍질을 했으며, 오늘의 본문에 보면 돌로 치는 것입니다. 협박도 해보고 때려도 보고 마지막에는 돌로 쳐 죽이는 것입니다. 이를 가는 마음, 증오심, 악한 마음이 이렇듯 크게 작용할 때에 엄청난 살인 행위를 하게 됩니다.
가해자들은 이를 갈았을 뿐 아니라 귀를 막기까지 합니다(57절). 귀가 열리면 손이 흔들리니까요. 귀를 열고는 돌을 들어서 칠수가 없으니까요. 사람들이 싸울 때에 보면 남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가만있어 보라. 내가 말하지, 하고, 저만 이야기하려들지 남의 말듣는 자세는 전혀 없어요. 싸울 때에 ‘당신 말하시오. 나 듣겠소’ 한다면 싸울 일이 없어집니다. 듣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싸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살인에까지 가는 것이지요. 자세를 달리해서 귀를 열것입니다. 마음의 귀를 열면 들려지고 듣다보면 감동이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에도 귀를 막고 소리를 지르면서 돌로 치는 것입니다. 악한 사람, 악의에 찬 사람은 막바지에 이르러 으레 귀를 막습니다. 무슨 소리를 해도 듣지 않습니다. 끝인 것입니다.
귀를 막았을 뿐 아니라 저들은 “일심으로” 스데반에게 달려들었습니다. 군중심리입니다. 집단화한 것입니다. 악의가 집단화할 때에 엄청난 사건이 됩니다. 행동화하여 우루루 달려듭니다. 소리를 지르며 돌을 던지게 됩니다. 이 순간은 전혀 앞뒤를 가리지 않습니다. 사형은 반드시 로마정부만이 집행할수 있게 되어 있는데도 이런 것마저 가리지 못하게 됩니다. 군중심리에 휩쓸린 나머지 저들이 지금 여기서 돌을 던지면 스스로들 로마법에 걸려든다는 것을 헤아리지 않을 만큼 대중이 없어집니다. 법적으로 불법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습니다. 앞으로 돌아올 불이익을 상관하지않습니다.너 죽고 나 죽어도 좋다는 발악입니다. 저들은 그런 심사로 돌을 던진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을 때에는 어쟀든 정당한 방법을 억지로라도 만들어서 그렇게 한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이 시간은 그것도 아닙니다. 억지 구실도, 억지 재판도 없이 그대로 성 밖에 끌고가서 돌로 치는 것입니다. 저들의 악이 극치로 이르러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가해자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이나 제자들에게 돌을 던진 가해자는 바로이런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는 오늘도 옛날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다음으로 우리가 볼수 있는 것은 순교자의 모습입니다.
한마디로 순교자의 모습은 ‘성령충만’이었습니다. 성령충만-우리는 이에 대하여 가끔 오해가 많습니다. ‘성령충만’이라 하면 그저 좀 무아지경에 들어가고, 허튼 소리도 하고, 방언도 터지고, 진동도 하고... 이렇게 황홀경험이 있는 상태라고 흔히들 착각하고 있습니다. ‘성령충만’이 무엇이냐고 누가 묻거든 오늘의 본문을 보라고 하십시오. 결정적인 충만입니다. 하나님의 영에,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사로잡혀서 그 기쁨으로 충만해 있을 뿐입니다. 다른 감정은 아무것도 없는, 그런 평화, 그런 자유-이 모습이 ‘성령충만’입니다. 그 담력, 그 담대함, 나를 해하는 사람들, 그 원수들을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기도하고 하는 모습, 바로 이런 모습이 성령충만한 모습입니다.
사도행전 6장15절은 이 모습을 가리켜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이 중인의 모습입니다. 무릇 복음을 증거하는 사람의 얼굴은 언제나 천사의 얼굴과 같아야 합니다. 평안함이요 자유함이요 고요함입니다. 풍랑속에서도 고요합니다. 소란의 와중에서도 평온합니다. 아무도 훼손 못하는 온전하고 절대적인 평화입니다. 절대적인 샬롬입니다. 그래서 천사의 얼굴입니다. 천사의 마음이 있으니 천사의 얼굴입니다. 또한 성령충만하면 자유합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시간에는 아무 욕망에도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고요합니다. 심령이 자유합니다. 완전한 평안과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순교자의 얼굴입니다. 그래서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했습니다.
그러면 이제, 스데반은 어떻게 해서 천사의 얼굴이 되었는지 우리는 인과적으로 한 번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본문을 보니 하늘을 우러러 보았다고 말씀합니다. 위를 보았어요. 골로새서 3장2절에 보면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라고 말씀합니다. 위를 보았기 때문에 스데반은 천사의 얼굴을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땅을 보면 어떻게 됩니까 걱정거리가 많습니다. 땅을 보니 처자식도 있습니다. 땅을 보니 사랑하는 친구들이 나를 죽이려 합니다. 나를 향해 이를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얼굴이 하나하나 보입니다. 이러고야 어떻게 내 얼굴이 일그러지지 않겠습니까 마음이 어찌 평안하겠습니까 그러나 우러러 보았거든요. 우러러 하늘을 보았습니다. 하늘을 보고 땅을 보니 평안할 수 있었습니다. 잊지말 것입니다. 언제나 위를 보십시오. 이스라엘사람들의 격언에 ‘앞도 막히고 뒤도 막혔거든 위를 보아라’하는 말이 있습니다. 모름지기 위를 보십시오. 우러러볼 줄 알아야 합니다.
우러러 보았을 때에 스데반은 용서의 가능성을 얻게 되었습니다. 넓은 마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위를 봄으로 그리스도를 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뵙고 나를 보고, 그리고 이웃을 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된 자세입니다. 이웃을 보고 나를 보는 것이 아닙니다. 땅을 보고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뵙고 나를 보고, 그 다음에 이웃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 405장은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와’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뵙고 그리스도를 뵙고 나를 보니 나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가 그지 없습니다. 이렇듯 감격하고나서 이웃을 본즉 용서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 하시는데 내가 왜 저를 용서 못합니까 하나님께서 나같은 죄인을 사랑하시는데 내가 왜 저를 사랑하지 못합니까 문제는 여기 있습니다. 그래서 위를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늘이 열린 것을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늘은 닫힌 것이 아니라 열려 있습니다. 열린 하늘로 그리스도를 뵙는데, 그리스도께서는 본문에서 보는대로 영광받으신 그리스도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 예수님입니다. Exalted Christ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저러한 예수님을 생각할줄 알아야 합니다. 병고치시는 예수님,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 가난한 사람 돌아보시는 예수님-우리는 흔히 이렇게 예수님을 생각하지만 초대교회 사람들이 생각하는 예수님은 그런 예수님이 아닙니다. 영광받으신 예수님이요 부활하신 예수님입니다. 스데반이 우러러뵌 예수님은 영광중에 계신 예수님입니다. 그를 바라뵙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니 신학적으로 아주 중요한 용어가 나옵니다. 바로 ‘인자’라고 하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살아 생전에 당신께서 스스로를 가리켜 늘 “인자가” “인자가”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을 향해서 ‘인자’라고 호칭한 적이 한 번도 없어요. ‘당신은 인자입니다.’하고 말한 사람이 없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했지 ‘인자’라고 하지는 못했습니다. 오직 한 제자만이 예수님을 가리켜 ‘인자’라고 부르는데, 바로 스데반이 그 사람입니다.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하고 그는 말합니다. ‘인자가’라니, 어떻게 생각하면 감격스럽기도 하고 다행스럽기도 합니다. 이 한 제자가 비로소 제대로 불렀으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지칭하는 바른 호칭은 ‘인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언제나 그리스도로, 메시야로, 하나님의 아들로 밖에는 고백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은 “인자가”하고 말합니다. 완전하고도 결정적인 고백입니다. 성숙한 고백입니다. 참으로 위대한 순간에 그 마음에 이루어지는 기독론-그리스도에 대한 이해가 이렇듯 높은 차원이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에 감격하지 않을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에 보니 “무릎을 꿇고(60절)”라 합니다. 처음부터 꿇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뭇 돌에 맞았습니다. 이미 육신이 깨지고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이제 이대로 죽는구나’ 싶은 순간, 끝이 되었다고 판단한 순간에 그는 무릎을 꿇었습니다. 이 순간을 한 번 상상해보십시오. 쉬운 일입니까 돌무더기 속에서 지금 엉망이된 육신에 정신은 오락가락 합니다. 한가닥 남은 정신마저 가물가물 사라져갑니다. 이러한 순간에 무릎을 꿇은 것입니다. ‘이대로 무너질수는 없다’ ‘기도 없이 끝낼수는 없다’-이래서 한사하고 몸을 가누어 무릎을 꿇은 것입니다. 기도의 자세를 수습한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를 드립니다. 군중의 고함과 어지러이 날아드는 돌세례의 와중에서 스데반은 가까스로 경건한 자세를 취하였고, 그리하여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더할수없이 귀한 모습입니다. 우리가 임종을 맞이할 때에도 그냥 누워서가 아니라 무릎을 꿇고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있는 힘을 다해서 무릎을 꿇음으로 하나님 앞에 바른 자세를 가질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모름지기 바른 자세는 무릎꿇은 자세입니다.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그렇게 무릎꿇고 드리는 스데반의 기도는 이렇듯 간단합니다. 긴 이야기가 없습니다.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시 31:5)”-이스라엘사람들이 잠자리에 들 때에 드리는 기도문입니다. 생명을 위탁하는 기도입니다. 자신을 위한 기도입니다. 스데반은 이렇게 자기 생명을 하나님께 위탁하고 나서 그 와중에도 원수를 위한 기도까지 잊지 않습니다.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위대하다는 표현으로도 스데반의 이 모습을 그리기에는 부족합니다. 나는 저들을 미워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이여, 저들의 이 허물을 용서하시고 저들의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말아주소서-이 기도는 신학적으로도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디모데후서 4장16절에 있는 사도 바울의 말씀을 인용해봅니다. “다 나를 버렸으나 저희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사도 바울의 임종기도와 같은, 유언과도 같은 말씀인데, 자기를 핍박한 모든 사람들에 대하여 이야기하면서 그 허물을 저들에게 돌리지 말아달라고 말씀합니다.
‘허물을 저들에게 돌리지 말아달라’-여기에는 깊은 뜻이 두가지 있습니다. 첫째, 나는 저들의 죄를 사할 권리가 없습니다. 내가 이렇게 죽는다고 해서 ‘하나님,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 할 수가 없습니다. 둘째,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말아 주십사 하는 말의 숨은 의미는 일이 이렇게 된데는 그 잘못이 나에게 있을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뭔가를 잘못해서, 내 실수로 인하여 저들이 저렇듯 화를 내게 됐는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말라면 그 누구에게 돌리라는 말입니까 그 다음 말은 없습니다. 곧 그 허물을 나에게 돌려주십사 하는 뜻이 있는 것입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남을 용서할 때에 무작정 ‘용서해주십시오’ ‘사해주십시오’ 하는데 누가 누구보고 하는 이야기입니까 ‘하나님, 저 사람이 저렇게 된 것은 그 원인이 간접적이건 직접적이건 나에게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이여, 이 허물을 저들에게 돌리지 말아주십시오.’ 아주 중요한 기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기도는 다릅니다. 예수님의 경우에는 누가복음 23장 34절에 보면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는 완전한 것이었기에 후회가 없습니다. 동시에 예수님은 자신이 지금 만백성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시고 계시거든요. 지금 속죄의 제사를 드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들의 죄를 사하여주옵소서‘ 하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스스로 “네 죄를 사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죄를 위한 기도를 대신 할 수가 없습니다. 대단히 깊은 신학적 의미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제, 본문의 끝에 보니 “이 말을 하고 자니라” 했습니다. 기독교인의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자는 것입니다. 잊지 말것입니다. 돌에 맞아 죽지만 스데반은 살해당한 것이 아닙니다. 고요히 잠이 든것입니다. 왜요 주님 오실 때에 부활할 것이니까. 그리스도인은 어떤 모양으로 죽었든지 자유롭습니다. 성도의 죽음을 가리켜 피살이라고 불러서는 안됩니다. 안죽을 것이 죽은 것처럼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사고사라 해도 안됩니다. 성도의 죽음은 어느때에 어떻게 죽더라도 죽음이 아니요 잠입니다. 주님께서 부르셔서 가는 것이요, 그리고 잠드는 것일 뿐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사망관입니다. 이점을 깊이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본문에는 또한 기독론이 나타나는데, 간단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인자-그리스도는 바로 저기 계십니다. 부활승천하셔서 하나님의 영광 속에 계시되 인자로 거기 함께 계시다는 것입니다. 또하나 중요한 것은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것입니다(55절). 벵겔이라고 하는 주석가는 주님께서 스데반을 환영하기 위하여 일어서신 것이라고 주석합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굳이 왜 서셨다고 표현했을까-“스데반아, 어서 올라 오너라” 하시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욱 중요한 의미는 이것입니다. 순교자가 죽는 아름다운 순간을 지켜보시고 벌떡 몸을 일으키실 정도로 기뻐하심입니다. 환영하심입니다. 영접하심입니다. 그러나 잊지 말 것은 여기서 이적을 베푸셔서 ‘구출작전’을 펴시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돌을 던지던 사람이 장님이 되어버린다든지, 하늘에서 벼락을 치든지 해서 스데반이 안죽었으면 참 멋있겠다 싶은데,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그 영광스러운 곳에서 주님께서는 스데반의 장렬한 죽음을 지켜보시고 계십니다. 그의 영혼을 환영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그대로 죽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안죽었다는 이야기가 아닌 것입니다. 기적이 나타났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을 지켜보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다시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높은 보좌에서 벌떡 몸을 일으켜 환영하시고 영접하시고 기뻐하십니다. 승리하는 것을 보시고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인간적으로 생각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 하는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기적은 없습니다. 스데반은 죽었습니다. 여기에 순교자의 참 모습이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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