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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한 착한 여인의 죽음 (행 09:3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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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의 맥락을 보면 전반부라고 부르는 12장까지는 베드로를 중심으로 한 초대교회의 이야기이고, 13장부터는 후반부분으로서 사도 바울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입니다.
오늘의 본문이 있는 9장은 사울이 바울이 되고 중생하는 이야기로 시작하여 9장 하반부에는 다시 베드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니까 9장 처음에 바울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가 다시 오늘의 본문에서 시작하여 12장 끝까지 베드로를 중심으로 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13장부터는 다시 주로 바울을 중심하여 이루어지는 일이 기록되었습니다. 이것이 사도행전에 흐르는 맥락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바울 이야기를 해나가다가 다시 베드로의 이야기로 바뀌는 부분의 첫머리입니다. 두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룻다에 사는 애니아와 욥바에 사는 여인 다비다에게 일어난 이적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미 본 바와 같이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초대교회의 두드러진 특징은 첫째가 성령충만한 말씀입니다. 사도들이 설교할 때마다 그 설교가 성령충만했습니다. 그래서 한 번 설교에 3천명이 회개하는 역사도 일어났습니다. 그들의 설교하는 모습이 항상 성령충만했다고 말씀합니다. 스데반이 설교할 때도 성령이 충만하다.-이 말은 두 가지 의미로 승화됩니다.
하나는 말씀하시는 분의 영적 권세입니다. 성경은 “기탄없이 말하더라”라고도 묘사했습니다. 별로 배운바가 없는 사람이지만 아주 담대하게, 능력있게, 큰 영적 권세를 가지고 하나님 말씀을 전했다 하는 뜻인 동시에 또하나는 듣는 사람의 마음이 전부 감동되었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그리스도의 영으로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설교하는 사람의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으며, 그 설교를 통하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다는 의미에서 충만인 것입니다. 이점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의 생명력이 그 설교를 통하여 약동하고 거기서 큰 역사가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또하나 그들의 설교에서 뺄 수 없는 이야기는 그 설교가 전부 증거적 의미가 있다는 점입니다. 자기들이 눈으로 직접 보았거든요. 베드로도 요한도 다 실제로 본 이야기입니다. 다른 이야기가 아니라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에서 말씀한것처럼 “눈으로 본바요 귀로 들은 바요 손으로 만진바”를 증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논리적으로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추상적으로 철학적인 논리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보았다. 내가 들었다, 내가 만져보았다.-이렇게 확실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럼으로 당연히 이미 이루어진 그리스도 사건이 그 말씀을 듣는 사람들 속에서 다시 actualize되는 것입니다. 재연되는 것입니다. 생명력화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설교에 띤 특징입니다. 그런 것을 한마디로 말해서 성령충만한 설교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의 특징은 이적과 표적이 나타났다는 사실입니다. 이적과 표적을 통하여 그 말씀을 전하는 베드로, 요한 등이 그리스도께서 선택하신 자요, 하나님께서 지명하신 자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적 자체에도 중요한 의미가 있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적을 통하여 바로 이 사람이 하나님의 택하신 사람이라,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점이 바로 이적의 가장 큰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이분들의 하는 일이 곧 하나님의 일이요, 이분들의 말씀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그들이 주께서 하시던 이적을 그대로 이어받아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적을 통하여 말씀의 권세를 확증하고, 하나님의 역사가 여기에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거듭해서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적의 결과에 대하여 성경은 언제나 이적을 본 사람들이 다 믿게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이적을 보고, 그 다음에 설교말씀을 믿게 되었어요. 이적의 목적이 여기에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 번째 특징은, 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교리화하거나 규례화한 것이 아니라 생활화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유무상통했습니다. 말씀을 듣고 즉각적으로 실천했어요. 내것이다 네것이다 하는 사람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초대교회는 사랑과 은혜가 넘치는 교회로 나타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신앙이 여기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초대교회의 가장 큰 특징입니다.
오늘의 본문에도 큰 이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베드로로 볼 때에는 가장 큰 이적입니다. 베드로가 행한 이적 중에서 가장 큰 이적입니다. 철학자 데카르트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기적의 본질은 하나님이며,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에 하나님께서 실제로 이적이라고 하는 방법을 통하여 계시하시고 계심이다. 가장 큰 이적이 세가지 있으니, 하나는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이요. 두 번째는 우리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자유의지를 가지고 마음대로 하는 것이요, 마음대로 하는 것 같으나 하나님의 능력안에 있다. 그 자체가 신비로운 하나의 이적이다. 세 번째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는 것이다. 말씀의 성육신, 이것이 세 번째 이적이다.’ 했습니다. 사실이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고로 깊이 생각해보면 이적 아닌 것이 없어요. 하나님의 능력안에서 모든 것이 이적입니다. 다만 우리가 미쳐 이 이적을 이적으로 모르고 있다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 베드로를 통하여 이적이 나타납니다. 좀전에 말씀드린바와 같이 이적은 말씀의 진실성과 말씀의 능력과, 그리고 하나님의 사역이 여기에 있다는 것을 확증하기 위하여 나타나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흔히들 ‘계시적 사건이다’라고 말씀하게 됩니다. 이적에 말씀이 담겨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적을 보면서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주님게서 어떻게 역사하시고 계신가를 순간순간 보아야 합니다. 특별히 히브리적인 표현으로 논리적으로, 추상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을 통하여 진리를 설명하는 데 있습니다. 그런고로 오늘도 이적이라는 사건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 있는데 그 말씀을 구구절절이 말씀으로 받아 소화해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을 읽어나가느라면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성도’ 라고하는 말입니다. “때에 베드로가 사방으로 두루 행하다가 룻다에 사는 성도들에게 내려갔더니(32절)”합니다. 또 41절에서는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들여”라고 합니다. 본문에서만 이렇게 두 번 ‘성도’라는 말이 나오지만 사실은 이미 9장13절에서도 ‘성도’라는 말을 보았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아무 설명 없이 이렇게 성도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아시는 것과 같이 4복음서에는 ‘성도’라는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 들어와서 이런 특수한 용어가 나타납니다. 기독교인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수믿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제자’라는 말과 함께 이 ‘성도’라는 말이 나타나는 것은 사도행전의 한 특징입니다. 복음서에서는 제자라고 하면 열두 제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에서는 일반 기독교인을 가리켜 제자라고 지칭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리스도인을 지칭하는 말중에서 가장 좋은 단어가 ‘성도’일 것입니다. 우리말로 풀이하면 ‘거룩한 무리’가 되겠습니다. 그런데 헬라어로는 ‘하기오스’로 ‘거룩한 사람들’입니다. ‘거룩하다’ ‘구별되었다’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다르다는 말입니다. 세속에서 구별된 사람이다. 하나님 편으로, 그리스도께로 구별된 사람을 성도라고 합니다. ‘거룩’의 개념을 이해하기에 가장 적절한 상징적 예표가 있습니다. 바로 제물입니다. 양은 같은 양입니다. 그러나 제물은 거룩합니다. 같은 양 중에서 가장 깨끗하고 정결한 것으로 구별해서 ‘이것은 제물이다’ ‘하나님께 드리어질 제물이다’하고 구별합니다. 구별 했을때에 그양은 거룩한 양입니다. 하나님께 바쳐지는 양은 거룩한 양입니다. 가장 정성되이, 깨끗한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바쳐지는 것이 제물입니다.
성도는 소속이 바뀐 사람입니다. 소속이 하나님께로 바뀌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거룩한 백성입니다. 하나님께로 구별된 사람들입니다. 본질적인 동시에 사회 윤리적 도덕적인 면을 포괄하는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도이기 때문에, 거룩한 무리이기 때문에 생각하는 것이나 말하는 것, 행동하는 것, 옷입는 것, 자고 먹고 하는 모든 일에 거룩함이 있어야 합니다. 달라야 합니다. 기독교인은 달라야 됩니다. 가치관도 다르고 철학도 달라야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하고는 확실하게 다른 바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성도입니다. 초대교회 사람들은 분명히 그렇게 달랐습니다.
성도, 거룩한 무리-참으로 귀한 이름입니다. 예수믿는 사람은 세속으로부터 구별된 거룩함이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시다’ 할 때, 이는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지칭입니다. 그런고로 거룩한 무리라고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거룩함을 힘입은 사람들이다’라고 하는 의미가됩니다. 이렇게 보면 ‘선택’의 교리까지 포함하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한 번 더 생각해야 됩니다. 우리가 성도라는 것을 잊지말고 모름지기 성도의 생각, 성도의 행위가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것을 항상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본문에 두 이적이 있습니다. 이 두 이적을 함께 생각해 보면 그것이 절대로 베드로의 능력이 아니라는 것, 이 점이 엄격히 설명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능력이 많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베드로를 통하여 나타났을 뿐입니다.
특별히 3장 12절 말씀을 봅시다. 성전 미문에 앉아 있던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운 다음에 베드로가 백성들을 보고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분명히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일으킬 때에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라고 말했습니다. 곧 예수의 이름이 한 일인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이 나타난 것일 뿐, 베드로는 심부름밖에 한 것이 없어요. 이적을 보았으면 그리스도를 쳐다 볼 것이요, 이적을 보았으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지 왜 우리를 쳐다보느냐 함입니다. 베드로가 본래 상당히 우쭐하기를 잘하는 사람인데 이적을 보니 정말 거듭났어요. 자기의 능력이나 체면은 다 뒤로돌립니다. 깨끗한 경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에도 보면 애니아라고 하는 사람이 중풍병으로 8년이나 누워 있는데, 이 사람을 찾아가 일으킬 때에 하는 말을 보니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신다. 그러니 일어나거라” 이것이 베드로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든지 이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제가 전에 시카고에 가서 선교대회에 참가했을 때입니다. 그 선교대회에는 상당한 예산이들므로 여기저기서 조금씩 모아야 되거든요. 그래 우리 교회에서도 몇천 불을 보조했었습니다. 제가 강해를 마치고 나오는데 모두들 박수를 치면서 수고했다고 격려하고 감사하다고 인사를 합니다. 그런데 여기까지는 그렇다하고, 이 대목에서 사회자가 나서더니 객쩍게도 시키지 않은 해프닝을 벌이는 것이었습니다 “고가 목사님께 박수 한 번 더 치십시다. 강해만 해주신 것이 아니라 목사님께서는 이 설교 대회에 몇천 불을 희사해주셨습니다. 그래 놓으니 다시한번 우 박수를 치는 것입니다. 저는 별수없이 다시 나가서 한마디 하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박수치실 것 없습니다. 그건 소망교회가 드린 것이지 곽 목사가 드린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제가 받을 박수가 아니지요“ 그랬더니 또다시 박수가 터져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이 말씀 드리는 것은 그 일이 사실은 소망교회가 한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언제든지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혹 여러분이 남을 구제합니까 내가 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내 것을 준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남을 구제할 때에 이렇게 말해보신 적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아주 깨끗한 마음, 이런 마음이 아니거든 굳이 하지 마십시오. 언제나 우리의 마음은 아주 깨끗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통하여 이루시는 일입니다. 그뿐입니다. 영광이나 칭찬이나 고맙다는 말이 나한테로 돌아오게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늘 말합니다. ‘주께서 당신의 병을 고쳐주셨다.“라고 아나운서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선포하고 있을 뿐, 자기 능력도 아니요 자기 경건도 아닙니다. 아름다운 관계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신다.”-얼마나 아름다운 관계입니까 다비다를 일으킬 때에도 보십시오. 행동으로 표현합니다.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라고 말씀합니다. 보통은 환자가 여기에 있으면 그 환자쪽을 향해서 손을 붙들고 하나님께 기도하는데 베드로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돌아서서 기도했어요. 시체는 뒤에다 두고 돌아서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다시 돌이켜서 시체를 향하여 일어나라 했어요. 왜일까요 시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중하기 때문입니다. 몸을 하나님께로 향하고 시체를 등진채 무릎을 꿇고 기도를 했어요. 그렇게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힘을 주시고 영력을 주시고 확신을 주신 것 같아요. 그렇게 성령의 역사로 힘을 얻은 다음 돌아서서 죽은 사람을 향하여 일어나라고 소리지릅니다. 아무 때에나 소리질러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응답을 주실때에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능력으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입니다. 나는 기도하고 다만 일어나라고 말하는 심부름을 한것일 뿐이라고 강조합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의 능력이요 철저하게 그리스도의 사역이었더라는 말입니다. 베드로는 사환이요 일꾼이요 심부름꾼이었을 뿐입니다. 이 관계를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애니아는 누운 지 8년된 중풍병환자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자세히 보니 재미있어요.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한 대 곧 일어나니”-8년이나 누워 있던 자리입니다. 그 자리를 정돈하라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 다시 눕지 마라, 다시 과거로 돌아가지 말아라, 돌아갈 생각 말아라, 깨끗하게 될것이니 자리를 걷고 과거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5장8절에 보면 거기에도 38년 동안 누워 있던 환자를 예수님께서 일으키십니다. 그때에도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하셨습니다. 이 사람은 항상 누워있던 사람입니다. 그 자리는 그 사람에게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 미련을 두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8년 혹은 38년 동안을 누워 있던 그 자리를 걷어버리라고 말씀합니다. 과거로부터 얼마나 깨끗하게 벗어나야 하느냐를 가르치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본문의 주인공이 되는 다비다에 대하여 생각하고자 합니다. 욥바에서 룻다까지는 걸어서 3시간 걸리는 거리랍니다. 걸어서 3시간 가까운 거리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중요한 특징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미 죽었습니다. 다비다가 죽었어요. 죽었는데 사람 둘을 세 시간 걸리는 데로 보내어 베드로를 청하는 것입니다. 장례식을 보류하고 말입니다. 이제 베드로가 달려옵니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야 할 것이 있어요. 그 사람들이 어떻게 되어서 베드로를 불렀을까 하는 점입니다. 이미 죽었는데 죽은 자를 살릴 것으로 알고 불렀는지, 아니면 너무나도 원통하고 아까우니까 장례식이라도 같이하면서 베드로가 위로되어 주기를 바라서 불렀는지, 알수가 없어요. 과연 베드로가 죽은 자를 살릴 것으로 생각했는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이 있어서 베드로를 급히 오라고 했는지 어떤지, 그 문제에 대해서는 우리가 성경에서 뜻을 알수가 없어요. 아무튼 슬픈 일을 당했기 때문에 불렀습니다.
다비다 사건에는 적어도 세가지 중요한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다비다는 기독교인입니다.
성경에 보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 와서 병고침을 받았습니다. 병고침을 받기 전에 그 사람들은 예수님을 모르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를 안믿던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무슨 이유로든지 병들었고, 그 병을 고침받으면서 믿음을 얻게 됩니다.
나사로는 예외입니다. 나사로는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입니다. 이미 믿는 사람이요, 주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병들어 죽었습니다. 여기에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도 그 점이 나타납니다. 애니아라고 하는 사람은 믿은 것 같지 않으나 다비다는 ‘여제자’라 불릴 정도로 예수믿는 사람입니다. 예수믿는 사람이 병들어 죽은 것입니다. 여느 환자의 경우와는 다른 것입니다. 예수믿는 여성도가 병들어 죽었어요.
두 번째로, 다비다는 착한 사람입니다.
선행과 구제가 심히 많았던 착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병들어 죽었어요. 안믿는 사람이라서 죽은 것이 아니요 악한 사람이라서 죽은 것이 아닙니다. 죽음은 적어도 죄에 대한 심판은 아닌 것입니다. 믿는 사람도 죽습니다. 구제를 많이 한 특별히 믿음이 좋은 이 사람도 죽었다는 말씀입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죽음을 바로 생각해야 합니다. 죽음을 마치 심판이나 저주인 양 이해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다비다가 선행과 구제를 심히 많이 한 사람이라고 해요. 이래서 더욱 우리의 관심을 끕니다.
누가복음 7장에 보면,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 하나가 병들었는데, 이 백부장의 믿음이 좋아요. 그래서 유대사람들, 특별히 유대인들 장로 몇 사람을 예수님께 보냅니다. 보내면서 내 사랑하는 종이 병들었는데 와서 고쳐주십사합니다. 백부장은 로마 사람입니다. 로마군인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그는 중대장쯤 됩니다. 즉 유다를 점령하고 있는 군인이면서 그는 경건했어요. 정치적으로는 로마군인이지만 종교적으로는 유대사람들의 종교를 소중히 여겼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능력도 믿었습니다. 장로들이 가서 예수님께 간청을 하는 말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나이다.” 왜냐하면 우리를 위해서 회당을 지어주는 등 선한 일을 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자기의 종을 고쳐달라는 것이니 이 사람을 위해서 이적을 행하는 것은 마땅합니다 함입니다. 장로들도 그 마음에 안타깝게 생각한 모양입니다. 오늘의 본문에도 같은 맥락이 있습니다.
다비다가 죽었는데, 다비다는 선한 일을 많이 한 사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 매우 슬퍼하고 있어요. 안타깝게 생각해요. 그토록 선한 사람이 이렇듯 일찍 죽다니, 어떡하면 좋단말인가, 그래서 괴로워했습니다. 그뿐아니라 39절 끝에 보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의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저희와 함게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내어보이거늘”합니다. 이 장면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어요. 이 많은 과부들을 위해서 도르가는 수고를 많이 했어요. 과부들을 위해서 수고했다는 것, 과부를 구제한다든가 과부에게 봉사한다는 것은 가장 큰 선행에 해당되었습니다. 과부는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의지할 곳이 없기 때문에 구약성경에 보면 여러 곳에서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라고 말씀합니다. 과부를 돕는다는 것이 당시에는 가장 큰 덕목의 하나였던 것입니다. 다비다가 손수 그 과부들을 옷해 입혔습니다. 그 과부들이 베드로 앞에 저들의 옷을 보이면서 도르가가 지어준 것이라면서 우는 것입니다. 여기서 베드로의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번 생각하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 세상 떠날 때에 이렇게 보일 것이 있을 것 같습니까 내가 구제한 사람이 찾아와서 “이분이 나를 위해서 이렇게 수고했습니다.” 하고 내가 공부시킨 사람들이 찾아와서 “이분이 나한테 장학금을 줘서 제가 공부했습니다” “이분이 이런 좋은 일을 하던 분입3?” 합니다. 아무도 몰랐지요. 그러나 장례식에 찾아와서 이런 말을 할수 있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죽었을 때에야 제대로 평가됩니다. “진작 죽었어야 될 놈이지. 잘죽었지” 하는 소리를 듣는 사람이라면 한심한 사람이지요. 다비다가 죽었는데, 과부들이 모여서 ‘이렇게 착한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죽었습니다.’하고 슬피 우는 것입니다. 그 선행과 그들의 아름다운 마음이 베드로의 마음을 뜨겁게 했습니다. 베드로는 감동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할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다 물리고 다락에 올라가 도르가를 위하여 기도하게 됩니다.
여러분, 적어도 우리의 선행이나 모든 행동으로 교역자들의 마음 속에 기도하는 마음을 일으켜야 합니다. 교역자가 교회에서 기도할때는 온 교인을 위해서 다 기도하지만 이상하게도 특별히 그 이름이 기억나는 사람이 있어요. 그의 아름다운 일련의 선행을 생각하면서 “하나님, 이분을 도와주세요. 이분을 꼭 도와주세요” 하는 간절한 기도가 우러날 때가 있습니다. 교역자의 마음을 뜨겁게 해서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이 생기도록 선행이 있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기억난다는 것이라곤 섭섭한 것밖에 없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아요. 그러나 다비다를 보십시오. 특별히 불쌍한 사람들, 과부들이 모여서 옷을 보이면서 이거 다비다가 손수 만들어준 것입니다, 하고 웁니다. 특별히 불쌍한 사람들을 많이 도운 사람 도르가에게 베드로가 감동이 되어서 기도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능력을 얻어서, 응답을 받아서 “다비다야 일어나라”하게 됩니다.
다비다는 일어나게 되고 모두가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35절에서는 애니아가 병에서 나았을 때에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가니라”라고 말씀합니다. 42절에서는 다시 “온 욥바사람이 알고 많이 주를 믿더라”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결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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