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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순종 (빌 0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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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본문은 이렇게 말해 놓고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어야 한다. ‘예수의 마음’하면 무척 어려운 것을 요구하는 것으로 인식한다. 그런데 2장 1절 이하의 상황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
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
여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
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빌 2:1-4)”
일반적으로 신자들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틀린 문제가 아닌 잘 하는 문제에 걸려 있다. 기독교 신앙의 어려운 점 가운데 하나는 옳고 그른 것, 즉 거룩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 거룩이 ‘사랑’이라는 아름다움까지 가 있지 않는데 있다. 사랑과 덕이라는 부분까지 가 있지 않으면 ‘아직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문제가 생겼을 때는 옳고 그름을 판별하는 방법으로 풀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 마음을 품고 이 문제를 해결하라’ 권고하고 있는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시고 순종하는 자세에서 모든 문제를 풀었다는 것을 기억해서 신자가 당한 문제를 풀 기준과 자세를 삼으라는 것이다.
‘자기를 비웠다’는 것은 대단한 것이다. 자기의 주장이나 판단을 버렸다는 뜻이다. 자기의 주장과 판단을 스스로 종이 되어 하나님이 하시는대로 맡겼다는 말씀이다. 우리는 보통 우리의 판단 때문에 잘 싸운다. 판단이 옳았을 때는 더 잘 싸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행하셨다. 그러나 성경의 묘사는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나오지 옳다는 묘사는 오히려 적다. 그 일은 자기를 낮추고 죽기까지 복종하는 데까지였다. 그의 죽음은 십자가의 죽음이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
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
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9-11)”
예수님이 하신 일을 높이고 있는 장면이다. 이 장면 때문에 우리도 죽을 각오를 하고 순교할 각오만 한다면 우리도 이러한 하나님께서 주께 허락하신 것과 방불한 축복을 허락하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죽음을 각오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죽어도 좋다’는 것이지, 죽음을 각오했으니 영광된 결과를 달라는 요구조건으로 제시되어서는 안된다. ‘죽는 것’이 아니고 ‘죽음을 각오했다’는 것으로 결과를 요청하는 것은 우리더러 ‘죽음을 각오하라’는 것이 아니라 ‘죽으라’는 것이다. 우리는 ‘죽음을 각오했으니 이루어 주옵소서’하기 쉽다. 죽음을 앞세워 놓으면 그 결과가 꼭 이뤄진다는 방법론으로 죽음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의도하신 것은 그를 죽여서 졸병을 만드시겠다는 것이다. ‘죽으라’는 말은 졸병이 되라는 말이요, 명령에 순종만 하고, 숨겨져 있고 감춰진 자세를 가지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요구하는 것이 꼭 이루어지기 위해서 죽음이라는 것을 앞세우고는 죽지 않는다.
실로 죽는다는 것은 굉장히 어렵고 고달픈 것임을 알아야 한다. 자기를 비우고 종이 되고 죽기까지 복종하는 것이다. 곧 죽으라면 죽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
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
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
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빌 2:1-4)”
성경이 요구하고 있는 것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지니라’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증명하고 싶어서 일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래서 제시된 것이다. 즉 아무리 옳다 할지라도 자기를 증명하는 것으로 쓰여지는 날에는 이것이 얼마나 사람을 해치는 것이 되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래서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가 되는 것이다.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은 ‘자기의 영광이나 자기의 증명은 없다’는 것이다. 그는 고통스러운 십자가를 순종하셨고 정말 죽으셨다. 성경에서 우리가 본 받고 싶어하는 성향의 인물, 또는 부럽게 생각하는 인물은 요셉과 다니엘이다. 왜 그럴까 끝이 멋있기 때문이다. 축복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누구 흉내를 내라고 하는가 예수를 흉내내라! 본받아라 말씀하신다. 우리는 보통 ‘주를 좇는다’는 말을 착각하고 있다. ‘주를 좇는다’는 것의 맨 뒷 부분이 요셉의 성공과 다니엘의 성공과 연결되지 십자가의 죽음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불행한 신앙의 작태이다. 사실은 이 길을 걸어야 하는 것이다.
주를 좇는 길은 십자가를 것이다. 그 길에 더러 영광의 순간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 순간의 영광만 취하겠다는 것은 어리석은 발상이다. 그 영광을 넘어 십자가의 죽음까지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신자의 올바른 자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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