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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생명의 법 (출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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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 출애굽기 19장 5-6절과 베드로전서 2장 9절은 똑같은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차이가 있다. 출애굽기 19장에서는 내용의 약속을 미래형으로 하고 있다. 미래형이기 때문에 어떤 조건이 붙는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
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출 19:5-6)”
조건이 있고 그 조건이 충족되어야만 이 결과들이 생길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전서 2장은 완료형이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네가 내 말을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이라는 조건이 ‘무엇으로 완성되었기에 이 미래형 약속들이 완료형이 되었는가’ 조건의 자리에 바로 ‘십자가와 부활사건’이 서기 때문이다. 십자가와 부활사건은 기독교 신앙에 있어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이요 전부이다. 그러나 뜻밖에도 이 부활이라는 문제는 신자들에게 있어서는 아직도 미래형으로 인식되어 그 신앙생활을 하는 자들이 많음을 보게 된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세계라(마 1:1)’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의 나라를 완성하시며 그러기 위하여 우리에게 거룩을 요구하시는 것과 그 거룩이 우리의 힘으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완성되는가 하는 것들이 떠오른다.
그래서 신구약이 다같이 거룩을 요구하고 있으되, 구약은 그 거룩이 어떤 의미에서는 ‘조건’으로 요구되고 있지만 신약에 와서는 ‘이미 완성되어진 것, 얻어진 것’으로 요구되고 있다. 때문에 같은 거룩이 구약으로 요약될 때는 율법적 성격과 심판의 성격을 띄고, 신약에서는 사랑으로, 믿음으로, 소망으로 가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다. 이 사건이 가장 극적으로 구약에서 묘사된 것이 출애굽사건이다. 출애굽 사건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유월절, 곧 이스라엘 최고 절기의 그 근거를 이루는 사건이다. 그것이 또한 홍해를 건너는 사건으로 그 의미와 내용을 강조한다.
출애굽 사건을 시작하면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신 사건을 추적해 보자. 출애굽기 3장에서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신다. 그의 백성을 애굽에서 꺼내겠다는 약속과 명령을 주신다. 그 내용은 고난에서 꺼내는 해방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 이상의 목표가 12절에 나온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
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
거니라(출 3:12)”
출애굽을 고생하는 땅, 종된 땅, 신약식으로 말하면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꺼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꺼냄을 받은 뒤 할 일이 있다. 곧 하나님을 섬기게 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그래서 출애굽 사건은 이 사건이 끝난 다음에 애굽으로부터 벗어나 홍해를 건너 시내산으로 간다. 시내산에 도착한 그 정경들이 오늘 우리가 본 본문같이 출애굽기 19장 5-6절 말씀에서 가장 먼저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내 말을 듣고 내 언약을 지키라”는 것으로 먼저 요구사항이 나오고 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
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출 19:5-6)”
출애굽기 24장 3절부터 보자.
“모세가 와서 여호와의 모든 말씀과 그 모든 율례를 백성에게 고하매 그들이
한 소리로 응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명하신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
다 모세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고 이른 아침에 일어나 산 아래 단을
쌓고 이스라엘 십이 지파대로 열두 기둥을 세우고 이스라엘 자손의 청년들을
보내어 번제와 소로 화목제를 여호와께 드리게 하고 모세가 피를 취하여 반은
양푼에 담고 반은 단에 뿌리고 언약서를 가져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리매 그들
이 가로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출 24:3-8)”
시내산에 와서 19장 5-6절의 약속을 이룬다. 그러면 19장과 24장 사이에는 무엇이 있는가 우리가 잘 아는대로 십계명이 20장에 나온다. 그 뒤로 지켜야할 율례들이 기록되어 있다. 그것을 더욱 상세히 기록한 것이 레위기다. 레위기는 읽기에 지루하고 따분한 책이다. 왜 그런가 거룩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목욕과 이발’을 가장 싫어한다. 목욕 뒤에는 어디를 잘 안 닦았는지 어머니가 꼭 지적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제일 좋은 때는 언제인가 ‘목욕과 이발’을 한 다음이다. 시원하고 아름답게 단장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성경에서도 레위기는 읽기 싫다. 읽으면 우리의 더러움이 지적되고 우리가 어디를 더 께끗하게 해야 되는가를 요구받고 있기 때문이다. 속을 내가 닦았는지 안 닦았는지 옷을 입고 다니면 누가 알겠는가 그런 것들이 왜 요구되고 있는가 ‘거룩한 나라’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을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이다.
“모세가 와서 여호와의 모든 말씀과 그 모든 율례를 백성에게 고하매 그들이
한 소리로 응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명하신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
다(출 24:3)”
“언약서를 가져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리매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
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출 24:7)”
구약성경의 말라기는 ‘성전문을 닫을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하는 것으로 끝난다. 죄 때문이다. 성경은 우리가 죄의 노예인 것을 지적하고 있다. 죄가 우리의 주인이다. 우리가 죄를 선택한 것이다. 의나 선을 선택하든가 악을 선택하는 기로에 선 것이 아니라 우리는 죄밖에 선택하지 못한다. 애굽 밑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간섭 없이는 탈출할 수 없듯이 우리 스스로는 죄의 사슬로부터, 종된 신분으로부터 탈출하지 못한다. 그래서 출애굽 사건은 뜻밖에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해 내는 싸움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배하려고 하는 것을 막는 악한 세력인 죄를 어떻게 파괴하고, 진멸하고 승리하여 우리를 그곳으로부터 꺼냈는가를 설명하는 것이다. 이것이 출애굽이다.
출애굽기 3장 12절에 ‘너희가 이 산에서 나를 경배하리라’ 하셨다. 이것이 출애굽의 궁극적인 목표이다. 애굽이 반대하고 처음에는 안 놓아 주다가 나중에는 놓아줄 것이다. 그때 기록이 18절 이하이다.
“그들이 네 말을 들으리니 너는 그들의 장로들과 함께 애굽 왕에게 이르기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임하셨은즉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려 하오니 사흘길쯤 광야로 가기를 허락하소서 하라 내
가 아노니 강한 손으로 치기 전에는 애굽왕이 너희의 가기를 허락지 아니하다
가 내가 내 손을 들어 애굽 중에 여러가지 이적으로 그 나라를 친 후에야 그
가 너희를 보내리라 내가 애굽 사람으로 이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할지라
너희가 갈 때에 빈 손으로 가지 아니하리니 여인마다 그 이웃 사람과 및 자기
집에 우거하는 자에게 은 패물과 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여 너희 자녀를 꾸미
라 너희가 애굽 사람의 물품을 취하리라(출 3:18-22)”
내용을 잘 살펴보면 두 가지 내용이 겹쳐서 나온다. 하나는 출애굽을 ‘노예되었던 것에서부터 꺼내는 것’으로 묘사하지 않고 ‘하나님을 경배하려고 하니까 허락하라’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바로가 보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출애굽 사건은 한 민족이 한 민족으로부터 자유를 쟁취하는 것으로 성경이 성격을 규명하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반대하는 세력으로 대치시키고 있다. 그래서 이 싸움은 영적인 싸움으로 진술되고 있다.
또 하나는 여호와께서 애굽을 세게 치자 바로가 결국은 놓아 보내게 된다는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과의 싸움에서 졌고 굴복했다는 묘사 때문에 ‘탈취물을 취한다’라고 되어 있다. 빈손으로 나오지 않고 ‘금 은 패물을 얻어 나온다’고 마지막을 묘사하고 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금 은 패물을 얻어 가지고 나온다는 것은 이 상황에서는 전쟁으로부터 승리한 사람의 전리품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싸움, 곧 영적 싸움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잡고 있는 악한 세력을 깨뜨리고 우리를 꺼낸 사건을 진술하고 있다.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의 신앙에 대해 ‘내가 주를 잘 섬기지 못하고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한데서 떨치고 일어나서 승리해야지!’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좌절한 자리에서 떨쳐 일어나고 넘어진 자리에서 일어서는 것을 신앙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구약의 성도들과 같다. 그러나 신약의 성도들은 그렇게 살지 않는다.
출애굽기 15장을 가면 유월절을 지나 이제 홍해를 건너는 사건을 보게 된다. 그곳에서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홍해를 건너고 하나님 앞에 찬송한 시가 나온다. 이 찬송이 왜 가능했을까
“바로가 가까와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
뒤에 미친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이같이
우리에게 하느뇨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고한 말이 이것이 아니뇨 이르기
를 우리를 버려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뇨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여
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 14:10-14)”
이 전쟁은 하나님과 죄악의 세력 사이의 전쟁이다. 죄악 세력이 하나님을 대적하지 못한다. 하나님이 죄악을 깨뜨리고 우리를 그곳에서부터 꺼내시는 전쟁이다. 그것이 부활이다. 그 전쟁을 예수님께서 하러 오시는 것이다. 우리가 하지 않는다. 부활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스스로가 이룰 수 없는 승리를 이루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꺼내 놓으신 것으로 우리에게 한 근거와 조건으로 친히 이루어 주셔서 이제 서게 한 자리에 있는 자들이 가질 수 있는 것으로 정의되어 있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
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
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히
2:14-15)”
예수님과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이 갖는 가장 중요한 내용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죄에 대하여 죽고 그의 부활하심과 합하여 하나님과 의에 대하여 사는 자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존재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신앙생활이란 자기가 죄와 싸워 이겨서 넘어오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신자들은 오늘날 이 싸움에서 진 자기의 모습을 보고 놀라는 것이다.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내리신 재앙으로 애굽 사람으로부터 보냄을 받아 탈출하다가 다시 쫓기듯 도망해 홍해 앞에 선 모습과 흡사하다는 말이다. 물리치고 나온 것 같은데 그들이 더 거세고 흉악하게 좇아오고 아무 곳에서도 나를 구할 자가 없고 앞에는 홍해요, 뒤에는 좇아오는 철병거들 사이에 낀 모습들을 늘 발견하는 것이다. 이럴 바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말한 것 같이 싸우지 말고 그곳에 가만히 있을 것을, 그러면 중간이나 갈 것인데, 괜히 나왔다가 가도 오도 못하는 것에 걸린 모습들을 보고 늘 당황하는 것이 신자들의 현실에서의 모습이다. 그러나 여기에 한 비밀이 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
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
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
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
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
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
니라(고전 15:51-58)”
여기 표현대로 보면 신앙의 최종적인 승리의 표현이 ‘수동태’로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모든 표현들이 ‘수동태’로 되어 있지 ‘능동태’로 되어 있지 않다. 생각해 보라. 우리는 이제 몇십년 더 살다가 죽을 것이다. 죽으면 우리 몸들은 육신은 땅에 묻혀서 썩을 것이다. 마지막 나팔 소리에 이 몸도 부활한다는 것이 성경의 약속이다.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 57절의 표현이 있기에 부활이란 성경에서 가장 중요하게 취급되는 것이다. 부활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사는 자연계에서 최고의 법칙은 사망이다. 사망을 이기는 것은 없다. 한번 죽은 것이 다시 살아나는 법은 없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망을 이기는 법칙 속에 들어간 자들이다. 우리를 사망이 가두어 놓지 못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기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이김을 주실 것이다.
우리의 믿음은 무엇인가 이기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김 속에 있는 힘이라면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일까 우리가 시험을 치러서 합격하면 학교에 들어 간다. 시험을 보아서 떨어졌으면 그 학교에 못 들어 간다. 떨어진 자는 그 다음에 공부 안해도 상관없다. 그러나 학교에 시험을 봐서 합격했으면 그 학교에 들어간 학생은 졸업할 때까지 시험일 치룬다. 시험 뒤에는 성적표가 반드시 뒤따른다. 신앙생활은 이기기 위한 싸움이라기 보다는 이긴 자로서의 싸움이다. 합격과 불합격을 결정하는 싸움이 아니고 신자로서의 승리와 누림을 지속하느냐 놓치느냐의 싸움이다. 우리는 낙제하는 일은 있어도 퇴학당하는 일은 없을 자리로 들어 왔다는 것이 부활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법이다.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우리는 신앙 생활을 못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것이 정상이다. 점점 영이 맑아지기 때문이다. 옛날 같으면 그 죄를 짓는 것이 눈에 안보였는데 이제는 보인다는 말이다. 옛날에는 살인적인 욕을 했어도 떳떳했었다. 더 지독한 욕이 없는가 생각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말을 안한다. 마음이 여려졌기 때문이다. 사실은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훨씬 더 죄책감이 생기는 것이다. ‘난 희망이 없어!’ 자꾸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자꾸 겸손해지고 자꾸 운다. 겸손하다는 말은 제 삼자가 볼 때 이야기지 본인이 겸손해졌다고 느끼는 사람은 없다. 실제로 본인은 ‘겸손한 것이 아니라 좌절하고 있는 것’이다. 옆 사람이 보기에는 자기와 비교해서 너무나 깨끗하고 겸손하다고 생각하는데 신자는 더러움과 자신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거룩과 자신을 비교해 보기에 절망하고 한탄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이 절망으로 끝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우리가 절망하는 것이나 우리가 장담하는 것으로 우리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의 백성으로 삼았고 거룩한 나라로 삼았기 때문에 훈련시키는 과정으로 그것이 존재하는 것이지 그것에 합격장을 받으면 내 백성을 삼겠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포기되지 않는다. 취소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고전 15:58)”
성경은 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단어를 조건으로 제시한다. 우리는 ‘사망이 이김을 삼킨 바 되는’ 생명이 사망을 이겨내는 법칙 속에 초대받아 들어온 자라는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 사망권세를 깨뜨리고 우리를 거기로부터 꺼내신 것이다. 그래서 사실은 성경 전체를 통하여 가장 중요한 선언이 우리에게 로마서 8장 1절로 결론지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
하였음이라(롬 8:1-2)”
모든 것은 한번 태어나면 죽는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의 부활이 우리에게 준 법칙, 곧 생명의 법칙으로 사망을 이기는 것이다. 우리는 못난 짓을 할 수 있다. 실패도 할 수 있고 어리석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제는 사망의 자리에 가지 않는다. 정죄의 자리에 가지 않는다. 하나님이 우리를 꾸짖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다. 이것이 부활이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디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믿는 것”으로 진술된다. 왜 그런가 생명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오늘 꽃이 피어 있지 않았다면 내일 필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내일 피지 않았다면 그 다음날 필 것이다. 우리가 볼 때 나무에 꽃이 피어있지 않았으면 ‘죽었나’하는 의심이 찾아온다. 죽은 나무라면 꽃은 안 필 것이다. 우리에게 죽음이란 없다. 우리는 오늘 안 피었어도 내일 필 것이고 내일 안 피면 모래 필 것이고 언젠가는 필 것이다. 우리는 생명의 법 칙 안에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우리를 거기서부터 구원했기 때문이다.
성경이 약속한 모든 약속들이 모두 우리의 것이다. 놓치지 말아야 한다. 아직도 우리를 아직도 시험 보게 하지 말라. 우리 자신을 스스로 만든 기초 위에 세워 놓고 만족해 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루신 것으로 말미암는 것, 바로 그것이 신앙이다. 믿음 위에 굳게 서서 담대하게 신앙생활에서 승리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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