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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봉사론 (삼상 3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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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은 골리앗을 죽인 뒤 백성들에게 인기가 높아졌다. 이것을 사울이 시기하여 죽이려 함으로 도망 다니다가 마지막에는 적국인 블레셋까지 가게 된다. 블레셋에 있는 방백 중에 아기스라는 사람이 다윗을 비호해 주고 블레셋으로 귀화하도록 조치를 취해 주었다. 아기스는 다윗이 사울의 미움을 받고 들어온 사람이기에 귀화한 사람이라 믿고 그를 비호해 주지만 다른 불레셋 사람들은 다윗을 믿지 않았다. 그런던 중에 블레셋과 이스라엘 사이에 싸움이 일어났다. 그때 아기스는 이때야 말로 다윗이 블레셋 사람이 된 증거를 보여줄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이때 다윗은 싸울 수도 싸우지 않을 수도 없는 상황에서 따라 나섰다. 아기스와 함께 전쟁에 나가자 다른 모든 방백들은 다윗에 대하여 의심을 품는다. 이때 아기스가 보증은 선다. 그러나 그것은 받아 들여지지 않고 다윗은 되돌아 간다. 다윗의 입장에서는 큰 위기를 모면한 셈이다. 다윗이 그동안 자기가 거하던 시글락 성에 되돌아 와보니 함께 따랐던 부하들과 가족들을 아말렉 사람들이 다 잡아가 버린 뒤였다. 가축도 다 빼앗기고 재산이 다 약탈되었다. 그래서 본문 30장 4절에는 다윗과 그와 함께한 백성들이 ‘울 기력이 없도록 소리를 높여 울었다’고 진술하였다. 이것은 다윗을 훈련하시는 하나님의 과정이다.
다윗은 그의 생애 속에서 골리앗과 싸워서 이겼을 때 한번 반짝하고는 그 다음부터는 가혹한 훈련을 받게 된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왕도(王道)나 전쟁하는 법을 가르친 적이 없다. 다윗은 언제나 도망 다니고, 또 도망 다니고, 울고 또 울고, 한숨만 쉬는 세월을 보낸다. 나중에는 블레셋에도 못 있게 되어 도망 나올 때 미친 사람 노릇을 해 가지고 오물을 뒤집어 쓰고 수염에 침을 흘리며 빠져 나온다. 시편 34편은 미친 체 하고 있다가 쫓겨난 후에 지은 시다. 그런 와중에서도 다윗은 여호와를 찬송하고 있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이런 차원에서 볼 때, 하나님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간을 쓰려고 할 때 무엇을 요구하시는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
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
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
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고후 1:8-9)”
고린도후서 11장에서 바울은 ‘40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번 맞고 세번 태장으로 맞고 여러번 파선하고 강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의 위험을 만나고 굶고 춥고 헐벗었다’라고 되어 있다.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
러번 죽을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번 맞았으며
세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
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
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
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 11:23-27)”
바울은 하나님 앞에 최고로 충성된 일군이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의 복음을 전하러 다닌 일들과 과정을 보면 한번도 우리가 생각하는 형통의 자리에 있어본 적이 없다. 언제나 고생만 했다. 그 고통이 얼마나 심했는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졌다’고 했다. 바울은 고난을 당할 때마다 이제는 ‘죽었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그는 죽지 않았다. 말하자면 그 일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데 사도 바울이 이젠 죽었구나’라고 생각해야 되는 어떤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필요’를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은 우리의 개념과는 얼마나 다른가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한다’ 그럴 때는 당연히 시련이 먼저 있어야 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열심도 아니고, 충성도 아니고 죽어야 한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12장에서 바울은 ‘이 가시를 내게서 뽑아 주십시오’하였으나 하나님은 달리 대답하셨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
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
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고후 12:7-9)”
사도 바울 쪽에서는 전혀 자기가 평안 하려고 이 문제를 요구한 것이 아니다. 갈라디아서에 의하면 이것을 ‘내 몸에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있다’라고 설명해 주고 있다. 그 원어가 간질이라는 단어의 어근과 같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아마 간질병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학자들도 있다. 사도 바울이 스스로를 설명한 것을 보면 외모도 볼품도 없고, 언변도 어눌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다가 간질병까지 가지고 있었다면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너무 치명적이었을 것이다. 사도 바울 쪽에서 생각하자면 자기의 편안함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가 감옥에 갇혔든지 어디에 있든지 걱정을 안하는 사람이었다. 사도행전 20장을 보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당신은 잡힌다’ 했을 때 ‘내가 주께 받은 바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라면 생명을 조금도 귀하게 여기지 아니한다’라고 대답했던 사람이다. 그런데 이 부분들은 다른 요구이다. 주의 복음을 위해 간절하게 구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그것을 거부하셨다. 열심에 관한 부분에서 제일 재미있는 것은 마태복음 16장 16절이 아닐까 싶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이시니이다(마 16:16)”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모함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3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신다. 그러자 베드로가 막았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무슨 말인가 ‘주님께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제가 결코 방관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막아 드리겠습니다. 내 죽음으로라도 그것만은 막겠습니다’하는 뜻이다. 이때에 주님은 어떻게 말씀하셨는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도 이제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우리는 당연히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야 한다. 우리 주변에는 주님을 위해 목숨까지도 바치겠노라 말하는 이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이 부분에 있어 많은 오해가 있다. 극단적으로 말해 하나님이 무엇이 부족해서 못하는 것을 우리가 보충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 하나님이 늘 필요로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온전히 맡겨진 충성심이요 그것 이외는 쓰는 것이 없다. 하나님이 우리를 낮추었으면 낮춰 쓰시는 것에 만족해야 하고, 들어 쓰시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하나님은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의 일을 승리로 이끄시고야 만다. 그런데 우리는 꼭 우리가 승리하는 것이 주님이 승리하는 것이라고 믿고, 우리가 성공하는 것이 주님이 성공하는 것이라고 믿는 나쁜 습관에 빠져 있다.
디모데전서에서 이 점을 더 확실하게 살펴보자. 디모데전서 1장 12절 이하는 사도 바울의 직분론이다. 디모데에게 직분에 관한 충고를 하면서 ‘나는 나에 대한 맡은 바 직분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가’를 말하고 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
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
성하였도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
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만세
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
광이 세세토록 있을지이다 아멘(딤전 1:12-17)”
하나님이 나를 충성 되이 여겨 나에게 직분을 맡기신 것은 ‘내게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다’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충성 되이 여겼다’는 것도 내가 충성심이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그렇게 보아 주셨다’라는 말이다. ‘내가 훼방자, 핍박자, 포행자’였다. 그런데 그가 나를 불렀다. 왜 나를 불렀는가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했기 때문에 나같은 것도 용납해 주셨다’는 것이지 나에게 쓸만한 구석이 있었다는 말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를 그렇게 품어 주시고 나를 직분자로 불러주신 것은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오셔서 나를 구원하시고 직임을 주셨고 모든 사람을 그렇게 구원하시는 분이다’라고 했다. 왜 죄인 중에 괴수를 들어 쓰셨을까 내가 먼저 구원을 얻은 것은 후에 주를 믿어 영생을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시려고 ‘야! 저런 것도 구원을 얻은 걸 보니 나도 희망이 있겠구나’라는 것 때문에 나를 썼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개념이 직분론의 대표적인 부분이 되는 것이다. 나보다 훨씬 못난 사람이 하나님 앞에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면서 희망을 갖도록 하기 위하여 그를 사용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생각은 어떤가 ‘내가 실력이 있으니까 하나님이 나를 써서 하나님이 이 일을 행하셨을 것이다. 저 사람이 했으면 못했을 것을 내가 했기 때문에 되었다’고 생각한다. 바울의 이야기는 무엇인가 ‘나를 씀으로써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얼마나 은혜로우신가, 긍휼이 많으신가 저 바울을 보니 나도 물론 희망이 있겠다. 그래서 나를 쓰는 것으로 하나님이 무엇을 하시는가 하나님의 만세의 왕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게 하셨다’는 말이다.
곧 직분자라는 것은 결국 쓰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얼마나 영광스러우신가, 얼마나 은혜로우신가가 드러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지 우리가 무슨 일을 한다는 것은 사실은 ‘다음 다음의 목표다’라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모든 직분자들, 혹은 하나님의 교회에서 봉사를 맡은 모든 사람들이 신경 쓰고 해야 되는 일은 ‘나 아니면 못한다’, ‘하나님이 나에게 이 일을 맡겼다. 그래서 내가 이 능력이 있어야 된다’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 같은 것을 써주신다. 나를 씀으로 뭐가 증명되어야 하느냐’가 바로 특히 마음써야 될 부분인 것이다. ‘나 아니면 이 일을 못한다’가 아니라 ‘나’ 제일 못난 나를 쓰는 것을 보아서 하나님은 은혜와 영광이 세세토록 나타나도록 하는 일이 우리의 쓰이는 바의 사실상 궁극적인 목표가 되는 것이다‘라는 것을 알아야 되고 이것이 신자의 바른 직분관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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