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신자의 존재론 (빌 01:12-18)

첨부 1


신앙은 어떠해야 되는가 궁극적으로 신앙생활이란 무엇인가 신자가 어떤 신앙자세를 가져야 되는가 이것은 한마디로 내가 주님을 위하여 존재하는가, 주님이 나를 위하여 존재하느냐의 싸움이다. 그러나 신자가 어떤 신앙적인 실패를 하는가 하면 기독교적인 모든 것을 동원해서 ‘나를 증명해 달라’고 하나님께 조르는 점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나를 남보다 더 사랑하셔서 다른 사람과는 달리 특별 대우를 하신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이 내 말을 들으신다는 것을 들으신다는 것과 ‘너는 가짜고 나는 진짜’라는 것을 증명해 달라고 한다.
그런데 사도 바울식 신앙을 보면 나의 잘난 것이 증명되어 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를 위해서 쓰여지는 것이 사실은 신앙에 있어 가장 가치있고 정당한 길이라고 말하고 있다. 바울의 사도권은 언제나 논쟁의 불씨가 되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이 잡혀 로마로 이송되어 간 후 두 갈래로 파가 생겼다. 그가 감옥에 갇히자 ‘바울이 주님이 세우신 사도였으면 왜 마음껏 복음을 전하지 못하도록 하나님이 감옥에 가두셨겠느냐’는 무리가 있었다. 반대로 ‘그가 주를 위해 고난받는 참된 사도다’하는 무리가 있었다. 이와 같은 싸움의 와중에서 바울은 ‘내가 아무러면 어떠냐 뭘로 하든지 주님만 전파되면 되지 않느냐’는 식으로 말한다. 우리는 이와같은 문제로 자주 혼란에 빠진다. 기도하면 잘되고 축복하신다는 무조건적인 논리가 때로는 맞지 않을 경우가 있는 것이다. 그것이 하박국 선지자와 욥의 경우일 것이다.
불의한 자가 이 땅에서 잘 살다가 편안히 죽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들의 생애와 하나님의 사람의 생에에 있어서 가장 큰 차이점은 불의한 자들의 생애는 모든 것이 자신들을 치장하기 위하여 있는 것이다. 반면에 신자는 그가 당하는 ‘어떤 것도 주를 위하여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난도 주를 위한 고난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너희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내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고로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
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
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
익함이니라(빌 1:19-21)”
바울은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는 것’ 외에는 관심이 없다. 이것이 아니면 신자가 아니다. 사도 바울의 소원은 빨리 죽어 하늘 나라에 가서 주님을 만나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이 땅에 살아있는 것은 주님께서 아직도 갖고 계신 구원의 계획에 동참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
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
여 더 유익하리라(빌 1:22-24)”
‘너희를 위하여 유익하고 주께서 그 일에 안타까움과 사랑과 긍휼과 은혜를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내가 살아있는 것이지 내가 살아서 꼭 주를 위해서 뭘 해야될 일이 있다는 뜻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내가 없으면 안된다’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당신의 일에 나를 쓰고 계시고, 내가 당하는 모든 일을 통하여 영광받으시기 위하여 나를 살려 두심으로 내가 살아있다’는 것이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롬 14:7-9)”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어떤 사
람은 모든 것을 먹을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느니라 먹는 자
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
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 혹은 이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찌니라 날을 중히 여
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
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 하며 하나님께 감사
하느니라(롬 14:1-6)”
이것은 바로 이런 싸움이다. 사도 바울 당시의 사회에서 육류는 언제나 국가가 섬기는 우상에게 제물로 바쳐지고 나서야 시중에 판매가 되었다. 그래서 고기를 먹는 것은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이요,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은 우상을 섬긴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건강을 위하여는 고기를 먹어야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둘로 나뉘었다. 우상의 제물이기 때문에 먹지 않겠다는 사람과 고기를 먹고 건강을 얻어 주의 일을 하겠다는 사람들이 나왔다. 이 경우 둘 다 잘하는 것이다. 아무도 남을 비판하지 말라는 것이다. 먹고 먹지 않는 이유가 주님을 위해서라면 다같이 정당하다는 것이다.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
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
(롬 14:4)”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신앙의 정도와 깊이에 따라 적절하게 인도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먹고 먹지 않는 것으로 싸워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죽이시기로 했다면 죽이실 이유가 있을 것이요, 그것으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높이면 높이시는 방법으로, 낮추시면 낮추시는 방법으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신자끼리 싸울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싸움은 왜 생기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의 신앙이 사람 앞에서 평가 받고 싶어하는 욕심 때문이다. 율법을 앞세우고 기독교를 동원해서 나를 증명하고 싶은 것 때문이다. 우리는 남보다 내가 잘 났다는 것을 증명하려 한다. 그러나 성경은 신자에게 그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영광스러우시다는 것을 증명하라 하신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이 아무리 연약하고 아무리 모자라도 용납하셨다면 우리도 용납하여야 한다.
어떤 사람의 경우에 우리가 보기에는 그만하면 괜찮다 싶은데 하나님께서는 치시는 경우가 있다. 그것을 우리는 그 사람을 정죄하고 비난하는 시각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에게 거룩과 성결을 완벽하게 요구하시는가로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가 다 주의 것이요, 주께서 우리의 발걸음을 정하시며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우리의 어떤 모습 속에서 나타내기를 원하신다면 우리는 그것에 순종하고 그 일을 할일이다. 사람끼리 비교하며 서로 싸워서는 안된다. 하나님이 그의 영광을 위해 나를 부르셨으며 그의 은혜와 자비와 긍휼로 나를 불러 그의 필요를 위하여 나를 쓰고 있다면 그것에 감사하고 순종해야 한다. ‘살든지 죽든지 주가 네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여김을 받으소서. 내가 주의 것이고 나의 삶의 모든 국면과 모든 일과 형태에서 주의 손길과 명령하심에 충성하게 하옵소서. 예수 외에 다른 것은 돌아볼 틈이 없게 하옵소서’라고 고백하며 나날의 삶을 살아가는 자가 신자임을 알아야 한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