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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을 바로 알아감(6) (롬 10:2-3, 딤전 01:13, 마 25:2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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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빈약하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명의만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우상숭배하게 되고, 인생관이 그릇되어 인생을 낭비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점차 신지식(神知識)이 간소화되면 결국 배교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오늘도 신지식이 빈곤(貧困)이 가져오는 결과 두 가지를 더 생각하겠습니다.
첫째, 신지식이 빈곤하면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않고 자기의를 이루려고 합니다.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경영하시는 경륜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게 되면 하나님을 위하여 열심히 무엇을 한다고 하면서도 오히려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않고 자기 의를 이루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했다고 말합니다.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롬10:2-3)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서 먼저 힘써야 했던 일은 먼저 자신들이 하나님께서 보내어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요, 메시야로 알아보고 영접해서 구원함을 받고, 나아가서 다른 이방인들에게도 예수님이 구세주이시니 그분을 믿어야 만 구원을 얻는다고 소개를 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보내셔서 오신 메시야로 알지 못하고 오히려 십자가에 잡아 죽이라고 외쳤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죽이라고 했던 이유는 한마디로 예수님을 신성모독자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셔서 장터와 강도의 소굴이 되어 있는 모습을 보시고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만에 다시 세우겠다”고 하신 말씀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을 파괴하는 자로서 신성모독자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서 안식일을 범하고, 자기 제자들이 밀밭 사이로 지나다가 밀을 비벼서 먹음으로 안식일을 범하였는데도 오히려 옹호하였다면서 안식일법을 무시하는자로서 신성모독자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죄사함의 권세가 있다고 함으로 자기가 하나님과 동등된 분으로 주장하여서 신성모독자로 여겼습니다.
그들은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임재하시고 사유하시며 교통하시는 장소였던 성전의 실체가 바로 예수님이시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성전의 실체이신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사유와 교통의 은혜를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구약 시대에 줄곧 지켜오던 안식일이 지향하고 나왔던 그 실체가 바로 예수님이시요, 모형이었던 안식일의 주인은 바로 예수님이셔서 예수님 안에서 참된 안식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죄사함의 권세를 가지시고 하나님과 동등되신 분이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러한 분으로, 메시야로 자신을 계시해 주셨고, 그러한 사실을 입증할만한 표적들을 보여주셨지만 믿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신성모독자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러한 신성모독자를 처단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의를 이뤄드리는 것이요, 충성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열심으로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고 마침내 나무 십자가에 달려 죽게 했습니다. 결국 다른 이방인들에게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증거하기는 커녕 자신들마져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오히려 죽였습니다. 이러한 그들의 행위를 돌이켜 보면서 바울 사도는 오늘 본문에 있는 말씀을 하였던 것입니다.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유
그들이 예수님께서 수많은 말씀 계시나 사건 계시를 통해서 친히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계시해 주셨지만 믿지 않았던 이유는 어디에 있었을까요 그들이 전통적으로 가지고 내려오던 메시야관이 잘못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기대하고 있었던 메시야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메시야, 즉 예수님과는 전혀 다른 메시야였습니다. 그래서 정작 참된 메시야이신 예수님께서 오셔서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여러 모양으로 계시해 주셨지만, 자기들이 기대하는 메시야가 아니기에 받아들일 수 없었고 오히려 신성모독자로 생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함
그렇다면 예수님 당시 대부분의 유대인들의 메시야관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사두개인들을 중심으로 하고 그들을 추종하던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메시야관이 어떠 했는가 하는 것은 그들이 예수님께 나와서 여러 차례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보여달라!”고 시험하며 요청하는 모습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당신이 정말로 하나님께로부터 보냄받은 메시야라면 경천동지(驚天動地:하늘을 놀라게 하거나 땅을 뒤흔든다는 뜻으로, 모시 놀라거나 기적 같은 것이 일어 남을 이르는 말이다)할 하늘의 표적을 보여주라!”고 했고, 그러한 요청속에 그들이 메시야관이 잘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나와서 “하늘의 표적”을 보여달라고 한 것은 여러 차례였습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만 찾아 보면 두차례 나타납니다. 첫번째의 요청은 예수님의 공생애 제2년 중반쯤에 가버나움에서 귀신 들려 벙어리 되고 눈먼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신 일이 있은 직후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시자 거기에 있던 사람들이 보고 다 경이(驚異:놀랍고 이상하게 여김)롭게 여기고 놀라고 하는데도 그 무리 가운데 있던 바이새인들만이 예수님께 별도의 표적을 구했던 것입니다(마12:38, 눅11:15-16). 두번째 요청은 제3년 전반 중간쯤에 떡 일곱개와 생선 두어 마리로 사천명을 먹이시고 일곱 광주리가 남은 사건이 있은 후였습니다(마16:1-4, 막8:11).
(마12:38)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눅11:15) 그 중에 더러는 말하기를 저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고(눅11:16) 또 더러는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니
(마16:1)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마16:2)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마16:3)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마16:4)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 가시다
(막8:11)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께 힐난하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거늘
이런 것을 보면 그들은 예수님이 아직 자기들에게 표적을 보여 주시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가 과연 자기의 주장대로, 자기가 시인하는 대로 이스라엘 사람에게 메시야라 할 것 같으면 메시야가 수반하는 메시야다운 무슨 징조가 있어야 할 것 아닌가 또 메시야라는 것을 실증 할 만한 어떤 경천동지(驚天動地)할 만한 일이 있어야 할 것 아닌가하고 생각했습니다. 그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메시야에 대한 해석이, 메시야관이 그렇게 생각하도록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동안에도 많은 표적을 보여 주셨고 그 표적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비와 능력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거기서 가르치고 있는 풍부한 계시 내용을 통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로서는 ‘아, 하나님이 메시야를 보내셨구나!’ 하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을만 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무지한 완고와 선입관에 사로잡혀 있는 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다른 것을 원했습니다. 그들이 구한 것은 보통 표적이 아니고 ‘하늘로서 오는 표적’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천계(天界:천상계, 하늘나라)에 무슨 이상이 있다든지, 좌우간 驚天動地할 만한 어떤 표적이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야라면 이러한 표적을 보여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 성령님의 능력이라면 그것은 자신이 메시야임을 자인하시는 것인데도, 그들은 “과연 우리가 인정할 만한 천계(하늘나라)의 다른 다른 표적을 보여 주시오”한 것입니다. 사천명을 먹인 것도 그들에게는 표적이 안되고 어찌하든지 저희들이 원하는 대로 천계의 혹은 성령계(聖神界)의 어떤 이상이 보이기를 바랐습니다. 즉 갑자기 대낯에 밝은 별이 나타난다든지 하는 그런 것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의 거룩한 능력을 조용히 겸손하게 살폈더라면 그것이 얼마나 신성한 능력인가를 충분히 알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신성한 능력인줄 안 사람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하지만 이 악한 세대의 지도자들은 거룩하신 성령님의 능력으로 행하시는 예수님의 일을 바알세불을 힘입어서 하는 것이라고 악평을 했습니다. 그리고 여타의 신성한 능력들을 보고도 메시야이심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그들을 향하여 “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한다”고 책망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그들을 추종하는 사람들, 또 그들에게 가르침을 받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 세대’의 대부분을 형성하고 있는 중추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도덕적 상태를 말할 때 ‘악하고 음란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선량한 뜻을 가지고 있지 않고, 악의를 가지고 예수님을 대했습니다. ‘음란하다’는 것은 구약적인 용어로서 영적인 배교나 우상숭배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아주 괴악한 심정을 가지고 자기들의 강력한 편견들을 가지고 주님을 대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이미 예수님께서 신성한 능력을 여러 모양으로 보여 주셨는데도 그릇된 메시야관으로 눈이 깜깜하게 어두워져서 그런 것을 다 무시하고 예수님을 죽이려는 괴악한 마음으로 와서 “우리에게 표적을 보여 주시오!” 했던 것입니다.
그들의 메시야관은 驚天動地할 하늘의 능력을 가지고 와서 로마의 압정으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켜주실 메시야였습니다. 그들은 하늘로부터 오는 무력을 휘둘러서 로마의 힘을 꺽고 이스라엘을 해방시켜 주실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했던 것입니다.
◎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계기와 이유
우리는 복음서의 여러 곳에서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중심으로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몇차례의 계기가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안식일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밀밭 사이로 지나다가 이삭을 베어서 먹음으로 안식일을 범하는 것을 묵인하셨고, 또 예수님 자신도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심으로 안식일 법을 어겼다는 것입니다. 또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셔서 강도의 소굴이 되어 있었던 성전을 청결케 하시면서 “이 성전을 헐라!”고 하셨는데, 감히 거룩한 성전을 헐라고 했으니 성전 모독죄가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만이 가지고 계시는 죄사함의 권세가 자기에게 있다고 하여 감히 하나님과 동등됨을 주장하였다면서 신성모독죄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들은 이러한 몇 가지의 결정적인 계기들로 인해서 신성모독자인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 하나님께 충성으로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저주’의 상징인 나무에, 즉 나무로된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이렇게 예수님을 신성모독자로 생각하여 나무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던 것은 그들의 무지한 열심 때문이었습니다.
(롬10:2)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롬10: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그들은 자기들이 지금까지 줄곧 지켜온 안식일이 지향하여 오던 실체가 바로 예수님이심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구약 경륜하에서 안식일 법이라는 모형(그림자)을 통해서 누리게 하셨던 안식을 이제 그 실체이신 예수님 안에서 누릴 수 있게 하셨다는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했습니다. 안식일의 실체이신 예수님 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있게 하셨던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여 하나님께서 내신 안식일 법을 어기는 예수를 죽이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충성이라고 생각하고 열심으로 죽였습니다.
또 그들은 “이 성전을 헐라 삼일만에 내가 다시 세우겠다!”고 말씀하신 예수님 자신이 바로 성전의 실체이심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약 경륜하에서는 성전을 통해서 하나님의 임재와 사유와 교통하시는 은혜를 누리게 하셨는데,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러한 것들을 진정으로 누릴 수 있게 하셨다는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전파괴자인 예수를 죽이는 것이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열심으로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또 그들은 “내게 죄사함의 권세가 있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과 동등된 분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오시는 메시야에 대해서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그러한 무지가 예수님의 주장(자기 계시)에 대해서 참람한 신성모독죄로 생각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신성모독자 예수를 죽이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충성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대해서 이렇게 알았어야 했다고 주장하는 것이 무리한 요구일까요 스데반 집사님의 경우(행7장)를 보면 결코 무리가 아닙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유대인들을 향하여 “성전의 실체이신 예수님을 당신들이 죽였다고!” 밝히 지적했습니다. 물론 스데반 집사님이 그렇게 지적하였던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사심으로 메시야이심이 실증된 이후이지만, 그러나 그 이전에라도 예수님께서 행하신 신성한 능력이나 가르침을 접하면서 예수님께서 왜 그렇게 행하시고(안식일에 병을 고치심으로 안식일 법을 어기는 행위), 주장하시는지(성전을 헐라하심, 죄사함의 권세가 있다하심 등)를 주의 깊게 관찰하고, 바로 생각하고, 공손한 마음으로 그 의미를 알고자 간절히 원하는 사람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심을 알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공손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대하지 않고 그들의 그릇된 메시야관에 사로잡혀 괴악한 마음으로 대하였기에 예수님의 행적이나 가르침을 보고서 정당하게 추찰(推察:미루어 생각하여서 살핌)해서 얻었어야 할 지식을 얻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안식’하게 하시고, ‘사유’의 은총을 입게 하시고,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거하게 하시는 은혜를 누리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무지한 열심으로 예수님을 죽였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알아보고 우선 자기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모셔야 했고, 나아가서 다른 이방인들에게도 예수님을 메시야로 소개하여서 받아들이도록 해야 할 사명을 부여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메시야이심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여 오히려 하나님의 의를 그르치고 자지들의 의를 세우려고 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알아보지 못한 원인은 그들의 메시야관이 잘못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릇된 메시야관을 가지고 메시야가 오셨을 때는 메시야로 알아보지 못하여 죽이고 말았던 것입니다. 메시야에 대한 지식이 왜곡되어 있었기에, 참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메시야로 알아보지 못하고 죽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그들의 무지(無知)가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통해서 구속의 은혜를 누리게 하셨던 하나님의 의를 힘써 복종치 아니하게 했습니다.
그러한 유대인들의 무지한 열심이 빗어낸 결과에 대해서 지적하였던 바울 사도 자신도 사실은 과거에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지 아니할 때에 무지한 열심에서 예수님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습니다. 신성모독자 예수를 믿는자들을 잡아서 죽이는 것이 하나님께 충성이라고 생각하고서 하나님께 대한 열심에서 교회를 핍박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의 과거를 돌아 보면서 ‘무지한 열심’ 때문에 교회를 핍박했다고 고백한 일이 있습니다(빌3:6, 딤전1:13).
(빌3:6)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딤전1:13)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오늘날에 있어서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이땅에 오신 예수님이 어떤 메시야로 오셨으며, 하나님께서 어떠한 뜻을 가지고 계시는지를 알지 못하면, 하나님께 충성한다면서 오히려 하나님의 의를 힘써 복종치 아니하는 결과를 가져 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어떠한 은혜를 베풀려고 오셨는지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바로 믿을 수 있고,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데 자신의 인생을 바로 헌신할 수 있습니다.열심히 하나님의 의를 위해서 충성한다고 하면서 무지로 인하여 오히려 하나님의 의를 그르치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둘째, 맡은바 달란트를 발휘하지 않고 사장(私藏)해 두는 일이 발생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이 빈약하여 그릇될 때에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는지 한 가지만 더 생각하겠습니다. 맡은바 달란트를 발휘하지 않고 사장(私藏:개인이 사사로아 간직함)해 두는 일이 발생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베푸신 달란트의 비유 가운데 그점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한 주인이 먼 나라로 여행을 떠나면서 종들을 불러서 자기의 소유를 각각 그 재능대로 금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맡겼습니다.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받은 사람들은 즉시가서 그것으로 열심히 잔사를 해서 각각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남겼지만,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습니다.
오랜 후에 주인이 돌아와서 종들과 회계를 합니다.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받는 자는 자기가 맡은 재능의 분량대로 남긴 이익으로 각각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더 주인에게 내놓았습니다. 주인은 그들을 똑같이 칭찬하기를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았던 사람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주인에게 받았던 달란트를 감추워 두었던 땅에서 끄집어 내서 한 달란트 그대로 주인에게 가져다가 주면서 그 한 달란트를 잃지 않고 잘 간직해 두었다가 그대로 가져온 것을 자랑스럽다는 듯이 내놓으면서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때 주인이 뭐라고 대답했습니까 잘했다고 칭찬했습니까 아닙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아!...이 무익한 종을 바같 어두운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합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이요, 주인 집에서 아무 씀모없는 무익한 종이라고 했습니다. 주인 집에 쓸모없는 무익한 종이기에 더 이상 집밖으로 내어쫓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주인집에서 종노릇하면서 생계를 유지하던 사람이 밖에 나앉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생존자체가 어렵게 됩니다. 주인집에 쓸모없이 된 무익한 종의 최후가 얼마나 비참한가를 보여줍니다.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이 이렇게 맡은바 달란트를 땅에다 묻어두고 아무런 가치를 발휘하지 못하였던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가 주인에게 하는 말에서 그 원인이 잘 들어나고 있습니다.
(마25:24) 한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마25:25)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
그가 주인에 대해서 가지고 있었던 지식이 잘못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자기의 주인이 ‘굳은 사람’이라서 혹시 받은 한 달란트를 가지고 장사를 하다가 잃기라도 하면 혼날 것이라는 ‘두려움에서’ 그 달란트를 땅에다 감추어 두었다가 그대로 내놓았던 것같습니다. 그러면서 맡긴 달란트를 잃지 않고 잘 간직해 두었다가 가져왔으니 이제 칭찬을 받겠거니 생각을 하면서 자랑스럽게 내놓았는지 모릅니다. 어떻든 그가 맡은바 달란트를 전혀 활용하지 못하고 사장(私藏)해 두었다가 주인집에 무익한 종이 되었던 이유는, 자기의 주인을 잘못 알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자기의 주인은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로 잘못 알았습니다. 아마 주인에 대한 종의 그러한 생각은,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대해서 가지고 있었던 생각을 지적하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자지들에게 맡기신 재능을 발휘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어떠한 결과를 내려고 하지 않고, 자기들은 가만히 있으면서 늘상 하나님께서 기적적인 방식으로 그들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시기를 기대하였습니다.
오늘날에 있어서 우리 성도들도 다 우리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집에서 일하는 종들입니다. 우리는 천상에 계셔서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우리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으로부터 각각 분량대로 달란트를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에게 달란트를 맡기신 주님은 우리가 재능을 발휘하지 아니하고 그대로 사장(私藏)해 두고 있는데도 기적적인 방법으로 어떠한 결과들을 내시는 분이 아닙니다. 당신의 종들인 우리가 맡은바 재능을 잘 활용하고 열심히 가치를 발휘하게 하셔서 결과를 내시는 분이십니다.그런데 우리가 악하고 무익한 종처럼 “우리의 주인은 심지 않는 데서 거두시는 분”으로 생각하면서 “내가 하지 않아도 주님이 다 알아서 하시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을 가지고서, 자기가 맡은자 달란트를 전혀 발휘하지 아니하고 사장(私藏)해 두고 무익하게 인생을 낭비하고 만다면, 우리 또한 주님 앞에 서는 낭ㄹ 주님께로부터 무서운 책망을 받게 될 것입니다. 장차 주님이 재림하실 날 우리 각자가 맡은 달란트에 대해서 회계하게 될 것입니다. 과연 우리 각자가 맡은 재능을 잘 발휘해서 주님의 나라를 위해서 많은 이를 남겼는지, 아니면 맡은바 재능을 다 사장(私藏)해 두고 아무런 가치도 발휘하지 못하고 무익한 종처럼 인생을 낭비하였는지 회계할 날이 오게 됩니다.
우리 하나님의 종들은 그날이 오기까지 맡은바 달란트를 잘 발휘해서 하나님께서 이뤄가시는 경영에 유조한 인생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늘상 기적적인 방식으로 당신의 경영을 이뤄가시는 분이 아니라 당신의 종들이 맡은바 달란트를 십분 발휘하게 하는 방식을 통해서 이뤄가시는 분이십니다. 맡은바 달란트를 십분 발휘하는 종들을 통해서 당신이 경영하여 가시는 거룩한 역사를 이뤄가십니다. 따라서 우리 각자는 맡은바 달란트를 십분 발휘하여 하나님 나라의 경영에 유조한 인생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하시겠거니 하면서 악하고 무익한 종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담임교역자 라황용
전북 김제 송상교회 /☏(0658) 542-5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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