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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을 바로 알아감(7) (창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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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는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빈곤하거나 왜곡되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는지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바로 믿고 섬기려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점점더 자세히 알아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이제부터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배우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우리가 어떤 분을 알기 위해서는 그분에 대해서 부르는 이름이나 그분의 됨됨이, 그리고 그분이 하는 일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역시 하나님에 대해서 알려고 할때도 하나님의 성호(聖呼)나 하나님의 품성, 그리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 중에서 우선 하나님의 성호(聖呼)를 살피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오늘부터는 하나님의 성호(聖呼)에 대해서 살펴보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배워가도록 하겠습니다.
▣ 이름의 중요성
성경에서 이름이란 하나님이나 인간에게 있어서 단순히 사람과 구별하기 위한 칭호 이상의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름에 붙게 되는 중요성을 익히 알고 있었으므로 그들의 개념 사용법을 보면 아주 폭넓은 의미가 나타나 있습니다.

1. 이름 속에는 그의 개성이나 인격이 집약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한 개인의 개성이나 인격은 그의 이름 속에 집약되어 있었습니다. 성경에서 이름이란 것은 어떤 사람이나 물체의 속성을 나타내는데 필요한 것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창2:19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오셨고, 아담이 그 동물들의 속성대로 이름을 지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창2:22-23절에서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남자(이쉬)에게서 취하였으니 여자(이샤)라고 칭했습니다. 히브리어의 [이쉬]나 [이샤]는 본질적 차이는 없고 오직 성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그 이름 아담과 본질적으로 같은 [뼈 중의 뼈요 살 중에 살]이란 뜻을 여실히 드러낸 명칭입니다. 이처럼 이름이란 그 속성을 드러내는 하나의 방법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게서는 아브람을 아브라함이라고 고쳐 부른 것이나[(창17:5)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 야곱(창27:36)[에서가 가로되 그의 이름을 야곱이라 함이 합당치 아니하니이까 그가 나를 속임이 이것이 두번째니이다 전에는 나의 장자의 명분을 빼앗고 이제는 내 복을 빼앗았나이다 또 가로되 아버지께서 나를 위하여 빌 복을 남기지 아니하셨나이까]을 이스라엘이라고 고친(창32:28)[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이 모든 것은 이름이 그 인격과 그의 속성에 깊은 관계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개인의 이름을 안다는 것은 그의 본질, 즉 인격이나 속성을 아는 것과 같았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이름을 통하여 당신의 속성을 인간들에게 알려 주셨고,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살피면서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알 수 있습니다.

2. 이름은 그의 존재를 대표합니다.
또한 이름은 그의 존재를 대표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을 동일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시103:1, 51:1, 사30:27, 56:6, 슥14:9).
(시103:1)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
(시51:1)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사30:27) 보라 여호와의 이름이 원방에서부터 오되 그의 진노가 불붙듯이 하며 빽빽한 연기가 일어 나듯하며 그 입술에는 분노가 찼으며 그 혀는 맹렬한 불 같으며
(사56:6) 또 나 여호와에게 연합하여 섬기며 나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나의 종이 되며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마다
(슥14:9)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리니 그날에는 여호와께서 홀로 하나이실 것이요 그 이름이 홀로 하나이실 것이며
그래서 ‘이름을 도말한다’는 말은 그의 존재를 없애버린다는 것과 동등한 의미를 가졌습니다(삼상24:21, 왕하14:27, 시83:4, 사14:22, 습1:4).
(삼상24:21) 그런즉 너는 내 후손을 끊지 아니하며 내 아비의 집에서 내 이름을 멸하지 아니할 것을 이제 여호와로 내게 맹세하라
(왕하14:27) 여호와께서 또 이스라엘의 이름을 도말하여 천하에 없이 하겠다고도 아니하셨으므로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손으로 구원하심이었더라
(시83:4) 말하기를 가서 저희를 끊어 다시 나라가 되지 못하게 하여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다시는 기억되지 못하게 하자 하나이다
(사14:22)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내가 일어나 그들을 쳐서 그 이름과 남은 자와 아들과 후손을 바벨론에서 끊으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습1:4) 내가 유다와 예루살렘 모든 거민 위에 손을 펴서 바알의 남아 있는 것을 그곳에서 멸절하며 그마림이란 이름과 및 그 제사장들을 아울러 멸절하며
이름이 도말되면 어떠한 짓을 해도 그는 죽은 것과 같이 취급되었습니다.
이렇게 이름이 그의 인격과 개성을 대표했기 때문에 이름은 말과 행위의 주체가 될 수 있엇습니다. 종종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이름을 대변하여 그의 능력을 가지고 당당하게 싸우고 행동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곧 하나님 자신의 능력이요, 권능이요, 현존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의지하여 승리하곤 했습니다(시44:5, 미4:5, 5:4).
(시44:5) 우리가 주를 의지하여 우리 대적을 누르고 우리를 치려 일어나는자를 주의 이름으로 밟으리이다
(미4:5) 만민이 각각 자기의 신의 이름을 빙자하여 행하되 오직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빙자하여 영원히 행하리로다
(미5:4) 그가 여호와의 능력과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 그 떼에게 먹여서 그들로 안연히 거하게 할 것이라 이제 그가 창대하여 땅 끝까지 미치리라
하나님의 이름은 그를 의지하는 모든 자에게 의지가 되고 보호처가 되며 안식과 위로가 되었습니다(시20:1, 잠18:10).
(시20:1) 환난 날에 여호와께서 네게 응답하시고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이 너를 높이 드시며
(잠18:10)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

3. 이름은 그가 하는 일이나 권위나 명예를 반영해 주기도 합니다.
창조주라든지 대주재라는 이름들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반영해 주는 이름입니다. 그리고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하나님께서 가라사대”라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전하였던 것은 이름에 권위가 반영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곧 하나님의 명예를 반영해 주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속성이나 존재, 그리고 하시는 일이나 권위, 명예를 이해하는데 참으로 중요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어떤 일을 하시고, 어떠한 권위와 명예를 가지신 분이신가를 이해하고자 하는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이름들에 대해서 배우는 것은 필수적인 일입니다.
◎ 하나님의 이름의 계시성

1. 하나님에 대한 칭호들은 사람들이 자의적으로 부른 것이 아니고, 하나님 자신에 의해서 계시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속성이나 하시는 일을 반영해 주는 것이요,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을 알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해 주시고 자신의 이름을 계시해주셔야만 합니다 따라서 사람이 자의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하나님에 대한 칭호들은 사람들이 자의적으로 부른 것이 아니고, 하나님 자신에 의해서 계시되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 이름을 부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의 이름을 계시하여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은 무엇보다도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능동적으로, 객관적으로 자신을 알리시는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 속에는 하나님께서 외적으로 드러내시는 덕과 우월성, 영광과 영예, 구속하시는 능력이 계시되어 있습니다. 그 이름은 하나님께서 이런 저런 성질로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이 이름은 사람들에 의해서 자의적으로 붙여진 것이 아니고 본래의 하나님을 그대로 계시해 줍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이름은 그의 영예, 영광, 뛰어남, 계시, 그리고 신적인 본질을 대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수단으로 해서 자신을 계시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그 피조물들이 그 이름에 따라서 그를 부르도록 요구하시는 이름은 우리가 그를 부르는 이름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 대해서 계시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특정한 이름들로 표현됩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그 피조물들에게 그의 계시에 근거하고, 그의 계시에 따라서 그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특권을 허락하셨습니다. 자연과 은총 안에 주어진 전계시를 다 포함하는 하나님의 한 이름은 우리에게서 많은 다양한 이름으로 나타납니다. 우리는 참으로 창조와 구속 가운데서 그의 존재에 관해 계시된 모든 것에 따라서 그를 부를 수 있는 권리를 가집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이름을 수단으로 해서 자신 스스로가 우리와의 아주 분명한 관계를 설정하십니다. 그에 대한 우리의 관계는 그가 우리와 맺으신 이 관계와 일치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일컫고 부르는 이 이름들은 자의적인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마음에서 상상해낸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히려 자연과 은혜 가운데서 의식적으로 또 자유롭게 자신을 계시하신 바로 그 하나님께서 우리로 그 계시에 근거해서 그의 이름을 부를 권리를 주셨고, 심지어 그 계시에 근거한 이름들을 그의 말씀 안에서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은 모두가 하나님의 게시에서 나온 것입니다. ‘계시된 이름’은 우리가 하나님을 부르는 모든 이름의 근거입니다.

2.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이름은 본체론적 하나님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고, 피조물에 대한 관계 중에 계신 하나님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그 자체로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표현하는 이름은 없습니다. 자연과 성서 안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는 모두가 명확히 사람을 향한 것이므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계시함에 있어서 인간적인 언어를 사용하시고, 인간적인 형태로 자신을 드러내십니다(신인동형론적 표현). 우리와의 관계 중에 계신 하나님을 지칭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그대로 표시하는 이름은 없습니다. 무한하시고 위대하신 하나님의 존재 전부를 담을 만한 그림을 이 지상에서는 찾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존재를 ‘한폭의 그림’, 즉 하나의 이름에 담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당신의 영원한 표호로 계시해 주셨던 ‘여호와’는 이름까지도 하나님의 존재 전체를 보여주는 이름은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이름을 다양하게 계시하고 있고, 그것도 피조물들과의 관계 속에서 계시하고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에 계시되어 있는 다양한 하나님의 성호들 속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배워가야 합니다. 어느 한 이름만 가지고 하나님은 이런 분이라고 좁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다양한 이름들을 살피면서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크심을 다양하게 알아가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그 작업의 첫 발을 내딛고 있습니다.
▣ 하나님께서 족장들에게 계시하신 이름:‘엘 샤다이’(전능하신 하나님)
하나님께서 ‘직접’ 사람에게 최초로 계시하신 이름은 ‘엘 샤다이’(전능하신 하나님) 입니다. 물론 그 이전에 멜기세덱을 통해서 아브람에게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으로 계시하신 일도 있지만(창14:19)[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하나님께서 친히 명명하여 계시해 주신해 주신 최초의 이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이름입니다.

1. 하나님의 성호가 계시되고 있는 역사적 맥락을 주의깊게 살펴서 그 성호를 통해서 계시하고자 하시는 내용을 바르게 깨달아야 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하면 여러분은 선뜻 뭐가 생각납니까 무엇과 관련해서 생각하게 됩니까 사도신경에서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라는 부분이 생각나실 것입니다. 그래서 ‘전능하신 하나님’ 하면 흔히 천지창조와 관련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할 때에 단순히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정도의 생각에 머물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계시하신 것은 천지창조와 관련해서 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어떤 맥락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계시하셨는지 그 역사적 맥락을 잘 살펴보면, 단순히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정도를 계시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린다면 “전능하신 하나님”은 “당신이 약속하시거나 하시겠다고 하신 것은 능히 이루실 수 있는 분”임을 계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단순히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는 분”과 “약속하시거나 하겠다고 하신 것은 능히 이루실 수 있는 분”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편에서 무엇을 요구했을 때 그것이 하나님의 의사에 일치하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지도 않고 기어이 구하였다가 이뤄지지 않으면 하나님의 전능성을 의심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당신이 하실 의사가 있는 것에 대해서 못이를 것이 없다는 점에서의 전능성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계시하신 역사적인 맥락과 관련해서 그 의미를 전확히 찾을 때만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성호에 계시된 정확한 의미와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바로 알기 위해서는 어떤 역사적 맥락에서 자신의 이름을 계시하셨는지를 주의해서 살펴야 합니다.

2. ‘엘 샤다이’(전능하신 하나님)로 계시하시게 되었던 배경
이 ‘엘샤다이’(전능하신 하나님)라는 이름은 모세 이전의 족장들에게 계시된 이름입니다(창17:1-2, 35;11).
(창17:1) 아브람의 구십구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창17:2)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세워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 하시니
(창35:11)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국민과 많은 국민이 네게서 나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출6;3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에서 그점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출6:3)
‘엘 샤다이’(전능하신 하나님)라는 이름은 최초로 아브라함에게 계시하셨습니다.
창17:1-2절에 이러한 말씀이 있습니다.
“아브람의 구십구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세워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 하시니”(창17:1-2)
그런데 이 장면에서 하신 약속은 사실 이미 아브람으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고[창12: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그의 씨로 티끌 같이 셀 수 없이 많은 후손을 이루게 하며[창13:16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리라[창15:5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하신 약속에 대한 재확증과 같은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매 그 믿음을 그의 의로 여겨주신 사실을 보게 됩니다(창15:6).[창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그러나 수년이 지난 후에도 아브람에게 자식이 없었습니다. 아브람도 나이 많아 늙었고 그의 아내 사라도 경수가 끊어진 상태가 되었지만 여전히 그들에게 자식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의로 인정해 주신 그 믿음도 점점 약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들은 믿음에서 떠나 계집 종 하갈을 취하여 후손을 얻어 보려는 육신적이고 불행한 임시방편을 좇았습니다. 그 결과로 이스마엘을 낳았는데, 이는 결코 약속을 따라 얻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로부터 다시 수년이 지나 아브람의 나이 99세로(처음 약속으로부터 24년이 지남), 이제 하나님이 하신 약속이 성취되기란 인간적인 계산으로는 전혀 불가능한 때였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 너무 어려워서 불가능한 일이 있겠습니까 그분에게는 결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이같은 때, 이러한 환경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 후손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재확증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꾸시고, 하나님 자신에 대해 “엘 샤다이” 곧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계시해 주신 것입니다.
약속에 대해 그들의 믿음이 흔들릴 즈음에 하나님이 그 약속을 재확인하시켜 주셔서 그들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바로 이러한 때에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약속을 능히 이루시는 분’으로 아브라함에게 계시하셨습니다. 이제 아브라함과 사라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은 오직 하나님만 주실 수 있으며, 그것을 육신의 노력과 행위로는 이룰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 둘의 몸이 먼저 반드시 죽어야 하며, 그 후에 오직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그 약속이 성취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1) ‘전능하신 하나님’은 당신이 하시고자 하신 것은 어떠한 어려운 일이라도 이루시기에 충분하신 분이십니다.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주시기로 이미 약속하셨는데, 아브람이 자신과 아내의 나이를 생각하면서 인간적인 조건으로는 도무지 이뤄질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믿음이 연약해져 있는 맥락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계시하고 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에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이름 속에 계시된 하나님은, 당신이 하시고자 하신 의사와 관련해서 전능하신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신이 하시겠다고 하신 것은 우리 인간 편에서 볼 때에 도무지 불가능해 보여도 하나님께서는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일이라면 어떤 일이라도 이루시기 충분하신 분임을 계시해 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맥락에서 이해하지 못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말만 때어서 생각하게 되면, 하나님의 의사와는 상관없는 일을 가지고 구해놓고 이뤄지지 않으면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심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따라서 성경에 계시된 “전능하신 하나님”은 당신이 하실 의사가 있느냐와 관련되어 있음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2) 더 나아가서 ‘엘 샤다이’는 하나님을 기다리며 그를 신뢰하는 모든 자에게 하나님은 그 약속을 충분히 이루시고 열매를 넘치게 맺도록 하시는 분임을 우리에게 알게 해줍니다.
이같은 사실은 그 이름이 사용된 처음의 몇몇 경우를 살펴보면 분명히 알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자신을 “전능한 하나님”으로 계시하신 하나님께서 ‘존귀한 아비’라는 뜻을 가진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으로 바꿔주시면서, “내가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니 나라들이 네게로 좇아 일어나며 열왕이 네게로 좇아 나리라”고 하셨습니다(창17:6).
“내가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니 나라들이 네게로 좇아 일어나며 열왕이 네게로 좇아 나리라”(창17:6)
또 이삭이 야곱을 축복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어 너로 생육하고 번성케 하사 너로 여러 민족을 이루게 하시고”, 또한 창35:11절에서는 하나님이 친이 야곱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국민과 많은 국민이 네게서 나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그리고 야곱은 그의 임종시에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많은 후손을 이루게 하리라고 하신 그 약속을 되풀이 했습니다[(창48:3) 요셉에게 이르되 이전에 가나안 땅 루스에서 전능한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 복을 허락하여(창48:4) 내게 이르시되 내가 너로 생육하게 하며 번성하게 하여 네게서 많은 백성이 나게 하고 내가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리고 동일한 이름으로 요셉에게 하늘과 땅의 복과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이 있을 것을 선포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엘 샤다이’(전능하신 하나님) 이름의 중요성이 욥기에 모아져 있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구약 전체에서 이 이름이 48회가 나타나는데 그 중에 욥기에서 무려 31회나 씌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욥의 결말은 처음 시작할 때보다 훨씬 더 풍성한 열매가 맺어졌고 한층 축복이 더해졌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생각할 때 “엘 샤다이”라는 이름의 의미는 채우시고 열매를 풍성히 맺게 하시는 분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3. ‘엘 샤다이’ 라는 이름의 기원과 의미
오늘 본문에서 ‘전능한’이라고 번역된 “샤다이”라는 말은 구약에 약 48회가 나타나 있는데, 그와 거의 유사한 단어로서 그 어원은 마찬가지로 생각되는 단어가 있는데 24회가 나오며 “젖가슴”으로 번역되었습니다. 가슴이라는 단어와 연관하여 샤다이라는 명칭은 양육하는, 공급하는, 만족케 하는 등의 의미를 암시해 줍니다. 하나님을 의미하는 “엘”이라는 단어와 함께 결합될 때 그것은 “양육하고 공급하며 만족케 하기에 능한 하나님”이란 의미가 됩니다. 따라서 ‘엘 샤다이“의 개념은 생명을 유지케 하며 은총을 부어 주시는 분이라는 의미로 강화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든 것을 공급하실 수 있는 풍성하신 분으로 인식됩니다.
예를 들자면, 야곱이 그의 임종시에 그 아들들의 미래에 대해 축복할 때, 창49:24-25절에서 요셉에 관하여 이같이 말했음을 보게 됩니다.
(창49:24) 요셉의 활이 도리어 견강하며 그의 팔이 힘이 있으니 야곱의 전능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그로부터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가 나도다 (창49:25) 네 아비의 하나님(엘)께로 말미암나니 그가 너를 도우실 것이요 전능자(샤다이)로 말미암나니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원천의 복과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이리로다
여기서 하나님에 대한 각각의 이름들은 그 차이와 의미가 아주 두드러지고 명백함을 볼 수 있습니다. “엘”로서의 하나님은 도움을 베푸시는 분이라면, “샤다이”로서의 하나님은 모든 면에서의 풍성한 축복과 젖먹이는 복까지도 내리시는 분이십니다.
이러한 어원과 관련된 하나님의 모습은 미래에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것에 관하여 말씀한 사60:15-16에 아주 놀랄마큼 선명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사60:15) 전에는 네가 버림을 입으며 미움을 당하였으므로 네게로 지나는 자가 없었으나 이제는 내가 너로 영영한 아름다움과 대대의 기쁨이 되게 하리니 (사60:16) 네가 열방의 젖을 빨며 열왕의 유방을 빨고 나 여호와는 네 구원자,네 구속자,야곱의 전능자인 줄 알리라
여기서 젖먹이는 복에 비유된 풍성함에 대한 개념은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풍성한 축복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구절 중에 하나인 사66:10-13에는 이보다 더 직접적인 표현이 나와 있습니다. 10절과 11절에서 선지자는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와 그를 위하여 슬퍼하는 모든 자에게 예루살렘의 구속과 회복을 인하여 기뻐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계속하여 이러한 말씀이 주어졌습니다.
(사66:10)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여 다 그와 함께 기뻐하라 다 그와 함께 즐거워하라 그를 위하여 슬퍼하는 자여 다 그의 기쁨을 인하여 그와 함께 기뻐하라 (사66:11) 너희가 젖을 빠는 것 같이 그 위로하는 품에서 만족하겠고 젖을 넉넉히 빤 것 같이 그 영광의 풍성함을 인하여 즐거워하리라(사66:12)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그에게 평강을 강 같이,그에게 열방의 영광을 넘치는 시내 같이 주리니 너희가 그 젖을 빨 것이며 너희가 옆에 안기며 그 무릎에서 놀 것이라(사66:13) 어미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니
여기서 주목할 점은 품(가슴)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원어 “샤드”로서 이는 “샤다이”란 말에서 파생된 것이며, 우리 성경에서 그 단어는 ‘전능한’이라는 말로 번역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엘 샤다이”라는 하나님의 이름은 능력이 있고 축복을 넘치게 내리시며 모든 만물을 풍성히 공급하시는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전능하신 분만이 그처럼 풍성히 공급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계획하시고 약속하신 것을 어떠한 장애와 반대를 뛰어넘어서 성취하시기에 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모든 축복과 풍성한 열매를 공급하시는 분입니다.
맺 는 말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오해 하므로 말미암아 하나님 당신이 하시고자 하시는 의사가 있으신가는 생각지도 않고, 우리 편에서 어떤 것을 요구해서 이뤄지지 않으면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의심하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당신하실 의사가 있는 일에 대해서는 어느 것이나 다 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엘 샤다이’(전능하신 하나님)를 믿는 우리는 그분이 약속하신 것은 어떠한 어려운 일이라도 능히 이루실 수 있는 분임을 믿고 그분의 약속들을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며 기대해야 합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바는 어떠한 장애와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에 불가능해 보이는 환경 가운데서도 그분의 전능하심 때문에 능히 이뤄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를 하시겠다고!”고 말씀하시고 약속하셨는데도 우리 편에서 자기의 인간적인 생각이나 경험이나 능력의 한계 정도에서 판단하여 불가능하리라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능력 한계로는 불가능해 보여도, 하나님께서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에 대해서는 능히 그렇게 하실 수 있고, 또 반드시 그렇게 하시는 분임을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알고 믿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은 예수님 당시 사두개인들의 경우에서 실감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자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두개인들을 향하여 그들은 “하나님과 성경”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서 약속하신 성경을 알지 못하였고, 그 약속대로 이루실 수 있고, 또 반드시 이루시고야 마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도 하나님을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한다면 하나님께서 성경에 약속하셨거니와 이미 성취된 여러 내용들을 믿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동정녀에게서 탄생하셨다는 내용이나, 삼일만에 부활하셨다는 내용, 그리고 장차 다시 오신다는 약속과 같은 귀중한 내용들을 믿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알고 믿는 믿음이 있어야지만 그러한 내용들을 믿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알고 믿는 것이 우리의 신앙에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믿는데 있어서도 그 의미를 바로 알고 믿어야 합니다. 당신이 하실 의사가 있다고 하신 것에 대해서 하나님의 전능성을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담임교역자 라황용
전북 김제 송상교회 /☏(0658) 542-5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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