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하나님을 바로 알아감(10) (창 22:1-14)

첨부 1


지난 시간에는 ‘엘’ 하나님으로 나타나신 여러 이름 가운데서 대표적인 이름 두 가지를 생각했습니다. 천지의 주재가 되시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과 억울하게 당하는 고통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을 지극히 높으신 분(엘 엘리온)으로 알고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어떠한 일도 일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에 제 인생을 제 마음대로 경영해 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어떠한 역경 중에서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며 감사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감찰하시는 분으로 믿는 사람은 어떤 억울한 일을 당해도 앙금을 품고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맡기고 위로함을 받게 된다고 했습니다.
오늘은 ‘여호와’ 하나님으로 나타나신 여러 이름 가운데서 ‘여호와 이레’(준비하시는 여호와)되신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그러한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신앙은 어떠한 자세를 취하게 되는지에 대해서 생각하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여호와 이레』라는 이름이 불려지게 된 역사적 배경
우리가 지난 번에 ‘여호와’라는 이름을 생각할 때에 여호와는 당신이 경영해가시는 역사의 과정 속에서 자신이 어떤 분이심을 증명하시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앞으로 사용하게 될 ‘여호와’와 복합적으로 사용하는 성호들은 다 역사적인 어떤 정황 속에서 하나님의 속성의 어떤 면을 체험하고서 불렀던 성호들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따라서 그러한 성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어떠한 속성을 계시해 주고 있는가 하는 것을 알려면, 어떠한 역사적인 배경하에서 그러한 이름을 불렀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먼저 『여호와 이레』라는 이름이 생겨나게 된 역사적인 배경을 살펴 보겠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100세의 고령의 나이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아들 이삭을 얻고 하루 하루 날짜가 가는 줄 모르고 기쁨이 얼마나 켔겠는지 짐작이 갈 것입니다. 하나님 보다도 이삭을 더 사랑하는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의 마음의 애정이 이삭에게 가 있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과연 아브라함이 당신을 더 사랑하는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주신 이삭을 더 사랑하는지 시험하시려고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고 명하셨습니다. 번제란 제물을 불로 태워서 드리는 제사입니다.
아브라함은 아침 일찌기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곳으로 따났습니다. 사흘 길을 가니 모리아산 아래에 도착하였습니다. 아이와 함께 저 산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경배하고 돌아 올테니 두 사환은 나귀와 함께 산 아래에서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아들 이삭에게는 번제에 사용할 나무를 지우고, 아브라함은 불과 칼을 손에 들고 산위로 올라갑니다. 산에 올라가면서 이삭이 아브라함에게 묻습니다. “내 아버지여,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이삭이 아버지와 함께 산을 올라가면서 생각해 보니까 번제에 필요한 불이나 나무는 준비해 가면서 왜 정작 중요한 제물은 준비해 가지 않으시는 것일까 하고 이상하게 생각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에 아브라함이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아브라함이 가로되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엘로힘 이르에-로)”(창22:8)
아브라함이 이렇게 답변한 것은 조금후에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 친히 어린 양을 준비하시리라는 것을 알거나 믿고서 한 이야기는 아닌듯 싶습니다. 단지 아들 이삭에게 사실대로 말할 수 없어서 그렇게 말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런 해석이 되겠습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곳에 이르러 아브라함이 그곳에 돌을 주어다가 단을 쌓고 그 위에 나무를 벌여놓고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올려 놓았습니다. 그런데 그때에 이삭이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에 대해서는 성경에 기록하고 있지 않아서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아마 자기를 번제로 드리라고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 때문에 죽지 않을려고 발악하거나 하지 않고 믿음으로 순종하였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이런 점으로 보아서 이삭도 아브라함의 신앙 못지 않게 대단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아브라함은 칼을 들어 이삭을 잡으려 하는 순간입니다. 그때에 아브라함의 심정은 또 어떠했겠습니까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자식, 그것도 100세의 고령의 나이에 얻은 독자요, 또 하나님께서 장차 큰 민족을 이루기 위해서 약속을 따라 주신 후사를 죽여 불로 태워서 드리려는 순간입니다. 이때에 아브라함의 심정은 어떠했으며, 어떠한 생각을 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100세의 고령에 자식을 주셔서 큰 민족을 이루게 할 후사가 되게 해준다고 약속하실 때는 언제이고, 이제와서 또 뺏어 가시는 것은 무슨 심뽀입니까 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며 대들었을 법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러한 생각을 조금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이삭을 바치면서 어떠한 생각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후에 히브리서 기자의 기록을 통해서 엿볼 수 있습니다(히11:17-19).
(히11:17)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히11:18)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히11:19)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그렇게 위대한 아브라함의 믿음이 어떻게 해서 생겼겠는가 하는 것은 로마서에 바울 사도가 해명해 놓은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롬4:17-19).
(롬4:17) 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롬4: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롬4:19)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은 100세가 되어 자기의 몸이 죽은 것 같이 되었고, 아내 사라도 90세가 되어 그녀의 몸이 죽은 것 같이 되었지만 믿었고, 실제 약속대로 이뤄진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죽은 자도 살리시며 없는 것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분이심을 온전히 믿을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한경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죽은 자도 살리실 수 있는 분으로 믿었으며, 이삭을 받칠 때에도 그러한 믿음으로 받쳤을 것입니다.자식을 번제로 받쳐야 하는 아픔이야 이루 말할 수 없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원통해 하는 심정은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개인의 사적인 부자(父子)의 정에 매여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고령의 나이에 얻은 독자이었지만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하지 않았기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이삭을 받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까닭에 아브라함이 칼로 이삭을 잡으려고 하는 순간 여호와의 사자의 음성이 들려 와서 이삭을 잡지 못하도록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하매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22:11-12)
한마디로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심정이 이삭을 사랑하는 마음보다 컸기에 이삭을 아끼지 아니하고 받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 심정에는 이삭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심정이 있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가장 사랑하고 아끼는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받치라는 명령에 순종함으로 하나님께 대한 경외하는 심정을 실증해 보인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심정을 가지고, 자기의 가장 사랑하는 독자까지도 아낌없이 받쳐 순종하였던 아브라함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삭 대신에 받칠 어린 양을 미리 준비하셨고 제공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수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수양을 가져다가 이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삭 대신에 자신에게 드려질 수양을 친히 준비하신 것을 체험하고서 얼마나 감격적이었고, 인상적이었겠습니까 그러한 감격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서 그 은혜를 기념하기 위해서 그 땅 이름을『여호와 이레』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후대까지도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는 말이 있게 되었습니다.

1. 『여호와 이레』라는 이름의 의미
그러니까『여호와 이레』라는 명칭은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준비하시는 역사를 체험하였던 땅, 모리아산을 향하여 불렀던 이름입니다. 여기서 “이례”로 번역되어 있는 단어는“리아”(:준비하다, 제공하다)의 미래형으로서 “이르에”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여호와 이에르』라고 읽어야 하고, 그 문자적인 의미는 “여호와께서 준비(제공)하시리라!”는 뜻입니다.
그 말속에 함축되어 있는 더 폭넓은 의미들은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의 질문에 답변한 내용 가운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비록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대답할 때에는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시리라는 사실을 아는 것은 아니 었지만, 결국 그렇게 되었고, 그렇게 되기 이전에 아브라함이 했던 말 속에서 더 폭 넓은 의미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호와 이르에』라는 말의 넓은 의미는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는 뜻이 됩니다.
어떻든 처음에는 그러한 하나님을 체험했던 땅, 모리아산에 붙였던 이름이 오늘날에는『여호와 이레』라고 해서 “준비하시는 여호와”라는 의미의 하나님의 성호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2. 역사적인 맥락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요소
이러한 역사적인 맥락에서『여호와 이레』되신 하나님을 바르게 이해하는데 놓치지 말고 꼭 함께 연결해서 생각해야 할 중요한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해서 받칠 수양을 준비하시되 어떠한 경우에 준비하셨느냐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브라함이 어떠한 상태에 있을 때에 준비하셨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심정으로 독자 이삭까지도 아끼지 아니하고 순종할 때에 이삭 대신에 받칠 수양을 준비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독자 이삭 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아브라함을 위해서,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데 필요한 수양을 준비해서 제공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을 준비하시고 제공해 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맥락 속에서 생각할 때에『여호와 이레』되신 하나님에 대해서 오해하지 않고 바르게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여호와 이레』되시는 하나님께 대한 오해가 많이 있는데, 그러한 오해는 그 이름이 불려지게 된 역사적인 맥락 속에서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흔히『여호와 이레』 (여호와께서 준비하시리라, 혹은 준비하시는 여호와)라고 하면 자기의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서 구하면서도 하나님께서 다 준비하시고 제공해 주시리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당신을 위해서는 자기의 가장 귀한 것이라도 아끼지 아니하고 드려서 순종하고자 하는 자들을 위해서 필요한 것들을 준비하시고 제공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무엇을 준비하시고 제공해 주실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 준비하신 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다 준비하시고 제공하시는 분이지, 그렇지 않고 자기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경영해 가시는 역사를 거스리며 살아가는 자들을 위해서도 필요한 것들을 준비하시고 제공하시는 분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이점을 오해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필요한 것들을 준비하시고 제공하실 때에는, 그 사람이 그것을 가지고 자기를 희생하면서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서 유용하게 사용할 의사(意思)가 있는가를 보시고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장하심은 자기를 희생하면서까지 하나님의 보장하심은 자기를 희생하면서까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는 자에게 약속된 것이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마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따라서『여호와 이레』되신 하나님은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만 살아가는 이방인들과는 상관이 없는 분이십니다. 비록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는 삶을 살아가지 않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만을 생각하면서 오직 자기를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은『여호와 이레』되신 하나님께서 무엇인가를 준비하시고 제공해 주실 것이라는 기대를 아예 버려야 합니다. 사실 매사에 자기가 자기에게 필요한 것들을 찾으면서 자기를 위해서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까지 거기에 개입하셔서 그에게 필요한 것들을 준비하시고 제공해 주셔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서 자기를 아끼지 아니하고 살아가는 사람에게나 하나님의 준비하시고 제공하시는 손길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라야 하나님께서 준비해 주시고 제공해 주시지 아니하면 안될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3. 하나님의 일에 직접적으로 수종드는 종들의 생업을 보장해 주신 하나님
자기의 가장 아끼는 것까지 드려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고 하는 자들을 위해서 그들의 생업을 보장해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계시가 여러 곳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이스라엘 열 한 지파에게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제공해 주신 것이나, 특별히 하나님을 가까이에서 모셨던 레위지파에게는 그들이 경작할 땅을 기업으로 주시지 아니하시고, 열 한 지파로부터 십일조를 거둬서 그것을 그들에게 나눠주심으로 그들의 생계를 보장해 주셨습니다. 레위지파는 성전에서 제사장으로서 직무를 수행하거나, 혹은 봉사하는 자들로 부름을 받아서 그 일에만 전념하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그러한 자들의 생계를 보장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열두제자를 파송하시면서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고 하시면서 그 이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일군이 저 먹을 것을 받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이고,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만 전념하는 제자들의 생계를 주님께서 보장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둘째,『여호와 이레』와 우리의 신앙
그렇다면 하나님을『여호와 이레』되신 분으로, 즉 ‘준비하시고 제공하시는 여호와’로 알고 믿는 사람은 어떠한 신앙의 자태를 드러내게 될까요

1.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데 지불해야 할 댓가가 아무리 크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미리 준비하시고 제공하시며 보장하실 것을 믿기에 순종합니다.
자기의 생존에 필요한 것들이나 사명을 감당하는데 필요한 것들을 하나님께서 준비하시고 제공하실 것을 온전히 믿기에 거기에 마음을 빼앗기거나 그것을 위해서 염려하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서 살아갑니다. 자기에게 어떠한 희생이 요구되어도, 자기의 것을 챙기고 앉아 있거나 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나아갑니다. 저는 그러한 신실한 형제 자매들을 많이 봅니다. 교회를 건실하게 이뤄가기 위해서 자신의 직업이나 생업까지도 고려하고 나아가면서 하나님께서 준비하시고 제공하신 생업에 종사하며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려고 하면 인간적인 계산으로 생각할 때에 손해가 되는 것같고, 자기가 가장 아끼고 귀하게 여기는 것을 포기해야 하는 어려움을 감수해야 하지만, 그러한 희생을 감수하고 나아가는 자의 필요를 하나님께서는 다 아시고 준비하시고 제공해 주십니다. 하나님을 그러한 분으로, 즉 자기의 희생을 감수하면서도 순종하는 자의 필요를 준비하시고 제공하시는 분으로 알고 믿는자는, 어떠한 희생을 지불하고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 살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봉사할 때도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기 때문에 자기의 힘으로 무엇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고 자기의 공로를 내세우거나 하지 않습니다.
(벧전4:11)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2. 자기의 유익만을 챙기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여호와 이레』되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것이요, 결국 이미 제공받은 것까지라도 빼앗기게 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사울 왕의 경우에서 그러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이기게 해주실터이니 거기서 얻는 모든 전리품은 다 멸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대로 승리를 준비하시고 제공해 주셨습니다. 따라서 사울 왕은 약속하신대로 전쟁에서의 승리를 제공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아무리 좋은 전리품이라 할지라도 다 멸했어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전리품 중에서 좋은 가축들을 죽이는 것을 아깝게 생각하고, 자기의 유익만을 챙기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치 아니하였습니다. 튼튼하고 탐스러운 가축들을 남겨두고 비틀거리고 병든 것들만 죽였습니다. 전쟁에서 승리를 준비하시고 제공하신 『여호와 이레』되신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사울 왕에게 사무엘 선지자를 보내셔서 어찌하여 하나님께서 명하신 바를 어기고 “탈취하기에만 급급했느냐!”고 책망하시고, 하나님께 좋은 것들을 제물로 드리기 위해서 남겨둔 것 뿐이라고 거짓으로 변명하는 그에게 순종이 제사 보다 낫다고 책망하시고, 그의 왕권을 박탈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여호와 이레』되신 하나님의 손길을 통해서 승전을 제공받고서도 자기의 유익만을 챙겼다가, 오히려 제공해 주신 은혜 마저 빼앗긴 것입니다.
담임교역자 라황용
전북 김제 송상교회 /☏(0658) 542-5382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