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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약속의 자녀와 육신의 자녀 (창 21:8-21)

첨부 1


이삭의 탄생은 모든 사람에게 기쁨을 주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 뿐만 아니라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도 기뻐했습니다. 왜냐하면 이삭을 보면 하나님께서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하셨다는 생각이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이삭을 보면서 모든 사람들이 기뻐했던 것처럼, 이삭을 만진 모든 사람들이 축복을 받았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사람들마다 기쁜 소식을 듣게 되고 은혜와 복을 받습니다.
누가복음 2장 14절에서는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그렇습니다. 이삭의 출생이 아브라함과 사라와 모든 사람들에게 복이었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출생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었고 지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평화를 주었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들이 이렇게 기쁨과 복을 주시는 예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가슴이 시원해집니다.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평생토록 지은 죄도 깨끗히 씻기는 줄로 믿습니다. 죄의 뿌리가 뽑혀 죄사함을 받고 용서함 받게 해주시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죄사함의 복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복을 받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천국이 보장됩니다. 그러니 우리는 웃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영생을 얻어 천국에서 영원히 살게 된다니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이렇게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고 능력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저는 예수님과 이삭처럼 여러분의 삶이 모든 사람에게 축복이 되기를 바랍니다.

건강하게 자라는 이삭
8절을 보겠습니다.
아이가 자라매 젖을 떼고 이삭의 젖을 떼는 날에 아브라함이 대연을 배설하였더라
이스라엘 사람들은 대부분 2-3세 때 젖을 뗀다고 합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큰 잔치를 열었던 때는 이삭이 두 세살 되었을 때였습니다.
이 말씀은 이삭이 아무 사고 없이 건강하게 잘 자랐다는 이야기입니다.
아이가 세상에 태어난 것도 기쁨이지만 잘 자라는 것도 부모에게 큰 기쁨이 됩니다. 세상에서 여러 환란과 고난을 겪다가도 집에 돌아와 잠자는 아이를 보는 순간 온갖 시름이 모두 사라집니다.
누가복음 2장 40절에서 예수님의 자라는 모습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
이 말씀은 목사님들이 성도들을 심방해 그 자녀들을 축복하기 위하여 자주 인용하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이 자랄 때에 네 가지의 축복이 있었다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자라는 복입니다. 자라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아이가 자라지 않을 때는 부모의 마음이 아픕니다. 예수님은 잘 자랐습니다. 두번째는 건강하고 씩씩하게 자랐습니다. 예수님은 유약한 어린이가 아니었습니다. 힘있는 강한 아이였습니다.
그러나 힘만 있는 아이가 아니라 그 위에 지혜도 있었습니다. 이것이 세번째 축복입니다. 예수님은 육체적 건강과 정신적 건강이 조화를 이루는 어린이로 자랐습니다.
예수님의 성장의 제일 큰 복은 네번째 복인데,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임하였더라는 복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자녀들보다 더 큰 복은 없습니다.
자녀가 부모의 품에서 자라지만 대학을 가고 결혼을 하면 부모의 품을 떠나 영원히 돌아오지 않습니다.
과연 누가 우리들의 자녀를 끝까지 책임지고 키울 수 있습니까 부모가 키우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키우시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임하도록 기도하고 축복하는 것처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잘 자랐던 것처럼 아마도 이삭이 자라며 강하여졌으며,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나님의 은혜가 떠나지 않는 축복이 이삭에게 임하였을 것입니다.
이삭은 이렇게 건강하게 자랐습니다. 그러나 그런 이삭에게 문제가 생깁니다.

동생을 괴롭히는 이스마엘
9절을 보십시오.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소생이 이삭을 희롱하는지라
이스마엘은 이삭보다 열네살 위였습니다. 아브라함이 팔십육세 때 이스마엘을 낳았으며 이삭은 1백세에 낳았습니다. 그리고 이삭이 2-3살 먹을 때까지의 기간을 포함하면 이 때의 이스마엘은 사춘기로 예민한 나이인 16-17세였습니다.
바로 그때 이스마엘이 어린 이삭을 희롱하고 핍박했습니다. 이런 일들은 어느 가정에서나 일어날 수 있습니다.
제가 영국에서 목회를 할 때였습니다. 어느 교인이 잘 키우던 한 아이가 두 살 터울로 동생이 생기자 동생을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자기가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 하다가 이제 그 사랑이 동생에게 모두 가는 것처럼 느꼈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날 부모님이 없을 때에 이 어린아이가 막 태어난 아이의 눈을 손가락으로 찔러버렸습니다. 다행히 실명되지는 않았습니다. 이것이 시기하고 질투하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이스마엘이 동생을 희롱하는 모습을 이삭의 어머니인 사라가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모욕당하는 것은 참을 수 있지만 자식이 모욕 당할 때는 참을 수 없습니다. 이삭이 열 네살 위인 이복 형에게 학대를 받는 것을 보자 사라는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라는 즉시 아브라함에게 달려가 따졌습니다. 당장 이 아이와 여자를 내어 쫓으라는 것이었습니다.
14년동안 잘 살고 있었지만 이삭이 태어나자 이런 가정의 문제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가정에서 일어나는 단순한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건을 굉장히 중요한 사건으로 여겨 갈라디아서 4장 22절 이하의 말씀에서 이 사건의 의미를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 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계집 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이암았느니라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 노릇하고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이 사건을 하나의 비유라고 설명했습니다.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난 자요, 다른 하나는 자유한 자에게서 난 자라고 했습니다. 전자는 육체를 따라 난 자라고 말하며 후자를 약속을 따라 난 자라고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한 것이 단순히 이복형이 이복동생을 희롱한 사건으로 본 것이 아니라 영적인 사건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관심은 여기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했던 사건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한 해석은 계속되는 갈라디아서의 구절에 보면 잘 나타나 있습니다.
28절부터 다시 보십시오.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그러나 그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 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 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
성경에 따르면 이스마엘은 육체를 따라 난 자였고 이삭은 약속의 말씀을 따라 난 자였습니다. 사도 바울을 이렇게 말합니다. 그로부터 먼 훗날 메시아가 태어나서 우리를 구원하셨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녀들은 모두 약속의 자녀이다라고 말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약속의 자녀로 축복받은 줄 믿습니다. 우리는 약속의 자녀입니다. 이삭으로부터 태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스마엘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육체의 자녀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비록 이스마엘의 후예라고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약속의 자녀로 축복해 주십니다.
그렇다면 오늘 여기 갈라디아서 4장 28절 이후에 나타난 말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다 약속의 자녀로 태어났는데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니라고 말한 것처럼 이 문제는 영적인 문제였습니다.

옛사람을 내어 쫓으라
우리 안에는 두가지 모습이 있습니다. 육체를 따라 난 자의 모습이 있고 약속을 따라 난 자의 모습이 있습니다. 이 둘이 서로 싸운다는 말입니다. 육체를 따라 난 자녀를 거부하지 않을 때는 육체를 따라 낳은 자녀가 약속을 따라 낳은 자녀를 핍박하고 희롱하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이 거하십니다. 그러나 성령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안에 육체의 자녀, 육체의 생각이 계속 있으면 그것들이 영의 생각을 지배하게 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 하나님을 섬기는 생활에서 승리하지 못하고 갈등하며 육체에 지고 맙니다.
30절을 보면 성경은 네 안에 있는 육신의 소욕을 몰아내라 그리하면 성령의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다시 창세기로 돌아가 봅시다. 사도바울의 해석을 듣고 이 본문을 보면 그 뜻이 분명해집니다. 창세기 21장 10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매
육신의 일은 영의 기업을 계승하지 못합니다. 로마서 8장 5절에 보면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라고 말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말씀함에도 우리는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고, 성령을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안에 있는 육신의 생각을 포기하지 않고 옛사람의 모습을 그대로 가지려고 합니다.
나의 옛사람, 옛자아를 포기하지 않고 신앙생활을 잘 하려고 하기 때문에 육의 생각이 영의 생각을 지배하고 육신의 일이 영의 일을 간섭하며 희롱하는 일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따라서 정말로 예수를 잘 믿고 싶다면 여러분 안에 있는 육신의 생각을 끊어버리십시오. 그래야만 자유하는 자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라는 이삭이 희롱당하는 것을 견디다 못해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어 쫓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자기 남편에게 당당하게 이야기했습니다.
11-12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그 아들을 위하여 그 일이 깊이 근심이 되었더니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을 위하여 근심치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
두 여자를 얻으면 두 자녀가 태어나게 되어 육신적인 갈등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이스마엘이 태어난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인간적인 생각 때문에 태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갈등과 고민이 생겨났습니다.
처음에 하갈을 내어 쫓을 때 그것으로 끝났으면 지금과 같은 문제가 없었겠지만 하나님께서 다시 하갈을 집으로 돌려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을 받아들여 14년간 그 아이를 키웠고 정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약속대로 이삭이 태어나자 이런 갈등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어 쫓으라고 사라가 강력하게 요구할 때 그 말대로 쉽게 내어 쫓을 수도, 그렇게 하지 않을 수도 없었습니다. 이스마엘도 자기 피붙이기 때문입니다. 그 고민이 바로 11절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아들 때문에 깊이 근심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라의 손을 들어주셨습니다. 12절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근심하지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때 아브라함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비록 실수로 낳은 아들이지만 자신의 아들이요 하갈도 자신의 아들을 낳아준 사람이었기에 매정하게 내어 쫓는 일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로 이것은 예수를 믿고 나서 육신의 생각을 떼어 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일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도 믿고 옛사람도 그냥 데리고 살려고 합니다. 둘 사이에 갈등이 생깁니다. 하나님은 네 안에 있는 옛자아를 살려두지 말고 내어 쫓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은 그것이 너무나 고통스러웠지만 하나님의 명령은 분명했습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옛사람을 끊어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살을 뜯어내는 것 같은 고통을 겪습니다. 어떻게 이스마엘을, 또 어떻게 하갈을 내어 쫓으란 말인가 모두 같이 데리고 살았으면 좋을 텐데...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스마엘과의 고통스런 이별
결국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하기로 결정하던 날 아브라함은 잠을 이루지 못했을 것입니다. 부인 앞에서는 고통스런 모습을 차마 보여주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고민은 너무나 깊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깊이 고민하자 하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신지라
우리는 여기서 놀라운 하나님을 만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가 실수한 아들이지만 나는 그 아들에게 복을 내려 큰 민족을 이루게 해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에 보면 이삭에게 준 복이나 이스마엘에게 준 축복이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가슴이 넓으신 분입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 부대를 취하여 하갈의 어깨에 메워 주고 그 자식을 이끌고 가게 하매 하갈이 나가서 브엘세바 들에서 방황하더니
새벽에 아브라함이 일어나 홀로 하갈과 이스마엘에게 집을 떠나도록 짐을 꾸리기 시작했습니다. 물과 떡을 장만해서 자기 부인과 아들에게 이것을 메어 줍니다. 어쩌면 아브라함은 금이나 은같은 패물을 주머니에 넣어 주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하갈, 이스마엘 사이에는 아마도 가슴아픈 이별의 대사가 오고 갔을 것이며 세명 모두 울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살을 에는 고통을 감수하면서 이 불쌍한 여인과 그 아들을 내어 보냈습니다.
이 모습이 바로 나의 옛사람을 끊는 고통입니다. 옛사람은 생각만큼 쉽게 끊어지지 않습니다. 자기 피붙이를 내보내야하는 아브라함의 마음처럼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이스마엘과 하갈을 내보내는 아픔을 겪지 않으면 우리의 옛자아는 죽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옛사람과 새사람이 둘 다 살아있다면, 육의 생각과 영의 생각을 모두 품고 있다면 이스마엘이 어린 이삭을 희롱한 것처럼 육의 생각이 영의 생각을 희롱하게 될 것입니다.
15절부터는 이 사건이 보다 더 드라마틱하게 전개됩니다. 15-16절입니다.
가죽부대의 물이 다한지라 그 자식을 떨기나무 아래 두며 가로되 자식의 죽는 것을 참아 보지 못하겠다 하고 살 한 바탕쯤 가서 마주 앉아 바라보며 방성 대곡하니
아브라함의 집에서 쫓겨난 하갈과 이스마엘은 물이 떨어져 입술과 목이 다 탈 지경이었습니다. 하갈은 떨기나무 그늘에 자식을 앉히고 화살을 쏴서 도달할만한 거리쯤 떨어진 곳으로 가 털썩 주저 앉았습니다. 그리고 죽어가는 아들 이스마엘을 쳐다보며 서럽게 울기 시작했습니다. 과연 이스마엘과 하갈이 어떤 기도를 했겠습니까

이스마엘과 함께 하신 하나님
하나님께서 이들의 방성대곡하는 소리와 간절한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17-18절입니다.
하나님이 그 아이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가라사대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우리 하나님은 놀라우신 분이십니다. 사라와 이삭의 기도만 들으시는 것이 아니라 하갈과 이스마엘의 기도와 통곡 소리를 들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원수가 꼭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예수님은 그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하갈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 기도소리를 다 들었다. 너의 통곡과 저 아이의 기도를 들었다. 이제 일어나 아이의 손을 붙들어라. 내가 이 아이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할 것이다.
인간이 실수했어도 하나님은 그것을 책임지시는 분입니다.
19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시매 샘물을 보고 가서 가죽 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그 아이에게 마시웠더라
하나님께서 고통 가운데 있는 그들에게 샘물을 주셨습니다.
20-21절을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그 아이와 함께 계시매 그가 장성하여 광야에 거하며 활 쏘는 자가 되었더니 그가 바란 광야에 거할 때에 그 어미가 그를 위하여 애굽 땅 여인을 취하여 아내를 삼게 하였더라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 아이와 함께 계셨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이스마엘을 버리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아랍세계를 구원하실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아랍세계도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모든 이방인들도 사랑하십니다.
지금 중동에서 벌어지는 전쟁은 성경의 바른 진리를 깨닫지 못해서 육적인 싸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삭이 크냐 이스마엘이 더 크냐는 적자와 서자의 싸움입니다.
그러나 그 질문에는 해답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는 이 싸움은 영적인 것이지 육적인 싸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삭을 약속의 자녀로 선택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한 가지 입니다. 먼 훗날 이삭의 후예 가운데 메시아가 태어나게 하시기 위서였습니다. 누구든지 그 메시아를 만나고 그를 믿는 자는 구원을 얻게 될 것입니다.
약속의 자녀의 참된 의미는 육체나 족보나 혈통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이방인이건 이스마엘의 후예이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에 참된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저주 받은 인생이 되살아 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기 원하시는 그 비밀을 이삭을 통해 주셨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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