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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창 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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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믿음의 테스트를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잔인하게 아들을 빼앗아가는 하나님의 모습이 아니라 메시아를 우리에게 주고 싶어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놀라운 복입니다. 믿음의 마지막 시험은 주신 것을 빼앗는 것 온 인류 구원위해 번제로 드려질 예수의미하는 이삭 아브라함의 믿음의 삶에는 두번의 큰 계기가 있었습니다. 첫번째는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음성을 들려 주었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인생에 분기점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우리의 인생의 분기점을 만들어 줍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내 인생의 새로운 시작을 만듭니다. 아브라함은 가족들과 함께 갈대아 우르를 떠납니다. 떠나는 것이 구원의 시작입니다. 떠나지 않으면 구원은 시작되지 않습니다. 믿음은 자기가 살던 정든 고향과 친척을 떠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익숙한 것, 가족이나 친척, 고향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떠날때 하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이 아브라함의 생애의 전부는 아닙니다. 오랜 시간동안 아브라함은 실수와 갈등을 겪으면서 믿음이 성장했습니다. 믿음이 완성될 무렵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백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달라고 요구하십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우리가 속되게 하는 말처럼 병 주고 약 준다고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자녀를 얻은 기쁨을 누릴때도 있지만 때로는 그 자녀를 하나님이 먼저 데려가시기도 합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 인생의 여러가지 사건중에 결정적인 사건이 있습니다. 사람을 만나는 것은 결정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결정적인 사건입니다. 아브라함이 늙어 인생의 마지막 시점에 하나님앞에 부름을 받은 사건이 바로 오늘 말씀입니다. 창세기 22장 2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두번째 하나님의 부름은 너무나 감당하기 어려운 가혹한 시련이었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 자신이 생명보다 더 귀중하게 여기는 백세에 얻은 아들이삭을 포기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포기를 요구하는 믿음
여기서 우리는 신앙의 중요한 두번째 명제를 보게 됩니다. 신앙은 내가 가장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생기지 않는 이유는 익숙한 곳에서 떠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익숙한 것을 계속 붙잡고 그것에 의지하여 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1절을 보십시오.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들을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믿음의 마지막 테스트는 내가 사랑하고 좋아하고 가지고 싶은 것을 얼마만큼 포기하는가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만들기위해 오랫동안 훈련 시키셨습니다. 원래 아브라함은 믿음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믿음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믿음 때문에 아브라함이 선택된 것입니다. 여러분이 사랑스럽고 구원받을만한 가치가 있어서 하나님이 여러분을 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선택한 것입니다. 자식이 똑똑해서 부모가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사랑이 자식에게 조건없이 베푸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세상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수준까지 한꺼번에 끌고 오지 않으시고 조금씩 성장시키십니다. 그래서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수준에 맞게 다루십니다. 갑자기 하나님의 수준까지 끌고 간다면 우리는 머리가 돌거나, 포기하거나, 도망갈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답답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답답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계속 연단시켰습니다. 아브라함은 실수도 하고 갈등도 하고, 절망도, 좌절도 하면서 하나님을 조금씩 따라갑니다. 드디어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았습니다. 그는 이방인으로 타국에서 삽니다. 인생은 원래 남의 나라에 사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내 나라가 아닙니다. 이 세상은 사탄이 지배하는 땅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고향은 하늘 나라입니다. 우리는 잠깐 남의 나라의 땅에 살기 때문에 고독하고, 외롭고, 힘들고, 허무하고, 병이 듭니다. 그 나라에 가면 그런 일이 없을 것입니다. 많은 세월이 흘러 아브라함의 믿음도 완숙한 단계가 되었습니다. 믿음의 완숙은 실패를 통해 이루어 집니다. 성공한 사람들은 실패의 사건보다 성공한 사건들만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 성공은 실패라는 과정없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고통이란 과정을 거치지 않고 성숙은 없습니다.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많은 세월동안 하나님은 참았습니다. 아브라함을 위해 하나님이 끝까지 기다려 주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믿음이 성숙한 사람으로 변해갑니다. 성숙이란 어떤 일을 당해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에 이르는 것입니다. 얻었을 때만 아니라 줄 때도 흔들리지 않는 것, 건강할때만 아니라 병들었을 때에도, 살때만 아니라 죽을때도 평안한 것입니다. 부도가 나고, 사랑하는 자식이 죽어가도 흔들리지 않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그런 믿음에까지 이르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이 성숙한 단계까지 왔다고 생각했을 때 다시 나타납니다.
아브라함에게 온 시험
1절을 보시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무엇을 주기 위해 오신것이 아니라 빼앗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모두 다 주었기 때문에 이제는 빼앗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테스트는 아주 중요합니다. 두란노에서 목사님들을 대상으로 목회연구원을 하는데 아무리 좋은 강의를 해도 원하는 수준까지 도달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원인을 찾아 보았더니 시험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숙제도 있고 시험도 있어야 성장도 있습니다. 학생들이 제일 싫어 하는것이 시험입니다. 그래도 테스트는 꼭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수 있습니다. 시험을 봐야 자신의 약점과 부족한 부분을 알 수 있고 점검해서 보완할 수 있습니다. 시험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테스트하셔서 우리의 믿음에 약하고 잘못된 부분을 보완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이제 다 키웠다고 생각하시고 시험을 보시는 것입니다. 시험을 받을 때는 너무나 힘들다고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그 시험을 통과해야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의 수준까지 우리를 이끌어 가십니다. 시험이라는 단어는 세가지 다른 말이 있습니다. 첫째, 한국말로는 시험이지만 영어로는 유혹이라고 부르는 시험이 있습니다. 템테이션(Temptation)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야고보서 1장 13절에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하나님에게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시험을 받으시지도 시험하지도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격을 점검하는 테스트와 유혹을 받는 템테이션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유혹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사단이 우리를 유혹할 뿐입니다. 두번째 시험은 시련이라는 시험입니다. 야고보서 1장 12절을 보면 시험을 참는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라고 됩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시련을 겪게 됩니다. 자신이 잘못하지 않아도 시련은 오게 되어 있습니다. 시련은 누구든지 겪게 마련이고 시련을 통해서 성장하고 성숙해집니다. 시련이 올 때 잘 참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는 생명의 면류관이 주어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말씀의 시험은 점검하는 테스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친히 우리를 위하여 행하시는 것입니다. 1절을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테스트하기 위해 찾아오십니다.
준비된 대답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찾아와 아브라함아라고 부르십니다. 아브라함은 예 제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우리가 이 곳에서 자세히 살펴볼 것은 예전의 아브라함의 대답의 방법과 많은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전에도 수없이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불렀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마다 아브라함은 순종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아브라함의 대답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대답한 의미는 하나님 어떤 명령을 내릴지라도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라는 뜻입니다. 마틴루터가 종교개혁을 하면서 이와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법정에서 그가 재판을 받을 때 카톨릭신자들에게 수많은 압력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나는 바꿀수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이 종교개혁을 일으켰습니다. 사람들이 가장 쉬운말 네가지를 못한다고 합니다. 고마울 때 감사하다라고 말하지 않고, 미안할 때 미안하다고 못한답니다. 세번째 예라고 대답해야 할 때 예라고 하지 못하고 틀린 것을 보고 아니오라고 말하지 못한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예 내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믿음을 점검하는 하나님의 시험은 아브라함에게 너무나 가혹한 테스트였습니다. 그 시험은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세워주는 믿음에 관심이 있습니다. 믿음을 갖겠다는 것은 무엇을 얻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갖는데 관심이 있고, 부자가 되고 권력을 쥐는데 믿음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을 주겠다는 것이 아니라 뺐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네게 백세에 아들을 주겠다고 말하면 기분이 좋습니다. 그런데 백세에 얻은 아들의 생명을 가져가겠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얼굴색이 변하고 서성거리게 됩니다. 우리는 여기서 믿음의 아주 중요한 정의를 발견하게 됩니다. 처음 믿음은 아들을 얻었듯이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마지막 단계는 주신 것을 빼앗기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나를 포기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백퍼센트 신뢰할 수 있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백퍼센트 믿음입니다. 만일 오십퍼센트를 신뢰한다면 오십퍼센트믿음입니다. 무엇을 의지하는지가 우리의 믿음을 결정합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이 무엇을 얼마나 주시는가가 아니라 자신을 얼마나 포기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이 세상의 비극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유한한 자신을 의지하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이제 우리는 곧 죽을 터인데 죽음을 준비하지 않고 마지막 순간까지 무엇인가 붙잡기 위해 노력합니다. 여기에 우리의 한숨과 고독이 있습니다. 자기를 꺾고 포기하지 않기 때문에 교회를 평생 들락날락해도 믿음의 세계에 발도 들여놓지 못합니다. 그저 종교적인 프로그램에 익숙해져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기회가 없는 것은 나를 포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네 자식을 포기하라
그러나 2절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보고 너를 포기하라라고 하지 않고 네 자식을 포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부모는 자식이 죽게 되었을 때 대부분 자식이 죽는 것보다 자신이 죽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암에 걸린 자식이 죽어갈 때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하나님 제가 대신 죽을께요라고 합니다. 이것은 사실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사랑하는 자식을 내놓으라고 말합니다. 네 사랑하는 아들, 네 독자라는 표현을 쓰는데 이것은 쓸말이 없어 이렇게 많은 말을 쓴것이 아니라 얼마나 아브라함에게 이 아들이 소중한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참된 믿음이란 나의 생명과 존재보다 더 귀한 것을 포기하는데 있습니다. 포기의 강도가 높아지면 믿음의 강도가 높아집니다. 포기하는 것이 없으면 장로나 집사, 아무리 교회에 오래 다녔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왜 사람들은 자신을 의지할까요 유한하고 죽을수 밖에 없는 자신을 의지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을 너무나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이력서 쓰기를 좋아하고 수많은 훈장을 갖기를 좋아합니다. 그것이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연예인교회를 할 때 유명한 여배우가 어느날 저를 찾아와 이렇게 고백을 했습니다. 목사님, 제가 대종상을 받고 영화상을 받은 것을 제 장농에서 치워 버렸습니다. 그것이 나를 속여 왔습니다. 내 인생을 속였습니다. 그 화려한 사람들의 음성과 인기에 많은 세월을 보냈습니다. 하나님은 집요하게 네가 아니라 네 아들을 달라고 요구하십니다. 아들을 번제로 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저 죽이거나 내보내라는 것이 아니라 번제로 달라고 하십니다. 번제라는 말은 대속의 의미가 있습니다. 번제의 제물이란 다른 사람의 죽음을 대신하는제물의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제일 알기 쉬운 것이 심청전입니다. 눈먼 아버지를 위해 자신의 몸을 던져 임당수물에 빠져 죽습니다. 아버지의 눈을 위해 자신의 몸을 버립니다. 번제는 제물입니다. 한국교회가 부흥하는 이유는 순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미국교회가 크지만 순교자가 없기 때문에 공허합니다. 제물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소중한 이유는 온 인류를 위한 제물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2장 6절-8절을 보면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요한일서 4장 10절에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라고 말합니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요구와 명령에는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큰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 그것은 먼 훗날 이 땅에 하나님의 아들이 태어날 것인데 그 아들을 온 인류를 위해 번제로 내어 주실 것이라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아들을 빼앗아 가는 것 이상입니다. 그러므로 이삭은 스스로 죽으면 안됩니다. 이삭이 죽는 방법이 아주 중요합니다. 그것은 스스로 죽거나 누가 죽이면 안되고 번제로 드려져야 합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아들의 심장을 꺼내어 피를 흘려야 한다는 사실은 기가 막힌 일입니다. 아들을 달라고 하면 그저 주고 도망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방법은 안됩니다. 아버지가 칼을 들어 아들의 심장을 찔러야만 합니다. 아버지는 고통없이 아들을 죽일 수 없습니다. 고통을 당하는 아들을 지켜보아야 합니다. 기막힌 심정으로 아들이 죽는 것을 자기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게 내어주고 고통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서 죽는 장면을 목격해야만 했습니다. 피를 흘리며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고 외치는 그 모습을 하나님은 피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그것과 동일한 일을 아브라함을 통해 겪게 하십니다.
모리아산으로 가는 아버지와 아들
하나님은 예수님이 피흘리는 모습을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런 고통의 대가를 치루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골고다 언덕으로 끌려 가셨습니다. 이삭은 안방이나 논에서 죽일 수 없고 산에서 죽여야 했습니다. 먼길을 가서 죽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그러셨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은 삼일길을 걸어 모리아산으로 갔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무슨 말을 했겠습니까. 삼일동안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를 생각해 보십시오. 생명과도 같이 사랑하는 아들을 번제로 드려야 하는 아버지의 심정과 아무것도 모른채 따라가는 이삭이 함께 가는 길에서 나누었을 대화를 상상해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삼일을 겪었지만 하나님은 수천년동안 자기 아들을 내 손으로 죽여야 한다는 사실을 묵상을 하셔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서 삼십년동안 돌보아 주셨습니다. 십자가에 갈 때까지 하나님은 그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게 내어주고 참아야 했습니다. 차라리 어느날 갑자기 십자가에 못박아버리면 쉽습니다. 참을 수 없는 고통은 죽임을 당하기 위해 걸어가는 아들의 모습을 그저 바라볼수 밖에 없는 심정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산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 아들의 등뒤에는 아들 자신을 태울 나무를 지고 가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무슨 말을 할수 있을까요 결국 예수의 이야기입니다. 이삭의 이야기는 예수의 이야기이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이야기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아들을 세상에 내어주는 아버지의 이야기입니다. 믿음이란 예수를 만나는 것입니다. 적극적이고 생산적인 사고방식으로 하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믿으면 된다라는 것은 최면이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은 병들어 죽을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그리스도를 붙잡았다면 그것이 믿음입니다.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았다면 그것이 믿음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너무나 세상적으로 잘못 사용하고 있습니다. 성경적인 믿음은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어린양을 만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 을 보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안에서 사는 것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믿음의 테스트를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잔인하게 아들을 빼앗아가는 하나님의 모습이 아니라 메시아를 우리에게 주고 싶어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놀라운 복입니다.
기도합시다
자기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아브라함을 통해 배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사랑을 너무나 값싸게 여기고 하나님의 고통을 너무나 간단하게 생각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이후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게 내어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 이후부터 예루살렘 골고다언덕에서 자기 아들 예수가 못박혀 죽을 것을 생각하면서 얼마나 고통하시며 기다리셨습니까 우리가 여기 있사오니 받아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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