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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히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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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5절 하반절을 보면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구약성경 신명기 31:6의 인용입니다.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행하실 것임이라 반드시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13장의 경우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생활을 할 때 하나님께서 떠나지 않으신다는 것이고 신명기 31장의 경우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으로 살 때 담대한 삶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3:1-5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태도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사는 사람들을 하나님은 떠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이 요구하는 크리스쳔의 삶은 어떤 것인가를 살펴 보겠습니다.
1 형제 사랑을 계속하라는 것입니다.
1절을 보면 “형제 사랑을 계속하고”라고 했습니다.
사랑의 진위여부는 그것이 일관성이냐 지속적이냐 그리고 일시적이냐 영원한 것이냐로 판명됩니다.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지속적이며 영원하기 때문에 높고 귀한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6:24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찌어다”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강조한 <변함없이>라는 것은 지속적인 사랑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온돌방처럼 펄펄 끓다가 며칠 만에 식어버리는 사랑보다는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서로를 신뢰하고 사랑하는 것이 훨씬 더 고상한 사랑인 것입니다.
변덕스런 사랑보다는 지속적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본문은 형제가 누구이며 그들을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1)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말라고 했습니다.
신명기 10:19을 보면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나그네에게 숙소를 제공하고 음식을 대접하는 것을 미풍양속으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나그네를 대접할 때마다 애굽에서 학대받고 살던 일을 생각하곤 했습니다.
물론 우리 가운데 부모덕으로 어려서부터 호의호식하며 고생이 무엇인지 모르고 자란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유년기나 청소년기를 가난과 싸우며 보냈을 것입니다. 바로 “그때”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어느 날 자기 집을 찾아온 낯선 나그네 세 사람을 극진히 대접했습니다.
창세기 18장을 보면 아브라함은 그들을 위해 발 씻을 물을 떠서 제공했고 송아지를 잡아 요리를 만들었고 밀가루로 떡을 비졌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 세 사람은 하나님과 천사들이었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그 사건을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천사를 대접하기 위해 대접한 것이 아니라 손님 대접하기를 기뻐하다가 우연히 천사를 대접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열왕기상 17장을 보면 사르밧 동네에 살고 있던 한 과부는 마지막 남은 가루 한 웅큼과 기름으로 음식을 만들어 자기 집을 찾아온 엘리야를 대접했습니다. 때는 흉년이었고 가루 한 웅큼은 그녀와 아들의 마지막 식량이었습니다. 그녀가 그 사건 때문에 받은 축복은 흉년이 끝날 때까지 가루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손님 대접은 너그러운 마음을 지닐 때 가능합니다. 그리고 그 축복이 크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2) 고통받는 이들을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3절을 보면 “자기도 함께 갇힌 것 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자기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받는 자를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갇힌 자와 학대 받는 사람들을 형제로 보고 그들에게도 사랑을 베풀라는 것입니다.
사더행전 12장을 보면 초대교회 지도자였던 베드로가 헤롯 왕의 박해로 투옥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베드로가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교인들은 모여 기도했다는 점입니다(12:12).
시체말로 하면 고통을 분담한 것입니다.
영국의 어느 잡지사가 독자들을 대상으로 인간관계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했습니다.
설문 가운데 <친구란 누구인가>라는 항목이 있었습니다. 친구란 “꼭 필요할 때 곁에 있어 주는 사람” “모든 사람이 내 곁을 떠날 때 내 곁으로 오는 사람”이라는 응답이 최우수 응답으로 뽑혔습니다.
영국 감리교 목사이며 심리학자인 위더 헤드(L.D. Weatherhead)에게 어떤 환자의 임종을 지켜보고 있던 간호사가 물었습니다. “목사님 만약 저분이 돌아가시면 저분의 아내에게 뭐라고 위로를 해야 될지 모르겠어요”라고. 그에게 위더헤드 목사는 “그 부인에게 따뜻한 차나 한 잔 가져다 드리도록 하시오”라고 대답했습니다. 곁에 있어주는 사람, 위로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월리스(Wallis)의 글 가운데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친하게 놀던 소꿉장난 친구의 어머니 장례식에 다녀온 딸에게 어머니가 물었습니다. “네 친구에게 뭐라고 위로했니”, 딸의 대답은 “엄마,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그냥 그 아이 곁에 앉아 껴안고 함께 울었어요”라고.
말 한마디가 위로와 용기와 격려를 주는가 하면 불쑥 내뱉는 말 한마디가 곧 깊은 상처를 주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겨울은 고통받는 이들의 고통이 가중되는 계절입니다. 지금 우리 주변에는 가난, 질병, 실패, 재난, 이별, 억울함 때문에 고통받는 이웃들이 많이 있습니다.
본문은 그들을 생각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네가 그 입장이 된 것처럼 그들의 고통을 마음에 두라는 것입니다.

2 혼인을 귀히 여기라는 것입니다.
4절을 보면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하라”고 했습니다.
결혼제도는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기 때문에 사람이 마음대로 바꿀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결혼에는 두 가지 큰 법칙이 있습니다.
첫째는 남자와 여자가 결혼해야 됩니다.
아담과 하와의 결혼은 1남1녀의 결혼이었습니다. 그래서 호모섹스는 용납될 수 없는 것입니다. 에이즈의 발원지가 호모섹스에 있다는 것은 결혼의 가장 중요한 질서를 파괴한데 대한 하나님의 심판인 것입니다.
둘째는 일회적 사건이어야 됩니다.
한 번 결혼 했으면 생애를 마감할 때까지 헤어져선 안됩니다.
성경이 용납하는 이혼은 음행을 저질렀을 때 뿐입니다.
결혼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조건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첫째 타당성이 인정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20세된 남자와 60세된 여자가 결혼을 한다든지 여자와 여자가 결혼을 하는 것은 타당성이 없습니다.
신앙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타당성이 인정되어야 합니다.
둘째 이교도와의 결혼은 금해야 합니다.
신명기 7:3-4을 보면 “또 그들과 혼인하지 말찌니 네 딸을 그 아들에게 주지 말것이요. 그 딸로 네 며느리를 삼지 말 것은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로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고 했습니다.
결혼해서 잘 살아도 신앙이 죽어 버린다면 그것은 못 사는 것입니다. 행복한 결혼은 부부가 함께 예수 믿고 사는 것입니다.
셋째 자나친 혼수나 사치스런 결혼을 금해야 합니다. 예수 믿는다면서 지나친 혼수를 요구한다든지 조건을 강요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넷째 결혼을 귀히 여겨야 합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사건이며 축복이기 때문에 결혼을 소홀히 취급하면 안됩니다. 선택이나 결정도 신중해야 하고 결혼생활도 소중해야 합니다.
3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는 것입니다.
5절을 보면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돈을 다스리고 관리하는 행위를 학문적으로는 <경제>라고 말합니다.
사람이 돈의 지배를 받고 속박을 받는 것은 정상적 질서가 아닙니다. 돈 때문에 망하는 사람들의 경우를 보면 초기에는 사람이 돈을 법니다. 그러나 중반에 접어들면 돈이 돈을 법니다. 그러나 중반에 접어들면 돈이 사람을 법니다. 그러다가 중반에 접어들면 돈이 사람을 잡아 먹고 맙니다.
바울은 디모데전서 6:9-10에서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6:8에서는 “우리가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비행기 여승무원을 스튜어디스(Stewardess)라고 합니다. 이 말의 어원은 고대 영어인 Stig Weard라는 말이라고 합니다. 그 뜻은 “돼지 우리를 지키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 말이 발전해서 “주인의 식탁을 준비하는 사람”이 됐고 나중에는 다른 사람의 가사를 관리하는 사람”이 됐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930년 미국의 보잉사가 간호사 8명을 뽑아 정기항로에 승무원으로 탑승하게 하면서부터 스튜어디스라고 부르게 됐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키고 관리하는 사람이지 주인이 아닙니다.
돈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돈 때문에 죄를 짓거나 망하면 안 됩니다. 교도소에 수감돼 있는 사람들의 70% 정도는 돈과 관련되어 있다고 합니다.
돈이 없어서 죄 짓고 더 벌기 위해 죄 짓고 쉽게 갖기 위해 죄 짓고 훔치다가 죄 짓고 관리 잘못해 죄 짓게 되는 것입니다.
중병으로 입원해 있는 50대 초반의 남자를 만났습니다. 그가 받은 진단은 신경쇠약에 간경화에 위무력증이었습니다.
그는 회사를 키우기 위해 낮도 밤도 없이 뛰어 다녔습니다.
돈을 버는 일이라면 수단도 방법도 가리지 않습니다. 교회도 예수도 버렸습니다. 그러기를 20년 동안 계속했습니다. 20년이 지난뒤 먹고 쓸 만큼의 돈을 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행복이 아니었습니다. 간경화, 위무력증, 신경쇠약, 그래서 절망, 좌절, 패배감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뉘우치고 있었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바울은 말씀합니다. “돈을 사랑하지 말라”고. 그 뜻은 돈은 생활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돈은 물질이지 인격이나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돈을 많이 법시다. 그러나 돈의 노예가 되지 맙시다. 돈을 많이 법시다. 그리고 가치있게 씁시다.
4 결론을 찾겠습니다.
본문 5절 하반절을 보면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그 뜻은 주님의 뜻을 바로 깨닫고 바로 사는 사람들을 주님은 버리거나 떠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시편 37:25을 보면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13:6을 보면 “주는 나를 돕는 자시라”고 했습니다.
죄인도 회개하면 버리지 않으시고 가까이 하십니다. 그러나 바르게 살기를 거부하고 주님을 외면하려는 사람이나 제멋대로 살려는 사람은 멀리하십니다. 그들을 돕지 않으십니다.
구원은 어떻게 믿느냐로 결정되고 축복은 어떻게 사느냐로 결정됩니다. 우리가 진실로 축복되고 살기를 원한다면
주님을 가까이 해야합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들의 행복의 방향을 주님께로,
우리의 시선과 관심을 주님께로,
우리의 삶의 초점을 주님께 맞춰야 합니다.
그들을 주님은 버리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199

3.1

2.12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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