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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사 55: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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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인간과 비슷한 조건을 가진 분이라면 친구는 될 수 있어도 신앙의 대상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람처럼 늙고, 병들고, 죽는다든지 생각하는 것이나 말하는 것이 유치하다면 우리의 하나님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8절을 보면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라고 했습니다. 이 한구절 말씀으로 하나님과 인간은 같은 존재가 아님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물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피조돤 존재이기 때문에 모든 피조물 가운데 가장 하나님과 비슷한 점들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은 하나님이 될 수도 없고 하나님 행세를 해도 안되는 것입니다.
자신을 신격화했던 세계 유일의 독재자 김 일성의 죽음은 여러가지 면에서 충격적 사건이었고 다양한 반응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김 일성이 일생동안 저지른 몇가지 잘못을 지적한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그는 한국전쟁을 일으킨 전범입니다.
김 일성의 남침이 역사적 사실로 증명되고 있는 요즈음도 북침이라고 우기는 정신병 환자들이 있다는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김 일성이 일으킨 6.25 동란의 상처는 지금도 지워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는 이산가족, 전쟁 미망인, 상이군인의 한과 슬픔을 만든 장본인이며, 주전범인 것입니다.
둘째 반세기 동안 자신의 권력과 체제유지를 위해 역사적 유례를 찾아 보기 힘든 독재정치와 폐쇄정치로 북한을 도탄에 빠뜨렸습니다.
그는 북한 주민을 눈뜬 장님으로 만들었습니다. 사상과 체제의 노예로 세뇌시키고 속박시켰습니다.
셋째 북한을 세계에서 가장 살기 힘든 가난한 나라로 만들었습니다.
아프리카의 이디오피아나 소말리아, 모잠비크 같은 나라처럼 천연자원이나 기후가 악조건이어서 굶어죽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사건이라고 치더라도 북한 주민이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국경을 넘어 탈출하는가 하면 망명을 요청하는 것은 무엇때문입니까 모두가 다 김 일성 정치의 실패 때문인 것입니다.
러시아 모처에서 비밀리에 만난 북한 사람에게 밥을 대접했다고 합니다. 밥을 보자 그는 숨도 쉬지않고 밥을 움켜 먹었습니다. 곁에서 지켜보던 사람이 그렇게 빨리 밥을 먹으면 체하게 된다면 천천히 먹으리고 권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굶어죽으나 먹다가 죽으나 죽는것 마찬가지라며 계속 밥을 정신없이 먹더라는 것입니다.
경제는 정치의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백성을 굶어죽게 만드는 정치라면 무슨 소리를 해도 잘못한 정치인 것입니다.
넷째 자신의 우상화입니다.
김 일성 뺏지와 동상을 비롯해 그는 자신을 절대화하고 우상화하는데 전심전력했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진노하시고 용서치 않으시는 것이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이스라엘은 일찌기 바알, 아스다롯, 몰렉 등 이방우상을 끌어들여 숭배했습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받았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의 아합왕조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아합 왕은 이방여인 이세벨과 결혼하면서 그녀가 섬기던 바알우상을 함께 끌어 들였습니다. 그리고 그 죄값으로 3년 반 동안 비가 오지않아 그 나라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뿐입니까 아합왕조 자체가 무너져 버렸고 아합과 이세벨은 비참한 최후를 마쳐야 했습니다.
그 누구라도 우상을 숭배하거나 자신을 우상화하면 지옥갑니다.
요한계시록 22:15을 보면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 밖에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개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을, 술객들은 무당 점쟁이를 말합니다. 행음자란 우상숭배를 했거나 우상종교를 지지하거나, 방조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살인자들은 체제, 정권, 사상을 위해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는 자들을 말하고, 거짓말하는 자들이란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고 자신을 위하고 남을 해롭게 하기 위해 거짓말을 만들고 퍼뜨리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세상 떠난 김 일성은 요한계시록 22:15절 전체에 해당됩니다. 그러니까 그가 간 곳은 뻔한 것입니다.
다섯째 무신론을 주장한 것입니다.
그는 종교를 아편이라고 속단했고, 특히 기독교에 대해서 적개심을 가지고 지도자들을 숙청했으며, 교회를 모조리 없애버렸습니다.
봉수 교회나 그의 고향에 지었다는 교회는 그의 선전용에 불과했습니다. 만일 그 교회가 선전용이 아니고 진정한 교회였다면 교인이 수천 수만 명으로 매주일 불어나고 성장했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신이었고, 하나님을 부인한 무신론자였습니다.
유신론과 무신론은 협상 테이블이 없습니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는 절충이나 접목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유신론과 무신론은 둘 중에 하나가 무릎을 꿇거나 손을 들거나 죽어야 합니다.
남한에 가면 하나님이 있는 것으로 하고 북한에 가면 하나님이 없는 것으로 하자는 식의 절충이 불가능합니다.
무신론자가 유신론자가 되면 그는 행복한 사람이 됩니다만 그러나 유신론자가 무신론자가 되는 것은 멸망과 지옥으로 굴러 떨어지는 첩경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유신론자라면서 무신론의 괴수를 위대한 수령 어쩌고...하는 것은 그도 무신론자라는 얘기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진노 하실 것입니다.
김 일성, 그는 이제 영원히 악명만을 남긴 채 역사의 지평에서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의 악연이 끝났기 때문입니다.
남북정상회담, 북미회담 거기에 거는 기대, 세계의 관심과 함께 그는 숨쉬지 못하는 미이라가 되어 관 속에 누워 있습니다.
저는 이 사건을 지켜 보면서 본문이 생각났습니다.
독재자 김 일성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김 일성을 협상 파트너로 생각했던 정부나 미국의 생각은 하나님의 생각과는 같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세습적 절차로 정권을 승계한 김 정일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도 전혀 다를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문 속에서 하나님과 우리가 다른 점 두 가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1. 생각이 다릅니다.
8절을 보면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라고 했습니다.
몇 가지 다른 점을 살펴 보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생각은 거룩하십니다.
그러나 인간의 생각은 속되고 추합니다.
마가복음 7:21-23을 보면 사람의 마음 속에서 나오는 악한 생각 목록이 열거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음란, 도적질, 살인, 간음, 탐욕, 악독, 속임, 음탕, 흘기는 눈, 훼방, 교만 등 이 모든 악한 것이 속에서 나온다”고 했습니다.
온갖 추잡한 것들로 가득찬 사람의 생각과 거룩하신 하나님의 생각을 비교할 수가 있겠습니까
둘째, 하나님의 생각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영원불변하신 분이기 때문에 그 분의 생각도 변하지 않습니다. 조건이나, 환경을 따라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생각은 변합니다.
40년대나 50년대 사람의 생각은 아침 저녁으로 변했다고 합니다. 70년대 80년대 사람은 오전 노후로 변했다고 합니다. 90년대 사람들의 생각은 시간마다 변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요즘 소위 신세대, X세대의 생각은 종잡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왜 마음이 변했니”라고 물으면 “내 마음 나도 몰라”라고 대답한다고 합니다.
변덕스럽고, 경망스럽고, 방정맞은 태도나 생각이 정상처럼 보이는 세상입니다만 하나님의 생각은 변하지 않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생각은 늘 따뜻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생각은 범죄지향적이며 냉소적일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생각 속에는 늘 인간에 대한 사랑과 구원이 가득차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생각 속에는 시기, 분노, 질투, 미움 등이 가득차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에는 비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미국 존 홉킨즈 대학교의 사회학과 교수가 자기반 학생들에게 과제를 내주었습니다. 그것은 볼티모어 시내 빈민가에 사는 200명의 청소년을 만나서 그들의 희망이 무엇이며 장래 자기가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조사하도록 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90%가 훗날 교도소에 갇혀 있을 것이라고 응답했다는 점입니다. 그로부터 25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교수가 자기 연구실의 서류들을 정리하다가 그때 그 설문조사 자료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그때 그 청소년 200명이 궁금했습니다. 그는 자기 과의 제자들을 동원해 그때 그 청소년 200명을 찾아 확인하는 작업을 지시했습니다. 그 결과 180명을 확인했고 그 중 놀랍게도 4명만 교도소에 갇혀 있었습니다.
왜 그들이 교도소에 들어가지 않고 변화받아 당당한 사회인이 되었는가를 알기 위해 그들을 개별적으로 만나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 결과 100여명이 고등학교 시절 교사 였던 [오로크]라는 여자 선생님의 영향 때문이었다고 대답했습니다.
[오로크] 선생님은 은퇴한 후 양로원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를 찾아가 어떻게 학생들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가르쳤는가를 물었습니다. 그 할머니 교사의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제가 말할 수 있는 것은 한가지 뿐입니다. 그것은 저는 그들을 모두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저는 그들을 사랑했습니다”라고.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생각 때문에 죄사함 받고, 영생얻고, 오늘도 따뜻한 은총 속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2. 길이 다릅니다.
8절을 보면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라고 했습니다.
길은 계획, 목적, 가고자 하는 길, 하고자 하는 일을 의미합니다.
내 계획과 하나님의 계획, 내 목적과 하나님의 목적은 다릅니다. 내가 하고 싶고, 내가 가고 싶은 길도 하나님의 길과는 다른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길을 다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길을 선택하고 그 길을 따르면 삶이 편하고 길이 형통하지만, 하나님의 뜻이나 계획을 외면하고 내 길을 고집하고 주장하면 그 길이 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길은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이 안내하시고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철저하게 보호하시고 지켜 주십니다.
1791년 11월 4일 조지 워싱턴이 이끄는 군대가 세인트 클레어에서 대패했습니다. 부하가 조용히 물었습니다.
“각하 이 패배가 장군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지 않았습니까”라고. 그러자 워싱턴은 “이겨도 하나님의 손 안에 있고, 져도 하나님의 품 안에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길을 따르는 태도인 것입니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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