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하나님의 영광 (요 11:1-4)

첨부 1


요한복음 11장부터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궁극적인 목적인 우리를 위하여 죽 으시는 대속의 사역이 드디어 시작됩니다. 물론 그 사역은 십자가 죽음으로 완성되 는 것입니다. 1-10장에 있었던 것과 전혀 달리 11장부터는 예수님께서 죽으실 준비 를 하시고, 노골적으로 선언하시는 대목으로 진입하는 것입니다.

11장에 있는 사건은 우리가 잘 아는것과 같이 죽은 나사로를 살려 내는 일입니다.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서 썩은 냄새가 나는 자를 살려 내는 사건을 시점으로 드디 어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희생 제물이 되시고 돌아가실 사건을 암시하기도 하고, 그 사건이 우리들에게 제대로 전달 하기 위한 내용들을 11장에 전개해 놓았 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은 다만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도 살려 내시는 분이심을 증명하시 기 위하여 기록된 사건으로 보아서는 안됩니다. 그것보다 훨씬 깊은 내용이 포함되 어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바로 그러한 부분들을 추적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요11:4절을 보십시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 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요한복음을 우리가 추적해 보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당신의 복음이 진리 되심과 또한 내세와 천국에 관한 것들을 설명하시고 설득하시기 위하여 오시지는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진리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우 리가 그것을 알아듣고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하게 만드시려고 오신 것이 아 니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설명하고 설득하러 오신 것으로 잘 못 이해하게 되면, 오히려 그 설득이 실패하여 죽으실 수 밖에 없었다는 식으로 아 주 잘못 될수 밖에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더라도 우리에게는 그와 비슷한 당연한 형태의 질문들이 있습니 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 번거로운 일을 하시는가'하는 점입니다. 예 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고 이렇게 싸우시고 어차피 죽으실 거라면 그냥 오셔서 돌아 가시지 33년동안 그것도 생애의 마지막 부분인 3년밖에 활동을 안하셨으면서 그렇 게 오래 기다리실 필요가 뭐 있었겠는가 하는 질문을 할 수도 있습니다. 왜 하나 님게서는 이렇게 일하실까요 이러한 질문중의 하나가 바로 오늘 본문의 사건에서 도 제기될 수 있습니다.

나사로가 병들어 죽게 되었다고 보고가 왔습니다. '어떻게 손을 좀 써주십시오!' 라는 요청이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건 죽을 병이 아니다. 이 일을 통하 여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 나님의 영광이라는 단어가 개입되는 사건마다 병주고 약주는 느낌이 드는 것을 금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신자들의 감사거리들이 대개 그런 식이 아닙니까 넘어져 서 이마를 다쳤는데 뭐라고 감사를 합니까 눈이 다치지 않는 것이 얼마나 감사하 냐!고 말합니다. 넘어졌는데 뽀족한 돌이 있었기에 자칫 이마 밑에 눈에 찔렸다면 얼마나 큰일 났겠느냐! 차라리 이마를 다친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하는 말입니다.

이럴 때 상대방이 말하기를 '야 그럴려면 안 넘어지게 하면 될 거 아니냐! 이렇게 나오면 갑자기 우리는 할 말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껏 뭐라고 대답합니까 '하나님 앞에서는 그딴 말을 하는 게 아니예요'라고 얼머부립니다. 우리나라 신자 들이 신앙 좋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신앙이 좋다는 것은 내용적으로가 아니라 자세 가 참 좋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께 누를 끼치지 않으며 무슨 딴 생각을 품 지 않으려고 애쓰는 그 자세는 기가 막힐 정도로 기특합니다. 하지만 바로 이것이 무식하고 유치한 신앙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이유가 되기도한다는 사실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여러분을 변론자나 사상가로 만들려고 하자는 것은 아닙 니다. 성경 자체가 뜻밖에도 우리에게 그런 구체적인 질문을 하게 하도록 사건들을 제시하고 있게 때문입니다. 이같은 사건이 오늘 본문 뿐만 아니라, 9장에서도 나타 납니다. 요9:1-3절을 보십시다.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가로 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그러면 여러분 여기서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아니 세상에 하나님이 자기 생색 내 시려고 멀쩡한 사람을 소경으로 태어나게 했단 말이여요 물론 그렇지 않을 것이라 는 기대를 우리가 가지고 있습니다만 그 문제를 누가 굳이 붙잡고 늘어진다면 적당 한 해답이 생각나십니까 우리 신자들이 가지는 가장 큰 결점 중의 하나는 문제가 없을 때는 괜챦지만 문제가 생기면 꼼짝 못하는 병입니다. 왜냐하면 문제를 풀어서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기대와 막연한 소망 속에 살고 있지, 우리의 힘과 우리가 갖고 있는 것들을 자신있게 '이것이다'고 하여 우리 손에 갖고 있는것 이 의외로 적습니다. 기대 사항이 넘칠 뿐입니다. 기대가 클 뿐이지, 사실을 소유 하고 있느냐 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자신이 없다고 고백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인 11장에 돌아와서, 이 11장 이후부터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 아가실 것을 분명히 하면서 죽으시게 되는 내용들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요1-10장 까지는 하나님을 아는 자도 없고, 사랑하는 자도 없고, 빛이 왔으되 빛을 찾아 나 온 자도 없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죽으실 것입니다. 이 시점에 서 우리는 이런 생각이 듭니다. 왜 문제를 이렇게 복잡하게 만드시는 것일까 그러 지 마시고 아담과 하와가 타락했을 대 아예 인간들을 없애 버려서 새로 만들었으면 지금 우리가 지금 이런 고생을 안하고 태어날때부터 천국에서 잘 먹고 잘 살았을 텐데....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항변을 마음으로부터 하기도 합니다. '하나님, 무었때문에 이렇게 골치아픈 일을 주십니까 이렇게 병주고서는 우리에게 늘 사랑하신다고 해놓고 실제로는 하나도 도움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우 리의 인생 중에서 언제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족시주셨습니까 언제 우리의 요청에 하나님께서 제대로 응답해 주셨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늘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 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를 축복한다' '내가 너를 사랑하므로 매를 들 고 너를 아꼈으므로 곤란케 했다'고 그러십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하여 우리는 사실 잘 모릅니다. 우리를 데리시고 혼란시 키시고, 희롱하시는 것 같고, 장난치시는 것 같고, 우리를 너무 괄시하는 것 같아 보이는 것일 때는 없습니까 신자들에게 있어서 그의 신앙이 가장 활발할 때는 언 제나 세상적으로 일이 없을 때이고, 정작 일이 생겨서 하나님 앞에 응답받고 항복 해서 들어오는 일은 훨씬 적어 보이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비밀이 있습니다. 하 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영광을 들먹일 때마다 하나님은 너무 독재자시고 자가의 이익을 위하여, 자기의 만족을 위하여 우 리를 너무 희생시키시는 분 같아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라든가 하나님 의 주권, 하나님의 권위, 하나님의 엄위하심에 대하여 우리는 몹시도 잘못 생각하 고 있는 것입니다.

권위라는 것은 독재적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권위란 우리의 이해와 수준을 훨씬 벗어나고 뛰어넘는 자의 지혜를 말합니다. 권위라는 말은 결국 수준있는 지혜라는 뜻입니다. 즉 실력이라는 뜻입니다. 권위란 우리 가정에서는 보통, 부모님이 자식 에게 사용할 때 이렇게 많이 씁니다. 예를들어 부모가 자식에게 어떤 일을 권면할 때, 자식이 잘 알아듣지 못할 때 '넌 지금 모르지만 그저 이렇게 해야만 돼' '왜요 ' '왜는 설명해 줄 수 없지만 그렇게 해야 돼!' 이렇게 상대방이 수준이 낮아서 설명을 해줄 수 없을때 권위가 동원됩니다. 그러나 나의 이익을 위해서 상대방의 정당한 이익을 희생시키는 것으로 사용되면 독재입니다. 그리고 또한 분명히 그것 이 상대방의 이익을 위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상대방이 그것을 납득할 수 없기 때문 에 양보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만이 권위있게 강요할 수 있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이익을 위한 것이고 상대방이 그 이익을 요구할 수준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쪽에서 볼 때에 분명히 그에게 이익이 있고 축복이 있는 일입 니다. 그리고 그를 사랑하므로 주고 싶습니다. 상대방은 요청도 하지 않고, 주어도 모릅니다. 오히려 싫어합니다. 여기서 어떻게 해야 되는 걸까요 강요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권위란 일차적으로 바로 그런 뜻입니다.

하나님의 권위란 수준 낮은 인간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요청도 하지 못하고 알아 듣지도 못합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낮은 수준에 맡겨 두지 않으시 고 창조주의 실력으로, 창조주의 수준으로, 창조주의 지혜로 우리에게 강권적으로 간섭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복된 결과를 초래시키기 위해서 말입니다.

하나님의 권위가 우리에게 강요의 형태로 나타난다고 해서 무조건 싫다고 하지 마 십시오. 그것이 강요의 형태로 나타났지만 우리의 축복과 우리의 감사를 위하여 그 렇게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보통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말합니다.

왜 그렇게 말할까요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은 그가 독식하기 위하여 누구 의 희생을 강요하여 얻어 낸 부정한 이익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란 우리의 수준과 우리의 실력으로는 도무지 얻어낼 수 없었던 것을 하나님 편에서 의 열심과 사랑과 은혜로 말미암아 갖게된 것을 어느날 우리가 이해하게 됨으로써 그때에 비로소 반응하게 되는 것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는 것이 즉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시 며 소경된 자를 고치시는 것이 왜 하나님의 영광이 됩니까 우리는 종종 이렇게 오해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자기된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멀쩡한 사람을 병나 게 하고 죽게 하고 또 살려냄으로써 자기를 증명했다고 말입니다. 다시말해 병을 주고 고쳐냄으로써 자기를 증명하는 실력은 증명되지만 당하는 쪽은 행복스럽지 않 아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사로를 병들게 하고 살려내거나, 멀쩡한 자를 장님 되게 병을 줘놓고 고쳐 내는 것으로 자기를 증명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은 하나 님의 긍휼하심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생각하셔야 합니다. 나사로가 병들어 죽은 것은 하나님께서 그 를 병들어 죽게 한 것이 아닙니다. 날 때부터 소경 된 자도 하나님께서 그를 소경 되게 한 것이 아닙니다. 소경이 되었거나 병든 것은 모두 다 우리가 타락해서 도 망가 버리자 생겨난, 인류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찾아온 부작용들인 것입니다. 아담 과 하와가 하나님으로부터 범죄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손을 끊자마자 죽음아래 붙잡 힌 바 되고 질병과 고통과 사망과 슬픔과 비통 아래 놓여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 이 굳이 따로 누구누구를 저주한 것이 아니라, 죄를 진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게 되 는 일종의 비극이요, 저주요, 형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고로 이 저주와 형벌을 받을 우리들을 심판의 자리에 이르지 않도록 갑섭하시는 것입니 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죽을 병에 걸렸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했다는 것이 아 님을 먼저 이해해야 됩니다. 그 병이 얼마나 큰 병인가 하는 것을 인식하셔야 됩니 다. 이 병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공의롭고도 정당하게 판정하자면 하나님께서 우리 에게 병을 주시고 저주해도 할 말이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병을 고쳐 내기 위해서 하나님의 최고의 지혜와 최고의 성의를 동원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걸린 병은 지옥 불구덩이 에 떨어져도 당연하고도 마땅한 것입니다. 역사상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에 대하 여 한 번도 그의 진노를 나타내신 적이 없습니다. 물론 상징적으로 나타낸 적은 있 습니다. 그러나 노아 홍수 같은 심판을 하시고도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대상 들을 향하여 가진 안타까움이 너무 커서 그렇게 벌 준 데 대하여 스스로 안타까와 하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무지개라는 것을 만들게 했습니다. '내가 다시는 사람들을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 이렇게 무참하게 죽이지 않겠다. 내 공의 만을 펼치지 않겠다. 구원해 내고야 말겠다. 내 사랑을 실천하고야 말겠다'하는 것 을 스스로 확증하는 표로서 무지개를 내신 것입니다. 무지개는 우리에 대한 멧시지 일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무지개를 볼 때마다 우리에게 한 약속을 스스로 확인하시 겠다고 만든 하나님께서 스스로 걸었던 제동입니다.

물론 소돔과 고모라 같은 곳에는 하나님의 형벌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전 인류를 향한 것이 아니라 인류 앞에 꺼내 놓은 매질이지 사형 집행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 이후로 한 번도 하나님께서 이 죄지은 인류 , 하나님 앞에 형벌과 저주를 받아 마땅한 인간들에게 대하여 사형을 집행한 적이 없었습니다. 매질을 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와 죄지은 자에게 어떻게 형벌을 내리시는가 역사상 유일하게 나타난 사건은 십자가 뿐이었습니다. 이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죄와 죄인에 대하여 어떻게 진노하시는가를 펼쳐 보이셨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소경이며, 누구나 병들어 죽을 운명에 처해 있는 자 입니다. 이것을 상징하는 사건이 소경이 눈을 뜨는 사건이요 죽을 운명에 처한 병 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병주고 약주는 분이 아니라, 죽을 수 밖에 없 는 우리를 죽을 자리에서 어떻게 하여 꺼내시는가 하는 사실을 보여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도대체 얼마나 오래참으시고 사랑하셨길래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 가에 못박으시고 우리를 용서하셨나 하는 점을 보아야 합니다. 또한 그 십자가에 서 하나님의 공의가 해결되게 하심을 봅니다. 십자가 앞에서 하나님은 죄를 못본척 하고 사랑을 베푸실 수는 없으신 분이십니다. 바로 이것을 가리켜 하나님의 영광 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게서는 드디어 우리를 그 앞에 무릎 꿇리고 항복시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우리의 욕심을 채워주고 우리를 자기 편으로 끌여 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나중에 진심으로 하나님 앞에서 항복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자신을 감추거나 거짓으로 치장하신 데가 없다는 것 때문입니다.

다시말해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사랑이시기에 우리가 항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을 펼치시되 그의 공의를 굽히지 않으셨으며, 공 의를 펼쳤으되 그의 사랑을 양보하지 않으신 분으로서 우리의 항복을 받아 내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인류 앞에서 펼쳐 내신 구속 사역에 있어서의 가장 중요한 핵심들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장면들을 성경에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자 양 치던 목자들에 게 천군천사들이 나타나셔서 이렇게 찬송을 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도 쉬운 일이 아니 었을 것입니다. 같은 본체시요 동일하신 단 한 분의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셔서 죽으셔야만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 이 왜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지기 증명이 그것보다 더 멋있게 나타나는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말구유에서 나게 하시고, 33년간 이 땅에서 인간 들과 동일한 고통 속에 걷게 하시며 구원 하시려는 대상인 인간들의 손에 의하여 손 발에 못을 박히시며 가시관을 씌움받으시며 조롱 썩인 희롱을 받아 돌아가십니 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인 것입니다. 그 앞에 우리는 꼼짝 못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으며, 어떻게 대접하셨는가를 이것보다 더 잘 설명하고, 이 것보다 더 잘 설득할 수 있는 사건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꼼짝 못하고 항복하 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향하여 가지신 그 사랑의 깊이를 세상에서 우리 가 경험하는 그 어떤 감동스러운 정성과 비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당 신이야말로 참으로 나의 아버지십니다. 나를 이 세상의 그 어느것 보다고, 그 무슨 일 보다도, 그리고 어느 분보다도 사랑하시는 내 편입니다'라는 항복이 진정으로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우리에게 채찍을 들들고, 총을 들어 무릎을 꿇지 않으면 쏴버린다 식으로 강요를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분은 죽으시는 것입니다. '왜 주님께서는 그런 번거로운 방법을 택하셨는가 우리 같으면 싹 쓸어버리고 다시 만들었을 텐데. 오 히려 그렇게 했더라면 더 쉬웠을 텐데..'라고 생각 되십니까 예 분명히 더 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항복은 받아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찬송과 영광을 돌 리겠습니다!'라는 고백은 받아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 를 보내며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며 오늘도 오고 오는 세대에 그 십자가의 예수 그 리스도를 전파하게 하는 가장 큰 이유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앙 생활은 항상 연결이 되어져야 합니다. 여러분의 삶과 신앙 생활에 서 납득이 되지 않고 단절되는 부분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간섭이 만족스럽지 않은 사건이 있고,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의심스러워 보이는 낭패된 구석이 있습니까 여기서 여러분들이 아직도 그러한 일들에 대하여 섭섭하게 생각하고 계신다면 그것 은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잘 몰라서입니다. 바로 거기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특별 한 간섭이 있다는 것을 연결시켜 낼 수 있어야 합니다. 롬5:1-2절에서는 이것을 이 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 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 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 니라 여기서 예수믿는 자들이 소망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의 지혜로우심과 그의 능력으로 간섭하시는 인생입니다. 그 인생의 결과, 목적지, 하나님께서 계확해 놓으신 그 끝이 무었일까를 기대하라는 것입니다. 열망하셔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해력과 우리의 생각이, 우리의 상상이 그것을 미치지 못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사 증명하신 것 같이 우리는 그의 지혜와 그의 사랑 안에 붙잡힌 바 된 인간이요 인생인 것입니다. 거기에 신자들의 감사가 있고, 자랑이 있고, 자신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 '예수를 믿는다'고 말합 니다.

예수를 믿는 신앙 중에서 가장 우리를 오해시키고 곁길로 빠지게 하는 것이 무었 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것을 해라! 저것을 해라!'하는 것 이 먼저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도를 깨우치는 것이 먼저가 아닙니다. 하 나님을 아는 것이 먼저요, 하나님께 항복하는 것이 선행 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었을 약속했으며, 무었을 이루어 주시며 나에게 무었을 깨우 치시느냐 하는 것은 그 항복에 달린 열매에 불과한 것입니다.

성경의 99%가 하나님에 대한 설명입니다. '여호와로다 여호와로다 그는 자비롭고 은혜롭고 긍휼이 풍성하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지극히 사랑하시지만 죄는 미워 하시며 그러나 그를 사랑하시는 자를 용납하시고 채찍질하여 하나님께서 요구한 자 리에 이르게 하시고야 마는 여호와 그분'에 대한 설명들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 다.

여러분의 신앙은 몽땅 다 하나님의 약속들 이전에, 그분에게 못박히셔야 되고 그 분에 관한 신뢰와 그 분에 관한 이해로써 근거되고 중요한 내용으로 들어 있어야 됩니다.

나의 인생에 영광의 하나님의 간섭이 있으며 발걸음마다 함께하심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 우리에게 닥친 일들이 기쁨이든 슬픔이든 사망이든 협박이든 우 리가 비록 육체로는 근심하나 우리의 영으로써는 든든한 자리에 서 있음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결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사로 앞에 서셨습니다. 죽은 지 나흘이 되어 냄새가 나는 시 체 앞에 예수께서 서셨습니다. 다만 생명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과 교제 케 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로서 우리를 대접하러 오신 것입니다. 바로 거기 여러분들이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제 이 세상을 하직하는 날 하늘 나라에서 그 분을 아버지라 부르며 영원히 살 것입니다. 이 축복을, 이 자랑스러운 대접을 결코 소홀히 생각하지 마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