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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에로의 분리-성결 (요 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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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5장의 포도나무와 가지 비유에서는 과실을 맺는 일에 대하여 5단계로 이야기한다. 그냥 과실을 맺는 것이 있고, 더 과실을 맺는 것이 있고, 다음에는 더 과실을 많이 맺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과실을 적게 맺고 많이 맺는 것 이전에, 어떻게 했을 때 열매를 맺는가 하는 것이다. 열매를 맺는 유일한 방법은 포도 나무에 붙어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만 가능하다. 그리스도는 포도나무요 우리는 가지이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 거할 때 과실을 많이 맺힐 수 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엡 3:17)”
지금 신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인생과 나라는 존재의 주인인가가 아닌가 하는 점인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묻고 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성경에서는 신자가 되느냐 안되느냐 하는 문제 이상으로 신자가 된 자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고 사느냐 하는 부분에 대하여 굉장히 강조하고 있다.
나는 포도 나무가 아니다. 가지일 뿐이다. 내가 포도 열매를 맺는 것으로 내 자신이 누구에게로부터 기인하느냐가 증명된다는 것이다. 즉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내가 주를 위하여 무엇을 하는 것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의 삶 속에서 무슨 열매를 맺히느냐로 내가 어디에 붙어 있는가가 증명된다는 것이다. 포도 열매를 맺힘으로 포도 나무로부터 기인된 가지라는 것이 증명되는 것이지 내가 노력해서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니다.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20)”
열매로 내가 어디에 붙어 있는지를 알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 부분에서 어떤 오해를 하는가 하면 금욕적인 생활로써 우리가 어디로부터 기인하는가를 증명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하신 것은 사실상 일차적으로 우리들이 누구인가를 확인하는 데 있어서, 내가 붙어 있는 것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적극적인 어떤 증명이 있는 것이지 내가 어디로부터 분리시키고, 무엇을 만드는 것으로 자기 자신이 증명되지 않는 것이다.
물론 성경은 우리에게 죄짓지 말 것에 대해 여러 가지 권면을 한다. ‘술 취하지 말라’ ‘방탕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는 등의 권면을 한다. 그러나 성경이 요구하는 것은 그 모든 것이 적극적인 면에서의 우리 확인을 위한 부정적인 안내서이지 그것이 중심이 되는 내용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열매 자체를 전부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기독교를 생명이라는 데에 대해서는 전혀 증명하지 못하고 기껏 도덕성으로 밖에 증명을 못하는 것이다. 기독교가 기독교가 된 굵은 핵심은 그 생명 됨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생명은 없고 생명과 관계없는 데서 구별 밖에 없는 것이 우리 신앙 생활의 문제인 것이다. 생명이 열매를 맺지 못하기 때문에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혼동되고 윤리와 도덕과 혼동되는 것이다.
요한복음 5장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포도 나무로, 신자를 가지로 비유해서 나타내고자 하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동거이다. 모든 신자는 결론적으로 이 문제에 걸려 있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존재들요, 세상에 속하지 않는 자들이다.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요 17:9)”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이
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
이다(요 17:14)”
성경이 ‘거룩’이라는 말을 쓸 때에는 ‘구별되었다’는 뜻으로 쓴다. 우리는 이 구별을 ‘죄로부터의 구별’ ‘죄로부터의 거룩’으로만 생각한다. 그러나 이보다 더 깊은 의미는 결국 죄로부터 구별되어서 하나님의 소유로의 구별인 것이다. 이제는 하나님의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죄로부터의 구별은 되었으면서도 하나님께로의 구별은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가 많다. 출애굽 사건에서와 같이 애굽에서는 나왔는데 아직 가나안에는 들어가지 않은 것이다. 광야 생활을 하고 있으면서 오히려 종 되었던 애굽에서의 생활을 그리워 하고 있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열매가 없다. 광야 생활은 곡식을 심을 수도 없고, 그러니 열매를 맺을 수도 없는 생활이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그리스도와 하나로 부르신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듭나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의 몸으로 부르심을 받는 것이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고전 6:19)”
우리 안에는 성령이 계신다. 그와 함께 우리는 동거한다. 예수님의 별명이 임마누엘이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이다. 이와같이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실 때 우리에게서 생명이 증거를 나타내는 것이다. 생명이 증거를 나타내는 방법은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방법 외에는 없다. 생명이 있는 것은 당연히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신자들이 많이 오해하는 것은 자신이 스스로 열매를 맺는 것과 열매를 돕는 것을 구별하지 못하는 점이다. 우리는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 열매를 맺도록 도와야 하는 것이다. 내가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열매가 맺혀야 한다. 이것은 인내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리스도께 붙어있자는 싸움이다.
우리에게 열매가 많이 맺히기 위하여 우리의 신앙 생활은 절대 형통하지 않다. 성경이 이야기하는 형통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어떤 상황에서든지 우리와 함께 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사람이 요셉이다. 성경은 요셉을 일컬어 “하나님이 저와 함게 하시므로 형통한 자가 되었더라” 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일생은 우리가 생각한 모습대로의 형통은 아니었다. 우리는 정작 살아가면서 환난을 당하거나 시련을 겪거나 좌절과 슬픔을 당할 때 훨씬 더 열매가 많이 맺히는 것을 볼 수 있다. 신자는 그럴 때에 정작 신앙이 깊어지고 영적으로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
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
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
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1-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
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찌니라(롬
8:24-25)”
환난은 우리를 소망으로 이끌어 가는 것이다. 소망은 결국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기대이다. 즉 믿음인 것이다. 만일 환난이 없다면 우리는 보이는 것 속에서 만족하고 죽음의 잠만 잘 것이다. 환난을 당하면 비로소 우리는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환난을 당하면 우리는 우리는 이 세상이 무엇이며 내가 누구인지를 확인하게 된다. 환난만큼 인간이 죄악된 것과 세상의 순간성과 영원한 나라의 필요성을 확인시키는 것은 없다. 환난은 인내를 만들어 낸다.
신자들의 궁극적 삶의 목표는 그분만이 우리의 즐거움이고, 그분만이 우리의 기쁨이 되는 데에 있다. 신자의 삶은 그리스도와의 동거이다. 그분과의 깊은 교제이다. 그분과의 깊은 교제가 있어야만 우리에게 열매가 나타나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열매를 맺으라고 그런 적은 한번도 없다. 우리의 싸움은 결국 나를 그 앞에 복종시키느냐, 아니냐의 것이다. 그 결심, 그 선택만이 우리에게 요구될 뿐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
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
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
5)”
그리스도를 통해서 산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신자들을 보면 전혀 주님과 동거하지 않는데도 열매를 많이 맺어내는 것을 볼 수 있다. 자기 열심으로 만들어낸 열매들이다. 성령의 열매가 아니고 성품의 열매들이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업이 아니고 전부 성품이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우리와 동거하시며, 우리를 불러 결국 하나님께서 만들려고 하는 궁극적인 일의 목표가 어디냐 하면 바로 우리들이다. 우리를 만드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자녀된 우리를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신앙 인격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의 전부 성품에 관한 것이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
게 하려함이니라(요 15:11)”
그리스도 안에서 그와 동거하며, 그와 함께 걷는 신앙의 삶은 늘 기쁨으로 충만하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의 삶은 피곤하다. 일에 얽매여 있다. 일을 하는 자체로, 신앙의 열심으로 믿음의 수준을 판단하려고 하기 때문에 늘 신앙이 힘이 든 것이다. 이러므로 우리는 기쁨까지 도달하지 못한다. 하나님과 함께 살며,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름으로 살며, 그리스도와 동거하는 기쁨, 거기서 얻어진 열매와 빼앗을 수 없는 감사들을 우리는 전혀 맛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늘 놀라는 것은 신앙의 사람들이 가졌던 그 놀라운 신앙이다. 그들은 죽음 앞에서도 넘쳐나는 충만한 기쁨의 벅참을 가지고 있었다. 제자들은 매를 맞고 돌아와서도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자신들을 능욕당하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신 것을 기뻐했다. 감옥에 갇힌 사도 바울의 편지를 보면 ‘늘 기뻐하라’고 권면되고 있다. 왜 우리에게는 이런 것이 없을까 그리스도와의 동거가 깨어졌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 동거함이 없이 독립하여 내 열심으로 주를 위해서 일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우리의 신앙생활은 늘 실패요, 어려움의 연속인 것이다. 그리스도를 내 안에 모시고, 내가 그분 안에 있을 때만이 우리는 열매를 풍성히 맺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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