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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바뀌어진 시각 (요 16: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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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에서 `조금 있으면'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는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은 말하기를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고 또 조금 있으면 본다는 게 무슨 말이냐'고 물었습니다.

19절에서 답하시기를 예수께서 그 묻고자 함을 아시고 가라사대 내 말이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므로 서로 문의하느냐고 합니다.

`조금 있으면'이라는 말은 사실 무슨 중요한 내용을 담을 이유가 없는 것임에도 불 구하고 16-22절까지의 본문에서는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자꾸 되풀이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이 이야기가 13장에서부터 계속 간헐적으로, 그러나 꾸준히 반복되어 나오고 있습니다. 여기서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본다 는 것이 그리스도께서 친히 이루실 대속의 사역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21절에서는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 고 말씀하심으로 이것이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을 가르침을 분명히 뒷받침하고 있습 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인 16장에서는 이것을 좀 더 세밀하게 기록하고 있는 이유는 조금 특별합니다. 즉 예수님께서 대속의 사역을 하실 것이고, 그것을 위하여 이 땅에 오 셨다는 것을 우리는 다 압니다. 그러나 이 사건을 여기 기록함은 제자들의 마음 상 상태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조금 있으면 대속의 사역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실 것입니다. 그 리고 부활하실 것입니다. 우리를 다 구원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것을 모 르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실 중요한 일에 대하여 제자들이 모르고 있었던 이 사실을 요한복음에서는 구체적으로 꼬집어 자꾸 반복해서 기록한 이유가 무엇이냐 하는 질문으로 추적해야 되는 것입니다.

<본론> 우선 그 구체적인 결론부터 말하자면,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요구하고 기대하고 있는 것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루어주려고 하는 것 사이에 어떤 차이 가 있는가 하는 점을 집어 내기 위하여 이 사건을 이렇게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 것 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기대했었던 것은 오늘날 대부분의 신자들이 기대하고 있 는 것과 같은 종류의 것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실제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해 주 시려고 하는 것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는 무조건 슬픔을 없게 해 주시려고 기쁜 일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게 만드시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가 요구하는 방법과 주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방법이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본문 20 절을 보십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 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이렇게 주님께서는 우리의 근심이 변하여 도리어 기쁨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러나 우리의 신앙 생활은 `근심이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기쁨을 주십시오'라고 요구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의 대답은 우리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지 우리 기대에 맞는 기쁨을 주시겠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바로 이같 은 사실에서 우리 신앙의 핵심이 무엇인가 하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이미 예수 님께서는 요14:1-3절에서부터 근심의 문제에 대하여 언급하시고 계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 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 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 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근심하고 있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예수님 의 대답은 제자들로 하여금 근심을 없게 만들어 주고 그들의 기대를 채워주는 것으 로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알고 계시는 것으로 기쁘게 하겠다고 말 씀하고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알고 있는 그것들이란 아직은 제자들이 모르고 있는 것들입니다. 그것들이란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뜻을 이 루시는 것으로서 바로 `나 있는 곳에 너희를 영접하여 있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지금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기쁘고 좋은 일이라는 것도 예수님 께서 사로 잡혀가서 힘없이 당하시며 죽으시는 방법으로 이루어는 지는 것이기에 귀 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히려 그러한 방법으로 대속하며 우리를 구원하는 것을 원치 않을 뿐 아니라 그렇게 하시겠다는 말씀에 근심이 가득하였으며 다른 방 법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뜻과 말씀이 제자들에게는 손톱에도 들어가지 않는 납득키 어려운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제자들의 생각 사이에는 서로 다른 팽팽한 긴장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같은 말씀을 하였을 때에 도마는 이렇게 답답한 질문을 합니다. 요14:5절을 보면; 도마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 나이까 도마는 주님의 말씀에 대하여 `우리는 지금 주님께서 뭘 하려고 하시는지 도대체 모르겠습니다.' 그럽니다. 주님께서는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리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끊임없이 묻기를 ` 주여, 도대체 무엇을 하시려고 그럽니까'고 말할 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제자 들의 끊임없는 물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려는 그 일에 대하여 제자 들은 끊임없이 `무엇을 하시려고 그럽니까' 다시말해 `예수님 왜 그런 일을 하시 려고 그럽니까'하는 질문만 하고 있다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도대체 이 말의 뜻이 무엇입니까 누가복음 24장에 가면 대표적인 증거가 하나 나타납니다. 예수님게서 십자가에 돌 아가신 후에 뿔뿔이 흩어진 제자 중에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있었습니다. 예수님 께서 저들에게 나타나서 그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그들이 마음 속에 있었던 것을 이 렇게 표현합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 제자들이 바랐던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것이 아니라, 로마를 물리치고 이스라엘을 정치적으로 회복하며 그들의 모든 고난과 환난과 어려움에서 구출해서 잘 먹고 잘 살게 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러 오셨습니다. 영적인 문제를 해결하시러 오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끊 임없이 육적인 문제에 대한 기대로 예수님을 요구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친히 언급하신 내용이 요 6장에 나옵니다. 오병이어 로 오천 명을 먹이고도 열 두광주리나 엄게 남았습니다. 요6:14-15절을 보십시다.

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여기서 말하고 있는 `그 선지자'란 영어에 정관사가 붙은 것입니다. 정관사가 붙었 다는 것은 특별히 지칭되는 어떤 것을 의미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 선지자라' 즉 구약 성경이 그토록 예언했던 메시야인 줄로 알고 그 분을 왕으로 삼으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경제와 정치와 사회를 평화롭게 해주며 행복하게 하여 잘 먹고 잘 살다가 지옥 가게 해 주는 분으로 만들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저들의 손을 피하여 도망가셨던 것입니다. 요6:26-27절에 이 문제에 대하여 이렇게 언급하 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는 양식을 위 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예수님께서도 스스로 메시야라고 선언하셨으며, 사람들도 `이분이 메시야인가보다' 라고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메시야에 대한 백성들의 기대와 실제 메시야이 신 예수님의 내용이란 서로가 다른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실 생 각을 하고 계시고 있으며, 인간들은 끊임없이 자기들의 생활의 필요를 해결해 주시 는 분으로서 메시야를 자꾸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맨 처음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입문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 인생의 생 사화복과 운명을 주장하시는 분이신가 하는 사실을 경험하게 하셔서 확실히 믿게 하시기 위하여 그들의 병을 낫게 하시거나 갑자기 잘 살게 하시거나 어떤 기적을 이 루어 그가 당한 난관을 풀어 주시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곤란하게도 그러 한 일들이 신자들의 일상의 신앙 생활에 있어서도 그런 극적인 일만 일어나기를 기 대한다는 것은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면 그것은 곧, 여기 있는 제자들의 고 백과 똑같아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 애들도 잘 되고 우리도 잘 되고 모든 것이 잘 될 줄 알았었노라'는 고백밖에 나올 것이 없게 되기 때문입니 다. 그런 것을 신앙이라고 그러지 않습니다. 영적인 변화가 있어야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이란 믿는 자들이 처음에 근심하고 애통하고 걱정한 일들이 기쁨의 환경으로 바뀌어 지는 것이 아니라, 신자인 자신이 그 일을 보는 시각이 영적으로 달라지는 변화를 신앙이라고 합니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기도만 하면, 램프를 문지르기만 하면 즉시 마왕이 나타나서 `주인님! 부르셨습니까'하며 문제를 해결해 주듯이 생 각한다면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이런 신앙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지금 요6:26절에서 지적하신 말씀이 얼마나 정확한 지 모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그 표적들을 볼때에, 우리가 보는 물질 세계가 전 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증거로써 그 기적을 보지 못하고, 주를 믿었더니 그 냥 직장이 생기고 승진을 하고, 애가 공부를 안 했는데도 그냥 학교에 붙고....하는 식으로, 먹고서 배부른 까닭에 연속되는 요구로 일관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러 므로 기적들을 보고서 요구하는 우리의 시각이 얼마나 빗나가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 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몸을 보존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우리의 영혼을 보호하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14:2-3절의 말씀처럼 기쁨으로 `나 있는 곳에 너희 를 영접하기 위하여'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셨으며, 지금도 우리를 바로 그 일을 위하 여 간섭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예수님께서 이 대속의 사역을 하신 후 그러니까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부활한 후에도 제자들의 마음은 거의 움직이지 않고 여전히 그 생각이 자기 요구에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시도행전 1장으로 가 보십시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 님을 만나 보았습니다. 죽었다가 다시 부활하셨는데 이것은 정말 까무라칠 문제입니 다. 그런데 그때 제자들은 더 힘있게 물었습니다. 행1:6절을 보십시다.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예수님께서 남을 살려낸 정도가 아니라, 예수님이 친히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무덤 속에 들어가셨다가 사흘만에 드디어 살아 나셨던 것입니다. 그러자 제자들의 입에서 나온 질문이 이것이었습니다. `이제야말로 때가 왔군요 예수님, 우리가 그 때를 몰랐었습니다. 그때가 아니라 이제 하시려고 하시려고 그랬었군요. 이제는 저 희도 겁이 안 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행1:7절에;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 이런 무슨 찬물을 끼얹는 말씀입니까! 그러나 여러분들도 곧 그럴 수 있습니다.

예를들어 목사님의 설교를 잘 들고서 하는 말이 `그렇습니다. 목사님, 우리가 정말 이 육체적인 환락에 미쳐 예수를 믿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이제 영적으로 돌아 가겠 습니다. 하나님, 저는 이제 영적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므로 저 육체를 좇는 사람 들 보다는 더 주셔야 됩니다!'고 합니다. 이러면 그 제자들과 마찬가지가 되고 맙니 다. 그 자리가 그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적으로 된다는 것은 참으로 뚫고 들어가기 어려운 자리입니다. 왜냐하면 영적인 문제들이란 우리 인간들에게 있어서 는 생래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상적이고,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것들은 우 리가 젖 떼면서부터 배운 것입니다. 아니 그 전부터 알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나 세 상에 태어나면서부터 배우는 것이 세상 일이지 영적인 문제는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일을 우리에게 이루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 세상 적인 근심들을, 그러니까 세상적인 시각에서 보던 것을 영적인 시각으로 바꾸기 위 하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이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닙 니다. 요한복음 7장을 보시면 분명하게 예수님께서 이 문제에 선을 긋습니다. 이 두 부류를 기억하셔야 됩니다. 요7:32절을 보십시다.

예수께 대하여 무리의 수군거리는 것이 바리새인들에게 들린지라 대제사장들과 바 리새인들이 그를 잡으려고 하속들을 보내니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향하여이 야기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 가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하 신대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그를 반대하던 그들에 대해서는 도무지 영적인 세계와 영적인 신분에 있어서 같이 나눌 여지가 없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다시 요14장 을 보시면 도마가 그렇게 무식한 질문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19절에 이렇게 대답합니 다. 요14:19절에;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이렇게 바리새인과 같은 영역에 속한 자들과 도마와 같은 영역 속한 자들이 각각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에 속하였습니까 물론 여러분에게 선택을 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요14:5절에; 도마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 나이까 우리들도 기껏해야 이 도마와 같은 질문 밖에는 하지 못하는 자들인데도 불구하고 우리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 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요14:19) 고 히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을 살리기 위하여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러므 로 우리는 분명히 바리새인들과 같은 부류와는 전혀 다른 존재들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산 존재들입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전의 예수님은 믿는 자도 보았고 믿지 않는 자들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심으 로 이제부터는 믿는 자는 보되 믿지 않는 자는 보지 않는 영역으로 들어가실 것입니 다. 즉 육체의 눈으로만 보는 예수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신 그 사역이 믿음으로 연장되는 영계로 들어가는 자들만, 즉 거듭난 자만 보는 차원으로 그 사역을 이제 이루시는 것입니다. 조금 있으면 못 볼것이라는 말씀은 이제 십자가의 죽으로심으로 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또 조금 있으면 다시 볼 것이라고 한 말씀은 신자 들이 믿음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게 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믿 음의 눈으로만 주님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 계신 줄을 알기에 모인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시며,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줄 알 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초대하셨 고 선택하셨고 그 일을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선택받은 자로서의 신분에 맞는 생활를 하고 있느냐고 따져 온다면 우리는 그렇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서 우리를 영적인 곳으로 옮겨 하나님의 자녀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이전의 자리인, 오병이어로 먹이시고 우리가 탄 배에 오셔서 광풍을 잠 잠케 하던 그것이 중요하지,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요14:19)하는 주님의 삶을 본받아 사는 삶의 자리에 관해서는 별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라 사 는 삶이 우리에게는 습관적인 것이 아니라 생소한 것이기에 조금만 방심하면 이전의 자리에 늘 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는 요구가 `주여, 여기가 좋사오니' ` 이것으로 되었지 또 뭘 해야 합니까' `광풍을 잠잠케 하시며 죽은 나사로도 살리시 던 그 능력을 왜 내가 어려울 때는 허락하지 않습니까' 이런 식으로 밖에는 신앙 을 더 요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제자들의 바뀐 모습이 나타납니다.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할 터이고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고 한 그 예수 그리스도를 그 전에 보던 예수 그리스도와는 다르게 본 제자들의 모습이 나옵니다. 베드로의 설교 속에서 그것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행2:32-36절을 보십시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하나님이 오른손으 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가로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는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 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세상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죽여 마땅하다고 이야기하며 그를 추종하는 자들을 다 잡아 죽이겠다는 분위기로 완전히 장악되고 있었는데, 거기에 대하여 담대히 반 대하고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외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온 집은 정녕 알지니 너 희가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요 메시야니라라 고 도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라바를 살려줄지언정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소서!'라 고 외쳐댓던 원수들 앞에서 살살 숨어 좇아 다니다가 누가 `너 예수의 제자지'하며 물었을 때, `아니오!'라고 움츠러 들었던 베드로가 지금 살벌한 분위기 앞에서 `너 희가 잡아 죽인 예수가 사실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 이 바뀐 것이 아닙니다. 동일한 조건과 환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담대히 외칠 수 있었던 것은 베드로가 달라졌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유의해 보 아야 합니다.

예수를 믿어서 여러분이 사는 삶의 환경과 조건이 바뀌기를 바라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은 없습니다. 신앙이 바뀌어야 하는 것입니다.

행4:5-30절을 보시면 거기에 변화된 사도들의 모습이 나옵니다. 특히 자기 목숨이 두려워 도망가며 예수님을 저주까지 하였던 베드로가 당시의 핍박자들 앞에서 담대 히 예수님이 메시야임을 증거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것은 제자들이 처해 있는 환경과 분위기가 이전에 비해 조금도 개선되고 나아진 것이 없다는 것을 발견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은 권세잡은 자들 앞에 붙잡혀 갔으며, 그들의 하 는 일에 협박과 위협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제자들에게 이것이 이제는 더 이상 근심 케 만들지 못했습니다. 너희의 근심이 변하여 기쁨이 되리라는 예수님의 예언되로 제자들은 그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환경에 대하여 오히려 기뻐하였습니다. `옳소이다 주께서 예언하신 것같이 과연 헤롯과 빌라도가 모여 그 일을 하고 있나이다. 주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우리가 봅니다. 이런 나쁜 환경과 조건에도 불구하고 하 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이제 믿사오니 이 일에 우리가 부르받은 것을 감사하나 이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근심이 변하여 기쁨이 된 것을 보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예수를 믿습니까 병 낫기 위해서 믿습니까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믿습니까 뭘 위해서 예수를 믿기 시작하셨습니까 그 시작이 무엇이라고 하더라도 여러분을 꾸짖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제가 문제입니다.

이제목표가 무엇이냐가 문제입니다. 이제 알게 된 예수, 이제 알게 된 하나님입니 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이제 여러분 인생의 목표를 무엇에다 두게 되었습니까 다시 말해 바뀐 것이 무엇이냐하는 질문인 것입니다.

신자의 가장 두드러진 특권은 감사입니다. 무엇이 여러분을 불편케 만듭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은 자기 최면에 걸린 사람들이라고 공경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나쁩니다. 자기 최면에 걸려서 정신 나간 사람처럼 아무 때나 빙글빙글 웃고 아무 때나 할렐루야! 그러면 좀 곤란합니다. 자기가 처한 위기와 거기서 열심히 성 실히 살아야 할 것은 잊고 눈동자에 촛점이 없어져 버리는 것을 평안한 것이라고 하 지 않습니다. 분명히 주변에 위협과 압박과 어려움과 곤고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보이는 것으로 평가하지 않으며 보이지 아니하는 믿음과 소망과 상급을 바라 보며 이 신앙의 길을 기쁨으로 걷게 되는 것을 평안이라고 그럽니다. 여러분들의 신 앙이 이런 것으로 바뀌어 져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이 세상에서 여러분의 지위가 높든지 낮든지, 부하든지 가난하든지 그것이 여러분 의 신앙에는 전혀 상관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인생에게 맡 겨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게 하고픈 것이 있습니다. 가난하다고 하나님의 일을 못 할 것이 없고, 부자라고 해서 못 할 것도 없습니다. 부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유일 한 방법도 아니고, 가난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방해가 되지 않습니다. 교회는 부 와 지위를 가진 사람이 그것으로 인하여 교만하지 않아야 하는 곳입니다. 마찬가지 로 교회는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이 주눅들 필요가 없는 곳입니다. 두 종류 다 신앙 신앙인들입니다. 사회적 지위가 여러분을 신앙적으로도 지위를 가진 것처럼 오해되 어서는 않되며, 시회에서 이름 없는 것이 신앙 생활을 하는 데도 이름 없어야 되는 법칙이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높은 사회적인 지위로 교만 해서도 안될 뿐 아니라, 낮은 시회적 지위라고 지레 겁을 먹고 움츠러들 필요가 없 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적으로 곤혹스러운 환경 속에 보내셨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신앙을 지키며 사는 데는 방해가 되지 않도록 허락하셨음을 믿어 야 합니다. 그러한 믿음의 시각이 우리에게는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당장 괴롭 고 힘든 것에만 시선을 고정시킬 것이 아니라, 이제는 이 일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나타내시기를 원하시는가를 물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거기서 충 성과 순종과 인내를 약속하는 자세를 키우시므로 여러분의 시각이 염려와 근심에서 평안과 기쁨과 감사의 시각으로 바꾸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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