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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창 06: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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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어린 시절 추억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분은 이미 오래 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입니다. 할아버지를 생각하면 두 가지 얼굴 이 떠오르는데, 하나는 호랑이 같이 무서운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한없이 자애로운 모습입니다. 제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 야단 치 시던 할아버지는 지금 생각해도 무섭습니다. 하지만 저를 귀여워해 주시고 사랑하실 때는 어느 누구도 따를 수 없는 따뜻함을 보여 주셨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하나님의 모습도 두 가지 얼굴로 보입니다. 그것은 심판하시는 하나님과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입니다.

심판을 계획한 공의로운 하나님

13절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강포(强暴)가 땅에 가득함으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모든 땅, 모든 인간이 죄를 범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심판을 내리 시겠다고 합니다. 11절에 보면 이때 온 땅이 하나님 앞에서 패괴(銘壞)하여 강포가 땅에 충만한지라고 노아 시대의 죄악성을 증언합니다. 본문에서 계속 반복되는 단어가 패괴와 강포 인데 패괴는 쉽게 말해서 부패입니다. 그리고 강포는 폭력입니다. 12절 말씀도 보십시오.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패괴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패괴함이었더라.

아무도 예외가 없는 심판입니다. 모든 사람이 부패한 모습이 바울 사도의 말씀을 기억 나게 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 더니(롬 3:10,12,23).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부패하고 폭력이 난무하던 시대를 심판하신 공의로운 분이십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동일하신 하나님께서 우리가 사는 세상을 보시면서 또 한 번 심판을 계획할 수밖에 없지 않 으실까요? 우리 시대는 세상 뿐 아니라 교회도 타락할 대로 타락 한 실정입니다. 미국의 어느 장로교단에서는 동성연애자를 목사로 세울 것이냐 말 것이냐와 혼외 정사의 정당성에 대한 토의 를 했다고 합니다. 물론 부결되었다고 합니다만 이것이 기독교 교 단에서, 심지어 목사들의 회의에서 거론되었다는 것이 이 시대의 심각한 부패와 타락상을 반영합니다. 한국 사회도 하나님 보시기에 죄가 가득 찼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가까운 징조로 볼 수 있습니다.

구원을 계획한 사랑의 하나님

14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는 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짓되.

심판을 작정하시고 심판을 선언한 하나님은 동시에 세상을 살리실 계획을 세우십니다. 인간의 범죄는 너무도 분명하기에 심판도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여전히 노아를 통 해 방주라는 구원선을 준비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 간의 죄 된 생활에도 불구하고 변함이 없으십니다. 방주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확실하고 분명하게 보여 주는 사건입 니다.

방주는 온전히 하나님의 계획으로 이루어진 역사입니다. 인간이 생 각해 낸 것이 아닙니다. 구원이 철저한 하나님의 계획으로 완성되 었듯이 방주 역시 하나님의 세심한 손길로 만들어졌습니다. 방주 설계의 가장 현저한 특성은 절대로 안전하다는 사실입니다. 방주는 잣나무로 만들었습니다(14절). 그리고 역청을 칠하여 물이 들 어 오는 것을 막았습니다. 방주의 규모는 장(가로)이 삼백 규 빗, 광(세로)이 오십 규빗, 고(높이)는 삼십 규빗(15절) 입니다. 이는 굉장히 큰 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방주를 연 구한 학자들은 이 방주가 전혀 속력을 낼 수 없다고 합니다. 솔 직히 말해 방주는 급하게 항해할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물에 뜨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중요한 점은 방주가 빈틈 없이 안전하다 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안전을 보장하셨습니다. 하나님께 구원 받은 사람들은 주께서 보장하신 안전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오…저희 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의 손에서 빼 앗을 수 없느니라(요 10:28,29).

방주는 하나님을 향해서 고정되도록 설계되었습니다. 방주는 3층으 로 되어 있고 창문은 하늘을 향해서만 열려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만 시선을 집중하도록 고안된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사람은 시선을 하나님께 고 정하며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야 합니다. 구원의 사실과 방 주의 구조는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방주에 들어간 사람들의 안전 은 하나님이 보장하셨는데, 이는 언약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너와는 내가 언약을 세우리니…(18절 이하).

구원도 언약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

우리가 주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악한 세상을 심판하시면서 구원의 길로 방주를 준비하 게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온 세상을 심판하시기 전에 구원의 길 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방주 안에 들어간 사람들이 살 았던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마다 놀라우신 하나님의 구원 과 사랑과 영생의 은혜를 경험합니다.

구원을 계획하신 사랑의 하나님은 본문을 통해 인간에게 두 가지 명령을 내리십니다.

첫째 명령/방주로 들어가라 18절 말씀입니다.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자부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구원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명령입니다. 방주에 는 단 한 개의 문이 있었습니다. 16절 말씀을 잘못 읽으면 각 층마다 문이 있는 것처럼 생각이 되는데, 문은 하나밖에 없었습 니다. 구원의 문 역시 하나밖에 없습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요 10:9).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

어떤 사람은 기독교의 복음이 지나치게 독선적이고 배타적이며 편협 하다고 비판합니다. 어째서 구원의 문이 예수밖에 없느냐고 항의합 니다. 그러나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있는 사람들은 그런 질문을 하지 않습니다. 하나라도 구원의 문이 열려 있다는 사실에 감격하 고 감사해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이며 자비입니다.

심판받아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에게 하나라도 살 길을 마 련해 주신 것은 하나님의 크나큰 사랑의 증거입니다.

고층 건물의 아래층에서 불이 났을 경우 윗층에 있던 사람들은 모 두 비상구를 이용해 옥상으로 올라가게 됩니다. 이때 구조받을 수 있는 길은 헬리콥터밖에 없습니다. 구원의 길은 단 하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외의 길은 다 멸망으로 인도할 뿐입니다.

저는 노아가 방주를 만들면서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경 고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창세기 기사에는 그런 기록이 없으나 베드로후서 2장 5절에 보면, 오직 의(義)를 전파하는 노아 라는 증거가 나옵니다. 노아가 세상 사람들에게 구원을 받으려면 방주를 타야 한다고 외쳤듯이, 오늘날 우리도 죄 가운데서 헤매 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진리를 외쳐야 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 스도만이 우리가 살 길임을 전파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해야 합니 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첫번째 명령은 복음을 증거하라는 전도의 명령입니다.

둘째 명령/생명을 보존하라 19,20절 말씀을 보십시오.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수 한 쌍씩 방주로 이끌어 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케 하되 새가 그 종류대로, 육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각기 둘씩 네 게로 나아오리니 그 생명을 보존케 하라.

하나님은 홍수 심판을 통해 세상을 파괴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 님은 세상을 심판하신 다음에 새로운 질서를 세우십니다. 부패를 청소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새로운 사회를 만드십니다. 그러므로 심판은 파괴가 아니라 건설입니다.

마지막 심판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께서 재림하셔서 이 세상을 심 판하실 때 온 천지를 없애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십니다.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계 21:5 )에서 새롭게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카이노스』입니다. 이것은 시간 개념이 아니라 질(質)을 변화시킨다는 의미입니다. 새로운 사회, 새로운 역사를 이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노아 일가족과 각종 짐승들을 방주에 보전시키신 이유는 홍수 심판이 끝난 다음 새로운 질서를 세우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두번째 명령을 문화 명령이라고 말합니다.

창세기 9장 1절에는 하나님이 창조 사역을 마치시며 인간에게 하 셨던 명령(1:28 참조)이 다시 나옵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노아와 짐승들은 새로운 역사의 그루터기로 보전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두번째 명령은 문화 보전의 명령일 뿐만 아니라 문화를 개혁하라는 명령입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두 가지 명령은 심판대 앞에 서 있는 이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것과 이 사회를 개혁해 나가는 것 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 하나님이 원하시는 질서가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부패한 세상에서 절망하고 비관하는 것이 아니라 나 한 사람이라도 거룩한 삶을 추구하여 이 사회에 진실과 정의의 가치가 보전되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문화 명령입니다.

22절 말씀은 명령을 준행하는 노아의 응답을 보여 줍니다.

노아가 그와 같이 하되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 하였더라.

당신도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다 준행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까 ?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받아 주님 말씀에 순종하 는 삶, 어둠 가운데서 헤매고 있는 영혼을 예수께로 인도하는 삶 , 더 나아가 이 땅에 그리스도의 문화를 창조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온전히 준행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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