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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백배의 결실 (막 04: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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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히 크지 않은 구멍 가게를 운영하는 사람에게 만 원을 투자해서 1년 안에 백만 원을 벌 수 있겠느냐고 물었더니,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그런 비법이 있으면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투자액의 백배를 벌려면 그것은 경우에 따라 몇 십 년이 걸릴 수도 있고,또 경우에 따라서는 전혀 불가능한 것이 장사의 흐름이라고 합니다.
물론 예외도 있을 것입니다.부동산가의 상승세를 타고 집 값이나 땅 값이 갑자기 몇 배로 뛰어오를 수도 있을 것이고,기업 운이 좋아서 돈을 벌어 들이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그러나 백 배라는 배수는 힘든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20절에서 주님은 30배와 60배와 100배의 결실이 가능하다고 말씀하십니다.그리고 그것은 좋은 땅에 씨를 뿌렸을 때 가능하다고 하십니다.
이 이야기는 기업이나 영농법에 관한 강의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을 설명하시기 위해 들려 주신 비유입니다.
저는 오늘 이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들이 영적으로나,기업에 있어서나,장사에 있어서나 백 배의 결실을 맺고 축복을 받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우린 본문 속에서 몇 가지 교훈을 찾을 수 있습니다.

1.땅에 뿌린 씨는 한 가지였다는 것입니다.
본문 14절에서는 주님은 그 씨를 “말씀”이라고 해석했습니다.즉 복음을 의미합니다.말씀을 씨로 비유한 것은,씨는 생명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땅에 뿌리면 그 생명이 움트고 싹이 나는 역동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4:12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라고 했고,베드로전서 1:23을 보면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기독교가 생명이 있는 이유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는 종교이기 때문이며 살아 역사 하시는 말씀의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살아있다는 것은 그 말씀이 여러 가지로 역사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합니다.감동받고 감격합니다.그리고 새로운 삶을 결단하게 됩니다.
죽은 씨앗은 아무것도 못합니다.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살아 있는 종자이기 때문에 온갖 기적과 능력을 행하는 것입니다.
농부가 밭애 나가 뿌린 씨앗은 여러 종류가 아니라 한 가지였습니다.

2.밭은 네 가지였습니다.
길가,돌밭,가시떨기밭,좋은 땅으로 설명되는 밭은 사실은 사람들의 마음을 가리킵니다.보리나 콩 같은 씨앗은 땅에 뿌립니다만,복음의 씨는 사람의 심령의 이랑에 뿌리는 것입니다.
주님은 15절 이하에서 네 종류의 밭을 설명하셨습니다.주님이 설명하신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길가는 사람들의 행보가 잦은 곳으로,거기에 떨어진 씨는 마귀가 곧 그 말씀을 빼앗아 가 버린 것을 의미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길가처럼 딱딱하고 산만한 마음이 있습니다.이런 사람은 교회에 나와 앉아 있어도 오만 가지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합니다.설교를 들어도 내용이 귀를 스쳐갈 뿐 마음으로 스며들지를 않습니다.
돌밭은 흙이 얇기 때문에 햇볕이 나면 곧 싹이 시들어 버립니다.
이런 사람들은 말씀은 기쁨으로 받지만 뿌리가 약하기 때문에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넘어지고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면 금방 넘어져 버립니다.이런 사람들은 예수님과 쉽게 인연을 맺기도 하고 쉽게 끊기도 합니다.쉽게 교회를 나오기도 하고 쉽게 그만두기도 합니다.
가시떨기는 세상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욕심 때문에 결실하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보겠습니다.
길가에 떨어진 씨는 싹이 날 겨를도 없이 새들이 먹어 버렸습니다.그리고 그 새는 15절에 의하면 사탄이라고 했습니다.
길가는 시끄럽고 산만합니다.그러나 문제는 시끄러운 길가라도 면역이 되면 시끄러운 줄 모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13년 전 충신교회에 처음 부임했을 때입니다.그때만 해도 교회 살림이 어려웠기 때문에 강변에 자리잡은 15평의 연탄 지피는 아파트를 전세로 얻어 주어 이사를 했습니다.
전에 살던 곳은 널찍한 대지에 나무가 들어선 정원에서 새 소리를 들으며 자고 깨는 곳이었습니다.
이삿짐을 다 들여놓을 수가 없어서 이곳 저곳 흩어 놓은 채 이사 첫날 밤을 맞게 되었습니다.그런데 문제는 밤새도록 달리는 자동차 소리와 그 진동 때문에 잠을 이룰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그래서 낮이나 밤이나 무더운 여름에도 문을 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자 그 소리는 여전히 시끄럽게 들렸지만 못견딜 정도는 아니더라는 것입니다.즉,적응력이 생긴 것입니다.
신앙 생활의 경우 부정적 적응력이 생기고 죄에 대한 면역성이 커지면 그 영혼은 희망이 없습니다.
내 심령이 길가처럼 단단하고 또 산만하고 사탄이 활보하는 어두운 뒷길목이라는 것을 깨달았으면,빨리 그 길을 뜯어 고치거나 다른 길로 바꿔야 합니다.
길을 잘못 들면 목적지가 달라집니다.
돌밭에 떨어진 씨는 싹이 나오긴 했지만 곧 시들어 버리고 말았습니다.이 현상을 16절은 “즉시 기쁨으로 받았다”라고 했고,17절은 그러나 “잠간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라고 해석했습니다.
주목할 것은 “즉시 기쁨으로 받고 곧 넘어지는 자”라는 점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요소는 없는지 성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C.B.S의 “새롭게 하소서” 신앙 상담에 보내 온 어느 대학생의 편지가 생각납니다.
주님을 영접한 지 8개월 된 여대생인데.위로 쌍동이 오빠가 있으며 그 어머니가 절에 가서 불공을 드리고 아들을 낳게 되었다고 해서 딸이 예수 믿는 것을 결사 반대한다는 것입니다.계속 교회를 나갈 경우 머리를 잘라 버리겠다.아니면 집에서 나가라는 등 그 핍박의 정도가 심해서 견디기가 어렵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주님을 버릴 수가 없기 때문에 모든 각오가 다 되어 있으며 이 핍박을 이길 수 있는 힘을 달라는 편지였습니다.
그리고 집을 나갈 각오도 되어 있지만 부모님을 버리는 것이 죄가 되지는 않겠느냐는 사연도 적혀 있었습니다.
저는 다음과 같이 정리하여 대답을 해주었습니다.
첫째,기도할 것.그리고 50명,100명,200명 등 많은 사람에게 기도의 도움을 요청하고 그 고난의 승리를 위해 중보 기도자를 많이 만들 것.
둘째,핍박을 감사할 것.
셋째,집을 나가지 말고 집에서 핍박을 견딜 것(내가 집을 나가겠다든지 내가 부모를 버리겠다는 것이 아니고 부모가 나를 버리겠다는 것이니 이는 도덕적으로 그 책임이 부모에게 있음).
넷째,죽는 한이 있더라도 예수를 버리지 말 것(사람과의 인연이란 유한한 것이지만 주님과의 관계는 영원한 것이기 때문에).
다섯째,믿음의 승리와 가족 구원을 확신하고 인내할 것.
저는 그 소녀의 편지 속에서 반석 같은 믿음과 영혼의 옥토를 보았습니다.
조금만 어려워도 쓰러지고 약간만 힘들어도 교회 생활을 포기하고 주님을 떠나려고 벼르는 사람들에 비하면 그녀의 마음은 옥토였습니다.
생을 즐기고 자신의 죄를 정당화하기 위해 교회를 등지고 주님을 떠나는 사람들에 비한다면 가냘픈 소녀의 신앙은 장부의 신앙이었습니다.
얇은 신앙과 얄팍한 믿음은 싹이 자라지 못합니다.큰 나무는 모두 뿌리가 깊습니다.
“결코 나는 변치 않으리 결코 나는 변치 않으리 물가에 심기운 푸른 나무처럼 변치 않으리”라는 복음 성가의 가사를 깊이 음미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음으로 가시떨기밭에 떨어진 씨는 가시가 그 기운을 막아 버렸기 때문에 더 이상 자라지 못했습니다.
19절에 의하면 가시떨기는 세상의 염려,재리의 유혹,기타 욕심이라고 했습니다.
디모데전서 6:9-10을 보면,올무,정욕,돈 사랑,따위는 결국 자기를 찌르는 가시와 같다고 했습니다.
가시떨기밭 같은 사람은 돈 벌어야 된다는 이유 때문에,생을 즐겨야 된다는 이유 때문에,일이 바쁘고 해결해야 될 걱정 거리들이 많다는 이유 때문에 주님 곁을 떠나고 신앙 생활을 소홀히 하는 사람들입니다.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가시들이 결국은 자기를 찌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가시에 찔려서 죽거나 상처 투성이가 되는 것이 좋겠습니까 아니면 예수님의 품안에서 치료받는 것이 좋겠습니까
내 힘으로는 떨쳐 버리기 힘든 가시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주님에게로 나와 가시를 떨쳐 버리고 가시 없는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주님이 말씀하신 가장 좋은 밭은 “좋은 땅”입니다.
20절을 보면 좋은 땅은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와 육십 배와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말씀 그대로 듣고 받는 땅이 옥토입니다.길가도 돌밭도 가시떨기밭도 말씀을 들었습니다.그러나 그 말씀을 받아서 결실하진 못했습니다.
기독교의 결실 법칙은 백 배 천 배 만 배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단 듣고 받을 때만 그것이 가능합니다.
어떻게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옥토가 될 수 있을까요
첫째,겸손하게 말씀을 듣고 받아야 합니다.
내 의견과 주장을 앞세우려 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받되 겸손하게 받아야 합니다.귀를 기울이고 말씀을 경청해야 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10:17에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했습니다.
듣기 싫다고 해서 귀를 막아 버린다든지 내 마음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외면해 버리면 나는 수확 없는 농부가 되고 이익 없는 장사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둘째,그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어떤 농부가 겨울 내내 농사법을 연구했다고 합시다.그러나 봄에 밭을 갈고 씨를 뿌리지 않으면 그는 열매를 거두지 못합니다.
말씀을 듣고 받았으면 순종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우리는 1989년 한 해 동안 믿음의 농사를 지어 왔습니다.이제는 추수할 때가 되었습니다.문제는 30배인가 60배인가 100배인가입니다.
금년 한 해 동안 본래 내가 가지고 있던 믿음의 기본 자산까지도 까먹는 신앙 생활은 아니었는지 살펴봅시다.
누가복음 13:6-9의 비유를 봅시다.무화과 나무를 심은 후 3년 동안 거름 주고 정성을 들여 가꾸게 했지만 열매를 맺지 않자 주인은 과원지기에게 땅만 허비할 필요가 없으니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를 찍어 내어 버리고 다른 유실수를 심어야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과원지기가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 후에 만일 실과가 열면이어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 버리소서”라고 대답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리는 열매를 맺어야 할 나무이며 밭입니다.주님께 “이것입니다”라고 드릴 열매는 어떤 것입니까
만일 과수원 주인이신 주님께서 오늘 재림하셔서 열매를 요구하신다면 내놓을 수 있는 열매가 있습니까,없습니까
무겁게 늘어진 사과나무 가지를 볼 때마다 황금 파도 치는 가을 들판을 바라볼 때마다 빨간 대추로 뒤덮인 대추나무를 볼 때마다 저는 부끄러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이유는 주님께 내놓을 만한 열매가 없기 때문입니다.그리고 100배의 결실을 맺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주여,내 마음을 옥토로 갈아 주소서.
내게서도 100배의 결실이 쏟아지게 하소서.
오늘 여기서 주님 앞에 드릴 결실이 있게 하소서.
주여,나의 부실한 농사와 결실을 용서하여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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